제2절 교통의 발달과 문명의 발달 1. 문명은 다양한 정보의 결합으로 창조▲ 최 재 수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이제 교통=문명이라는 등식을 풀어볼 차례다. 문명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인지(人智)가 발달하여 인간 생활이 풍부하고 편리해진 상태. 정신문화에 대하여, 주로 인간의 외연적인 생활조건이나 질서에 대한 물질문화를 이름’ 이라고 되어 있다. 즉 인간이
▲ 최 재 수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해제 : “교통은 문명이다(Transportation is Civilization).” 이 말은 19세기 영국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마튜 아놀드의 말로, 불과 세 개의 단어로 교통과 인류문명의 발달과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어느 책자에서 이 간단한 세 단어로 된 문장을 읽는 순간 필자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
한국해운 60년사를 편찬하는 작업에 필자도 참여하였고, 정리과정에서 1960년대 초에 정부에 의하여 중형선(당시로서는 대형선) 몇 척을 신조하였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정리하고 넘어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KCTC의 회장이며 해운업계 원로중의 한분인 신태범 회장님이 이 사업의 첫 번째 제안자이자
이 글은 한국해양대학교가 세 차례의 폐교위기를 딛고 근 70년간 한국해운업계의 동량인 우수한 해기사들의 산실로서 존속해온 배경에, 해양대학을 창립하고 초대학장을 비롯해 네차례 학장을 역임한 海堂 이시형선생의 공헌이 지대함을 기록한 前 한국해양대학 학장 손태현 교수의 논문이다.<나라발전에의 공헌-海堂 李時亨과 韓國海洋大學>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서
▲ 최 재 수前 한국선주협회 전무해무청의 해체 이유1948년 정부수립 당시 해운행정은 교통부 해운국이 수행하여 왔다. 지금과 달리 해운국 기능에 조선업무도 포함되어 조선과가 있었다. 1955년 2월 17일에는 해운과 수산 기능을 통합한 해무청을 신설하여 해운(조선포함), 항만, 수산, 및 해양경찰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195
▲ 윤 석 희 변호사 법률사무소 지우1. 서론이번호에서는 운송인(복합운송인을 포함한)이 발행하는 선하증권 이면약관에 기재된 Himalaya Clause에 대하여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는 해상운송인과 화주이외에 제3자(대부분 하역업자나 터미널 운영업자)에 대하여 운송인이 주장할 수 있는 포장당 책임제한 및 time bar 등의 항변을 부여하는 규정으로, 위
▲ 최 재 수 前 한국선주협회 전무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수립하였으나, 당시의 경제여건상 경제자립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부 수립 2년도 채 못 되어 6. 25가 발발하면서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유일한 생명선이고 젖줄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경제원조였다. 이 경제원조 조차 없었다면 그 처참한 상
서양문물 수용이 늦은 결과--?임진왜란에서 한국이 결정적으로 불리하였던 것은 일본 침략군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인 조총(鳥銃)을 주무기로 삼은데 비하여 우리는 활과 창으로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몇 백년 후 서양의 열강세력들이 아시아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올 때 동 아시아의 주요 삼국인 한국, 중국, 일본 3개국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중국이었고, 그
1984년 미국 신해운법의 시행 미국은 철도 및 항공 산업에 대한 규제와 함께 해운에 대하여도 다른 OECD 국가들과는 달리 폭넓은 규제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다른 선진국(특히 서유럽 선진국들)들과의 마찰을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해운동맹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해운동맹에 대한 독점금지법의 적용을 제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초가 되자 미국은
선박의 대형화와 전용 항만시설의 새로운 개발1) 선박의 대형화컨테이너화의 물결은 단순하게 재래 정기선이 컨테이너선으로 대체되는데 머물지 않고, 운송제도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그 중의 하나가 선박의 대형화다. 재래 정기선의 경우, 적양하 하역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기선 기항 항이었던 부산항의 경우, 재래 정기선이 하루 화물을
컨테이너리제이션과 정기선의 구조적 변화 1절 해상컨테이너 출현의 배경과 연혁배경2차 대전 후,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기술혁신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선박의 기술혁신에서 전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형전용선화 기술혁신이었음은 이미 기술하였다. 이러한 기술혁신은 부정기선업계 전체로 확산됐다. 그러나 정기선 분야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큰 기술혁신이 이
1960년대 전반기의 해운시황1957년의 중동사태로 인하여 세계 해운업에 단기적이지만 호황이 왔다. 이때 대형전용화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동사태 자체는 단기적인 반짝 경기로 끝나고 해운업은 다시 불황의 늪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시작된 대형, 전용선화의 기술혁신은 계속되었다. 불황이었지만 대형, 전용선은 기존선박에 비하여
조선기술의 발전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 요소의 하나는 조선기술의 발달이었다. 전전까지만 해도 강제기선을 제작하기 위하여 철판을 연결할 때 리베트를 이용하여 접착하였으나, 대전 직전에 미국에 의하여 전기용접방식이 개발되면서 전기용접으로 쉽게 철판을 붙일 수 있게 되었고, 대형 크레인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선체를 여러 개의 불록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곳에서 만들
양대전 사이의 세계 해운 -세계 공황과 해운1929년 10월 24일 미국 주식시장의 폭락을 계기로 세계 경제공황이 시작되어, 해운계도 7-8년 동안의 절망적인 불황을 경험하여야 하였다. 해상물동량과 선복량의 수급관계가 해운업의 호·불황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인데, 해상물동량은 축소되는데 선복량은 하였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 해운불황은 피할 수 없었다. &
전쟁과 해운전쟁은 해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과 해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전쟁은 국지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영향을 받는 해역이 한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경우, 전세계의 해역이 전쟁의 영향권안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당시 해운업을 어느 정도 영위하던 국가들은 긍정적이든
강제기선에의 대체에 실패한 프랑스 해운의 낙후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적대와 경쟁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이 두 나라의 경쟁관계는 대체로 유럽 대륙 안에서는 프랑스 우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의 해외 진출 경쟁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해상활동과 해외진출이라는 면에서는 영국보다 뒤떨어졌다. 특히 나폴레온이
목조범선의 강제기선으로의 대체 19세기는 인류문명사에서 아주 특수한 100년이었다. 전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해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조범선시대가 끝나고 강제기선시대가 개막된 것도 이 시기였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활동에서 자유경쟁에 의한 시장경제가 강조되면서 영국의 항해법으로
중상주의와 부국강병한때 유럽을 지배하였던 정치경제사상인 중상주의와 해운업에 관하여 여기 검토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15세기 초에 포르투갈의 왕자 헨리에 의하여 시작된 탐험항해가 결실을 맺어 대항해시대로 연결된 이후 500년 동안, 세계사의 큰 흐름을 보면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그들이 어떻게 500년 동안 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