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운 60년사를 편찬하는 작업에 필자도 참여하였고, 정리과정에서 1960년대 초에 정부에 의하여 중형선(당시로서는 대형선) 몇 척을 신조하였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정리하고 넘어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KCTC의 회장이며 해운업계 원로중의 한분인 신태범 회장님이 이 사업의 첫 번째 제안자이자, 첫 실수요자로 선정되어 오늘날의 고려해운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중요자료 상당량을 그대로 보관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자료를 빌려 살펴보고 이 글을 정리하였다.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후로는 힘닿는 데까지 한국해운사를 정리

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 정리하

  △최 재 수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한 사실의 하나가 의욕에 비하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너무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후일을 기약하면서 아쉬운 대로 정리하였는데, 그 중의 한 아이템인 중형선의 신조에 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KCTC의 신태범 회장님에게 새삼 감사를 드린다.   

 

1. 대한조선공사와 조선장려법
1950년 1월 1일 대한해운공사와 함께 대한조선공사가 국영기업으로 설립되었다. 대한조선공사는 일제 때인 1937년 7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중공업주식회사(연간건조능력 1만 톤, 수리능력 5,000톤)를 미군정 때 접수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교통부가 직영하던 것이었다. 조선중공업은 설립 후 1939년에 1,100톤급 화물선 1척을 건조하였을 뿐, 8·15 광복 때까지 500 톤급 이하의 일본 해군함정을 건조하는 데 주력하였다. 대한조선공사로 전환된 뒤에도 바로 후에 일어난 6. 25 사변으로 별다른 수요도 없었고, 시설도 노후화되어 연안 소형선박의 건조와 수리를 주 업무로 하였다. 휴전 후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한편 선복량은 부족하나, 신조하거나 외국으로부터 도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존선박을 개량하여 사용하는 소위 선질개량사업이라는 것이 정부의 예산지원으로 이루어져서 조선업무량도 약간 증가시켰고, 부족한 선복량을 보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2.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조선계획의 구상
1961년 5. 16에 의하여 군사혁명정부가 출범하자 혁명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61년 하반기)하여 1962년부터 시행하였다. 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한 파트로 조선관장부처인 상공부는 관련부처와 협의를 거친 후, 조선 5개년계획을 수립 시행하게 된다. 이 계획에 의하여 중형선(당시로서는 대형선으로 분류 될만 하였다) 4척과 500총톤급 소형선 2척, 그리고 대형선이라 할 수 있는 15,000중량톤급 벌크선 한척을 건조하였는데 이 실적은 그때까지의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수준으로 보아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고, 어찌 보면 오늘날 세계 제1위의 조선강국의 꿈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선계획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자금지원이, 자기자금 10%만 부담하면, 40%는 정부보조금, 잔여 50%는 산업은행의 장기저리자금 융자라는 거의 전무후무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당시는 우리 민간경제계도 자본축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10%라는 지금으로 보아서는 최소한의 자기 자금이지만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아니하였고, 대형선의 국내신조나 신조선의 운항에 의한 수지타산을 맞출만한 해운경영 노하우를 못 가진 상황에서 용기 있게 민간자본을 동원하여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점 등이 모두 높이 평가될만한 사항이다. 이러한 사업 성공의 이면에는 해운에 대한 열정을 가진 관계자들의 숨은 공이 지대하므로 이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사석에서 이야기가 정부계획으로 발전
이 계획의 실마리는 대한해운공사의 선박수리과정에서 해공의 감독이었던 신태범과 당시 대한조선공사의 사장이었던 이영진 간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아래의 이야기는 신태범의 회고에 의한 것이다.    


정부의 ICA의 자금을 대출받아 1957년 4월 6일에 대한해운공사가 도입한 총톤수 3,827톤의 군산호가 1957년 묵호외항에서 풍랑으로 주묘(走錨)하여 좌초되었다.이 사고로 군산호는 1959년 2월 17일에 보험회사와 합의하에 전손(total loss) 처리되었다. 그러나 그 얼마 후 대한해운공사는 선복 사정상 이 선박을 인양, 수리하여 재사용하기로 하고 대한조선공사에 수리를 의뢰하였다. 1962년 10월 20일에 수리가 끝나자 대한해운공사는 이 선박을 대포리호로 개명하여 수출 철광석의 운송에 사용하였다. 이 군산호를 수리할 때 선장은 신태범(愼泰範)이었고, 수리공정 전체를 총괄 감독하였다.


이 선박수리공사는 전손 처리된 선박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는 것이므로 신조에 버금가는 대수리였다. 선장인 신태범은 대한조선공사의 수리현장에 거의 상주하면서 감독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공사의 수리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임하는 자세도 매우 성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하였고, 우리나라 조선 기술이 대형선의 신조도 가능한 수준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5. 16 군사혁명으로 새로 대한조선공사 사장으로 육군대령이었던 이영진(1961. 8.∼1965. 3)이 부임하였다. 이 사장도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는데, 부임하자마자 자기 회사의 가장 큰 공사현장(군산호 수리현장)을 자주 찾게 되었고, 일단 사장을 맡은 이상 무엇인가 뜻있는 실적을 올리고 싶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신태범 선장은 이영진 사장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자, 사석에서 일본이 시행하고 있는 계획조선제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대한조선공사도 기술수준이 그만하니 일본과 유사한 계획조선제도를 시행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이 제안을 받자 이영진 사장은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면서 함께 협력해서 신조선을 건조하자고 합의하게 되었다. 이영진 사장의 적극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은 신태범도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고 일본의 계획조선 관련 자료를 구하여 대한조선공사에도 제공하고 본인도 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이렇게 구한 자료 중에는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해운(海運)’(현재도 발행 중)이라는 월간지에 계획조선제도에 대한 해설과 함께 계획조선으로 건조할 선박의 설계도면도 부록으로 첨부된 것을 구해다가 대한조선공사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자료를 갖추고 확신을 얻게 되자 이영진 사장은 우리도 계획조선제도를 시행할 것을 감독관청인 상공부에 건의하였고, 건의를 받은 상공부는 조선계획을 수립시행하게 되었는데, 그 실무책임자는 조선과장이었다. 조선과에서는 관련부처와 협의를 거쳐 조선 5개년 계획을 작성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확실한 자료는 없으나 조선 5개년 계획은 중형선(당시로서는 대형선)은 매년 1척씩 건조하기로 하고 500톤급 정도의 소형선 몇 척을 곁들이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신태범은 신조선건조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에 관하여 미국선급협회 (ABS)의 한국 주재원 박남석 검사관의 자문을 받았다. 신태범의 요청을 받은 박남석은 매일 퇴근 후 두 사람이 만나서 밤늦게까지 선박건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실무적인 사항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의 이러한 자문이 사업을 추진하는데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참고가 되었다는 것이 신태범의 회고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계획의 시작은 신태범과 대한조선공사 사장 이영진과의 대화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금계획을 수립하여 예산을 확보하고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등 자금관리부서와 협의하여 자금배정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상공부 조선과가 실무부서다. 조선과장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당시 조선과장은 김철수였다. 신태범은 김철수 과장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해양대학 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사이인 박현규에게 중개역을 부탁하였다. 박현규와 김철수는 같은 고향의 학교 동기동창이고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부탁받은 박현규는 김철수를 소개하고 같이 협력하도록 유도할 뿐만 아니라 본인도 적극적으로 이 일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계획조선 추진 4인방이 형성되었다. 신태범, 이영진, 김철수 그리고 박현규이다. 그들은 일단 뜻을 같이하여 뭉친 후에는 네일 내일 가릴 것 없이 이 사업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서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특히 김철수 조선과장의 헌신적인 협력에 관계자들은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4. 지원 조건
이렇게 마련된 계획조선 조건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건조자금 구성 : 선박 실수요자는 총 건조비용의 10%에 해당하는 자기자금을 부담하고, 정부보조금 40%, 융자 50%의 비율로 구성한다.
② 정부보증융자 조치 : 실수요자의 자금 부족에 의한 사업의 지연을 막고, 담보를 경감하기 위하여 정부의 보증융자로 공사를 진행하고, 준공 후 선박을 후취담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③ 이자 및 상환 기간 : 융자기간은 건조기간을 거치기간으로 하고, 건조완료 후 최장 15년으로 하였다. 이자율을 연리 3.5%이었다.
④ 도입 원자재의 관세면제 : 철강재 및 목재 등 수입되는 조선용 기자재의 관세 면제를 통하여 건조비를 절감하도록 하였다.
이상의 지원조건은 조선사업자금융자요강에 의한 자금 지원조건이었는데 그 후 다음과 같은 사항이 조정되었다.
① 이자율은 요강 상으로는 3.5%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였다. 아마도 그 후 금리가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② 자금분담(10(자기자금 : 40(정부보조) : 50(산은융자))의 비율은 1차 년도의 선박(신양호 및 우양호, 천경호 등 3척)에만 적용되었고, 2차년도 이후로는 비율이 약간 조정되었다. 즉 2차선 동양호 10 : 30 : 60, 4차선 보리수 15 : 30 : 55로 조정된 것이다. 1차선이 성공하자 실수요자가 경합을 보여, 자신감을 얻은 정부가 자금조건을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선자금 조건은 그 당시나 현재를 통 털어 보아도 파격적인 조건인 것은 명백하다. 특히 당시는 인플레가 심한 경제 상황이었으므로 융자금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명목상의 금액은 그대로이나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로는 상당히 감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설계도면의 구득과 기술 습득을 위한 노력
조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계도면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은 특성상 주문생산이 원칙이므로 한 설계를 가지고 여러 척의 선박을 시리즈로 건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박단위별로 설계도를 작성하여 건조하는 것이 원칙이다. 마치 건물을 지울 때, 건물 별로 설계도면을 작성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조선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첫 번째 난관이 설계도면을 마련하는 일이다. 설계도를 새로 작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신조선의 설계를 백지에서 새로 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전무한 상태라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해결방안을 찾던 중 신태범이 일본에서 발행하는 해운(海運)지에 게재되었던 일본에서 작성한 설계도를 사다가 사용할 방안을 찾아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전 세계 3위의 해운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선박이 거의 전멸되었기 때문에 해운회사는 간판과 고철이 다된 선박 몇 척만 남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미군정 당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두려워하여 선박에 대한 전시징발보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해운회사가 다시 살아날 길이 없다. 그러나 섬나라인 일본이 해운 없이는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의 지도자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계획조선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파격적으로 유리한 금융조건을 제시하고 조선을 장려하였다. 계획조선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경제재건 계획상 필요한 선박을 조선한다는 의미를 줄인 말이다. 이 계획조선을 신속하고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정부가 지원하여 일본이 필요로 하는 표준선박 몇 가지 골라서 일본중소형조선공업협회가 일본의 조선기술진을 총망라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여기서 심층 연구를 거듭한 후 작성한 요강에 의하여 설계도면과 부속도서를 작성하여 일본해운 조선업계에 실비도 안 되는 4만9천엔이라는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신태범은 우선 일본해운집회소가 발행하는 해운(海運)지 1961년 7월호를 구득하여 관련기사를 정독하였다. 그 기사의 제목은 「1,600총톤형 화물선의 표준 기본설계의 작성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이 설계도작성을 주도하였던 실무자가 직접 기고한 글이다. 그 내용은


1. 작성목적,
2. 작성자 및 작성경과.
3. 본설계의 내용과 특색       
(1) 본설계의 주요요목 등, (2) 톤수, (3) 복원성, (4) 항로 및 적재화물, (5) 속력, (6) 선각구조, (7) 선창과 갑판 기계 등, (8) 자동화설계, (9) 주기관, (10) 발전기관, (11) 보조보일러,(12) 기타기관실보기, (13) 연료유, (14) 윤활유, (15) 진동대책, (16) 선원정원, (17) 운영요령서
4. 맺는 글 로 되어 있다.


설계도에 대한 작성자 측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방대한 작업과 실험을 거처야만 설계도면 하나가 완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이 필요한 설계도를 일본돈 4만9천엔으로 구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태범과 조선공사 기술진은 이 설계도를 구득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외에 실제 이 설계도로 건조한 선박을 방선하여 견학을 여러 번 하기도 하였다. 즉 일본에서는 이 설계도면으로 여러 척의 선박을 건조하여 운항 중이었고 그 중 몇 척은 수시로 부산항에도 기항하였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격언에 따라, 신태범은 시간만 있으면 부산항부두가에 나가 이 설계도면으로 건조하였음직한 일본선박을 눈여겨 그런 선박이 발견되면 확인한 후, 조선공사기술진과 함께 그 선박을 방선하고, 선장과 면담하고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사용된 부품 하나하나의 상표를 살펴보고 담당 해기사로부터 그 기계의 성능이 어떤가에 대하여 물어보는 등 아주 꼼꼼하게 체크하고 이것을 조선에 참고하였다.

 

신태범은 필자에게 그 당시 주기관으로는 니가타 엔진이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확인되어 신양호에 그것을 탑재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니가타 엔진은 지금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6. 1차년도 선박의 건조
조선지원조건과 자금계획이 마련되자 상공부는 실수요자 신청을 공고하였는데 1,600총톤급 화물선 한척과 500총톤급 화물선 두 척이었다. 신청자가 그리 많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10%로 되어 있는 자기자금을 마련할 만한 자본축적이 아직 되어 있지 않았고, 둘째 건조 조선소로 대한조선공사가 지정되었는데, 아직 대형선의 건조경험이 없는 대한조선공사의 건조능력을 신뢰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건의까지 하였던 신태범 만은 두 번째 문제인 기술수준에 대한 불신이 없었다. 전술한바와 같이 그가 직접 군산호의 대수리에 감독으로 참여하여 기술수준을 현장에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태범도 자기 자금 10%를 자기가 조달할 능력은 당시로서는 없었다. 그래서 재력이 있는 자기 친구인 양재원(梁在元)8)을 설득하여 투자하도록 유도하였고, 그가 참여의사를 밝히자 신태범이 실무를 맡아서 실수요자 신청을 준비하게 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는 중에 양재원으로서도 혼자 자금조달이 벅찰 것을 우려하여 양재원의 지인이고 신태범과 같은 신씨인 신중달을 참여하도록 유도하였고, 실수요자 선정신청은 일단 신중달 명의로 하기로 하고, 실무는 신태범이 전담하기로 하였다. 상공부나 대한조선공사도, 이 제도 창설의 최초 제안자인 신태범이 참여한 신중달을 첫 실수요자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일단 방침이 결정되자 실수요자 선정절차가 진행되었다. 이하 진행절차를 살펴본다.

 

1962년 5월 31일 : 선박건조계획시달 - 상공부 - 대한조선공사
1962년 6월 7일 : 선박실수요예정자 선정 - 상공부 - 신중달
1963년 2월26일 : 63년도 조선실수요자 확정 - 대한조선공사 - 신중달


위 선박실수요 예정자가 선정된 후 신중달(실무는 신태범이 주관, 이하 같다)과 대한조선공사간에 계약을 협의하여 합의된 내용을 상공부에 보고하고 상공부가 신중달을 1963년 조선사업 실수요자로 확정하여 시달하였다.

 

선명 : 1,600톤 화물선
계약금액 : 105,280,000원
정부책정융자금(산은자금) : 52,050,000원
정부책정보조금 : 41,640,000원
자기자금 : 11,590,000원  


위와 같은 내용이 확정되자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산업은행에 융자 신청하여 본격적인 조선이 시작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신중달을 실수요자로 선정한 것은 상공부의 조선 5개년 계획에서는 1962년분 실수요자로 되어있으나 정부의 절차지연으로 1963년으로 확정만 이월되었고, 실제 착공은 1962년에 이미 하였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 조선실수요자 확정 통보 공문에 “1. 귀하의 발주로서 현재 당사에서 건조중인 1,600톤급 화물선 1척에 대하여, 금반 상공부로부터 63년도 선박건조실수요자로 확정하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신양호의 실제착공은 1962년 6월 7일의 선박실수요자 예정자 선정 후 바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하여 후에 신양호(新洋號)로 명명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의 대형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1,600총톤급 중형선이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하여 건조되어 우리나라 해운회사에 의하여 운영되는 실적을 올리게 된다. 신양호가 준공된 것은 1964년 2월 22일이었다. 그 외에 제1차 실수요자 선정에 있어서 남성해운은 대한조선공사에서 500톤급 우양호를 그리고 천경해운도 역시 총톤수 500톤급의 천경호를 대선조선에서 건조하였다.


7. 2차선의 고려해운에 의한 건조    
1차선이 예정대로 잘 될 기미를 보이자 처음에는 잘 몰랐던 다른 해운업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검토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고려해운9)의 이학철 사장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는 63년도에 또 한척의 1,600총톤급 화물선 건조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태범을 찾아와서 이 일을 추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자문하였다. 신태범은 이학철 사장에게 자기 일같이 자세하게 작업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거의 실무를 대행해 주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해운과 1차선 추진 팀은 아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신태범 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고려해운이 2차선의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고려해운에 의하여 추진된 2차선인 동양호는 1차선인 신양호와 같은 설계도에 의하여 거의 동시에 착공되었다. 그 결과 준공도 1차선 신양호가 64년 2월 22일인데 2차선 동양호는 같은 해 5월 11일에 준공되어 준공일자가 불과 3개월 차이밖에 없다. 1차선과 2차선의 차이는 선가는 같으나 보조금과 융자금의 비율이 약간 차이가 난다. 즉 신양호의 산은(産銀) 융자가 50%였는데 비하여, 동양호의 경우 이것이 60%가 되고, 정부보조금은 신양호가 40%였으나 30%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전술한바와 같은 1차선과 2차선의 실수요자들의 관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8. 중형선 3. 4차선의 실수요자 경합과 5차선의 건조
상술한바와 같이 1, 2차선이 성공적으로 건조되는 것이 확실시 되자, 정부는 신조선의 규모를 좀 더 크게 해서 2,600총톤급 선박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이때는 이 사업에 관심을 갖는 해운업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고, 정부계획은 자금여력의 한계로 매년 1척을 계획하였으므로 신청자가 경합하게 되고, 서로 선정되기 위하여 로비를 전개하게 된다. 최후까지 경합한 것은 조양상선(사장 박남규)과 풍국해운(사장 박현규10))이었다. 양사가 심하게 경합하여 실수요자 선정부서로서도 어쩔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조정한 끝에 기존회사인 조양상선을 3차선(64년분)을 실수요자로 우선 선정하고 동시에 풍국해운에게는 4차선(65년분)을 선정할 것을 확실하게 약속하였다. 조양상선이 64년에 선정되어 건조한 선명은 남성호였고, 풍국해운이 65년도 건조한 선박의 선명은 보리수호였다.


1,600총톤급 화물선 2척과 2,600총톤급 2척을 성공적으로 건조한 조선공사는 신조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자신을 갖게 되어, 그 다음해(1966년)에는 15,000DW/T급의 대형선(당시로서는)을 범양전용선(현 STX 팬오션)을 실수요자로 해서 건조하게 된다. 그 후로는 대일청구권자금이 선박확보자금으로 배정되게 되면서 국내자금을 재원으로 한 신조선 건조계힉은 일단 마감하게 되었다.


1차선이 성공하면서 전술한바와 같이 실수요자들의 관심이 늘어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정부가 자금지원조건을 약간 실수요자에게 불리하게 다시 조정하게 된다. 다음 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1차선보다 2차선은 산은융자금이 60%(1호선은 50%)가 되고 그 대신 정부보조금이 30%(1호선은 40%)로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 차이는 큰 차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인플레가 심한 시대였으므로 장기저리 융자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목상의 금액은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경제적가치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3, 4차선의 경우, 자기자금이 부담이 15%로 늘어났는데 이것은 실수요자들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당시는 민간자본의 축적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이 자금을 동원한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66년 실수요자인 범양전용선의 자금조건에 대하여는 지금으로서는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9. 신조선의 고려해운에의 통합과 고려해운의 제2 창업
이상에서 업무상의 필요에 의하여 만난 신태범과 대한조선공사 이영진 사장간의 대화가 발전되어, 그때까지 이루지 못하였던 중, 대형선을 우리나라 조선소에서 신조하는 쾌거를 올리게 된 과정을 정리하여 보았다. 조선량은 1,600총톤급 화물선 2척, 2,600총톤급 2척, 15,000DW/T급 1척, 그리고 500총톤급 소형선 2척이다. 그 중 1,600총톤급 2척과 2,600총톤급 1척 합계 3척이 고려해운으로 통합되어 고려해운이 사실상 제2창업을 하게 된 경과를 신태범의 회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신태범과 가까운 친구였던 양재원이 비닐 제품동장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양재원 한사람만의 재력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양재원의 소개로 신중달이 이 사업에 동업으로 참여하게 되었음은 전술하였다. 신중달의 동업 참여로 어느 정도 자금여유도 생겼다.
그러한 시점에 고려해운의 이학철 사장이 2차선의 실수요자가 되기 위하여 신태범을 찾아왔고, 신태범은 아주 친절하게 그를 도와서 2차선의 실수요자가 되도록 도와주었고, 그 후의 작업진행과정에 대하여도 자기일 같이 도움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아니하였다. 고려해운은 그 당시 은양(銀洋)호라는 소형선 한척을 소유운항하고 있었다. 이 선박은 원래 화물선으로 건조한 선박이 아니라 전시에 작전지역의 항만에 계류해놓고 장병들의 휴양시설로 사용하던 선박이었다. 휴전 후 이러한 선박이 필요 없게 되자 민간이 불하 받아 화물선으로 개조하였으나 선체구조 자체가 화물선용으로 적합하지 아니하여 효율성이 떨어지는 선박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이학철사장도 혼자만으로는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학철 사장은 2차선의 실수요자가 되고나서 자기자금 10%를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고심 끝에 2차선 동양호의 지분 반을 팔기로 하고 신태범등에게 살 사람을 알선해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그런 부탁을 받은 신태범등(신태범, 신중달, 양재원)은 숙의 끝에 그 지분을 자신들이 인수하기로 해서 2차선 동양호의 지분 50%를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은양호는 처분하고, 은양호와 관련된 채무를 정산 정리하기로 하였다.
건조공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신양호와 동양호가 공히 준공을 맞이하게 되자 1호선인 신양호를 운영할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 당초 1호선 신양호의 동업을 협의할 당시에는 실수요자 선정신청과 건조과정에서는 신중달을 대표로 하고 준공된 후에 운영방안을 재협의하기로 하였었다. 숙의 끝에 새로 회사를 설립하기 보다는 이미 동업형태로 존재하는 고려해운과 합하여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제시되어 고려해운의 이학철 사장과 협의하여 신양호를 고려해운에 출자하는 형태로 통합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신중달 등(양재원과 신태범 포함)은 동양호 지분 50%와 신양호 지분 100%를 갖게 되고 이학철은 동양호 지분 50%와 은양호 지분분을 갖게 되나 은양호는 효율성이 낮으므로 처분하기로 한 약속대로 처분하고, 그 대가 상당액만큼 내부적으로 지분을 정리하였다.  

 
한편 박현규가 주도한 풍국해운도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풍국해운의 자본주는 박현규의 고향사람으로서 풍국탄광이라는 무연탄광산을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얼마 후에 풍국탄광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약속한 자기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졌다. 그 해결안으로 풍국해운의 주식을 고려해운이 사들이기로 하였다. 박현규는 전술한 바와 같이 풍국해운 이전에 신태범이 추진하던 신양호의 건조에 깊이 관여하여 4인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여 자연스럽게, 고려해운 관련자들과 매우 친숙한 사이였었으므로 서로가 큰 어려움 없이 풍국해운의 고려해운 인수를 합의하게 되었다. 전술한 신양호와 동양호를 합한 고려해운의 재탄생 후, 약 2년이 지난 시점에 풍국해운의 고려해운 인수가 이루어졌다. 박현규에 대한 대우는 신태범과 같은 수준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조선에 의하여 건조된 중형선 4척중 3척이 고려해운으로 통합되어 고려해운의 제2창업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제2창업과정을 거쳐 재탄생한 고려해운은 그 후 순풍에 돛단 듯이 승승장구를 계속하게 된다. 고려해운은 그 후 한국선주협회의 회장단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활약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사항의 하나는 3인의 자본제공자와 두 사람의 지분참여조건의 전문경영인 합계 5명으로 구성되어, 자칫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려해운은 제2창업과정을 거친 후 오랫동안 외부로 잡음이 새나오지 않는 일사불란한 안정된 경영과 발전을 거듭한 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업에 약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우리 국민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러한 의견들을 뒷받침 하는 현상으로 처음 좋은 생각으로 시작한 동업이 사업이 잘되거나 잘못되거나를 떠나서 동업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헤어지거나, 주도권 다툼으로 성장발전의 기회를 상실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한국적인 동업풍토에서 고려해운만은 동업자 상호간에 똘똘 뭉쳐, 오직 고려해운의 발전과 경영안정이라는 공동목표를 향하여 40여년을 일사분란하게 매진해 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고려해운 내에서라고 동업자상호간에 이견이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어 언급은 하지 아니하였지만, 창업대주주가 경제적 곤란에 처하여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일괄 양도하는 등 자칫 경영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도 몇 고비 있었다. 이러한 고비를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하여 고려해운을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간 지혜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