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범선의 강제기선으로의 대체

 

19세기는 인류문명사에서 아주 특수한 100년이었다. 전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해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조범선시대가 끝나고 강제기선시대가 개막된 것도 이 시기였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활동에서 자유경쟁에 의한 시장경제가 강조되면서 영국의 항해법으로 대표되던 중상주의적인 해운보호정책이 역사의 뒤꼍으로 물러나고, 적취자유를 중심으로 한 해운자유의 원칙이 세계해운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고, 유럽이외의 대륙은 모두 유럽을 위한 들러리였던 시대에도 변화의 기운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신호가 미국의 독립이었고, 두 번째가 일본의 세계열강 대열에의 합류였다. 또 백인만이 지배자라는 고정관념에도 변화가 왔다. 미국에서의 노예해방문제를 놓고 벌인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이김으로서 흑인=노예라는 등식이 일단 부정되었다. 그들도 사람이고  인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5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동아시아에도 서세동점의 물결이 닥쳐왔고,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마저 유럽 열강들의 최후의 만찬 식탁에 올라 백인들의 나이프 밑에 난도질 당하는 신세가 된 100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 해운과 관련된 핵심적인 움직임 몇 가지를 거론하면서 그 대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이 기간 중 세계 해운시장은 목조범선으로부터 철제기선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둘째 19세기 100년을 해운 세력 면에서 보면 미국과 영국간의 각축전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초기 미국의 절대적 우세가 19세기 중반이후인 후반기에는 영국 우세 미국 열세로 다시 반전되었다. 19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해운업, 특히 국제해운업은 두터운 보호의 우산 밑에 안주하고 있었으나, 1849년 영국이 항해법을 전면 폐지하고 해운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유 경쟁 체제로 전환하면서 세계 해운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해운시장도 무한경쟁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가 새로운 가치관으로 등장하였다. 

 

19세기는 세계의 발 역할을 하였던 목조범선이 강제기선으로 전환된 세기이기도 하다. 외항해운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 19세기 100년 중 전반인 1850년까지는 철제 증기선의 개발기로서 연안을 위주로 점진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시기이고, 하반기인 1850년부터 1900년까지의 50년 동안에는 이 철제 증기선이 외항해운시장에 등장하여 목조범선을 시장에서 서서히 몰아내고 그 자리를 확고하게 하는 기간이었다. 이하 시대별로 나누어 검토해보기로 한다.


목조범선의 마지막 경쟁
-영국의 조선 자재 고갈과 미국의 무한대의 조선 자재 -

19세기 전반기는 증기선이 실용화되기는 하였으나 범선이 대양항해에서는 우세를 유지하였다. 실제 이 기간동안 범선에도 선체와 범장(帆檣)설계에 획기적인 기술혁신이 잇달아서 효율이 월등하게 향상되었고, 운송원가도 크게 내려갔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선박은 우선 천재지변과 같은 재해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할 것과 적재용량이 큰 것이 특징이었다. 항해소요시간을 결정하는 스피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한 대서양의 해운시장에 변혁을 가져온 것은 영미간의 해운경쟁에서 비롯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미영 양국간에는 해운을 놓고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미국의 호혜주의법에 의하여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 후 북미 대륙과 유럽간의 무역화물을 놓고 영미간의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첫 번째 전쟁에서는 미국이 우세에 설 수 있었다. 그것은 조선용 자재의 조달 면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수백 년전부터 해운업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조선용 자재가 될만한 나무들을 거의 벌목하여 사용해버렸다. 대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자재로 나무가 다시 크기 위해서는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일부 조선용 자재를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유럽 인근의 산림에서도 조선용 자재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조선용 자재가 될만한 목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미국이 독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조선하여 활용할 수 있었으나. 미국이 독립하고 나자 이것도 쉽지 아니하였다. 이에 비하여 미국은 해안지방에서는 점진적으로 조선용 자재가 고갈되었으나, 내륙지역에는 원시림이 무한대로 있었기 때문에 고품질의 조선 자재가 거의 무한대로 공급되었다. 조선 재료의 공급이라는 면에서 영미간의 경쟁에서 미국 우세 영국 열세가 되었다.

 

쾌속선 크립퍼에 의한 스피드 경쟁

19세기 초엽, 보다 좋은 조선 자재를 이용한 쾌속선이 미국인들에 의하여 건조되었다. 1812년에 영국과 미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원인의 하나도 해운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대의 해군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영국 해군의 일반 수병들에 대한 처우는 악명 높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다. 그래서 영국 해군 함정에서 도망한 영국 수병들이 미국의 상선에 취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만성적인 수병의 부족으로 고심하던 영국 군함들은 이를 핑계로 미국의 상선뿐만 아니라 군함까지도 임검하여 미국 선원을 영국 도망병이라고 잡아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시기는 영국이 나폴레온 전쟁으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미 대륙 연안까지 영국 해군력이 미치지 못할 것을 계산에 넣었다. 그러나 개전하자마자 나폴레온이 모스크바 원정에서 실패하여 퇴각하게 되면서 영국 해군은 한 숨 돌리게 되어 영미간의 전쟁에서 해군 면에서는 미국의 열세가 되었다. 영국함대는 미국 해안을 봉쇄하여 압박해 들어갔다. 영국 함대와 전면전으로 승부를 가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미국으로서는 스피드가 빠른 쾌속선을 건조하여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고 나가 교역에 종사하거나 사략 활동을 통하여 영국 해군을 교란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건조된 선박이 크립퍼(clipper)선이다. 크립퍼란 바로 쾌속선이란 말이다. 이 선박은 당시의 영국선에 비하여 길이와 선폭의 비율이 매우 크고 선저를 둥그렇게 만들었고, 두개의 횡범 돛대를 가진 선박으로서 스피드가 극적으로 향상된 선박이었다.

 

이 선박은 전후에도 그대로 활동하여 스피드 면에서 영국선을 능가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박으로 명성을 갖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되면 미국의 크립퍼선은 아주 대단한 공헌을 한다. 흔히 서부 개척시대를 New Frontier라고 한다. 이는 직역 한다면 새로운 국경이다. 미국이 독립할 때까지만 해도 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식민지로 개척된 지역은 해안을 따른 아주 좁은 지역이나 강운으로 해안과 연결될 수 있는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개척이 유럽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독립하고 나자 미국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섰다. 즉 백인들의 지배지역을 북미대륙의 동해안으로만 한정하지 아니하고 내륙 깊숙히 중부로 개척해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 대륙의 중서부는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총과 대포로 무장한 백인들로서는 무인지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무인지경을 뚫고 들어가서 여기에 깃발만 꽂으면 곧 새로운 국토가 생기고 그곳이 미국의 국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부개척을 새 국경인 뉴 프론티어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된 이유다.

 

골드 러시와 미국 해운

1847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금을 찾아 미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대이주가 일어났다. 크립퍼선은 대규모 이주자들을 운송하는데 아주 적격선이었다. 금을 캐기 위해서는 남보다 한 시간이라도 일찍 현지에 도착하여야 한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미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 가는 육로가 개척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파나마 운하도 없을 때였기 때문에 멀리 남미 대륙 끝을 돌아가야 한다. 지금에 비하면 굉장히 긴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이 항로에 이주(移住) 여객이 몰리면서 여객운임이 폭등하였다. 이 항로는 미국의 연안 항로였기 때문에 미국 선박만이 취항 할 수 있었다. 미국 해운업자에게 대박이 터진 것이다.

 

여기서도 스피드 경쟁이 치열하였다. 1851년 풀라잉 크라우드(Flying Cloud)라는 선박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간 2만8,200킬로를 89일 21시간으로 항행하였다. 스피드에서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였다. 많은 승객을 탑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대형화도 이때 진행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 상선 중 1,000톤을 넘는 선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풀라잉 크라우드는 1,783톤(미국톤 기준)이었고, 같은 선주가 건조한 서버린 오브 더 씨즈(Sovereign of the Seas)는 2,421톤이었다. 이러한 선박은 크립퍼선 중에서도 캘리포니아 크립퍼로 불리는 대형 쾌속선이었다.

 

문제는 귀로였다. 서부로 가는 여객은 초만원이었으나 동부로 가는 여객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선에게 낭보가 날아들었다. 1849년 영국이 항해법을 전면폐지하고 해운의 자유경쟁을 선언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선주들은 미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 가는 이주여객을 수송한 후, 여기서 태평양을 횡단하여 중국으로 갔고, 여기서 중국산 차를 적재하고 뉴욕이나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849년 영국이 항해법을 철폐하자 이들 선박의 선수를 런던으로 돌렸다. 당시 영국에서는 해운을 장려하기 위하여 매년 중국차를 적재하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선박에게 현상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있었다. 미국 선주들은 이 경쟁에서 영국 선박을 가볍게 따돌리고 제일 먼저 도착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렇게 유럽에 도착하여 현상금까지 챙긴 미국의 크립퍼선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이민들을 탑승시키고 여유롭게 미국 동해안으로 향한다. 미국 동해안-미국 서해안-아시아-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로가 형성된 것이다.

 

당황한 것은 영국 선주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세계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이길 수 있는 해운력을 가진 국가가 없으리라는 자만심으로 항해법 폐지에 찬성하였으나, 폐지하자 마자 미국의 크립퍼선에게 한 대 되게 얻어맞은 꼴이다. 영국 선주들도 크립퍼선을 건조하여 미국과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고, 미국에게 빼앗겼던 차 무역의 주도권을 다시 찾게 된다.         

1950년을 전후한 상황 하에서 적어도 목조범선에 관한한 영국은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보다 훨씬 우수한 조선용 자재를 거의 무한대로 싼 값에 공급받을 수 있었고, 그 자재를 활용하여 영국보다 훨씬 대형선을 건조하였고 스피드도 빨랐다. 전술한 19세기형 세계 일주 항로도 유일하게 미국 선주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영미 간의 해운경쟁에서 다시 영국우세

해운에서 자유경쟁을 하게 된 185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간의 해운경쟁은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다시 영국 우세로 돌아섰다. 우열이 가려진 정도가 아니라 미국은 그 이후의 해운 경쟁에서 패퇴하여 시장에서 철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서부개척의 영향이다. 미국의 서부개척 붐과 특히 골드 러시는 미국의 쓸만한 노동력을 대거 서부로 몰리게 하였다. 그 결과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노임이 급상승하였다. 선원들도 저렴한 임금에 불만을 품고 보다 높은 임금을 찾아 선박을 떠났다. 종전의 임금으로는 이직하는 선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선원 임금을 올릴 수도 없다. 자유경쟁시장에서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비슷한 이유로 미국 내에 투자 기회가 무한대로 생겨났다. 특히 서부 개척 붐과 철도 부설 붐 등으로 자본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좋은 투자 기회는 높은 이윤 배당을 약속하였다. 모든 가용 자본이 서부와 철도로 몰려들게 되었다. 해운업자들도 선원들 때문에 속 썩히는 선박을 매각하여 그 자금을 철도나 서부 개척 분야로 전환하였다.

 

셋째 미국에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전시에는 많은 선박이 징발되게 마련이다. 선주들은 위험 부담이 큰 징발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 방법은 선박을 해외에 매각하는 길이다. 많은 선박이 영국 등 해외로 매각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넷째 강제 기선의 등장이다. 후술하겠거니와 19세기 초에 선박에 증기 기관이 탑재된 후 50여년이라는 기술 개선 기간을 거쳐 드디어 해운시장에서 철제기선이 목조 범선을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증기기관의 활용이나 철의 활용이라는 면에서는 영국이 미국보다 한 수 앞섰다. 특히 조선용 목재의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으로서는 철제 기선의 출현은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였다. 영국은 철제 기선의 건조로 다시 세계 해운과 무역에서 왕자적인 지위를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의 반전에 따라 미국은 더 이상 외항해운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필요한 대외교역화물의 운송은 외국선, 특히 영국선에 크게 의존하면서 그 여력을 미국 내의 경제개발에 돌렸던 것이다.     
 
증기 기관의 발명과 선박에의 활용  
1765년 스코틀랜드의 젊은 기술자인 왓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였다. 뒤를 이어 이 증기기관은 발전과 개량을 거듭하여 상당한 출력을 갖도록 되었고, 이것이 산업용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증기 기관은 출력이 충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선박용으로는 활용하지 못하였다. 18세기 말경이 되면서 증기 기관이 선박에 활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결과는 기대이하인 경우가 많았다.

 

세계 최초로 어느 정도 유용성이 인정된 증기선이 시장에 선보인 것은 1802년의 일이다. 스코틀랜드의 훠스 앤드 크라이드 운하의 관리자였던 단다스 경이 주문한 ‘샤롯트 단다스’라는 목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하는 말을 이용하여 부선을 견인하였는데 이것을 증기선으로 견인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에서 고안되었다. 이 증기 동력선은 아주 성능이 좋았다. 그러나 이 선박의 추진기가 당시는 외륜방식이었기 때문에 운하의 제방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수 주간만에 운항을 중지하였다.

 

이 샤롯트 단다스호의 짧은 운항기간 동안 몇 명의 승객과 견학자가 승선하였다. 이 몇 사람 중 미국의 청년 발명가인 로버트 풀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선박의 성능에 감동을 받아 귀국 후 미국의 자본가를 설득하여 그와 합작으로 증기 기관을 탑재한 성능 좋은 선박을 건조하였다. ‘크레아몬트라’고 명명된 이 선박은 처녀 항해에서 시속 4노트에 가까운 스피드로 허드슨 강 390km를 항행하였다. 이 선박은 허드슨 강에서 두 시즌 운항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계기로 하천에서의 증기선의 경제적인 운항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점이다.

 

크레아몬트의 경제적 성공은 많은 자본가와 사업가의 관심을 끌었다. 드디어 이와 유사한 사업체들이 유럽과 미국에 동시다발로 설립되었다. 운항은 주로 하천이라는 한정된 항로에 머물렀다. 1816년에 증기 여객선은 승객을 태우고 영국 해협을 건넜고, 뒤이어 런던과 파리 간을 운항했다. 영국 해협 도항 4년 후다. 초기의 증기선은 소형선이고 엔진도 단일 실린더 엔진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보다 대형선에 대형 기관을 거치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증기선의 대서양 횡단운항의 시작

그러나 초기의 증기 기관선은 위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양 운송용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범선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약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주, 특히 대서양 횡단 항로의 선주들을 망설이게 한 것은 연료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범선은 바람으로 움직이는데 바람의 이용은 공짜다. 이에 비하여 증기선은 비싼 석탄을 태워서 에너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연료비를 지불하여야 한다. 무엇 때문에 공짜로 갈 수 있는 것을 마다하고 비싼 돈을 들여서 갈 것인가 하는 고정 관념이 문제였다. 게다가 초기의 증기 기관은 대형이었고, 대양 횡단을 위해서는 많은 석탄을 적재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상당한 공간을 잡아먹게 된다. 그만큼 영업용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

 

1830년까지 단 실린더 엔진은 대양을 항행하는 선박에 충분히 사용할 만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엔진은 굉장히 컸고, 대량의 석탄이 연료로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기 기관선은 아주 잘 만들어진 어떤 범선보다도 성능이 좋다는 것이 인정되기도 하였다. 비싼 연료비 지출 전표를 결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천후 항해가 가능한 이 선박이 보다 선호할만한 하다고 생각하는 선주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너무 많이 소요되는 석탄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각도에서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문제는 엔진이 너무 크고 연료 효율이 너무 낮다는데 있다. 이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보다 대형선을 건조하는 수밖에 없다. 대형 엔진을 탑재하고, 대량의 연료용 석탄을 저장하고도 많은 공간을 여객이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도록 할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형선을 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도 초기에는 설득력을 크게 갖지 못하였다. 두 배 큰 선박을 만든다면 이 선박을 움직이는데 두 배의 석탄이 필요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선박의 운송능력을 결정하는 요인은 용적이다. 이에 비하여 그 선박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량은 선체가 수중에 잠긴 표면적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 단순한 논리가 선박에 적용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이를 현실로 적용한 사람은 영국의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회사의 기사였던 아이산바트 킹덤 브루넬이었다.

 

브루넬은 단순한 철도기사만이 아니었다. 그는 선박을 좋아하는 집안에 태어나서, 선박, 특히 장거리 항해에 견딜 수 있는 선박의 설계에 관하여 강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1835년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레이트 웨스턴 회사의 중역회의에서 런던에서 브리스톨까지 가는 주요 노선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를 검토하는데 그를 초청하여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어떤 중역은 너무 장거리 노선이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브루넬의 의견은 정반대였다. 노선이 너무 짧아서 경제성이 적다고 하면서 그보다는 ‘브리스톨까지 노선을 연장하고 이곳(브리스톨)에서 뉴욕까지 갈 수 있는 증기선을 건조하여, 그레이트 웨스턴이라 명명하여 운항하면 좋을 것’이라는 자기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 의견은 처음에 허황한 것으로 간주됐으나 중역 중에는 이 아이디어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브루넬은 열심히 중역들을 설득하여 드디어 합의를 도출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그레이트 웨스턴기선회사가 브리스톨에 설립되어 ‘그레이트 웨스턴호’를 건조하게 되었다.

 

2년 걸려서 새로운 선박이 드디어 준공되었다. 1,340톤의 선박에 750마력(종래의 선박의 거의 두 배)의 출력을 가진 선박이었다. 이 선박을 언론은 극찬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나, 다른 한편에는 이를 시기하는 선박회사도 있었다. 바로 그레이트 웨스턴호의 경쟁사였다. 그 회사도 이에 질세라 대형선을 서둘러 발주하였으나, 이미 경쟁하기에는 늦었기 때문에 서둘러 기존의 선박을 용선하여 그레이트 웨스턴호보다 먼저 뉴욕항로에 투입하였다. 320마력의 엔진에 700톤급의 ‘시리우스’라는 선박이었다. 이 선박은 장거리 항해를 위하여 연료저장고를 추가하는 등 여러 가지를 개조하였으나, 그래도 그레이트 웨스턴보다 4일 앞서 출항하는데 성공하였다. 1838년 4월 4일이었다. 4일 후 그레이트 웨스턴이 그 뒤를 이었다.

 

악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우스’는 19일간의 항해 끝에 사상 최초로 가장 단시간 안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선박은 뉴욕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몇 시간 후, 시리우스보다 4일이나 늦게 출항한 그레이트 웨스턴호가 뉴욕항에 입항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아니하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패자에게 군중은 냉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레이트 웨스턴호의 승리였다. 4일 늦게 출항하여 불과 몇 시간 차이로 입항하였던 점, 다음 날 보니 200톤의 연료탄이 남아있었던 점이 그렇다. 시리우스의 경우, 남은 연료가 수십톤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서양 횡단 항해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은 브루넬의 그레이트 웨스턴이었다고 할 것이다.

 

두 척의 기선이 거의 동시에 뉴욕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해양교통수단에 의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악천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양선은 공히 그들이 당초에 광고에서 약속하였던 것보다 빠른 시일 안에 목적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약 범선이었다면 이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후 그레이트 웨스턴호는 뉴욕과 브리스톨간을 왕복하는 정기여객선으로서 정확하게 스케줄을 지키면서 항행을 계속하였다. 일기나 계절에 관계없이 8년간에 67회의 대서양횡단의 기록을 세웠다. 브루넬은 그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도의 정확한 시간표를 바다에서도 그대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증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기술혁신과 증기선의 정착

그 후 증기 기관에는 획기적인 기술혁신이 가해졌다. 가장 큰 발전의 하나는 복합엔진의 개발이었다. 이 엔진은 처음에는 고압 실린더 안에서, 다음으로는 저압 실린더에서 두 번 증기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증기를 두 번 사용하게 됨으로서 복합엔진은 종전의 단일 실린더 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로도 큰 동력을 낼 수 있게 되어 연비(燃比)를 크게 개선하였다.

최초의 복합 엔진은 1854년, 기선 브렌든에 설치되었다. 그 결과 연료가 크게 절약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후 다시 보일러의 설계를 개선함으로서 보다 높은 압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었고, 3연성, 4연성의 엔진이 개발되어 연비가 더욱 개선되었다. 기선의 경쟁력은 그만큼 향상된다.

 

이러한 기선화를 더욱 촉진한 것은 스크류의 발명이었다. 초기 증기 기관선은 증기기관으로 얻은 동력으로 외륜(paddle)을 돌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비효율적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전시에는 상선을 전쟁용으로 징발하여 사용하였는데 외륜선의 경우, 적함의 대포 한방이 명중될 경우, 외륜이 파괴되어 운행 불능이 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증기선이 해군 함정으로 이용되는데 결정적인 결함이었다. 동력의 효율도 매우 낮았고, 비경제적이었다. 이 스크류가 연성 엔진과 결합되어 연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의 기술혁신이 어느 정도 급속하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것은 아래와 같은 4척의 기선과 관련된 자료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자료는 당시 유명한 기선회사의 하나였던 큐나드사가 1876년에 작성한 것이다.

 

1840년   Britannia   목선   외륜    단식레버기관
1855년   Persia      철선   외륜    단식레버기관
1865년   Java        철선   스크류  단식회전기관
1874년   Bothnia     철선   스크류  연성기관


1860년대 말에는 기선이 대서양 횡단의 화물운송에서도 범선을 능가하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희망봉을 경유한 극동항로에서도 기선을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올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항로의 왕자는 크립퍼선에 의한 차 무역이었으나,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인도 및 중국과 유럽간의 무역에서 기선이 범선을 압도하여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운하의 개통으로 항로거리가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항로의 중간 기항지에 저탄소를 설치하여 연료를 보급하게 되면서, 연료탄 저장고 중 상당 스페이스를 영업용 스페이스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범선이 기선으로 대체된 결정적인 시기를 1869년의 수에즈 운하의 개통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로는 이보다 4년 앞선 1865년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해에 홀트사(선주인 Alfred Holt에 의하여 설립된 회사)의 정기선이 리바플/모리샤스섬간 8,500마일을 논스톱으로 주항하여 연성기관에 의한 기술혁신이 명백하게 하였고, 세인들이 증기기관에 의한 해상운송의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실감하게 하였다. 실제로는 이 이후로 증기선이 화물운송이나 여객운송 양면에서 범선을 제치고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기선에 밀려서 범선은 정기항로보다는 호주항로나 남미항로와 같이 왕래가 상대적으로 덜 빈번하고 덜 민감한 항로에만 한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목저범선의 강제기선으로의 전환은 불과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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