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의 대형화와 전용 항만시설의 새로운 개발

1) 선박의 대형화
컨테이너화의 물결은 단순하게 재래 정기선이 컨테이너선으로 대체되는데 머물지 않고, 운송제도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의 하나가 선박의 대형화다. 재래 정기선의 경우, 적양하 하역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기선 기항 항이었던 부산항의 경우, 재래 정기선이 하루 화물을 적양하 할 수 있는 능력은 1,000톤 내외였다. 부산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항만이 그러하였다.

 

이것을 전제로 할 경우 1만 5,000톤의 적재능력을 가진 정기선이 만선 상태로 입항하여 전량을 양하하고, 역신 만선 화물을 적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0일이다. 이것이 2만톤이 될 경우, 그 소요일수는 40일이 된다. 이러한 하역소요 일수 때문에 그간 선박을 대형화하면 할수록 선박회전율이 낮아진다.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산물선이 대형화 전용선화의 구술혁신이 이루어졌으나, 정기선만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컨테이너선의 경우, 컨테이너 한 개가 평균 30톤 정도 적재하는데 이것을 한 시간에 갠트리 크레인 하나가 30개 정도 하역할 수 있다. 컨테이너 모선의 경우 간추리 크레인 2기가 동시에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 능력은 시간당 1,800톤(30톤 x 30개 x 2기)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선박이 들어와서 24시간 안에 적양하를 마치고 출항 할 수 있다. 만선선의 적양하에 30일 정도 소요되는 것과 단 하루 만에 마칠 수 있는 것은 천지차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이점으로 인하여 선박이 급속하게 대형화되게 된다. 처음 컨테이너리제이션이 시작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컨테이너선들은 미국의 전시표준형 선박을 개조한 것으로 700-1,200 TEU를 적재할 수 있었다. 아주 초기에는 이보다 더 작았다. 이 선박들을 업계에서는 제1세대 컨테이너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971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컨테이너선이 출현하였는데 대체로 1,800-2,300 TEU를 적재할 수 있는 컨테이너 전용선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을 제2세대 컨테이너선이라고 하였다. 이 제2세대 컨테이너선부터는 거의가 신조선이었다. 그 후 다시 컨테이너선은 대형화되어 1975년을 전후하여 2,300-3,000 TEU를 적재할 수 있는 제3세대 컨테이너선이 출현하였다.

선박의 대형화는 이 제3세대 선에 의하여 일단 정지되었다. 그 이유는 파나마 운하의 통과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시아와 북미를 왕래하는 소위 태평양항로의 취항선중 상당량이 최종목적지가 미 동해안이었다(특히 뉴욕). 파나마 운하의 통과가 필수다. 그런데 파나마 운하를 통항 할 수 있는 선박의 폭이 32.2m로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선폭을 32.2m 이내로 제한하여야 한다.

 

또 수심의 제약도 있으므로 선박의 흘수도 제한을 받아야 하였다. 이 때문에 선박의 대형화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곡물을 주로 운반하는 벌크선 중 가장 큰 것을 흔히 파나막스라고 업계에서 부르는데 이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사이즈라는 말이다. 적재중량톤수로 보아 대체로 6만톤 내외다. 컨테이너 전용선도 파나막스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대형화의 제동이 걸렸다.            

 

2) 항만시설의 새로운 수요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항만도 새로운 시설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무엇보다 재래 정기선이 접안하던 부두의 경우, 1만 5,000 내지 2만톤급 선박만 접안할 수 있었으나, 제3 세대선이 되면서 수심 12m정도에 선석길이가 250m에서 300m가 필요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배후에 넓은 컨테이너 장치장을 마련할 수 있는 배면부지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항만시설은 기존의 재래선 부두에서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새로운 컨테이너 전용 항만시설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한편 컨테이너리제이션이 진척되면서 항만에서의 컨테이너의 유통이 전체 운송 능률의 향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자, 선사나 터미널업자들이 앞 다투어 자기의 전용터미널을 보유하여 다른 업체와 서비스의 차별화를 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업계의 요구를 항만당국에서도 수용하여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을 항만관리자가 스스로 건설하되 그 운영은 대형 선사나 터미널 사업자에게 장기 임대하여 사기업방식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많이 도입하게 되었다.

 

3) Door to Door 서비스와 ICD의 탄생
컨테이너리제이션이 발달하면서 Door to Door 운송개념이 발전하면서 화물의 인수도장소가 재래정기선에 의한 운송과 같이 본선의 태클에서 태클사이가 아니고, 송하인이 화물을 운송인에게 화물을 인도하는 장소로부터 수하인이 화물을 인수하는 장소로 확대되면서 내륙지역에 컨테이너 화물을 통과하는 기지가 마련되었다. 이것을 ICD(Inland Container Depot or Inland Clearance Depot)가 새로 마련되어 수출입화물의 통관장소가 화물의 발착지와 가까운 대도시 인근의 ICD로 이전하였다. 이 ICD시설도 넓은 공간과 현대화된 컨테이너 취급시설과 장비를 필요로 한다.

 

운송시스템과 운송경로의 변화
컨테이너 이전의 재래선에 의한 운송의 경우, 운송에서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이 운송수단에 화물을 적양하하는데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다. 그래서 운송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한번 운송수단에 화물을 적재하면 가능한 한 최종목적지에 가까이까지 그 상태 그대로 운송하고, 더 이상 운송이 어려운 곳에서 운송수단을 바꾸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컨테이너화 이후에는 운송수단에 적양하하는 작업이 컨테이너를 들어서 간단히 적양하가 가능하기 때문에 운송수단을 바꾸는데 다른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자 화물의 출발지점에서부터 최종도착지점까지의 운송 루트 간을 다양한 운송수단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최적의 운송 루트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생한 새로운 운송개념이 국제복합운송이고, 국제복합운송을 이용한 주요운송 루트이 재편이 이루어졌다.

 

1) 국제복합운송 개념의 발전
“‘국제복합운송’이란 복합운송인이 물건을 그의 관리 하에 둔 한 나라의 어느 장소로부터 화물을 인도하기 위하여 지정된 다른 나라의 어느 장소까지 복합운송계약에 의하여 적어도 둘이상의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수행하는 운송이다.” 국제복합운송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UNCTAD에서 채택한 국제연합 국제물품복합운송조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International Multimodal Transport of Goods)에서 정의하는 운송인데 이 정의를 요약하면 ① 두 종류이상의 운송수단을 이용할 것, ②하나의 운송계약에 의할 것, ③ 2개국 이상에 걸친 운송일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운송의 개념은 컨테이너리제이션 이전부터 있어 온 개념이기 때문에 컨테이너리제이션 이후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할 수 없으나 컨테이너리제이션 이후에 부쩍 많이 사용되게 되었고, 일반화되었다. 컨테이너리제이션 이전까지의 운송은 운송수단별로 운송구간이 구분되는 구간 운송이 기본이었고, 물건의 최초 출발지에서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이러한 구간운송 여러 개가 결합되어 이루어졌다.

 

이 구간운송은 구간운송별로 운송계약이 따로 이루어지고 운송인도 달랐고 운송계약도 달랐다. 그러나 컨테이너리제이션 이후 화물을 컨테이너에 넣는 장소에서부터 화물을 컨테이너에서 꺼내서 수하인에게 인도하는 장소까지로 운송구간이 크게 확대되었고, 종전의 구간운송 개념의 운송이 여러 개가 겹치게 되었다. 그러나 컨테이너의 운송에서는 이러한 구간운송을 일일이 구분하는 것이 번거롭고, 오히려 책임소재가 불명확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운송개념인 국제복합운송의 개념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이 국제복합운송을 수행하는 운송인을 복합운송인(Multimodal Transport Operator : MTO)이라고 한다. 이 국제복합운송은 국제운송의 주운송구간이라 할 수 있는 해상운송을 수행하는 선사가 복합운송인이 되는 경우가 있고(VOCC : Vessel Operating Common Carrier), 해운업자가 아닌 화물운송주선인인 Freight Forwarder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선박을 운항하지 않으면서 국제복합운송을 수행하는 사람을 NVOCC(Non Vessel Operating Common Carrier라고도 한다.

 

2) 운송루트의 변화
전술한바와 같이 운송수단 간의 환적이 용이해지면서 다양한 운송수단을 결합시킨 최적의 운송 경로의 찾기가 일반화되면서 종전에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운송 경로가 속출하였다. 그 주요한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랜드 브리지(Land Bridge) 개념의 출현 : 다리(bridge)란 원래 육상교통로가 물에 의하여 막힐 경우 이 구간을 육상 운송수단인 차량이나 기차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그러나 컨테이너리제이션에서의 이 개념은 그 반대로 해상운송을 주운송수단으로 하는 운송에서 육지 때문에 선박이 갈 수 없는 구간을 육상운송수단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해상운송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육지(Land)를 다리(Bridge)로 사용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발상은 극동지역과 유럽을 연결하는 전 구간 해상운송(All Water Service)에 대한 대체 운송 경로에서 비롯되었다. 극동 유럽항로의 경우 극동(일본 및 한국)에서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나가 북해와 발틱해로 이르는 것이 원래 서비스 루트였으나, 컨테이너리제이션이 시작될 바로 그 때 중동사태로 인하여 수에즈 운하가 장기간 폐쇄되어 희망봉을 경유하는 우회항로를 이용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항행거리가 길어져, 항차소요시간도 길어지고, 운송비도 상승하였다. 게다가 전술한바와 같이 이 항로는 폐쇄형 동맹의 전형인 FEFC가 강력한 독점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이므로 화주들이 여러 가지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극동에서 컨테이너를 선적하여 북미 서안의 적당한 항만에 양하하여 이곳에서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또는 캐나다 철도)를 이용하여 대서양안으로 운송하여 여기서 다시 선박으로 유럽으로 운송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이것이 America Land Bridge다. 그러나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America Land Bridge와 같은 개념으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컨테이너를 선박에 적재하여 구 소련의 나호드카까지 운송하여 여기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여 유럽접경까지 가지고 가서 이곳에서 철도나 선박, 또는 자동차로 최종목적지로 운송하는 루트가 개발되었는데 이것이 시베리아 랜드 브리지(Siberia Land Bridge)라는 개념이다. 이 새로운 운송루트는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기 전에 극동/유럽, 그리고 이란사태 등으로 페르시아 만내의 항만의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한 시기에 극동이나 유럽에서 중동으로 가는 화물들이 상당량이 이용했으나, 1975년에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고 그 후 구소련의 경제악화와 붕괴,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인한 러시아의 사회혼란 등으로 이용이 많이 감소되었다.


중국이 개방된 후, 중국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철도와 연결시키는 새로운 루트로 TCR(Trans China Railroad) 루트가 개발되었으나, 중국과 러시아 철도의 궤도 폭의 차이 및 중려 국경에서의 통관절차 등으로 인하여 이용이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 후 중국의 경제가 급신장하면서 중국 철도의 능력이 국내화물 수요에도 못 미치는 사태가 되자 이 루트도 크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남북철도가 연결될 경우, 남북한의 철도를 이용하여, 중국, 러시아, 그리고 몽골철도를 이용하여 유럽과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루트인 TKR(Trans Korea Railroad)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실현단계가 아니다.      

 

3) 해상운송과 미국대륙횡단철도의 협력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중심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해안이었다. 아시아에서 많은 상품들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동부해안에 자리 잡은 항만으로 향하였다. 이러한 미국행 상품을 적재한 선박은 태평양을 향하여 동남진하여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여 뉴욕으로 향하였다. 이것이 태평양항로의 전 구간 해상운송이고, 메인 루트였다.


그러나 컨테이너리제이션이 확산되면서 교통수단간의 환적이 용이해지자 미 서해안에서 컨테이너를 양하하여 철도망을 이용하여 최종수요지로 운송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시간과 경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어 운송 루트가 크게 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에도 일부 있었으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이 규제완화(deregulation)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철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어 철도운영의 융통성이 보장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지자 파나마 운하의 통과 때문에 제한되었던 컨테이너 전용선의 크기도 풀려서 제3세대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된다. 뒤이어 미국철도의 경영혁신으로 2단적 컨테이너 전용열차가 일반화되면서 해상컨테이너와 철도간의 협동운송체제는 난숙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4) 구주항로의 변화
극동지역과 유럽지역을 연결하는 정기선 항로의 주기항지들은 북해와 발틱해 연안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유럽대륙의 남부가 주로 농업이 발달한데 비하여 북유럽 쪽에 공업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대도시도 여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컨테이너화 이후 이 루트에도 변화가 왔다. 수에즈 운하를 통하여 지중해로 나온 컨테이너선이 다시 지브랄 탈 해협을 빠져나가 북상하여 북해와 발틱해 연안으로 가는 것 보다 지중해 연안의 항만에 양륙하여 여기서 철도나, 자동차나, 수운을 통하여 목적지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항로는 미국의 동해안으로 가던 화물과는 달리 그리 많이 지중해를 이용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인다.

 

5) 정기선 기항항의 Hub & Spoke System화
재래정기선의 경우 운송수단 간의 환적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한번 운송수단에 적재된 화물은 가능한 한 목적지에 가까운 곳까지 운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양정기선들도 화물을 찾아서 주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항로까지 찾아가서 화물을 운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결과 기항지가 많아지게 되었고, 입출항 소요시간과 하역소요시간이 길어지게 되어 선박회전율도 매우 낮았다.

 

그러나 컨테이너화 이후 운송수단 간의 환적이 용이해지면서 구태여 모든 항만에 다 기항하기 보다는 화물이 가장 많고, 주항로상 적정한 위치의 한 항만을 Hub항으로 하고 그 허브항 이외의 항만으로 가는 화물을 피더(feeder)선으로 연결하면 보다 경제적일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따라 Hub & Spoke System이 발전하였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컨테이너선이 대형화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System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 중의 하나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우선 컨테이너 모선을 수용할 수 있는 전용부두와 터미널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북미나 유럽 등 원양정기선을 활용하여야 할 우리나라 수출입화물 중 많은 양이 부산항에서 피더선으로 일본의 고오베(神戶)항(혹은 오사가항)으로 운송되어 모선으로 환적하여 운송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항에 전용컨테이너 터미널이 완공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사라졌다, 그 후 다시 동북아의 경제정세가 변화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역전되었다. 이번에는 부산항이 Hub 항이 되어 러시아의 연해주, 일본, 중국의 환황해권의 화물들이 부산항으로 피더선으로 연결되면서 부산항이 세계 3위의 컨테이너 취급 항으로 급부상되었다. 지금은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이에 힘입어 중국항만들이 Hub항으로 속속 성장하면서 부산항의 지위가 5위로 전락되었으나, 부산항의 Hub 항으로서의 기능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컨테이너선의 고속화와 Sea Land사의 SL-7의 실패
원양 해상 컨테이너선이 출현하기 시작하던 무렵인 1960년대 말을 전후하여 대형점보제트기를 이용한 화물전용기가 취항하게 되면서 화물운송면에서도 항공기와 선박간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여객운송과는 달리 화물운송에서는 항공기의 운송능력은 선박의 운송능력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경쟁이 안 될 것으로 보이기 쉬우나, 신속한 운송을 생명으로 하는 우편물이나 견본상품, 부패변질하기 쉬운 상품, 고가 상품들은 빠른 항공기를 선호한다.

 

이러한 화물은 운임이 비싼 것을 그렇게 탓하지 않는다. 비싸더라도 빠른 항공기를 선호한다. 정기선 화물 운임은 화물의 운임부담력을 감안한 차별운임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정기선에서 이러한 화물은 양이 적더라도 채산성에 많은 영향을 주는 고급화물들이다. 이런 화물들을 항공기로 빼앗기게 되니 해운회사로서는 대응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항공기보다는 못하겠지만 선박을 고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컨테이너전용선들은 일반화물선보다 고속인 것이 일반적이다.

 

제3세대 컨테이너선이 한참 건조될 때 드라이 벌크선의 스피드가 16노트 내외였는데 컨테이너선은 24노트 정도가 기준이었다. 항공기와 선박의 이 스피드의 차이는 선박이 물의 저항을 극복하여야 하는데 비하여 항공기의 경우, 공기저항만 극복하면 전진이 가능하다. 이 물과 공기의 저항 차이가 바로 선박과 항공기의 스피드 차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박의 스피드를 향상시키기 위하여는 큰 추진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선박의 스피드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비하여 필요한 추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선두주자였고, 전 세계 원양정기항로의 사실상 독점을 겨냥하고 있던 Sea Land사는 고급화물을 가만히 앉아서 항공기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연료비의 증가를 무릅쓰고라도 컨테이너선을 고속화하여 항공기와 경쟁하기로 하였다. 물론 그렇게 할 경우, 기존의 다른 경쟁선사보다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하였다. 이런 경영판단에 의하여 Sea Land사는 SL-7로 명명된 32노트의 고속컨테이너선을 건조하여, 태평양항로에 투입하였다. SL-7선은 35피트 컨테이너 1,000개 정도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 7척을 건조하여 제1선이 1972년에 준공되었고 제일 나중에 준공된 선박은 1973년이었다.


그러나 이 선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선박이 항로에 투입된 바로 그해인 1973년에 오일 쇼크가 일어나면서 유가가 폭등하였다. SL-7을 기획할 당시 연료유가가 톤당 10불 내외였으나, 이것이 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수십배 폭등하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SL-7이 벌어들인 운임으로 그 연료비도 감당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견디지 못하고, 이 선박들은 미 국방부가 인수하여 비상용으로 계선하였다. 이 선박은 그 후 쿠웨이트 사태(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였는데 미국이 개입하여 이를 격퇴시킨 사건) 때 군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동원된 일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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