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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해양정책 개관
정부수립 직후 경제상황하에서의 대통령의 역할
[428호] 2009년 05월 04일 (월) 15:50:04 해양한국 komares@chol.com

▲ 최 재 수 前 한국선주협회 전무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수립하였으나, 당시의 경제여건상 경제자립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부 수립 2년도 채 못 되어 6. 25가 발발하면서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유일한 생명선이고 젖줄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경제원조였다.

 

 이 경제원조 조차 없었다면 그 처참한 상황은 우리가 겪었던 실제 상황보다 수십 배 더 심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원조의 대종은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하는 정부 대 정부의 원조였다. 거기에 종교단체의 온정성 원조가 일부 더하였다. 우리나라가 정부수립 후,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데, 그 기초가 된 것 중의 하나로 종교단체를 통한 각종구호물자의 보급이 한몫을 하였다는 의견이 강한데,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종교단체의 원조보다 수십 배가 크고, 내용도 다양한 정부 대 정부의 원조의 경제적 파괴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리고 이 원조물자와 자금의 배정과 사용은 원조당국의 의사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부의 수장이고, 정치적으로 최고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은 그 측근들의 부패와 무능으로 정치적으로 실패하였지만 본인 자신만은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에 대한 철학과 신념도 뚜렷하였다.

 

이러한 경제상황하에서 다행스럽게도 이승만 대통령은 정열적인 해운인과 거의 동등하다고 할 만큼 해양과 그 해양을 이용하는 수단 중 핵심인 해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해운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가지고 여러 가지 해운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항상 우리나라가 단기적으로 해운에서 급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고, 한때는 전 세계의 해운인들이 한국해운을 경이와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만들만큼 급속한 발전을 큰 부작용 없이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50년대의 착실한 해운준비기간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준비과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관과 해운정책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째 사항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고려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이 고려호를 성공시킨 남궁련 사장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다.                   

 

‘고려호’의 태평양 횡단과 남궁련 사장

1952 10 21일 부산항 1부두 3번 선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고철(톤당 운임 15달러)을 만재한 극동해운주식회사의 고려호(M/S Korea)가 출항식을 갖고 미국 포틀랜드(Portland)로 출항하였다. 이는 획기적 일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첫째, 국책회사로 설립된 대한해운공사 외에 순수 민간기업인 극동해운이 출현하였고, 둘째, 고려호는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고, 셋째, 대한해운공사도 시도하지 못한 태평양 횡단항해에 과감하게 도전한 첫 번째 선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1) 고려호

고려호는 원래 1938 10월 일본의 미스비시(三菱)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에서 신조된 가즈우라마루(和浦丸)라는 1만 톤급 대형 화물선(총톤수 6,800, 중량톤수 1,680)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 정부에 징발되었는데, 마이주루 항을 출항하여 포항에 입항하여 양화한 뒤, 1945 7 15일 부산항에 입항하려다가 외항 입구에 부설된 기뢰(機雷) 때문에 5일간 외항에서 대기하였다. 기뢰제거 작업이 완료되었다해서 내항으로 진입하던 중 7 20 13시경 부산 북항 방파제 1.2킬로 해상에서 미처 제거되지 않은 기뢰에 부딪쳐 선체가 대파되었다. 예인선으로 다시 항내로 예인해 오던 중 내항에 들어와 침몰되었다. 일본의 패전(敗戰)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던 때여서, 가즈우라마루는 반 잠수(潛水) 상태로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2) 극동해운의 창설과 고려호의 인양수리

광복이 되자 이 선박의 인양권을 차지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미 군정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문제로 시간을 보내다가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청년부장 출신인 남궁련이 1947년에 극동해운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8 8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족청의 지원으로 인양에 대한 권리를 따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선박은 인양 후, 1949년에 일본 살베이지 회사가 예인하여 나가사키조선소에 가서 선체수리를 마치고, 다시 요코하마에 소재하는 쓰루미(鶴見) 조선소로 예인하여 기관 수리를 마쳤으나, 극동해운이나 남궁련이나 70만 달러에 이르는 수리비를 지급할 능력을 갖지 못하여 인도받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와중에서 정부자금으로 수리비를 대납하여 비로소 극동해운에 인도된 고려호가 1952 10 3일 오전 11시에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이 고려호의 일본에서의 수리비의 국고보조에 관하여 당시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겸임하면서 주일공사로 근무 중이던 김용주는 자기가 이승만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수리비를 마련하게 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그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기술하고 있다.

 

고려호의 재생과 외화대부

극동해운 남궁련씨 소유선 고려호는 원래 일본의 상선이었는데 태평양 전쟁 중 미국공군기에 격파되어 부산항내에 반 침몰상태로 있던 것을 미군정시대에 남궁련씨가 불하받아 그것을 수리 재생시키고자 일본 나가사키에 끌어다 놓고 수리비 70만 불의 외화대부를 정부에 신청했었으나 2년이 걸려도 이것이 실현되지 않아서 결국 폐선 고철화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때 남궁련씨는 동경에서 나를 찾아와서 그 배를 고철로 팔면 4만 불밖에 안 나간다고 장탄식했다. 때마침 나(김용주)는 예의 백만명 이동계획문제로 1951 1월초 부산에 나오게 되어 그 기회에 이대통령께 일본에 끌어다 놓은 고려호 문제를 보고하고 이 선박을 70만 불 가량 들여 재생시키면 200만 불짜리 선박이 될 뿐 아니라 대형기선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에 1만 톤급 기선이 생겨나게 되니 그것은 국가적으로도 유리한 일이므로 70만 불의 외화 대부를 허락하시어 이 배를 재생하도록 하시라고 요청했다.

 

이대통령은 선박수리자금으로 70만 불 대부 건은 말은 들었으나 그러한 구체적 내용은 몰랐다 하시면서 그러면 김 공사가 그 선박을 수리하여 꼭 우리나라에 가져온다는 것을 책임지겠느냐고 반문하시었다.

나는 그것을 절대 책임지겠다고 대답했더니 즉석에서 비서를 불러 70만 불 대부 건을 곧 집행하도록 재무장관에게 지시하라고 하명하시고 다시 나에게 최순주 재무장관을 만나 그 사실을 잘 말해주라고 말씀하시었다.

 

이리하여 1년 수개월을 끌어온 70만 불 외화대부가 실현되고 고려호가 수리 재생되어 우리나라 해운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 외화 대부의 시발점이 되었다. 평소 이대통령의 고집불통은 유명하지만 내가 경험한 고철 대일수출문제와 이 고려호의 수리비 문제 등을 통해 나는 이 대통령이 내용을 충분히 인식하시면 사리판단과 이해가 올바른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3)‘고려호’의 운항

고려호는 적재톤수 1만 톤 이상의 대형 선박이었기 때문에 당초부터 원양항로 외에는 달리 투입할 수 없는 선박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항로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런 대형선을 운항하여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선장, 기관장 이하 사관들을 선발하는 것이 문제였다. 당초 남궁련은 선장으로 황부길(黃富吉)을 지목하였으나, 당시 황부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승선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황부길을 제외하고는 원양항해의 경험을 지닌 사람을 달리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현역 해군을 승선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어떻게 교섭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5), 남궁련은 선장에 박옥규 현역 해군준장, 기관장에 권태춘 현역해군 대령 등 현역해군 5명을 핵심요원으로 선발하였다.

 

민간요원으로는 1등 항해사에 김훈작, 1등 기관사에 지석남, 3등 항해사에 배순태 등 3명뿐이었다. 42명의 선원으로 고철을 가득 적재한 고려호는 10 21일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노후선인 고려호는 시속 12노트 정도의 속력밖에 내지 못하였는데, 출발한 지 며칠 만에 기관고장으로 5일이나 표류한 나머지 27일 만에야 목적지인 포틀랜드(Portland)에 도착하였다. 그 때 교민들의 환영은 말 그대로 열광적이었다.

 

12 16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스탁턴(Stockton)항에서 밀(小麥) 8,236(톤당 운임 11달러 95센트)과 잡화 1,014톤을 싣고 부산항에 귀항하여 하역작업을 한 뒤, 현역들은 모두 해군으로 복귀하였다. 후임 선장에는 1등 항해사 김훈작, 기관장에는 1등 기관사 지석남이 승진하여 승선하였다. 부산항에서 하역을 마친 고려호는 필리핀에서 독일 함부르크 행 ‘코프라’를 선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1953년에는 호주에서 홍콩 간 양곡수송 등 3국간에서 주로 운항하였다.

 

4) 이승만 대통령과 남궁련의 인연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이 고려호의 성공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일을 성공시킨 주역인 남궁련에 대한 신임도 매우 두텁게 가졌을 것이다. 그 증거로 남궁련은 얼마 후,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의 제4대 사장으로 발탁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하에서 4. 19로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을 물러날 때까지 장장 6년간 해공사장직을 지켰다. 이러한 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궁련 사장을 절대 신임하고 있었다는 몇 가지 증거도 있다.

 

그 하나로 필자가 우연히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방송에서 남궁련 사장이 인터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이 인터뷰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방송되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한국해운사를 내 손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장기간 역임하였고, 평생을 해운업에 종사하였던 남궁련씨의 인터뷰이므로 주의 깊게 들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오라고 한다고 연락이 와서 들어가서 이대통령을 뵈었다. 몇 가지 이야기 끝에 이대통령이 밑도 끝도 없이 “내 후임으로 누가 좋을 것 같아”라고 물으셨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하도 엄청난 이야기라서 어정쩡하게 “글쎄요”하고 우물거리고 말았다. 면담을 끝내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대통령이 “내가 아까한 말 잘 생각해보고 좋은 의견 있으면 이야기 해 줘” 하고 말씀하신다. 그 소리를 듣고 나오면서 정치인도 아닌 자기에게 그런 걸 묻는다니 하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말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불러서 가보니 “전번에 말한 내 후임자로 누가 좋은가 생각해 봤어” 하고 또 물으셨다.

 

그래서 깜짝 놀라면서 이것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구나 생각하고, “며칠 더 생각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하고 물러나와 생각 끝에 다시 찾아뵙고 “제가 생각하기로는 유석(조병옥 선생의 아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 대통령도 “내 생각도 그래, 유석밖에 없어.” 하시면서 “나가서 유석을 만나서 내 뜻을 전하고 그 결과를 내게 알려줘”라고 하셨다. 물러 나와 바로 조병옥박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후임을 맡아달라고 하니 흔쾌히 수락하면서 “다만 내가 몸에 병이 있어, 며칠 후, 미국에 가서 수술해야 되니, 수술하고 나서 돌아와 최종결정을 합시다”라고 하여, 그대로 이대통령에게 말씀드렸더니 “수고했어”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러나 조병옥 박사는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상황에서 미국에서 수술 후, 회복하지 못하고 타계함으로서 이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호의 인양과 수리, 그리고 대미항로의 개척은 남궁련씨를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발탁하게 하고, 다시 6년 후에는 노령으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이 대통령이 자기의 후임자를 천거하도록 할 만큼 신임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 중 해운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그가 경영하는 대한해운공사의 실적을 통하여 그의 능력과 인물됨을 잘 평가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또 하나 195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가 전후 복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새 도약을 준비할 단계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에도 정유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정유공장 건설의 실수요자로 남궁련씨를 선정하였었다는 것이 당시 대한해운공사에 있던 주요간부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자기가 중시하는 해운업을 성공시킨 사람에게 한 단계 다시 도약하는 발판이 되는 정유공장도 맡겨보려 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대통령 본인은 애국심도 강하고, 청렴결백하고 판단력과 추진력을 잘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스맨만 좋아하여 아첨배가 주변을 둘러싸서(인의 장막) 그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다는 것이 정평인데, 해운과 관련된 두 사람. 신성모(지난 호에 소개)와 남궁련에 대하여는 그 예외였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또 다른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한해운공사 초대사장인 김용주씨와 이승만대통령(선박반환문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해운공사의 초대사장인 김용주씨와의 사연도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에 대한 중요성 인식을 잘 대변해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김용주씨 스스로도 자기의 자서전인 ‘풍설시대 80년’에서 말하기를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이승만 박사와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업무를 통하여 서로 알게 된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대한해운공사 초대 사장으로 임명하였고(아마 이 부분은 김용주씨가 해공의 전신격인 조선우선의 주주 겸 사장이었으므로 당연하였을 수도 있다), 이어서 주일공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곰곰 생각해본 필자의 결론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직후의 군정기에 일찍이 조선우선의 사장이 된 김용주씨가 한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군정으로부터 전표선을 임차하여 이것을 운항하여 수익을 올려 회사를 움직일 수 있게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가지고 가서 돌려주지 아니한 선박을 돌려받는 일이다. 특히 김용주씨와 뜻을 같이 하는 해운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음으로 움직인 일이라면 바로 대일 선박반환교섭이었다. 일본은 법적인 책임은 불문에 붙이고 시치미를 뚝 떼는 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였고, 우리 측에서는 없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집요하게 반환요구를 했다. 이 일은 군정개시 직후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대일선박반환청구운동의 중심인물은 다름 아닌 조선우선 사장과 뒤이은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우리나라 민간해운업계를 대표한 김용주씨가 담당하였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통령이 된 이승만대통령도 해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지원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한 얼마 후에, 바로 해공사장 김용주를 주일공사로 임명하는 용단을 내린다(공사설립은 1950 11, 주일공사 임명은 그해 3). 이 인사는 파격적인 인사라 아니할 수 없다. 무엇보다 아무리 국영기업체 사장이라고 하지만 국내에서 대기업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을 신생국가의 고위외교관인 주일공사로 임명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인사를 단행한 것은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서 대일선박반환청구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김용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올바른 견해일 것이다. 즉 국영기업체 사장이라고 해도 민간인 신분인 김용주가, 미국(점령군사령부)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선박반환교섭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외국정부와 정부를 대표하여 교섭할 수 있도록 외교관직함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이승만 대통령은 대일 선박반환청구문제를 중시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용주는 공사직 재임기간 중 계속해서 주로 일본에 머물면서 공사 업무 외에 선박반환문제를 중점적으로 추진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주일공사 취임 후 얼마 안 되어 6. 25 사변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선박반환문제는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계속해서 한일 간의 가장 큰 쟁점 중의 하나로 남았다. 김용주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도 역시 선박반환청구라는 해운문제에 적극적인 열의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한 김용주씨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인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가난한 속에서도 정부가 선도한 선박도입추진

1952년에 정부는 300만 달러가량의 정부의 보유외화를 사용하여 총톤수 4,000 톤급 선박 2척을 도입하였다. 마산호와 부산호로 명명된 선박이었다. 그러나 이 선박의 구입경위는 석연치 않은 요소가 있었다. 1951 8월 겸직하고 있던 주일특명전권공사 직에서 물러난 김용주 사장이 대한해운공사 사장실로 귀임한 어느 날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Rhee Francesca) 여사가 보냈다는 비서가 사장실을 찾아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4,000톤급(총톤수 3,938, 중량톤수 6,145) 미국 전표선(戰標船) 시마비(C1mavI) 형 선박 2척을,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가 수배해서 척당 120만 달러에 구입키로 결정했으니, 대한해운공사가 이들 선박을 구입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귀임한 대한해운공사의 사장 김용주는 이를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이유인즉 그 당시 같은 형의 선박이 일본에 많이 입항해 있었는데, 부산항에서 인도하는 조건으로 척당 70만 달러면 충분히 구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도 장소가 스톡홀름이라면 이 배를 한국까지 회항하는 데에만도 많은 비용이 소요되어 척당 140만 달러가 된다는 계산이었다. 이는 당시의 국제선가에 비하여 2배에 이르는 것으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김용주 사장이 물러나고 1952 3 27일 제2대 이순용 사장이 취임하였다.

 

이순용 사장은 윤상송 상무이사를 대표로 5인의 인수요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첫 선박(마산호)을 인수하여 출국한지 3개월 만인 1952 8 15일에 이 선박은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마산호에 이어 곧바로 부산호가 입항하였다.

 

1953년에는 역시 정부 보유외화로 7,200톤급의 리버티 형 대형선 서해호, 동해호와 빅토리형 선박 남해호 및 유조선 천지호 등이 도입되었다. 이들 7척에 3 4,883톤에 이르는 선박의 도입은 모두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주영한의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 선박의 도입 전후과정에 여러 가지 말썽이 있었지만, 역시 정부 보유외화를 사용하여 도입한 것으로서 그 소유권을 정부가 가지고 그 운항만을 대한해운공사에 위탁하였는데, 그래도 이는 우리 스스로가 외국으로부터 선박을 도입한 첫 케이스였다.

위 내용은 한국해운 60년사에 기술된 내용이다.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다음 몇 가지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에서 외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외화의 사용에 대하여는 아주 조그마한 금액까지도 일일이 직접 결재하는 등 직접 관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로서는 거액이라 할 수 있는 외화를 사용하여 선박을 당시 경제사정에 비추어 대량 도입하였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자료로는 처음 2 (김용주가 거부한)의 가격만 제시되었을 뿐 나머지에 대한 가격이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할 때 적어도 1,000만미불 이상이 소요되었을 것인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선뜻 이 사업에 투자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 금액은 그 후의 대통령들의 수십억불에 해당하는 금액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중요사업이므로 적어도 이 사업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직접 결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러면서도 왜 그렇게 중요하고, 관심 있는 사업을 당연히 그 주 업무를 담당하는 교통부 해운국이나 대한해운공사의 사장 김용주에게 시키지 않고 해운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혀 없을 것으로 보이는 영사에게 맡겼을까 하는 점이다. 특히 해공사장인 김용주 씨의 이유있는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김용주씨를 퇴임시키면서까지 추진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자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추정하건데 이 시점이 6. 25 후의 혼란과 잇달아 터진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정국이 극도로 혼미해지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이를 기화로 한 야당의 정치적 공세로 그의 측근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도 흔들릴 기미가 있었으므로 방어적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처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끝으로 김용주를 전격 퇴임시킨 이유다.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프랑체스카 여사의 주변에서 이 일이 추진되었고, 그 허점이 김용주 씨의 예리한 지적과 용감한 거부로 딜레마에 빠지자, 이 일을 추진하던 세력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즉 현시세보다 두배가 넘는 시세로 선박을 도입하려 하였다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알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은 명약관화다. 그러므로 이 일을 추진하던 세력들이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김용주씨를 다른 적당한 핑계로 중상하여 퇴임시키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신성모에 대한 절대적 신임

신성모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남다른 신임과 신성모를 통하여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과 평화선의 선포, 그리고 이를 현실적으로 집행할 행정기구로서 해양경찰대와 해무청의 창설, 그리고, 한국해양대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 등이 모두 국제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대통령의 해양과 해운에 대한 국가적 중요성과 애착의 발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지난 호에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남다른 해운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은 다른 환경조건의 미비로 인하여 그의 재임 중에는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바로 뒤이은 4. 19와 군사혁명정부에 의한 경제개발의 적극적인 추진과정에서 크게 빛을 발하여 한국해운이 급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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