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리제이션과 정기선의 구조적 변화

 

1절 해상컨테이너 출현의 배경과 연혁

배경
2차 대전 후,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기술혁신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선박의 기술혁신에서 전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형전용선화 기술혁신이었음은 이미 기술하였다. 이러한 기술혁신은 부정기선업계 전체로 확산됐다. 그러나 정기선 분야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큰 기술혁신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대형전용선의 기술혁신은 선박의 대형화와 적양하 하역의 자동화와 기계화로 이루어진다. 적양하 하역의 자동화와 기계화를 위해서는 작업의 표준화와 단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액체화물의 전용선화와 대형선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액체화물을 벌크상태로 펌핑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드라이 벌크 분야에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것도 액체화물과 유사하게 벌크 상태에서 효율적으로 적양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기선의 경우 일반화물 내지는 잡화로 불리는 천태만상의 화물을 운송대상으로 하므로 하역을 자동화하거나 기계화하기가 쉽지 않다. 기계화와 자동화를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한편 2차대전 후의 세계 경제의 또 다른 특징은 노동 임금이 급상승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노동의 임금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급상승하였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사양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선진국에서 사양화된 산업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개발도상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해운업과 같은 서비스 산업은 서비스가 제공되는 장소적 가치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산업이전이 일어나기 어렵다. 정기선 경영은 적양하 하역비의 급상승과 선박회전율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참고로 1969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영선사였다가 민영화된(1968년에 민영화) 대한해운공사가 정기선의 컨테이너화 필요성을 검토하였던 자료에 의하면, 당해사의 주력 정기선항로였던 뉴욕항로(극동과 북미동안을 연결)의 톤당 평균운임이 60미불정도였다. 부산항에서 선적하거나 양하하는 하역비는 톤당 1불 50센트 정도인데 뉴욕항의 그것은 18불 정도 되었다. 일본의 경우 5불 정도였다. 일본 뉴욕간의 화물은 운임 중 38%가 하역비로 지출되는 셈이고 부산 뉴욕의 경우 32%가 하역비로 나간다. 이러한 하역비의 중압에 견디다 못한 세계의 정기선업자, 특히 선진국 항로 간을 중심으로 운항하는 원양정기선업체들이 이러한 하역비의 중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술혁신을 서두르게 된 것이 컨테이너화다.


컨테이너화는 제3의 유통혁명(1차는 증기기관에 의한 철도와 기선의 출현, 2차는 내연기관의 발명에 의한 자동차와 항공기의 출현)이라고 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기술혁신이기는 하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간단한데서 나왔다. 즉 상술한 바와 같이 정기선화물의 하역을 기계화하고, 자동화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운송대상화물이 천태만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물도 똑같은 상자 안에 담으면 하역하는데 알맞게 표준화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컨테이너화와 같은 시스템을 unit load system이라고 한다. 이 컨테이너화는 시행하자마자 그 엄청난 효율성 때문에 급속하게 확산되게 되면서 유통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컨테이너화의 연혁
1) Piggy back 시스템의 TOFC
오늘날 컨테이너제도의 출현은 철도운송과 도로운송의 연계운송으로 거슬러 오른다. 가장 먼저 출현한 근대적인 육상 교통수단은 증기기관을 이용한 철도였다. 그 후 2차 교통혁명은 내연기관의 출현에 의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였다. 두 교통기관의 장단점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철도의 경우, 대량 장거리 운송에는 운송비가 저렴하고 안전하여 큰 이점이 있는 반면 선로가 부설된 곳에만 갈 수 있으므로, 자동차와 달리 수요자의 문전까지 서비스하기는 어려운 단점이 있다. 반면에 자동차의 운송은 대량운송이 어렵고 기껏해야 5내지 10톤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소량운송 위주였고 그 결과 운송비용이 고가인 것이 단점이었다. 철도시설의 건설에 대한 막대한 기초투자를 해야만 개설할 수 있는 철도영업은 자동차 출현이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점사업으로서 여러 가지 독점이윤을 향유하고 있었으나, 자동차가 출현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운송수단 간에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거리 운송을 잠식해 들어오던 자동차가 점진적으로 장거리 운송에까지 침투해 오자, 철도도 이 문제를 좌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다른 한편 문전에서 문전까지의 운송이라는 편리성을 무기로 승승장구한 자동차도 영업거리가 장거리화되면서 철도의 대량 장거리운송과는 경쟁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절감하게 되었다.


교통수요가 늘어나자 교통서비스의 제공자들(특히 자동차 운송사업자)사이에서 이 두 운송수단의 장단점을 잘 보완하여 가장 경쟁력 있는 운송방법을 고안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화물의 출발지에서 화물자동차에 화물을 적재하고, 이 화물자동차를 화물열차의 무개차(flat car)에 적재하여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철도운송을 하고, 여기서부터 화물의 목적지까지는 다시 자동차로 운송하는 시스템을 고안해 냈다. 이 제도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었는데 아주 편리하고, 경비도 저렴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아이디어를 시행한 회사는 큰 이익을 얻었다. 이 시스템은 처음에는 대차 위에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화물 자동차를 싣고 가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제도의 경제성이 확인되면서 한 발 더 발전시켜 화물자동차의 견인(牽引)부분과 적재부분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하여 출발지의 문전에서 철도 대차에의 상차까지는 견인부분과 적재부분을 연결시켜서 하고, 적재한 후, 견인부문을 분리하여 적재부분만 목적지로 보내고, 목적지 인근에서의 철도에서의 하차는 여기에  따로 준비되어 있는 다른 견인부분을 가지고 가서 적재부분과 연결시켜 철도에서 하차시켜 목적지로 향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가 piggy back 방식이며 공식용어로는 TOFC(Trailer on Flat Car) 방식이라고 한다.

2) Malcom P. McLean에 의한 미국연안 운송
이러한 아이디어(화물자동차에 화물을 적재한 채 철도에 적재운송)는 해상운송으로 연결시키게 된다. 미국은 2차 대전을 치르면서 노르만디 상륙작전과 같은 상륙작전을 할 때 전투부대가 상륙한 바로 뒤에 LST에 군수품을 만재한 트럭을 적재하고 가서 이 트럭을 LST로부터 바로 상륙시킨다. 이렇게 상륙된 화물 자동차는 군수품을 적재한 채 그대로 일선 전투부대의 바로 뒤를 따라 가면서 군수품이 다 소진될 때까지 군수품의 보관창고 겸 운송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륙용 트럭은 다른 트럭과 달리 화물적재부분을 컨테이너와 유사하게 차폐하여 악천후에도 군수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일반 상용으로 해상 컨테이너가 활용된 것도 미국에서다. 이 사업은 SeaLand사의 창업주인 Malcom P. McLean이 1956년 4월에 T2 탱커(2차 대전 당시 미군용으로 건조된 2만 중량톤급 유조선)를 개조한 선박에 58개의 컨테이너를 갑판위에 적재하여 뉴와크와 휴스턴 간을 운송하였다. 그때 사용한 컨테이너가 그 후 SeaLand사가 1980년대 초까지 계속해서 사용해온 35피트 컨테이너(8′x8′x35′)였다. 이것이 해상컨테이너 운송의 시초다.


이 운송은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선 그때까지 일반화물의 해상운송의 가장 큰 비용요소였던 하역비를 대폭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 새시 상태로 운송된 컨테이너를 트랙터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되므로 하역시간이 크게 단축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인력에 의한 하역의 효율성이 극히 떨어졌기 때문에 대형선의 하역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선박회전율이 낮았기 때문에 벌크전용선과는 달리 정기선의 대형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였다. 그러나 컨테이너화에 의하여 하역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하역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되어 대형화의 가장 큰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3) 월남전과 해상컨테이너의 원양수송
원양항로에서의 해상컨테이너화는 월남전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월남으로 운송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월남은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온 나라로서 항만을 비롯한 운송 및 물류의 하드웨어가 낙후되어 있어, 군수품을 수용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항만시설이나 보관창고가 상대적으로 덜 필요한 해상컨테이너 운송방식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해상 컨테이너 운송방식을 개발하여 운영해온 Sea Land사가 이 운송을 담당하였다. 컨테이너에 의한 운송은 재래선에 의한 운송에 비하여 항만시설이 덜 필요하고 하역이 매우 빠르므로 항만시설이 낙후된 월남전에서는 안성맞춤인 운송시스템이었다.


항만에서의 하역뿐만 아니라 운송과 보관에도 컨테이너는 아주 편리하다. 컨테이너는 튼튼한 상자 형으로 되어 있고, 방수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비 속에 놓아두어도 화물이 손상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컨테이너는  창고기능을 겸할 수 있다. 또 해상운송되어 온 컨테이너를 새시위에 적재하고, 트랙터로 견인하면 쉽게 육상운송을 할 수 있다. 또 양하된 컨테이너는 해상의 바지(barge)에 양하하여 그 바지를 견인하여 사이공강을 따라 수상운송을 하면, 전선 가까이까지 쉽게 운송할 수 있다. 이렇게 전선 가까이까지 운송된 컨테이너는 그대로 장치하여 창고로 활용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물품을 꺼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편리성 때문에 컨테이너는 월남전에서 아주 유용하게, 그리고 널리 사용되었다.


월남전에서의 컨테이너 수요는 일방통행이다. 월남으로 가야할 군수품은 많은데 월남에서 미국으로 가야할 화물은 거의 없다. 빈 컨테이너를 그대로 미국으로 다시 싣고 가야 한다. 그래서 이 빈 컨테이너를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한 것이, 해상컨테이너를 일반상용으로까지 확대하는 방안이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일본이 여러 가지 경공업제품을 미국으로 대량 수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Sea Land사는 월남에서 발생한 빈 컨테이너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일본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을 운송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해상컨테이너를 국제원양항로에서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준비관계로 실제 가장 먼저 개설된 항로는 북미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서양항로였다.     


4) 해상 컨테이너운송의 국제운송에의 확대
미국의 연안운송과 월남전에서 많은 수익을 챙긴 Sea Land사는 이 아이디어를 국제정기선항로에도 적용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서둘렀다. Malcom P. McLean이 이끄는 Sea Land사는 재래정기선을 개조한 35피트 컨테이너 226개를 적재할 수 있는 컨테이너 전용선을 만들어 1966년 4월에 뉴욕과 유럽 간에 배선하면서 Weekly Service를 개시하였다. 이것이 국제항로에서 컨테이너 운송의 시초다.  그 이듬해인 1967년 9월에는 Matson Navigation Co가 역시 재래 선을 개조한 풀컨선인 Pacific Trader와 Pacific Banker를 투입하여 북미와 일본간의 항로에 취항하였다. 이것이 태평양항로에서의 컨테이너 해상운송의 첫 신호다.
Sea Land사는 대서양항로에 첫 개조 풀컨선을 투입한 후 그 효율성이 높이 평가받아 급속한 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태평양항로에 풀컨선을 투입한 Matson사는 성공하지 못하고 외항항로에서 철수하고, 하와이와 미 본토를 연결하는 연안항로만 유지하게 된다.      


유니트 로드 시스템의 3가지 형태
유니트 로드 시스템이란 잡화라고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천태만상의 화물들을 일정한 규격의 용기에 담아서 운송에 적합하도록 규격화한 것으로 지금으로서는 컨테이너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컨테이너라는 말의 영어적 의미가 바로 용기(容器), 그릇, 상자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컨테이너가 해상 운송에서 널리 이용되게 되면서 컨테이너이외의 유니트 로드 방식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Pallet System : 상품을 운송수단에 적양하 하거나 창고 등에 보관하는데 편리하도록 화물을 쌓아놓는 받침대를 팔렛이라고 한다. 정해진 규격의 팔렛위에 상품을 잘 쌓아놓고 적양하를 위하여 필요할 때 이 받침대를 포크 리프트로 들어서, 운송수단에 적재하면 한번에 아주 쉽게 팔렛에 쌓인 화물을 옮길 수 있어 편리하다. 이 시스템은 오래전부터 이용되어 오다가 해상에서 컨테이너운송이 일반화되자, 이 제도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컨테이너선에게 추격을 받게 된 재래 정기선들이 팔렛 시스템을 널리 재래 정기선에 원용하여 컨테이너선과 경쟁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원양장거리 운송에서는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그 결과 이 팔렛 시스템은 물류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운송의 보조수단으로서의 기능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물류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시스템으로 거의 모든 물류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arge Carrier System :  이 시스템은 화물을 바지에 적재하고 이 바지를 모선에 적재하여 운송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연구된 것은 선박의 대형화와 관련된다. 선박이 중소형의 목조범선이던 시대, 주요 강의 중류에 도시가 형성되고, 그 도시의 양안에 항만시설을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런던, 파리 등 주요도시가 다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선박이 대형화되자 더 이상 강안의 항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어 항만이 강 하구나 해안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도시와 이전해 나간 항만 간을 다른 교통수단으로 연결시켜야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대형모선으로 운송되어온 화물을 최종수요지까지 효율적으로 운송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이 바지 캐리어 시스템이다. 이 방식이 실용화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LASH(Lighter Aboard Ship) 시스템인데 5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바지에 화물을 적재하고, 이 바지를 본선에 장착된 크레인으로 본선에 적재하고, 목적지에 가서 이를 양하하여 최종 목적지까지 이 바지를 타그 보트로 예인해 가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Sea Bee 방식으로 1,0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바지에 화물을 적재하고 이 바지를 모선의 선측에 부착시켜 목적지 항으로 간다. 여기서 모선에서 바지를 떼어낸 후, LASH 방식과 마찬가지로 타그 보드로 최종목적지까지 예인해간다. 바지에 적재하는 화물은 양단의 작업의 편의와 능률을 고려하여 역시 컨테이너에 넣어서 조작된다. 이 방식도 거센 컨테이너의 도전에 직면하여 보다 경쟁력 있는 새로운 운송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업체들이 고안한 것이었으나, 이 제도도 경제적으로 채산을 맞추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Container System : 이 제도는 다시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RO/RO 방식 : Roll on Roll off를 줄인 말로서 컨테이너를 본선에 적재할 때 새시에 컨테이너를 적재한 상태 그대로 적양하하고 운송도 온 새시 된 상태 그대로 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특별히 적양하 하역이라는 과정이 없이 트랙터에 의하여 온 새시 상태의 컨테이너를 그대로 견인하여 선상의 적재장소까지 가지고 가서 온 새시 상태로 이것을 선박에 남기고, 트랙터는 나온다. 목적지에 가서도 이의 역순으로 트랙터가 들어가서 온 새시 상태인 컨테이너를 그대로 견인해 나온다. 적양하 하역이 매우 간편하고 하역비도 크게 절감될 뿐만 아니라 하역이 매우 빨라서 선박회전율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고, 현대적인 전용항만시설이 정비가 덜된 항만에서도 사용이 간편한 점 등이 장점이다. 반면에 온 새시 상태로 운송하므로 선내에서 한 컨테이너가 점하는 공간이 너무 커서 운송능력이 제한되어 경제성이 낮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이 제도는 Sea Land사가 처음 해상컨테이너 방식을 도입할 때 사용한 시스템으로 그 후 오랫동안 그대로 활용되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은 결정적인 핸디 캡 때문에 후술하는 LO/LO 시스템에 밀려서 지금은 단거리 카페리선에서 활용되는 등 제한적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LO/LO 방식 :  Lift on Lift off를 줄인 말로서 Ro/Ro 방식과는 달리 선박에 적재할 때 컨테이너를 새시로부터 분리하여 컨테이너 자체만을 선박에 적재하여 운송하는 방식이다. 적양하를 위해서는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대형 크레인에 의하여 컨테이너를 들어올려 적재하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이 방식은 대규모 전용 항만시설이 필요하고 하역소요시간도 RO/RO방식보다 약간 더 소요되는 단점이 있으나, 결정적인 장점은 선박의 운송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제도는 지금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이 방식은 그 후 육상운송에도 전용되어 컨테이너 2단적 열차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Sea Land사의 독주와 재래 정기선업계의 대응
Sea Land사와 Matson사에 의하여 1966년과 1967년에 대서양과 태평양항로에서 외항컨테이너 서비스가 선보인 이후 원양해상컨테이너 서비스는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태평양에 최초로 진출하였던 Matson사는 얼마 후 외항부문에서는 철수하여 본업이었던 연안운송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Sea Land사는 한번 시작한 해상 컨테이너 운송이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힘입어 사업을 거듭 확장해 나갔다. 이에 자극받은 재래선에 의한 정기선 서비스를 제공하던 업체들도 컨테이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해상 컨테이너가 등장한 후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이점(하역비의 절감과 적양하 하역시간의 단축에 의한 선박회전율의 획기적인 향상) 때문에 재래선과 컨테이너선의 경쟁 결과는 너무나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다른 원양정기선사들도 컨테이너화를 서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대응방식은 약간 달랐다. 당시 정기선 시장에는 해운동맹제도가 굳게 자리 잡고 있어 해운자유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것 같이 보였으나, 그것은 표면일 뿐 실질적으로는 해운동맹에 의한 과점 상태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 원양정기선의 3대 시장은 북미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서양 항로, 북미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태평양 항로, 그리고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럽항로였다. 이 중 대서양 항로와 태평양 항로의 경우, 미국 법률에 의하여 해운동맹의 독점력이 많이 제약되는 개방형 동맹(Open Conference)체제로 되어 있으나,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럽항로의 경우, 유럽제국의 해운 보호적 법제로 인하여 폐쇄형 동맹(Closed Conference)이었다. 전자인 미국 법제 하에서는 동맹에의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고, 독점 수단인 운임연려제나 투쟁선의 투입이 금지되는 등 해운동맹의 독점 유지를 위한 수단의 사용에 많은 제약이 가해진다. 이에 비하여 유럽항로동맹인 FEFC(Far East Freight Conference)의 경우, 회원의 가입이나 탈퇴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운임연려제와 같은 독점수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맹 내부에서 각 회원사의 적취비율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pooling system도 시행되고 있어 회원사들의 선박투입이나 기항지 같은 것도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


Sea Land사는 처음부터 기존업계와 무한경쟁을 통한 시장 지배력의 확보를 목표로 출범하였으므로 비동맹 노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면서 컨테이너리제이션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기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재래 정기선사들이 컨테이너리제이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은 개별선사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아니하고, 당해 항로를 관장하고 있는 해운동맹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Sea Land사를 제외한 다른 원양정기선사들의 고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재래정기선영업에 비하여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이 사업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할 경우 거대한 규모의 자금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재래정기선사들이 모두 컨테이너선을 제각기 확보할 경우, 선복과잉으로 과당경쟁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므로 이를 사전에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컨소시엄(consortium)이다. 즉 여러 개의 재래정기선사들이 계약에 의한 일종의 정기선사 연합을 결성하여 여기서 합의한 바에 따라 각사가 컨테이너선과 필요한 장비와 시설의 투자를 적절하게 분담하여, 확보된 선박과 시설 및 장비 등을 서로 유상으로 공용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의하면 투자를 분산시켜 자금 마련이 용이해지고, 과잉투자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서로 선박과 시설, 장비를 공용함으로서 대고객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동맹에 가입한 선사들은 동맹내부의 토의와 관련선사간의 대화를 통하여 이러한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대미항로에 대하여는 정부의 지도 하에 시장을 정밀 분석하여 그 시장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일본의 6대 선사가 각기 두개의 북미 항로(그 하나는 파나마운하를 경유하여 뉴욕으로 연결되는 항로이고 다른 하나는 미 서해안과 일본간을 연결하는 항로)에 두개의 컨소시엄을 만들어 각 사별로 투자비율도 조정 합의하여 그 계획에 따라 컨테이너화하였다. 한편 강력한  폐쇄형 동맹이 지배하는 FEFC에서는 동맹이 주도하여 동맹 내부의 선사간의 협의를 통하여 세 개의 컨소시엄(Trio, Ace, Scan Dutch)을 결성하여 일단 전체 셰어를 이 3개 그룹에 배정하고, 배정받은 셰어를 다시 그룹내의 참여선사 간에 배분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다른 한편 Sea Land사를 비롯한 미국선사들은 자금동원능력이 상대적으로 큰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독자적인 서비스체제를 갖추어 나아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정기선 시장은 재래선에 의한 서비스체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새로운 컨테이너리제이션이 그 자리를 메워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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