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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삼주 윤 상 송 자서전(6)
전쟁과 재건,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456호] 2011년 08월 31일 (수) 13:57:07 해양한국 komares@chol.com

해양한국 발행사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창립자인 삼주 윤상송의 자서전을 발간했다. 본지는 윤상송의 자서전을 연재하고 있다.

연재순
▶1회-대학진학이전 시기
▶2회-대학입학이후 도쿄상선학교 학창시절
▶3회-상선학교 학창시절
▶4회-졸업이후 취업과 마지막 승선
▶5회-육상(서울)에서의 새 생활
▶6회-전쟁, 그리고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7회-해양대학을 떠나 만학, 해사문제연구소 설립
▶8회-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9회-해운산업합리화위원장과 해운학회 설립

6.25 전쟁의 발발
해운공사는 발족된 지 불과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 대통령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서울 시민들의 안정을 독려하였으나,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우리 국군은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인민군을 막을 수 없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서울 시민은 전체 144만 6,000여명 가운데 40만 명에 불과하였다. 서울을 빠져나간 40만 명 가운데 80%가 월남 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 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되었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겼다.

이처럼 전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서울 시민 대부분이 그러하였듯 대한해운공사 본사의 직원들도 거의 적의 치하에서 비참한 생활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불안이었다. 그러한 불안 속에서 언제까지나 숨어지낼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렇다고 하여 적에게 협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북한에서 내려 온 사람이어서 그들의 보복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개월에 걸친 적 치하에서 그대로 견디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갑갑하기도 하여 분위기를 살피고자 본사에 나갔다가 그들에게 협력해야만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때 원산에서 항해사로 근무하였고, 내가 월남할 때 도와 준 정씨라는 분의 도움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 27일 유엔 안정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한국 땅에서 즉각 철수하도록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 장군
9월 하순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수립하여 이를 감행하였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 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제2 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제1 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의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 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 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 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서울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나는 유엔군과 인민군이 동자동 철도 굴다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을 청파동 집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런 전투장면에 흥미를 느껴서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고, 하루빨리 공산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심정에서였다.

이어 유엔군은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 쪽은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 쪽은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 쪽은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하다가 11월에는 두만강 일대로 진격하였다.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참전을 요청하였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생각에서, 결국 한국 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였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치하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민군이 갑작스럽게 서울을 점령하는 바람에 해운공사의 직원은 서울에 그대로 남아 고초를 겪거나 일부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지냈지만, 선박은 모두 해상에 있었던 관계로 무사하였다. 다만 전시상황에 따라 일부 선박이 수시로 군에 징발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1주일 가량 지난 1950년 7월 1일 진해통제부 사령관은 26척에 이르는 해운공사의 미국 대여선박 26척 가운데 엘에스티(LST, Tank Landing Ship)형 선박 9척과 에프에스(FS)형 선박 10척 그리고 유조선 1척 등 20척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대여선박 가운데 볼틱 형 6척은 미국 당국이 위험을 피하여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1950년 7월 20일 목포경비부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김천호와 울산호를 징발하여 정부미 8만 가마를 목포에서 부산으로 운송하였다. 이는 이미 광주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의 일부가 목포로 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주요 정부물자와 군수품을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작전이 종료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1950년 9월의 서울
같은 날 오후 6시에는 해군본부로부터 일단 해상으로 이동하여 다음 명령에 따르라는 지시에 따라, 역시 징발선인 단양호에 병력을 승선시켜 해상으로 이동하여 전세를 관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한해운공사 선박 가운데 징발선 20척을 제외한 나머지 선박 10여척을 민수물자 수송에 참여하도록 하였는데, 이들 선박은 교통부 해운국에 설치된 전시운송 사무소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1.4 후퇴 때에 정부는 전쟁 초의 경험을 살려, 후퇴하는 지역에서는 징발선 엘에스티와 에프에스 등의 수송선에 철수하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은 공간에 피난민들을 동승시켰다. 그리고 해운공사가 운항하는 선박과 물자를 부산으로 이동시키라는 교통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 해운공사의 선박에 해운공사 직원의 가족을 승선하여 부산까지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다.

마산호의 인수여행
1952년 3월 27일 김용주 사장이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내무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이순용(李淳溶)씨가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해운공사는 국책회사이므로 정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경질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김용주씨는 대한해운공사의 창립과 더불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지만, 6.25의 발발과 함께 초대 주일공사로 부임하여 종사해 왔기 때문에, 본의였든 아니었든 해운공사의 경영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1949년에 있었던 앵도호의 북한 억류 및 킴볼 스미스(Kinbol Smith)호의 월북 등에 대한 책임문제가 뒤늦게 불거진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있던 주영한이라는 사람의 알선으로 경무대(景武臺, 지금의 청와대)가 구입한 선박을 조선우선이 인수하여 운영하도록 김용주 사장에게 지시하였는데, 가격문제로 김용주 사장이 이를 거부한 데에 따른 인사 조치였다.

내가 이를 안 것은 김용주 사장이 물러난 뒤였다. 1952년 어느 날 나는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만나본 즉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Fran- cesca Donner Rhee) 여사로부터 배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군에서 사용할 배가 아니므로 해운공사에서 인수하는 게 좋겠다는 제의였다. 선박담당 상무일뿐인 나로서는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어서, 사장에게 보고하고 의논해 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이순영 사장에게 보고하고, 중역회의를 거쳐 그 결과를 경무대에 보고하였다.

당시 경무대의 공보담당 비서라 할까, 어드바이저(adviser)는 비노코라는 프랑스계 사람이었고, 배를 사도록 알선한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주영한씨였다. 이순용 사장은 경무대의 내락을 받아 주영한 총영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주영한 총영사는 이순용 사장을 무시하고 경무대에만 회신하였다. 경무대는 이를 다시 이순용 사장에 통보하는 삼각관계로, 경무대의 전신약호인 코피탈(KOPITTAL)이라는 전문만이 몇 차례에 걸쳐 오갔다.

어쨌든 해운공사의 인수가 결정되자 누가 어떻게 인수하고, 인수 후에는 어떻게 운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하는 디젤기관을 장착한 대형 선박이었기 때문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될 일이어서, 만약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것이 해운공사 내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해운공사는 출범 직후부터 외국으로부터 대형 선박의 도입을 추진하였으나, 선박을 도입할 만한 자금능력도 없었고, 유휴 선대를 많이 갖고 있던 미국은 정책적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선박의 판매를 허가하지 않아 실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등등의 사정에서 이순용 사장은 고급선원만이라도 외국인 선원을 승선시키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선원의 기술을 신뢰하고, 우리 배에는 우리 선원들이 승선하여 운항해야 한다는 신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인수책임자가 될 것을 자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선박을 인수하여 부산까지 회항하는 동안 우리 해기사들에게 기술을 습득시키기로 하였다. 그 결과 나는 이관용(李寬容, 해양대학 기관과 1기), 최만정씨 등의 기관사와 전기사 정문환(鄭文煥)씨, 그리고 통역 겸 경리로 김행오(金行五)씨 등 네 사람을 인솔하고 배가 있는 스웨덴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스웨덴의 트렐레보리
여권의 발급이 상당히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순용 사장이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분이어서, 당시 경무대 경찰국장이던 박병배(朴炳培)씨의 알선으로 3일 만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참해야 되는 해기면허에 관해서는 당시 영어로 된 면허양식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서툰 영어로 면허양식을 작성하여 해운공사의 비용으로 직접 인쇄하였다. 이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영문 면허장의 효시가 되었다. 여비 문제에서도 북유럽 출장의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체면 운운하는 나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상당한 액수로 결정되어 몇 천 달러를 받았다.

도쿄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및 덴마크 등 3국의 합동항공사인 에스에이에스(SAS, Scandinavian Airlines System)의 항공기로 갈아타고, 스위스의 주네브(Geneve)에 도착하였다. 시일에 다소 여유가 있어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Bern), 그리고 유명한 알프스 근처의 인터라켄(Interlaken) 등을 관광하였다. 그 뒤 주네브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는 현재 어느 비행기를 탔다고 선주에게 연락하였다. 그 결과 코펜하겐(Copenhagen)에 내리자마자 선주 측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특별히 마련한듯한 스튜어트도 없는 조그만 비행기로 갈아타고 아름다운 섬을 내려다보면서 약 30분간 비행하였다. 마침내 트렐레보리(Trelleborg)에서 내려 다시 자동차로 40분간 쯤 달려 아담한 항구에 도착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선주 대리점 대표를 만나 인수하기 전에 선박을 검사하고 재고품을 조사하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와 달리 대리점 사람들의 태도가 매우 불친절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배를 검사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소지하고 있던 인도절차에 관한 전권 신임장을 제시하였으나, 배는 이미 한국 향 준비를 완료하고 당신들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승선하여 곧 출항하라고 일방적으로 말하였다.

“윤이라는 사람은 선박을 인수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주영한 총영사의 편지가 와 있어서, 우리의 검사와 조사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영한 총영사에게 전문으로 연락을 취하였는데, 여전히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즉시 떠나라는 전문만을 보내왔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재외 인사 가운데 한국인은 모두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커서 그러한 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수백만 달러나 되는 선박을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고 인수할 수 없는 일이어서 백방으로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동석했던 수출입국 관리관이 나의 주장을 인정하여, 스웨덴 체재를 며칠간 연장하는 비자를 발급해 주어, 나는 다음 기항지인 프랑스의 덩케르크(Dunkerque)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본선을 먼저 출항시켰다.

인수 항해
대리점 측은 본선의 상태가 매우 훌륭하나, 각종 의장품 및 비품 등은 선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재고가 없다는 상식 밖의 발언을 했다. 나는 스웨덴 출입국관리청의 관계관과 프랑스 주재 공사의 주선으로 스톡홀름(Stockholm)에 가서 선주 대표를 만나 본선의 상태와 재고품의 내용을 파악한 뒤, 덩케르크로 가서 본선에 승선하여 먼저 승선한 인수팀과 합류하였다.

   
마산호와 같은 형의 전시표준선
이로써 인도임무에 따른 모든 절차를 마치고 귀항하게 되었다. 그러나 디젤엔진의 기술을 우리 선원들에게 습득시키는 문제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이 선박의 전 선주가 미국인이었던 관계로, 영어로 된 기관 취급방법에 대한 텍스트가 배 안에 비치되어 있어서, 항해 중 이것을 읽으며 선원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실습에 대한 요구를, 스웨덴 선장은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왕에 우리 선원의 기술 습득능력을 믿었고, 또 우리 배에는 우리 선원을 태워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던 나는 나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스웨덴인 선장을 마침내 설득하여 항해 중에는 우리 선원들이 기관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항해를 앞두고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된 거제도포로폭동사건이 외국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본선에 승선하고 있던 외국인 선원들은 부산이 거제도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선을 주장하였다. 이들을 간신히 설득하여 출국 3개월 만에 부산항에 입항하였는데, 부산항이 가까워지면서부터 나는 출장 중인 상무이사로서 선박부와 선원부에 수시로 여러 지시를 하였다.

본사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도입한 5,000총톤 급의 우수선박이어서, 본선의 부산 입항을 환영하기 위해 정확한 입항일시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입항 전 날 불어 닥친 폭풍으로 예정일보다 하루 늦추어 입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 군악대까지 동원된 성대한 환영식이 이루어졌는데,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 내외까지 참석하여, 내가 대통령 부부를 배에 안내하였다. 대통령 부부를 수행한 장택상(張澤相) 총리는 선박 내의 살롱을 둘러보고, 총리실보다 훌륭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선박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한 미국의 전시표준선의 하나인 시마비(CIMAVI) 형의 선박이었다. 오늘날에는 20만 중량톤 급이나 30만 중량톤 급 유조선이 운항되고 있지만, 광복 직후 우리나라가 소유하였던 선박은 석탄을 연료로 하는 소형의 증기기관선뿐이었다. 그 뒤 2,000톤 급의 엘에스티(LST)와 그보다 작은 디젤 선박이 몇 척 도입되었지만, 6,000 중량톤(6,145dwt, 3,938gt) 급 디젤선박은 대단한 대형선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선원으로서는 운항 경험이 전혀 없는 선박이었다.

이 선박의 원명은 로사 소오멘이었는데 도입 후 마산호로 개명되어, 나의 소신대로 우리 선원에 의해 훌륭히 운항되었을 뿐 아니라, 뒤이어 같은 급의 부산호가 도입됨으로써 두 선박은 우리나라 해운회사로서 대미 정기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하는 선박이 되었다.

족청계의 대한해운공사 진출
나는 1952년 말에 대한해운공사 상무 직을 사임하였다. 원래 해운공사 임원의 임기는 3년이어서 1952년 말에 임기가 끝나게 되어 있었지만, 1952년 10월 9일 제2대 이순용 사장이 취임 6개월 만에 물러나고, 제3대 사장으로 정운수(鄭雲樹)씨가 취임한 데 이어 새로운 이사의 선임에 있어 이른바 족청계(族靑系)가 경영권을 장악한 때문이다.
족청(族靑)이란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의 약칭이다. 제2대 정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1951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의 국회의석 분포는 민주국민당을 비롯한 야당 측이 절대다수였다. 당시 헌법상 정부통령 선거는 국회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제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형편에서는 자신의 재당선이 어렵겠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가 이끌 새로운 정당의 조직과 국민의 직접선거로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의 필요를 느꼈다. 이대통령이 1951년 8.15광복기념식 석상에서 자신이 이끌 새 정당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밝히자, 기왕부터 정부에 협조하던 국민회, 대한부인회, 대한청년단 및 대한농민조합총연맹 등 5대 사회단체가 즉각 호응하여 나섰고, 뒤이어 대한국민당과 국회의원 70여명이 합세하여 마침내 신당 발기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준비위원회는 원내와 원외 대표가 동수로 참가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정책 토의에 들어가서 원외파는 정부통령 직선제를 주장한 데에 반하여, 원내파가 간선제를 주장하여 타협이 불가능하였다. 그해 12월 23일 원외, 원내 양파가 각각 자유당을 창당하여 두개의 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52년 여름에 들어서면서 원내파가 점차 원외파에 합세하게 되어 7월 4일 정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됨으로써 소위 정치파동을 넘겼다. 이 과정에서 원외 자유당을 결성한 족청파는 정치계뿐만 아니라 각계에 자기 세력을 침투시키기 시작하였다.

대한해운공사 상무직의 사직
즉 정운수씨는 족청계로 해운공사의 사장이 된 사람이었는 바, 해운공사의 임원을 개선함에 있어서 실무책임자를 겸한 이사를 제외한 모든 이사를 퇴임하도록 하였다. 해운공사의 이사들은 창립 때부터 은행장이나 국회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이사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는가’ 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겠지만, 족청계 세력의 일원으로 사장이 된 정운수 사장으로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퇴임을 어떻게든 밀어붙이려 하였다.
당시의 이사 가운데 한개(韓介)씨와 나는 실무 전문가라는 이유로 유임이 결정되었지만, 이사 전원이 사퇴하는 것을 계기로 나도 사임을 결심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상무이사로 남는다고 해도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또 전 임원이 물러나는 마당에 나도 그들과 진퇴를 같이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잠시나마 쉬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부산항에서 미군의 항만운송에 종사하던 일본 선박을 한국 선박으로 대체하게 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된 대한통운의 임봉순(林鳳淳) 사장이 신설되는 선박부의 중역으로 취임해 줄 것을 나와 한개씨에게 권유하여 왔다. 그러나 이왕에 해운공사를 그만 두는 마당에 좀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임봉순 사장의 권유도 사양하였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에서 외국 선사의 총대리점 역할을 맡고 있던 에버렛기선(Everett Steamship)이 애경유지(愛敬油脂)의 방계인 동남해운과 이안공사(怡安公司)로 하여금 각 1척의 선박을 투입하도록 하여, 인천과 도쿄 간에 정기항로를 개설하였다. 이는 비록 한일 간이긴 하였지만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한 최초의 정기항로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1954년 1월부터 1959년 5월까지 이안공사의 고문과 동남해운의 부사장이 되어 한일 간 정기항로 개설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에버렛기선은 대단한 의욕을 갖고, 훌륭한 선원을 승선시켜야 한다는 전제 아래, 고급 선원은 미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충당할 것을 나에게 권유하였다.

에버렛기선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에버렛이라는 미국 사람이 필리핀을 본거로 세운 대리점사였는데, 에버렛은 당시 세계 60여개 선사의 한국 내 대리점을 맡고 있던 회사로서, 선원의 능력이나 인품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 선원의 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음을 믿고 있었고, 또 태극기를 게양하는 배에 외국인을 승선시킨다는 것은 법적으로야 어떠하든,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선장 전원을 한국인으로 임명하였다. 그 때 선장으로 기용된 양원석(梁元錫)씨나 김성오(金聲五)씨는 물론 전 선원이 우수한 기량을 발휘함으로써 6개월 이후부터는 좋은 평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선원을 외국선에 승선시키자는 요구가 에버렛기선으로부터 나왔는데 이는 즉각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뒷날 우리나라 선원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장이나 사장이라는 분 모두가 해운을 잘 모르는 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실질적인 경영을 책임져야 했는데, 나 역시 기관과 출신이어서 해운경영 등의 실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동남해운의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비로소 깨우쳤다. 이를 단시간에 해결하기 위해 나는 차터파티(charter party)니 비엘(B/L, bill of lading)이니 하는 해운용어에 대한 개념을 이면지 등에 적어, 책상 위에서는 물론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익히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이안공사가 서울과 부산 간에서 천일정기화물운송이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박남규(朴南奎)씨에게 매각됨으로써, 동남해운과 이안공사가 운항하던 한일 간 정기항로가 폐쇄되어 나는 1959년 5월 동남해운 부사장직에서 퇴임하였다.

뜻밖의 한국해양대학장 취임
그 즈음 나는 미국 국제협조처(ICA, International Coorperation Adminstration)의 계획에 의해 미국의 해운행정과 해운경영 실태를 시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에 따라 나는 1957년 10월부터 1958년 2월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미국의 항만행정기관과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APL, American President Line) 등을 시찰하였다. 그 결과 한국해운의 현대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이 설립되어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은 교육법 및 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거하여 행정학을 심오하게 연구하고, 그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행정기관의 고급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전문대학원으로 1959년 1월 13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특수대학원으로 설립되었다. 1960년 1년을 수료한 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한국해양대학교의 신성모(申性模) 학장이 별세하였다. 이 때문에 해양대학 교수회의에서 나를 후임 학장으로 선임하고 나의 학장 취임을 교섭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생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관계로 완곡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립대학의 총학장의 선임은 교수회의가 결정하여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미 교수회의에서 결정되었고, 4.10혁명 직후여서 학생들에게 만연된 자유 남용의 풍조가 특수학교인 해양대학에도 번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등 그 통제가 시급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3, 4개월이 지난 뒤에 학장의 취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학장의 취임을 수락하기에 앞서 서울에서 해양대학교 동창회의 간부들을 소집하여, 첫째, 앞으로는 보결생의 입학을 일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니 동창회가 이에 적극 협조할 것, 둘째, 학교의 예산투쟁에 협조할 것, 셋째, 학생의 통제에 협조할 것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보결생, 예산확보 및 학생에 대한 통제 등 이 세 가지가 시급히 해결해야만 할 해양대학의 현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동창회에 대한 협조 요청이었을 뿐 동창회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 가지를 동창회에 대하여 전제조건으로 내건 것은 나 자신의 다짐을 공표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째, 보결생 문제는 비단 해양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대학사회에 만연된 문제였다. 그러나 다른 대학과 해양대학의 경우에는 그 내용이 달랐다. 다른 대학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빠듯한 학교 경영자금을 늘이는 수단으로 보결생을 뽑아들였지만, 전액 국비로 학교를 경영하는 해양대학은 학교 내 사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동창생들 사회에까지 번져 있었다. 이 경우에는 동창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둘째, 한국해양대학교는 설립 당초 통위부(統衛部, 현재의 국방부) 산하에 있다가 교통부 산하로 되어 교통부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늘 넉넉한 지원이 부족하였던 것도 문제였거니와, 졸업생들이 학사학위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전임 신성모 학장의 노력으로 문교부 산하로 관할기관이 바뀌었으나, 뒤늦게 문교부 산하에 들어감으로써 서자 취급이 불가피한 상황인데다가, 문교부는 해운산업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다른 어떤 문제보다 동창회의 조직적인 협조가 필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동창회의 적극적인 협조만으로 시급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셋째, 학생의 통제에 대한 문제는 현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미래의 문제였다. 해양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어떤 대학의 학생에 비해서도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지만, 4.19 학생혁명에 따른 여파가 만만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아무튼 이러한 나의 제안을 동창회가 수락함으로써 나는 해양대학의 학장직을 수락하고 학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나의 학장직 발령은 허정(許政) 과도정부(過渡政府)가 발령한 최후의 정부 발령장이었다.
한국해양대학 학장에 취임한 나는 우선 해군예비원령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해양대학생들은 재학 4년 동안 해군예비역으로서 군사훈련을 이수하고 있었지만, 법이 없어서 해군예비역으로 임관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에 징집되는 외에는 병역을 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 취업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전임 신성모 학장이 개인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선 해양대학 10, 11 및 12기생들이 소급하여 임관될 수 있었다. 그 뒤에 7, 8, 및 9기생들도 소급하여 임관될 수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해군예비원령의 제정을 추진하여 달성하였다.

   
이한빈
내가 한국해양대학 학장으로서 이루어낸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반도호(半島號)에 의한 연습항해의 성취였다. 반도호는 전임 신성모 학장 때 해운공사에서 불하받아 미국의 원조로 연습선으로의 개조에 착수한 배였다. 원래의 선명은 김천호(金泉號)였는데, 개조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하와이로 출항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요로를 통하여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휘호를 부탁하여 승낙을 받고, 이준수(李俊秀) 및 박현규(朴鉉奎) 등 동창회 대표들로 하여금 반도호라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이 배의 수리에는 상당한 자금이 들었는데, 당시 예산국장으로 있던 이한빈(李漢彬)씨와 특별회계담당이었던 김학렬(金鶴烈)씨의 협조가 컸다.

원양항해 실습계획의 수립
개국 이래 우리나라의 연습선을 처음으로 하와이에 취항시키면 해운사상 고취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서 결심한 일이었는데, 출항시키는 데에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이를 단행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각의에서 통과되도록 시도하여 성취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수리하였기 때문에 하와이로 출항하는 데에도 미국의 대한국 원조기관인 유솜(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Republic of Korea)의 승인이 있어야 하였다. 그런데 당시 컬렌이라는 유솜 처장은 첫째 배가 너무 노후하여 사고가 날 위험성이 있고, 둘째 선원의 기술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반도호의 하와이 취항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도호의 하와이 취항을 반대한 이면적인 이유는 정치적 문제에 있었다. 당시 하와이 출신 상원 의원은 반한파로서,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 자체를 적극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반도호가 하와이에 취항하여서 조그만 사고라도 낸다면 이 사람이 들고 일어나, 정치문제화할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면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해운 초창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 연습선이 해외, 특히 하와이에 취항하게 되면 경쟁상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의 반대 로비도 작용한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연습선의 취항 예산은 1961년도 예산으로 확보된 것이어서 1961년 말로 끝나 버리기 때문에, 연내에 출항시키지 못하면 모든 예산이 국고로 반환될 염려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한 결과, 겨우 유솜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61년 12월 30일 반도호는 하와이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이날의 반도호 출항식은 예비사관 임관 축하식도 겸해 이루어졌는데, 이 자리에는 윤보선 대통령과 곽상훈(郭尙勳) 국회의장도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반도호의 출항에 앞서 거사 자체가 해양사상의 고취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지만, 그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나는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을 방문하여 우수한 기자의 편승과 보도를 부탁하였다. 장기영 사장은 한국일보의 기자만을 탑승시킨다는 조건 아래 쾌히 승낙하고 반도호의 출범의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윤보선(중앙)대통령의 반도호 내부 시찰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상송
반도호 하와이로 출항
반도호가 출항할 즈음은 마침 동해안에 태풍이 예보되었는데, 반도호가 출항하자마자 태풍을 만나 난항하고 있다는 기사를 만들어 출항 다음다음 날 한국일보 신년호 1면에 대서특필로 게재되었다. 이러한 보도가 나간 결과, 정부 당국과 학생 가족으로부터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염려와 문의의 전화가 쇄도하여 진땀을 빼야 했다. 그렇기는 하였지만 그로 인해 해양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드는 데에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당시 성춘향(成春香)이라는 영화가 국내에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하와이 교민에게 상영하여 주면 사기의 앙양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이 영화의 제작자인 신상옥(申相玉) 감독을 만났더니, 오재경(吳在卿) 공보부 장관에게 부탁해 달라는 조건 아래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조선호텔 근처에서 이발 중이던 오재경 장관을 찾아내어 경위를 설명함으로써 승낙을 얻어, 외무부의 협조 하에 성춘향의 필름을 파우처(poucher)로 발송하였다. 이 영화는 하와이에서 상영되어, 교민은 물론 하와이의 다른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교민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다. 또 해양대학과 하와이대학생 사이에 친선 축구시합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망명 중이었던 이승만 박사도 참관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반도호 출항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중앙)과 윤상송 학장(왼쪽)
이처럼 반도호의 하와이 취항은 기대하였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반면에 워낙 노후하여 모든 승선원이 막심한 고생을 감내해야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리 고려하여 나는 학교 직원 외에 국내 최고급 선원을 배승시켰다. 그리고 최고 지휘자인 연습감으로 해운국장, 해양대학장, 해무청장 등을 역임하고 당시 대한조선공사 고문으로 계셨던 황부길(黃富吉)씨의 승선을 부탁한 외에, 조선공사의 기술진, 문교부의 담당관, 신문기자, 영화제작소 촬영기사, 그리고 만화가 신동헌(申東憲) 씨 등을 동원하여 배승하였다. 반도호는 출항 3개월 만에 큰 성과를 거두고 무사히 귀항하였다.

국립대학의 통폐합 문제
내가 한국해양대학 학장으로 있는 동안 뜻하지 않은 일로 해양대학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5.16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군사정부는 문교행정을 쇄신하기 위한 목적에서 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국립대학을 그 도시에 있는 종합대학교에 흡수시킨다는 방침을 수립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국립대학으로 부산대학교 외에 해양대학, 수산대학 및 교육대학 등이 있었는데, 군사정부가 수립한 방침대로 시행된다면 해양대학은 부산대학교의 1개단과 대학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재임하는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나로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학장으로 재임하는 중에 해양대학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우려였지만, 해기사 출신으로서 해운에 종사해온 내가 생각하기에 해양대학을 부산대학교에 흡수시킨다는 것은 해운과 해양대학이 지닌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였기 때문이다. 학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아주 무거운 것이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해운의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우려를 불식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대학도 다른 대학 나름의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적어도 해양대학이 부산대학교에 흡수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해양대학은 영도에 소재하고 있어서 부산대학과의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국비로 해기사를 양성하는 학교로서 전원을 강제로 기숙사에 수용하고 있고, 또 해군의 예비사관 후보생으로서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률적인 방침으로 해양대학을 다른 대학교에 흡수시켜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강력한 반대의사를 문교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문교부는 부산지방에 국한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전국을 상대로 수립한 정책이라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5·16 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도세력의 결집체인 군사혁명위원회로 설치되어 5월 18일에 개칭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문교위원장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여 성취해 내었다. 당시 수산대학도 그대로 존속하였는데,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겠지만, 내가 기울인 노력이 수산대학의 존속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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