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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苦同樂해온 해운연관산업계의 40년 (3) 조선산업
조선업 40년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飛上’
[451호] 2011년 03월 29일 (화) 10:59:32 박보근 komares@chol.com

   
 

1970년대 현대·대우·삼성 대형 조선소 건립, 해운조선육성방안으로 동반발전 추진, 후반기 세계 2위 조선국 부상
1960년대 정부의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경제성장을 선도, 가속화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시행됐다. 해상물동량에 따른 선박수요 충족과 경제적, 안보적 측면에서 조선공업의 성장이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조선공업을 기간산업으로 적극 육성지원하게 됐다.

1973년 현대중공업의 준공과 더불어 26만DWT급 VLCC를 건조함으로써 세계 조선시장에 뛰어들었으며, 1, 2차 유류파동에 의한 세계적인 조선불황에도 불구하고 70년대 후반에 세계 2위의 조선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건설을 추진하면서 최초로 수주한 초대형 수출선인 26만톤급 VLCC 건조를 동시에 추진했다. 1973년 조선소 준공과 선박건조를 동시에 이룩하는 쾌거를 이루며 국내 조선산업이 세계시장에 본격 진입하는 이정표를 만들었고, 뒤를 이어 1975년에 수리 전문업체로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됐다. 정책적으로는 1976년부터 ‘해운조선종합육성방안’이 추진돼 국내 선박수요를 자급하고, 국내화물 자력수송을 돕기 위해 계획조선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이 동반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삼성그룹이 1977년 우진조선소를 인수하고, 대우그룹이 1978년 대한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를 매입하여 조선산업에 참여했다. 1977년에는 중대형 조선소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산업을 체계적이고 다각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조선공업협회’를 발족했다.

1967년에 종합제철소의 입지를 포항에 선정하고 1968년 4월 포항제철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함으로써 조선산업의 핵심후방산업이 되는 후판생산 철강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73년 7월에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완공했으며, 1975년에는 선박용 강재인 중후판 61만톤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1976년에는 2기 설비를 준공했고, 뒤를 이어 3기(1978년)와 4기(1981년) 설비를 준공하여 조강능력은 820만톤으로 크게 증가했다.

조선산업의 육성과 병행하여 선박용 엔진 부문에도 투자가 이루어졌다. 1977년에 현대중공업이 대형 디젤엔진 사업을 시작했으며 이어서 쌍용중공업과 대동중공업도 중형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타 조선기자재 부문은 수출고도화 핵심산업으로 지정·육성했으나 낙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주들의 수입제품 선호를 극복할 수 없어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조선산업의 국산화율은 극히 저조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73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소에서 건조한 선박은 어선이 9,148GT로 전체의 76.2%, 컨테이너선이 2,000GT로 약 16.7%, 탱커가 180GT로 1.5%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산업 근대화가 진척되지 못했다.

초대형 조선소 건설, 국내 최초의 ‘컨’전용선 등장
   
▲ 자료 : 조선협회, 김효철著'한국의 배'
1970년대 초까지 대한조선공사는 국내 조선산업을 대표하는 최대 기업이었다. 1970년 9월 현대건설(주)이 중동 건설사업에 투입했던 설비와 인력을 활용하여 10만톤급 도크 1기, 6만톤급과 3만 5,000톤급 선대 각 1기씩을 갖춘 대형 조선소 건설계획을 제출했으며, 정부는 당시 대형 유조선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사업을 승인했다.

이어서 세계 조선시황에 맞는 국제적인 규모의 조선소 건설계획으로 확대 수정하고 주요 프로젝트로 선정하여 적극 지원함으로써 조선산업 구조가 변화하게 됐다. 국제적 수준에 걸맞게 최대 건조능력 50만톤급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으며, 연간 26만톤급 VLCC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대규모 조선소로 건설됐다.

1차 공사가 진행중이던 1973년 3월 정부의 ‘장기 조선업 진흥계획’ 발표로 현대조선소는 시설능력을 다시 100만톤급 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초대형 조선소로 확장하는 2단계 공사를 추진했다. 이러한 확장단계를 거치면서 세계적 규모의 초대형 조선소가 등장하게 됐다. 이 같은 단일 조선소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의 조선소 계획만을 가지고 조선소 건설공사를 기공하기도 전에 26만 6,000톤급 VLCC 2척을 그리스로부터 수주하는데 성공하여 조선소 건설공사와 병행하여 건조했다. 1974년 11월에는 제1호선인 ‘애틀랜틱배런’호를 선주에 성공적으로 인도함으로써 세계에서 주목받는 조선소가 됐다. 또 1973년 8월 대동조선(현 STX조선)이 흥아해운에 인도한 ‘비너스(Venus)’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운반선으로 당해에 우리나라에서 건조된 선박 중에 최대이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준공과 확장으로 1974년에 우리나라는 건조능력이 100만톤을 넘어섰으며, 1970년대 말에 이르러 280만톤 규모에 달하게 됐다. 건조량 측면에서는 1974년 VLCC 건조를 계기로 56만톤을 기록했으며, 이후 꾸준하게 60~70만톤을 유지함으로써 주요 조선국이 됐다.

조선공업진흥계획, 선박수출 연불수출로 전환
1970년대에 실시된 조선공업진흥계획은 선박의 자급률을 향상하고 국산화율을 높이는 한편, 나아가서는 선박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됐다. 또 대우, 삼성 등이 군소조선소를 대폭 통합하고 계열화하면서 중형전문 조선소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1973년부터 석유파동에 따른 조선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선박수출이 연불수출 형태로 전환됐으나, 우리나라 연불조건은 선수금 비율과 금리 그리고 상환기간 등에서 선진국에 비해 불리했다.

한편 1975년에 정부는 조선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의 하나로 재정과 금융지원으로 선박건조를 계획하고, 실수요자를 정부에서 선정하여 국내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계획조선제도를 실시했다. 이 제도는 외항해운 육성방안(1974년)과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1976년)에 의해 시작됐으며, 해운진흥법(1978년)을 근거로 제도화됐다. 이에 따라 내항선은 전량, 외항선은 75%까지 계획조선자금으로 건조할 수 있어 조선소가 최소의 건조량을 유지하며 불황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국제적인 선박수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조선설비 능력이 과잉상태이던 환경에서 1977년 7월 19일 정부 주도로 사단법인 한국조선공업협회가 설립됐다. 설립당시 회원은 현대중공업과 대한조선공사, 삼성조선, 현대미포,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 동해조선, 대동조선, 대선조선, 부산조선공업, 신아조선공업 등 10개사였으며, 이후 대우조선해양이 회원이 됐다.

198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 조선 불황 장기화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로 대대적 구조조정, 조선시설 신·증설 제한
   
 
조선산업의 매출액과 부가가치가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6년에는 약 2% 정도에 불과했으나 이후 연평균 30% 이상의 고속성장을 이룩함으로써 1985년에는 매출액 3조 3,000억원에 이르게 됐고, 부가가치로는 1조 3,000억원에 달하게 되면서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 이상으로 증가하는 양적 성장을 실현했다. 특히 고용인력은 1976년 대비 3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의 여파로 198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해운과 조선의 불황이 장기화됐다. 로이드 통계에 따르면, 1983년부터 벌크화물선을 중심으로 신조선 수주가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1988년까지 전 세계의 연간 발주량이 1,000만GT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저조했다.

1989년부터는 다시 선박 발주가 증가하며 조선경기가 상승국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가하락은 1986년 상반기까지 이어졌으나, 3저로 불리는 원화의 저평가와 유가의 하락 그리고, 원자재 가격하락 등이 유리하게 작용하여 하반기부터 약 1년 정도 상승세로 반전됐다. 1987년에는 해운시황이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발주물량도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발주물량의 대부분이 한국조선소로 몰려옴에 따라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30.2%까지 달했다. 그러나 과격한 노사분규가 시작되면서 생산현장의 불안정한 조업이 이어져 납기지연, 인건비 상승, 그리고 원가상승이 불가피하게 됐을 뿐 아니라 원화절상이 가속화되면서 일시에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세계 조선·해운 경기의 침체가 계속되던 1980년대에 들어서 정부의 조선산업 육성정책에 따른 지원으로 대우조선공업,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소의 도크가 속속 완공되면서 국제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세계 조선시장의 불황이 지속되고, 신조선가 하락, 초기 단계의 금융비용과 감가상각 부담, 그리고 1987년부터 시작된 원화절상과 노사분규 등이 겹쳐, 결국 1989년에 이르러 조선업계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인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를 취하고 조선시설의 신·증설 제한과 선박수출 추천제도를 실시해 저가수주와 과당경쟁을 방지했다.

이 시기에 대한조선공사는 노르웨이 선주가 발주한 다목적 벌크화물선 ‘PROBO'선의 인수를 거부한데 따른 분쟁 탓에 도산으로 법정관리에 이어 한진그룹으로 인수됐다. 1990년 한진그룹이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하여 한진중공업으로 새롭게 출발하고 동해조선과 부산수리조선소도 흡수 통합했으며, 법정관리 상태에 있던 코리아타코마도 한진중공업에 매각됐다. 한라그룹은 인천조선을 인수하여 한라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때 합리화조치로 대우조선에 대해서는 일부 계열사 통폐합 등 자구노력을 전제로 한 산업은행 대출금 상환유예, 신규대출금 제공 등이 이루어졌고, 한라중공업, 한진중공업 등에는 부실기업 인수대가로 세제혜택이 주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의 세계 선박시장 점유율이 1/4수준에 이르게 되자 1989년 3월 EC는 경쟁력 회복과 점유비율 확대를 위해 선가 개선을 위한 선가 모니터링 실시와 시장분배 조정 등을 요구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에 협상을 요구했다. 이어 1989년 6월 미국 조선공업협회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본, 서독, 노르웨이 등 4개국 조선업계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급과 면세혜택 등을 불공정무역관행이라 하여 미 통상법 301조에 의거 제소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후 조선분쟁은 OECD WP6 다자간 협상으로 바뀌면서 수년간의 협상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산업은 1990년 10월 OECD WP6로부터 회원국으로 추대되어 국제간 협력이 필요한 선진국 중심의 국제기구에 진출한 최초의 산업이 됐다.

1989년 세계 신조선 발주량이 1,930만GT로 대폭 증가한 이후 지속적으로 연간 발주량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동안 시황회복의 장애요인이던 해운업계의 선박 과잉보유가 1980년대 전반부터 다량의 선박이 해체되면서 해소되어 발주량 증가로 나타나게 됐다. 조선산업의 건조능력 과잉보유는 1980년대 장기간 조선불황을 지나는 동안 조선소가 지속적으로 도태되면서 해소되어 수급상황도 호전됐다.

‘조선공업진흥법’ 폐지, 국내 234개 조선소 M&A 본격화
1983년 1월 대우조선의 제2도크가 완성되고 이어서 같은 해 3월 삼성중공업의 제2도크 건설공사가 각각 완성됨으로써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1980년대 초부터 일약 세계 2위 수준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조선소 건설이 마무리된 1983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조선업체는 대형조선업체 4사, 중형 조선업체 7사, 소형 조선업체 223사, 수리전문 조선소로 현대미포조선소와 부산수리조선소 2사가 있었으며, 국내 전체로 234개사에 달했다.

1980년대에는 장기간에 걸친 세계 조선경기의 불황으로 일본은 합리화 조치를 통해 건조능력을 감축했으며, 유럽의 많은 조선소들은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신규설비를 증설하지 않았지만 생산성 향상과 자동화를 위한 일부 시설투자가 건조능력 증가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설의 증가에 따라 종업원 규모도 1984년까지는 꾸준히 증가했으나, 이후 조선불황의 장기화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각 조선업체들이 적극적으로 감량경영에 임하고 설비자동화를 추진하면서 1988년까지 종업원 수가 감소했다. 하지만 1989년부터는 수주량 증가에 따른 조업량 증가로 다시 늘어나 1989년 말 한국조선공업협회 회원사의 종업원 수는 5만 903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대형 4사의 종업원 수가 3만 9,935명으로 전체의 78.5%를 차지했다. 특히 종업원 규모 변화는 시설과 건조물량 증가에 따른 것이 특징이고, 기술직의 증가율이 기능직이나 사무직을 추월하고 있어 기술인력 충원에 주력했다.

1980년에는 해상물동량이 급격히 감소하며 전년대비 2.9%가 감소했고, 1981년 4.1% 감소, 1982년 3.4%로 감소하며 극심한 해운·조선불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1983년에 일본의 산꼬기선은 저선가 상태를 머지않아 벗어나리라고 판단한 뒤 3만~4만톤급 벌크화물선 125척을 발주하여 전 세계 선사들의 경쟁적 발주를 유도했다. 이에 따라 일본조선소에 이어 우리나라에도 주문이 몰리게 됐다. 1983년에 우리나라의 신조선 수주실적은 무려 179척, 410만GT로 수주량 신기록을 수립했으며, 현대미포조선은 여러 수리도크를 신조선용 도크로 사용했다.

로이드 통계에 따르면, 1987년 일본의 수주량은 477만GT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34.7%로 감소했으며 우리나라는 416만GT를 수주하여 점유율에서 30.2%로 일본을 바짝 추격했다. 수주잔량 면에서는 1987년 9월 말 이후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섰다. 1989년부터는 해상물동량이 증가하고 선복수급 불균형도 해소되어 세계 신조선 발주량이 1,931만GT에 달하면서 조선시황은 1990년대의 호황국면을 예고했다.

정부정책 측면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 조선산업이 중점 육성산업으로 지정되어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연불수출금융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하고 내수기반 구축을 위해 계획조선을 확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정책이 시장원리로 전환되면서 조선산업 지원도 공업발전법(1986년 6월 조선공업진흥법 폐지)으로 통합했다. 1980년대 말 정부는 조선산업의 경영 정상화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선산업 합리화조치(1989년 8월 28일)를 취하고, 선박수출 추천제도를 실시하여 저가수주와 경쟁을 방지하고 설비 증설을 불허했다.

1990년대 조선산업합리화조치 해제, 대대적인 설비확충, 세계 1위 등극, 외환위기 국내 조선산업 가격경쟁력 높여, 평균 2년치 수주물량 확보
   
 
경제여건이 호전됨에 따라 설비투자를 규제하던 합리화조치를 1993년 해제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호황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설비확충의 길을 열게 됐다. 이런 국내 조선업계의 대대적인 설비확충은 세계적인 비난에 직면했지만 2000년을 전후한 신조발주량의 폭발적 증가를 미리 내다본 최적의 대응으로 드러났다.

1980년대 말부터 세계 조선시황이 회복되어 수출선 건조가 확대되고 조선기자재의 국산화율이 높아지게 됐다. 또 조선기술이 향상돼 1990년대에 조선산업은 재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조선업 전체를 살펴보면 소형조선소의 감소로 1980년대에 비해 업체수는 감소했지만, 설비자동화의 확대, 생산성의 향상 등으로 연간 900만톤대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후선을 대체하려는 수요가 증가해 세계 조선경기가 회복되어 고용의 확대와 설비의 신증설이 활발해졌다. 1999년 연말을 기준으로 중대형 업체 9개사의 고용인력은 1988년의 4만 9,000명에 비해 크게 늘어 7만 1,400명 수준에 달했다. 건조설비 면에서도 1993년 연말에 설비 신증설을 제한하던 조선산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삼성중공업이 길이 640m급 도크를 신설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중공업, 한라중공업, 대동조선 등이 연이어 도크의 신증설을 추진했다.

우리나라는 1993년 엔화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데 따른 반사이익으로 경쟁력이 높아져, 기존 500만~600만톤 수준에 비해 대폭 증가한 약 950만톤의 선박을 수주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수주국이 됐고, 국내 조선업계의 경영수지도 점차 안정됐다. 특히 1990년대 우리나라의 건조능력과 자동화설비 투자가 확대된 것을 비롯해 일본이 규제완화, 중국의 시설확장 등으로 세계 건조능력이 증가하면서 비교적 높은 발주량에도 불구하고 1993년을 정점으로 신조선 선가는 하락세를 보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국가 전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외환위기 때 원화의 약세가 국내 조선산업이 가격경쟁력을 일거에 획기적으로 높이는 요인이 됐다. 한라중공업이나 대동조선의 경우 설비투자를 위한 차입금이 경영부담을 가중시켜 부도났고, 대우중공업은 그룹 차원의 경영파탄으로 화의절차를 밟기도 했지만 조선산업 전체 차원에서는 호기였다. 또 세계 조선시장도 연간 발주량이 2,265만~3,648만GT에 이르러 1980년대 수준을 크게 상회하면서 국내 조선업체들은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했다.

1990년대 정부의 조선산업 육성이나 지원정책은 대부분 전체 산업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시행됐다. 1993년 7월 조선산업 합리화조치 해제를 계기로 조선업체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시황이 호황이 될 것으로 예상해 대규모 도크 건설에 투자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전후한 조선업계의 1단계 구조조정에서는 IMF관리체제 이전의 그룹별로 비용절감, 조직정비, 생산성 향상 등에 초점을 맞춰 통폐합 작업이 이루어졌다. 2단계 구조조정은 업종 전문화를 근간으로 과잉투자 분야의 조정, 관련업계의 재무구조개선 등에 있었다. 조선산업은 과잉설비 논란은 있었지만 외화가득률이 높은 수출업종으로 호황상태에 있었고, 평균적으로 2년치 이상의 수주물량을 확보하고 있어 직접적 조정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대형 조선업체들이 대부분 사업 구조조정을 완료하면서 조선업도 재무구조의 변화 등을 겪었다.

현대중공업은 빅딜을 거치며 조선과 해양구조물 사업의 비중이 51.5%에서 53%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대우중공업은 항공기와 철도차량을 정리하고 차량사업부를 대우자동차에 이관했으며, 조선과 기계사업부를 분리 독립하여 조선전업업체가 됐다. 삼성중공업은 선박용 엔진과 발전설비 부문을 정리하여 조선과 해양구조물 분야의 비중이 60.6%로 증가했다. 한진중공업은 철도차량 부문을 조정하고 건설 부문을 합병하게 되어 조선부문의 비중이 약 40%로 낮아졌다.

1993년 합리화조치 해제 후 선박건조설비 확충과 세계조선시황의 호조로 국내 조선산업은 계속 성장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대 중반기 이후 설비가 확충되면서 건조량이 꾸준히 늘어났으며, 1999년에는 916만GT를 기록, 건조량 기준 세계시장 점유율이 30%대에 올라섰다.

한편, 조선산업의 후방사업으로 1992년 광양제철소 4기 설비가 준공되면서 철강산업의 조강생산능력은 2,080만톤으로 세계 3위가 됐으며, 중후판 생산능력은 1995년에 339만톤으로 증가했다. 삼성중공업은 박용엔진 부문에 참여하여 최대 500만 마력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고, 조선산업 호황에 따라 생산실적이 점증해서 2,500만~1억 달러의 수출실적을 나타냈다. 기자재 부문도 부품과 소재 국산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국산 자급도가 80%대로 크게 향상됐다.

2000년대 조선산업 수주, 건조, 수주잔량 세계 1위
EU 조선산업 통상마찰, 고부가가치 선박건조, 친환경 선박기술 대두
   
 
2000년 이후 한국의 조선산업은 수주, 건조, 수주잔량 등에서 세계 조선산업을 선도하게 됐다. 조선산업 생산은 1995년 이후 제조업의 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14.3%의 연평균 상승률을 유지했다. 2003년 기준 선박수주량은 3,240만GT로 세계시장의 43.8%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경쟁 상대이던 일본(31.9%)과 미래 경쟁상대로 예상되는 중국(14.4%)을 크게 앞섬으로써 국내 조선산업은 세계 조선산업을 확고하게 선도하게 됐다.

그러나 EU는 1999년부터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급상승한 것은 한국 정부의 지원때문이며, 이에 따라 EU조선업체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2002년 한국을 WTO에 제소했다. 통상적으로 고용효과가 크고 방위산업의 성격이 강한 조선산업은 경쟁력을 잃더라도 보조금을 지원하면서라도 유지해야 하는 산업인데, 이 제소는 조선산업이 WTO라는 국제기구에서 정식으로 제소당한 첫 번째 사례가 됐다.

한편, 우리나라도 EU의 잠정보조금이 WTO 분쟁해결 절차(DSU) 23.1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으며, 잠정보조금이 근거가 되는 EU차원의 TDM(임시 보호 메커니즘)과 이를 집행하는 회원국의 이행법이 협정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판정을 얻어냈다. 사실 EU의 TDM은 수출신용과 구조조정, 연구개발비 지급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조금 지급을 허용한 법적 장치로서 회원국들은 집행법령을 통해 직접 보조금을 제공해왔다. WTO의 판정은 과거 외환위기 때 단행된 국내 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이 보조금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판단이 됐다. 이에 따라 보조금 때문에 선가가 하락해 자국업체들이 피해를 봤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2000년 이후 조선산업만을 특정 지원하는 정책은 WTO의 규정에 저촉되어 시행할 수도 없으나 기초기술 성격이 연구개발은 조선산업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산업 전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초 기술이므로 정부차원에서 지원되고 있다. 2004년 기준 조선산업의 R&D 지원은 차세대 LNG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화물적재 용기 기술개발을 비롯하여 수출보증보험, 세제 지원, 인력개발지원, 지역진흥사업 등이 있다.

국내 조선업체들은 199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이루어왔다. 1990년 10월 동해조선(주)는 한진중공업에 흡수합병됐으며, (주)부산수리조선소도 1990년 10월 한진중공업에 흡수합병, 코리아 타코마조선공업(주)도 1999년 3월 한진중공업에 흡수합병 됐다. 신아조선(주)는 2006년 8월 SLS조선(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대동조선(주)는 1998년 법정관리를 받은 후 2002년 1월 STX조선(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현대미포조선은 2006년 울산장생포공장을 준공했고, 대우중공업은 1999년 7월 워크아웃 발표이후 2001년 8월 워크아웃을 졸업, 2002년 3월 대우조선해양(주)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나중공업은 1999년 10월 삼호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99년 11월 현대중공업에 의한 위탁경영을 실시했으며, 2002년 5월 현대중공업 그룹사로 편입된 이후 2003년 1월 현대삼호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2000년대 초 조선업계가 사상 최대 호황기를 누리며 목포·해남·진도 등 서남해안지역에서는 중소형 조선소들이 속속 출현했다. 2006년 C&그룹은 선박 수리·건조, 플랜트, 건설기계·장비 제조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C&중공업을 설립하고 조선업에 본격 진출했다. 당초 중소형 조선업체 인수를 추진했던 C&그룹은 방향을 바꿔 조선소를 새로 짓기로 결정하여 전남 목포에 1만평 규모로 조선소 건립을 추진했다. 대주그룹 계열사인 대한조선(옛 신영조선)도 전남 해남 화원에서 중형 조선소를 건설하고, 신안중공업도 신안지도에 둥지를 마련하였으며, 고려조선도 신안중공업과 비슷한 일정으로 진도에 조선소를 건립했다. 선박용 블록을 생산했던 성동조선해양은 신조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로 변신하여 육상건조공법을 도입, 세계 10위의 조선소로 발돋움하게 됐다. 2002년 선박용 메가블록 제작을 시작으로 2005년 신조선업체로 전환한 SPP조선은 2010년 11월 100척의 선박을 인도하며 중형조선소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의 여파로 2005년 이후 설립된 8개 신생 조선사를 포함하여 중소조선소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2009년 1월 금융감독당국과 채권은행들은 19개 중소 조선사의 신용위험평가를 실시한 결과 C&중공업을 D등급으로 퇴출시키고, 대한조선과 진세조선, 녹봉조선 등 3개 조선사는 C등급으로 워크아웃이 결정됐다. 이후에도 채권단은 2009년 3월 2차 구조조정 명단을 발표, YS중공업을 퇴출 등급으로 판정하고 세코중공업과 TKS에 대해서는 워크아웃을 진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전남지역에서는 C&중공업이 퇴출되고, 대한조선과 여수의 YS중공업, 영광의 TKS조선, 목포의 세코중공업이 워크아웃 절차를 밟게 됐다. 2010년 6월 금융위원회는 16개 조선소를 대상으로 세부평가를 진행하여 3차 구조조정 대상을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명단보다는 워크아웃 대상인 C등급에 1개사, 퇴출절차를 밟는 D등급으로 2개사를 선정했다. 중소조선소들은 금융위기 이후 선박 수주량이 급격히 감소했으며, 구조조정 절차에 따라 회생계획을 마련하거나 퇴출됐다.

중소조선 침체, 대형조선 고부가가치선박·플랜트 집중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며 국내 조선산업은 2010년 조선업 경쟁력을 나타내는 3대 지표(수주량, 수주잔량, 건조량) 모두에서 1위 자리를 중국에게 내줬다. 2007년 당시에는 중국이 10년 이후에나 따라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으나 금융위기를 거치며 중국이 ‘국수국조’를 내세우며 조선산업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사업다각화를 통해 대형 선박수주와 LNG선박, 유조선, 해양플랜트, 풍력, 태양광 부문에 집중해 나가고 있다. 국내 대형조선소들은 2007년도 해양사업부문의 수주비중이 25.2%에 불과했으나 2011년에는 대형 조선사의 수주목표 중에 65.7%를 차지할 정도로 사업 포토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특히 국내 대형조선소들은 중국이 원가경쟁력을 확보함에 따라 2000년 후반기부터 해외조선소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현대미포조선은 1999년 4월 베트남 국영조선소와 합작으로 현대비나신조선을 설립, 수리조선을 시작하여 2008년 1월부터 신조사업을 시작했다. 대우조선은 1997년 루마니아정부와 합작으로 망갈리아조선소를 설립하고, 중국 산동지역에 두 번째 해외법인인 산동유한공사(DSSC)를 설립하여 조선용 블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중공업도 1997년 중국 저장성 닝보에 블록 생산기지를 만들었고, STX조선은 중국 다롄에 생산기지를 마련하여 신조선박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진중공업도 2008년 필리핀 수빅만에 수빅조선소를 건립하여 신조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세계 1위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은 2010년 12월 현재 조선 및 해양플랜트 분야에서 총 80척을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은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익성 위주의 수주전략을 펼치면서 2010년에는 선박부문의 수주실적이 사실상 전무했다.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해양플랜트 위주의 수주전략을 펼쳐 2010년 2월 노르웨이에서 11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원통형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를 수주하고, 14억 달러 규모의 미얀마 해상가스전 플랜트 등을 수주했다. 또 2010년 말 독일 최대 컨테이너선사인 하팍로이드사로부터 1만 3,1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0척을 총 14억 5,000만 달러에 계약하기도 했다. 삼성중공업은 2010년에 대만 에버그린사로부터 8,000teu급 컨테이너선 20척을 20억 달러에 수주했으며, 2010년 말에는 드릴쉽 3척을 연달아 수주했다. 1996년 미국 듀퐁그룹의 코노코(CONOCO)사와 유전개발 전문업체인 R&B사의 컨소시엄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심해유정 개발용 드릴쉽을 수주한 삼성중공업은 1998년 9월까지 전 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쉽 12척 가운데 7척을 수주했고, 2011년 3월 현재에는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쉽 63척 중에 삼성중공업이 34척을 수주하여 54%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2009년 16억 달러로 전체 43%이던 해양부문 수주액이 2010년 52억 4,000만 달러(전체 수주액의 48.3%)로 증가했으며, 특수선박도 2010년에 14억 6,000만 달러를 수주하면서 전체 13.4%를 달성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은 2006년 처음으로 드릴십을 수주하여 2011년까지 총 15기를 수주했다.

STX그룹은 2010년 10월 유럽선주로부터 1만 3,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수주하고 STX다롄에서도 6,500teu급 컨테이너선과 펄프운반선, 벌크선 부문에 신규 수주를 늘려나가고 있다. 특히 해양플랜트 부문에서는 2007년 ‘테크닙(Technip)프랑스’社로부터 심해용 해저파이프 설치 플랜트를 시작으로 노블드릴링홀딩사로부터 드릴쉽을 수주하며 해양플랜트분야를 적극 공략해 나가고 있다.

국내 조선산업은 2010년 선박과 조선기자재 수출액이 2009년 대비 약 10% 증가한 498억 달러를 기록했고, 수주금액도 2009년대비 138% 증가한 306억 달러로 중국보다 24억 달러가 많아 세계 1위를 유지했다. 조선업계는 중국이 양적으로 한국을 추월했지만 고부가가치 선박과 해양부문에서는 아직 기술적으로 부족하다고 전망하고, 전 세계적인 환경기준 강화와 연료절감 추세에 따라 대형 선박과 친환경 선박 위주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비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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