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눈부신 발전, 세계 5위권

 

 

 
 

1970년대 이전 63년 ‘항만운송사업법’ 제정
다양한 하역장비 도입

1879년 부산항의 개장을 시작으로 전개되어온 우리나라 항만역사는 태동부터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 우리나라 고난의 시기를 함께했다. 1945년 해방 후, 이른바 ‘가대기’작업 및 목도작업 등 원시적 형태의 하역작업 시대를 지나 1950년 6·25 전쟁 후에는 군수물자 급증, 복구 및 구호물자 급증, 문경 시멘트공장 및 나주 비료공장 건설에 따른 기자재 등 수입물자 급증으로 항만하역 수요가 늘어났다. 이 시기에는 항만하역사업이 성립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50톤급 해상크레인 등을 도입했으며, 중량물 등의 하역은 미군의 장비를 이용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르러 ‘제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무역화물이 크게 증대하고, 대단위 공장이 속속 건설됨으로써 하역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또한 1963년 9월 19일에는 ‘항만운송사업법’이 제정되었다. 이 항만운송사업법은 항만운송 질서의 확립과 항만운송업체의 건전한 육성 및 이용자에 대한 공익증진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이 법이 시행됨에 따라 종전의 등록제가 면허제로 전환되어 소정의 면허요건을 구비한 사업자에 대해서만 면허증을 교부하게 되었다. 이로써 항만하역업체가 정돈되어 장비의 도입을 서두르게 되었다. 20톤급 육상크레인과, 7톤급 지게차 및 30톤급 트랙터 등 다양한 하역장비가 이 시기에 도입된 것. 그러나 항만하역사업은 그 사업규모가 여전히 영세하여 경영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한편, 1967년 항만의 지정·개발·관리 및 사용에 관한 사항을 정해 항만 건설을 촉진하고 항만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항만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1961년에는 도선법과 개항질서법이 마련되어, 항내에서의 선박 입·출항, 항법, 위험물 조치는 물론 도선에 관한 사항을 규정했다.

 

1970년대 항만청 신설, 부산·인천 컨 전용부두 준공, TOC제도 일부 시행
1970년대의 항만산업은 최대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시설과 장비만 갖추고 있으면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호황기였던 것이다.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수반된 수출입화물의 급증, 중화학공업 공장의 건설 붐, 플랜트 등 수출화물의 중량화 추세, 본격화되기 시작한 컨테이너화에 따른 사업분야 확대, 유통기술 축적에 의한 해외진출의 개척 등으로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다. 또한 300톤급 육상크레인, 45톤급 지게차, 60톤급 트레일러, 50톤급 스트래들 캐리어 등이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특히 1970년 2월 대한통운과 한진상사가 각각 미국의 컨테이너 선사 Matson, Sea-Land와 국내 총 대리점 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3월 1일에는 부산항에, 4월 2일에는 인천항에 처음으로 컨테이너선이 입항했다. 이후 컨테이너 운송은 해마다 100% 이상의 증가를 보였으며, 1974년에는 인천항의 전면 도크화에 따라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준공되었고, 1978년에는 부산항 제1단계 개발 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개장되었다.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는 5만톤급 1선석을 포함해 5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연간 232만톤, 약 27만teu의 컨테이너 하역능력을 갖췄다. 부산항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는 5만톤급 2선석에 4기의 갠트리 크레인을 갖추고 연간 50만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로 건설되었다.


비컨테이너 전용부두 건설도 본격화되었다. 1974년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함께 개장된 양곡 전용부두는 5만톤급 선박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축조되었는데, 하역시설로서는 시간당 800톤을 하역할 수 있는 양곡 진공흡입식 하역기 1기, 2기의 컨베이어 벨트 및 15만 톤 저장능력의 사일로를 갖추었다. 이어 시행된 부산항 종합개발 1단계 공사 준공은 전용부두의 건설을 촉진시켰다. 제 5부두에 컨테이너 및 양곡 전용부두, 제 7부두는 석탄 및 고철, 광석, 전용부두로 개장한 것. 부산항 양곡 전용부두는 5만톤급 1선석 및 8만톤을 저장할 수 있는 양곡 사일로와 시간당 800톤을 처리할 수 있는 양곡 하역기를 설치해 연간 200만톤의 처리능력을 갖췄다. 제 7부두에는 연간 석탄 114만톤, 고철 70만톤 및 광석 72만톤을 처리할 수 있는 부두가 개장되었다.


이러한 전용부두의 개발로 항만시설 관리 운영방식에도 큰 전환이 이뤄졌다. 부두별로 그 특성에 알맞는 하역업체를 투입해 부두를 전용 사용토록 함으로써 그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된 것. 이에 부산지방해운항만청은 ‘항만시설사용규칙’ 제5조에 의거해 ‘부산콘테이너부두운영공사’, ‘자성산업’, ‘삼덕사’ 및 ‘천양항운’에 대해 각각 컨테이너부두, 양곡부두, 석탄부두, 고철 및 광석부두에 대한 전용사용을 허가했다. 지정하역회사 (TOC, Terminal Operating Company) 제도가 입안되어 일부 항만에서 시행된 것이다. 이들 부두에 대한 전용 사용을 허가 받은 업자들은 단순한 하역업자로서의 하역 작업만이 아니라 임대 시설의 관리를 비롯해 부두지역의 관리 운영 및 지역내 장치된 화물의 관리 등 부두 운영 주체자로서의 성격도 지녔다. 이는 우리나라 항만시설관리 운영 방식의 전환을 뜻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같은 ‘부두 전용화’는 곧 ‘하역 전문화’를 촉진시켜 ‘항만유통의 신속화’를 가져왔다. 즉 전용부두의 건설과 하역의 기계화로 하역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 항만 시설 발전은 물론 유통비용 절감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8년 통계를 살펴보면 잡화 1만 5,000톤 처리시, 체항시간이 1974년보다 5일 18시간이나 단축되어 총 3만 2,000달러의 운항 경비가 절감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한편, 1970년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1976)이 시행되었던 시기였다. 두차례에 걸쳐 실시한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획기적인 발전 기반을 구축하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정부는, 제 3차 경제개발 계획의 기본정신을 성장과 안정 및 균형의 조화, 자립적 경제구조의 확립, 국토종합개발의 촉진에 두었다. 이에 △부산, 인천, 군산 등 13개 주요항의 중점개발 및 하역능력의 배가 △부산 및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의 건설 △중화학공업의 중점 육성에 따르는 지원항만 시설 축조의 추진 △양곡 및 컨테이너 등 화물별 부두시설의 전용화 및 항만하역의 능률화 등에 목표를 두고 주요항에 대해 집중적으로 항만사업비가 투입되어 항만시설의 확충 및 현대화가 추진되었다.


1976년 3월 13일에는 항만청이 신설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탄생한 항만청의 기구는 해운국, 운영국, 시설국으로 총 3국 22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항만청은 항만에 관련된 업무 뿐 아니라 해운과 조선에 대한 업무를 담당해 실질적인 해사행정의 일원화를 추구했다. 이에 1977년 12월 16일 항만청의 명칭을 해운항만청으로 개칭했으며, 해운항만청의 신설로 항만의 건설과 운영 행정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1980년대 컨테이너부두공단 설립, 85년 부산항
세계 10위권 진입, 컨테이너 처리량 7배 괄목성장

1980년대는 우리나라 항만의 성장과 번영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항만 물동량과 하역수요가 증대되었고, 컨테이너 및 중량화물이 급증함에 따라 하역의 기계화가 더욱 가속되었다. 이와 더불어 하역의 일관작업이 진전되어 종합운송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졌고, 하역장비도 초 근대화되었다. 부두별 지정하역회사 제도(TOC)가 일부 항만에 정착되었고 대기업의 계열화가 증가됨으로써 기업간에 경쟁이 유발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에 착수한 1960년대의 국제적 추세는 선박의 대형화가 이미 이루어져 일반 화물선의 평균 크기가 2만톤, 원자재 전용선들은 5만톤에서 10만톤급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항만 시설은 부산항을 제외하고는 1만톤급 이상이 항행, 접안, 하역할 수 있는 시설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을 거쳐 1980년대에 다다르면서 항만 시설의 확충이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1977년에 10만 중량톤급 선석이 포항항에 등장하는 등 1977년 우리항만의 접안 능력은 133척에 달했으며, 1980년에는 1만 중량톤급 이상의 선석이 59개로 늘어나는 등 총 접안능력이 191척으로 늘었다. 1981년에는 10만 중량톤급 선석이 포항항에, 5만 중량톤급 선석 1개가 삼일항에 추가되었고 1985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15만 중량톤급 1선석이 포항항에 등장했다. 5만 중량톤급 3개 선석도 인천항에 추가되어 1985년 총 선석은 15만톤 선석 1개, 10만톤급 선석 5개, 5만톤급 선석 20개를 포함 총 254개로 늘었다. 해운항만청 통계에 따르면 전체 접안 능력은 1976년의 117척에서 1985년 254척으로 119.7%가 증가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이후에도 이어져 1986년에는 광양항에 15만톤급 선석이 등장했고, 198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25만 중량톤급 3개 선석이 광양항에 2개, 울산항에 1개 등장했다. 1989년 우리나라 항만의 접안능력을 살펴보면 25만톤급 선석 5개, 15만톤급 선석 3개, 10만톤급 선석 6개를 포함해 총 363개의 선석이 갖추어져 1980년에 비해 172개 선석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역실적도 1980년대 들어 급상승했다. 한국항만운송협회의 자료에 의하면 1977년 항만하역실적은 전국 합계 5,750만톤으로, 부산 2,690만톤, 인천 1,180만톤, 포항 710만톤, 울산 220만톤. 그러나 10년 뒤 1987년에는 부산 7,000만톤, 울산 3,600만톤 포항 3,190만톤, 인천 2,880만톤을 기록해 총 2억 560만톤을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9년에는 총 2억 4,200만톤을 전국항만에서 처리해 1979년 7,950만톤에 비해 3배 가까이 상승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은 컨테이너 분야에서 일어났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컨테이너 화물을 처리한 부산항의 실적을 비교해 보면 1970년대 컨테이너 물동량에 비해 1980년대 물동량이 7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부산항은 1978년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구축하고 50만 7,000teu의 물량을 처리했다. 컨테이너 화물의 비약적인 증가로 1989년도에는 215만 9,000teu를 기록해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이같은 컨테이너 물동량의 증가율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드문 것으로, 1985년의 경우 전체 수출화물 중 컨테이너 화물이 46.1%에 달했다.


1985년도에는 부산항이 처음으로 세계 10위권 컨테이너 항만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BPA 자료에 의하면 1985년 부산항은 총 114만 8,000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해 미국의 롱비치(114만 1,000teu)를 따돌리고 세계 9위 항만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컨테이너 화물은 증가세를 이어가 1986년 153만 3,000teu로 8위, 1987년 194만 9,000teu로 6위, 1988년 206만 5,000teu로 7위, 1989년 215만 9,000teu로 6위를 기록했다. 환적 물동량은 1982년 처음으로 7,000teu를 처리한 이후, 1989년에는 9만 9,000teu를 처리해 꾸준히 성장했다. 대부분의 컨테이너 화물이 부산항에서 처리되었으므로 제2의 컨테이너 항만인 인천항은 1989년 11만 6,000teu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한편, 1989년 12월 30일에는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법’이 시행되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컨테이너 물동량에 대비해 항만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방안이 필요한 시점에 공단의 방식으로 항만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공감에서 발의된 것이었다. 이는 기존의 항만관리 체제에 대한 변화를 최소화하면서도 재원조달 방안을 다각화할 수 있다는 점과 공단의 조직을 쉽게 다른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감안된 결과였다.

 

 
 

1990년대 부산-광양 ‘2 port 시스템’
TOC제도 본격 시행, 99년 세계 4위 컨항만 지위, 부산신항 개발문제 검토
1980년대부터 컨테이너 물동량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처리시설의 부족에 따른 문제가 대두되었다. 1989년의 우리나라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은 237만teu로 그 중 215만teu가 부산항에서 처리되었으나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부산항 5, 6부두의 컨테이너 처리능력은 고작 72만teu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부산항 3, 4부두 등 재래부두에서 이동식 크레인을 이용해 컨테이너를 취급했으나, 이는 정상적인 항만운영이 아니었다.


이에 1989년 설립된 컨테이너부두공단은 부산항과 광양항을 컨테이너 전용항만으로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본격적인 컨테이너 부두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로써 부산항에는 4단계 컨테이너부두 건설계획으로 지정되었던 감만부두를 착공하고 동시에 광양항 1단계 공사를 개시했다. 광양항 1단계 공사는 이미 준공된 1선석을 포함한 4개 선석을 건설했다. 이로써 감만지역에 1988년 4월 세방과 국제통운을 운영사로한 컨부두가 개설되었으며, 이들 부두의 하역능력은 120만teu에 달했다. 또한 1995년부터 신감만부두 부지 조성을 시작해 연간 48만teu를 처리할 수 있는 부산의 5번째 컨테이너 부두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외에도 자성대부두와 신선대부두 확장 공사를 1994년 착수했다. 자성대부두는 미군에서 사용중인 재래부두 1선석을 인수해 1만톤급 1선석의 접안 시설로 확충했으며 1996년 준공되었다. 자성대부두는 1만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185m 안벽을 지녔으며, 연간 10만teu의 처리능력을 더할 수 있었다. 신선대부두는 5만톤급 컨테이너 전용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부두가 존재했으나, 늘어나는 물동량과 포스트 파나막스선 등 선박의 대형화 추세에 맞춰 1선석을 추가하게 되었다. 추가된 1선석은 300m의 안벽과 연간 40만teu의 하역능력을 증강시켰다. 이로써 신선대부두는 총 4개 선석에 연간 160만teu의 하역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1990년대에는 부산신항의 개발문제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미 부산항은 부산항 1, 2, 3, 4단계 개발계획에 의하여 컨테이너부두가 건설되었고, 정부는 광양항 개발계획을 통해 ‘투포트(2 port) 시스템’을 표방했다. 이러한 방침은 부산항은 감만부두의 건설을 끝으로 더 이상의 개발은 하지 않고 나머지 컨테이너 물동량은 광양항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산항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부산항에는 여전히 컨테이너 부두시설의 부족상태가 계속되었다. 여기에 부산항은 컨테이너 물동량의 두자릿수 성장이 계속되면서 국제 허브항의 명성도 얻게 되었다. 이에 해양수산부는 1994년 4월에 부산시 강서구와 진해시 용원동 및 가덕도 북서안 일원에 새로운 항만을 개발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산신항만 개발계획의 추진의 특징은 개발계획이 양적·질적으로 방대한 규모의 개발계획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자본을 유치해 민자로 건설하기로 한 점이었다.


이와 같은 방침이 정해지자 정부에서는 ‘가덕 신항만 기본계획’의 용역에 착수했고, 용역결과에 의해 1996년 2월 ‘가덕 신항만 민자 유치 기본계획’을 고시했다. 이어 1996년 7월과 9월에 각각 부산항 기본계획(가덕신항만 개발계획) 및 민자 유치시설 기본계획을 고시하고, 민관이 합동으로 설립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1997년 삼성중공업, 삼성SDS 등 삼성그룹 5개사와 현대건설, 동아건설, 한진해운 등 24개 업체가 참여한 민간단체 컨소시업이 구성되어 ‘부산신항만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외환위기로 공사의 진행이 더뎌졌고 결국 2000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1990년대는 부산항이 ‘국제 무역 허브항’으로의 위상을 충실히 다진 시기였다. 부산항은 1990년 234만 8,000teu로, 세계 7위를 기록한 후, 1991년부터는 세계 5위 항만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93년에 300만teu, 1995년 400만teu, 1997년 500만teu를 잇따라 돌파한 부산항은 1999년 644만teu를 기록해 세계 4위의 항만으로 발돋움했다.


광양항은 정부의 ‘투포트 시스템’에 따라, 1993년 1월 18일 광양항 1단계 컨테이너부두 공사가 시작되었다. 1997년 준공된 광양항 1단계 컨테이너부두는 1,400m 안벽에 5만톤급 4척이 접안할 수 있고, 연간 160만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또한 1995년 광양항 2단계 컨테이너부두 개발계획이 확정되어 착공되었다. 계획에 따르면, 광양항 2단계 컨부두는 5만톤급 컨테이너 4선석, 2만톤급 4선석 및 관용선 부두 400m를 조성해 연간 144만teu를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같은 계획은 장기적으로 광양항에 20개 컨테이너 선석을 확보함으로써 부산항과 더불어 양항체제를 갖추어 나간다는 의지였다.


이외에도 PSA가 인천컨테이너터미널 건설에 대한 허가를 1997년 획득해 국내 최초의 민자유치에 의한 외국인 투자 터미널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같은해 평택·당진항에는 3만톤급 3선석의 잡화부두가 완공됨으로써, 인천항과 더불어 수도권의 수출입화물을 분담하는 중부지역 무역항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1997년 부두운영회사제도(TOC, Terminal Operating Company)가 처음 시작돼 부산항과 인천항에 민간기업의 자율적인 부두운영이 시작됐다. TOC제도는 항만시설에 대한 민간기업의 참여를 촉진시켜 부두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물류비의 절감을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되었다. TOC 제도의 도입으로 시간당 하역생산성이 평균 13.7%의 향상을 가져오는 등 국내 항만경쟁력에 큰 역할을 했다. 항운노조 상용화 시도도 본격화되었다. 1997년 TOC제도의 도입으로 상용화를 시도했지만 항운노조의 반발로 무산되었고, 1999년 노사정 대화를 통해 노무공급체제 개편 논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용화 시행은 2005년이 되어야 이루어졌다.
 

 
 

2000년대 민영화 및 GTO 국내진입 가속화
중국항만 성장, ‘항만노무상용화’ 시행, 항만공사법 제정 BPA, IPA 등 등장, 06년 부산신항 개장

1980년대 전반기 미국에서 시작된 ‘규제완화(deregulation)’는 국제교역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기 시작해, 1990년대 말 해운동맹의 소멸 등은 물론 개별 국가들의 해운항만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항만운송사업과 부대사업들이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어 외국인들도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었고, 글로벌 터미널운영사들도 국내로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화’의 바람을 따라 항만에선 ‘민영화’라는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항만공사제도는 항만의 공공성과 기업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스템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1960년대부터 여러차례 검토되었던 항만공사제도 시행은 계속 지연되다가 2003년에 이르러 성사되었다.


2003년 5월 29일 ‘항만공사법’의 제정은 본격적인 항만공사 체제로의 전환을 이뤄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 법안의 공포로 부산항만공사(BPA)가 2004년 1월 1일 출범했고, 2005년 7월에는 인천항만공사(IPA)가 설립되었다. 뒤이어 2007년 7월에는 울산항만공사(UPA)가 출범했다.


항만의 민영화추세도 일반화되었다. 특히 정부가 1998년 사회간접자본시설(SOC)의 민간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최소운영수입보장제도(MRG, Minimum Revenue Guarantee)를 전격 도입하면서 항만의 민간투자도 활성화되기에 이르렀다. MRG 제도란 사회간접자본시설 민간투자사업과 외국인 투자유치 확대를 위해 도입한 제도로 민간이 전담하던 수요예측의 리스크를 정부가 일부 부담하는 제도이다. 즉, 사회기반시설 완공 후에 실제수요가 예측치에 미치지 못한 경우 일정기간 동안 국가가 일정비율(80~90%)까지 보전해주는 제도였다.


이를 통해 부산신항 1단계, 목포신외항 1-1, 2단계, 인천북항 1-1, 2-1단계, 인천북항 일반부두, 울산신항 1-1단계, 포항영일만 신항 1-1단계, 마산항 1-1단계, 평택항 다목적부두가 MRG 제도를 통해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 제도는 ‘국민의 세금을 민자부두에게 퍼주고 있다’는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2006년 폐지되었다. 이에 2006년 협약이 체결된 광양항 여천 일반부두, 평택항 양곡부두 등 6개 부두는 MRG 조건 없이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민영화 추세와 더불어 글로벌터미널 운영사(GTO)들의 국내 진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싱가포르항만공사의 자회사인 PSA는 인천남항(100%), 부산신항(16.23%), 부산북항과 광양항(HPH 20% 지분소유로 인한 간접진출) 등에 진출했다. HPH도 부산 북항 자성대(100%, 현대상선으로부터 매입), 광양항 1선석과 KIT(한국국제터미널 88.9%)를 운영하고 있으며, DP월드는 부산신항만 1단계의 29.6% 지분을 확보했다. 또한 선사형 GTO인 에버그린은 자회사인 Uniglory를 통해 2002년 신감만부두 지분 30%를 확보했다.


부산신항도 6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6년 1월 19일에 1-1단계 3선석이 준공되어, 본격적인 신항시대를 맞았다. 여기에 2009년 한진해운신항만 터미널, 2010년 현대상선터미널이 연이어 준공되어 부산신항은 컨테이너부두 17선석, 다목적부두 1선석등 18선석과 연간 605만teu의 하역능력을 갖췄다. 그러나 신항의 개장으로 인해 기존 부산 북항과의 경쟁체제가 심화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이전까지 항만 물동량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컨테이너 화물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부산항은 2000년 754만teu를 처리해 홍콩, 싱가폴에 이어 세계 3위 항만으로 도약했다. 이후에도 부산항의 물동량은 2001년 807만 2,000teu(3위), 2002년 945만 3,000teu(3위)를 기록했으며, 이후 중국항만의 강세로 5위로 내려앉았으나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특히 2003년도에는 부산항 최초로 1,000만teu를 돌파해(1,040만 8,000teu) 동북아 메가허브 포트로의 위상을 높였다. 2008년 하반기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2009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지난해(2010년)에는 1,419만 4,000teu를 기록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중국항만의 성장은 부산항의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기 칭다오항의 개장으로, 중국항에 대한 모선 기항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부산항의 환적 물동량 증가세를 둔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아가 경인지역의 컨테이너가 중국항만에서 환적되기도 하는 등 우리항만의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2005년부터 부동의 1위를 유지했던 싱가폴 항만이 2010년 처음으로 상하이항에게 1위 자리를 내줬으며,중국 닝보항, 광저우항, 칭다오항은 최근 몇년사이 부산항의 5위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한편 항만 노무인력 체계에서는 100여년간의 관행이 깨지고 ‘항만노무상용화’가 전격 도입되었다. 2007년 1월 1일 부산항 항만상용화를 시작으로, 9월에는 평택항, 10월에는 인천항에서 항만노무 상용화가 시행된 것. 이에 따라 부산항은 2007년 1월, 345명의 희망퇴직을 받고, 879명을 상용인력으로 채용했다. 인천항은 17개 사업장에서 하역사 직원으로 재고용된 982명과 일용직 노동자 504명이 투입되었고. 평택항은 인력풀 50명과 비하역분야 53명을 포함한 298명이 채용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시행된 항만상용화는 2009년 경제위기에 따른 항만물동량 감소와 운영사 경영난, 노동자들의 불만 등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우리나라 항만산업은 1879년 첫 개항이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며 부산항을 세계 5위 항만으로 발전시키는 등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급격히 변하고 있는 세계정세와 국제 항만산업의 이슈에 대한 대응에 따라 ‘우리나라 항만이 더욱 성장할 것인가, 도태될 것인가’를 판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세계 1위 항만인 상하이항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는 중국항만의 초강세와, 국내 항만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항만배후단지의 활성화, 적정 항만시설 개발과 하역요금 덤핑문제 해결, 선박 대형화 및 대형 크루즈선 입항문제 해결, 부산북항 및 인천내항의 재개발 문제, 그린항만 구축 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국내 항만 경쟁력 제고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