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세계 25위권에서 5위 ‘선진해운국’ 우뚝

 

 
 

근대해운의 태동과 진흥(광복이후-1960년대)
해운진흥법 웨이버제 법제화 ·선원법 제정
‘전용선대’ 도입

한국의 근대해운은 구한말 1880년대에 상선회사 ‘이운사’ 설립으로 태동했고 이후 몇몇 상선 회사들이 설립됐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져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 상선회사들이 우리 해운시장을 거의 독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1945년)이후부터 1950년까지가 한국의 외항해운산업 생성기라할 수 있으며, 조선우선 인수와 선원양성의 움직임으로 시작된 재건운동이 우리나라 현대해운의 출발점이었다. 이때 한국해양대학교가 설립(1946년)되어 한국해운 성장을 이끌 해기사 양성의 중책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목포해양대학교의 전신인 목포상선고등학교도 1950년에 설립되었다. 50년대는 전시에 군수물자와 원조물자 운송증가로 해운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이를 전후로 세계적인 해운호황도 한국해운의 활기를 촉진했다. 해운업계에는 대한해운공사를 비롯한 선사들이 생겨나고 54년 대한선주협회와 57년 대형선주협회가 설립됐으며, 60년에는 이 두 단체를 통합해 한국선주협회가 탄생했다. 


1960년대 정부는 해운을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해운의 진흥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60년대에 해운진흥법이 제정(67년)되어, 세제지원과 화물유보제도가 시행되었다. 65년 교통부 고시로 시행된 웨이버제도(국적선불취항증명서) 법제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69년부터 73년까지 5년간 외항해운 장려금과 외항정기항로 결손 보조금이 일부지원되는 가운데 선복의 증강사업이 추진됐다. 국취부나용선(BBC/HP)이 도입된 것도 이 시기이며, 국내조선소에서 선주 10% 융자 50%, 보조금 40%의 비용으로 대형 외항선박이 국내 최초로 건조되어 한일항로에 투입됐다. 


그러나 선복증강사업이 계획만큼 성과를 실현하지 못하자 선주협회 주최로 선박도입추진위가 구성되어 중고선을 도입시 면세조치를 건의해 66년 2,700톤이상 선박이 면세물품화 되었다. 이 시기 선복증강이 시동되면서 장려금과 노후선대체건조자금 등 해운금융제도가 태동했다. 이러한 선복증강 노력으로 62년 10만톤 선복·120만톤 수송물량에서 66년에는 23만톤의 선복·270만톤 수송물량, 69년에는 86만 6,738톤·900만톤 물량 등 보유선복과 수송물량이 크게 늘었다.


60년대는 선원법이 제정(62년)된 시기이기도 하며, 포스코의 창립과 함께 철광석 수요가 발생해 60년대말 ‘전용선대’가 도입되었다. 아울러 대한해운공사의 완전 민영화가 1968년에 이루어졌다.

성장기-70년대
세계 25위 ‘중진해운국’ 대열, 해운항만청 창설
1,2차 세계 오일쇼크 해운먹구름
외항해운육성방안으로 선복증대, 계획조선 시작

1970년대는 한국해운의 선복증강 시기로 성장기에 해당한다. 국적 외항선사가 운임수입 1억달러를 돌파(72년)했으며, 산업자본의 해운업 진출이 붐을 이루던 시기이다. 국제그룹과 대우그룹, 동양그룹, 삼익주택, 현대그룹, 한진그룹, 동아그룹, 한라그룹 등 국내 굴지의 그룹사들이 외항해운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해운불황에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좌초됐다.


70년대는 우리나라 해운업계의 3대 위기중 첫 번째 위기국면인 세계적인 ‘오일쇼크’가 (73년,78년) 발생한 시기다. 첫 오일쇼크 당시 국적선복은 168만톤·수송물량 2,000만톤·운임수입 1억 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국제해운시황의 침체 속에서 국적선사들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시기에 해운업계는 비교적 안정된 성장을 시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해운업의 장기발전을 위해 교통부가 ‘외항해운육성방안과 추진대책’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74년 해운진흥장려금은 폐지되고 정부의 육성방안이 일부대형 선사의 중점육성안이라며 업계가 강력하게 반발했고, 해운조성시책의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해운육성방안이 처음으로 검토됐다는 점에서 우리 해운사에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풀컨선이 75년에 대한해운공사에 의해 도입되었고, 계획조선사업도 같은 해 제 1차사업 시행에 들어갔다. 76년에 해운항만청이 창설되었고, 이 때 한국해운의 외항선복량은 300만톤을 넘어서 세계 25위의 중진 해운국 대열에 합류했다. 정부는 이 시기 ‘해운조선종합육성방안’을 확정하고 계획조선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계획조선사업은 국적 외항선사들이 선박을 확보하는 주요수단으로 이후 1993년까지 18년간 활용되었다.


국제해운협력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다. 79년 수차례의 계획조선사업으로 획기적으로 선복량이 증가해 1979년 외항상선대 선복량은 467만톤·8,550톤 수송·12억5,000만불 운임수입을 기록하며 크게 선복과 운임수입의 성장세를 실현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 이후 세계적으로 닦친 해운불황이 한국해운업에도 먹구름을 몰고 왔다.

 

구조개편기-1980년대
해운불황으로 ‘해운산업합리화’조치
63개 선사 20개 그룹선사로 재편
초대형선사 등장 말기 흑자전환과 대외개방

세계경제와 2차 오일쇼크 여파로 한국해운업계는 기록적인 선복증강을 이루었지만 80년에는 대내외 해운경영환경이 변하면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해운업계가 자력으로 불황을 극복하지 못하자 정부는 83년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을 마련해 추진했다. 82년 당시 해운업계의 운항수지적자는 1,024억원이었으며 일부선사가 도산했다. 각종 운임지수가 폭락하면서 ‘계선점’을 운운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간 감면됐던 해운관련 세제(법인세, 지방세등)가 과세와 감면율 축소로 이어지자 해운업계는 ‘불황’과 ‘조세부담’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같은 시기 정부가 ‘해운산업육성대책’ 수립과 함께 추진한 해운산업합리화 계획에 따라 해운기업들은 통폐합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실현가능성에 대한 여러 논란 끝에  동영해운과 한진해운, 호남탱커를 제외한 66개선사가 합리화조치에 참여키로 해 63개사를 대상으로 17개 그룹이 형성되었다.

 

당시 합리화선사를 그룹별로 보면 △원양항로는 범양상선, 현대상선, 고려해운, 두양상선, 대한해운, 대한선주, 대양선박, 조양상선 등 8개그룹 △동남아항로의 경우 동남아해운, 세양선박, 오성해운, 조양근해상선 등 4개 그룹 △한일항로는 동진해운, 신라해운, 한일해운, 남일상선 등 4개그룹 △특수선그룹은 한국특수선이 형성됐다. 이중 범양상선, 고려해운, 세양선박, 대양선박, 대한해운, 대한선주 등 6개 그룹이 합병선사이고 나머지 11개그룹은 2년뒤 흡수합병을 전제로 참여선사의 보유선박을 수탁운항하는 운영선사그룹이었다.

 

보양선박과 선일상선, 한림해운, 삼원선박, 성운물산, 중앙상선, 범주해운, 유공해운, 서진해운 등 9개사가 계열사로 참여했다. 불참 3개사를 포함해 20개사로 정리된 합리화 참여선사들은 등록세와 취득세 등 677억원의 조세감면 혜택과 연간 3,700억원 규모의 선가원리금상환액을 유예받아 자금난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실무작업 추진과정에서 진통을 겪으며 운영사로 참여키로 했던 삼미해운이 보유선박을 모두 범양상선에 매각하며 해운업을 접었고, 진흥해운과 동호선박, 해영상운 등도 이 시기에 도산했다. 국제해운과 흥아해운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84년 11월 대양선박을 마지막으로 17개 그룹선사에 대한 신규면허가 발급되었다. 그러나 통폐합작업은 부분적인 이합집산 과정을 거치며 19개 선사가 해운업을 정리했고 한일항로 운영선사그룹이 재조정되어 당초 17개 그룹선사에서 20개 그룹선사로 재정비되어 85년말 2년간의 해운합리화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1988년말 외항해운업계는 63개사가 20개 그룹선사로 정리됐다.


해운합리화조치를 계기로 범양상선과 현대상선 등 외항해운업계에 초대형(당시개념)선사가 등장했고 한진그룹과 현대그룹을 제외한 그룹사들(삼미그룹, 동아그룹, 쌍용그룹, 한양그룹, 미원그룹, 대농그룹, 진흥그룹)이 선박매각과 흡수합병, 폐업 등을 통해 해운업을 정리했다. 


합리화조치가 마무리된 85년은 계획조선제도가 도입 10년을 맞은 해로서, 제 10차 계획조선결과 예년보다 4배가 증가된 물량이 확정되어 자금지원이 이루어졌다. 대폭적인 계획조선 지원은 포항 2제철소 건설로 증가한 선복수요가 작용했다. 계획조선의 업무는 해운항만청 소관에서 88년 산업은행으로 이관됐다.
70년대말부터 시작된 해운불황은 87년까지도 크게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벌어진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투신자살은 해운업계를 넘어서 온나라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해운계 비사’였고, 범양상선은 은행관리 하에 들어갔다. 이 시기 부실로 대한선주(대한상선)가 한진그룹에 인수돼 ‘역사속의 기업’으로 남게된 것도 해운계의 ‘큰 사건’이었다. 88년 발생한 동원실업의 수입물품 사취사건인 LG위조 사건은 국적선사와 국내 선박대리점이 연루된 또하나의 대형사건이었다.


80년대는 제도적으로 선원제도의 근대화·합리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한국시장에 대한 선진해운국들의 개방압력이 거세진 시기이다. 한국 해운시장의 개방은 한미간에 먼저 이루어졌다. 한국내 미국선사인 시랜드의 한국지사 설치가 89년에 허용되었고, 이를 기화로 대외개방 문제는 한국해운업계의 현실이 되었다. 북방해운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한중간 직항로가 89년 6월 15일 처음 개설되었고, 한소(現러시아)간 직항로 개설도 논의가 시작됐다. 아울러 정부는 합리화조치의 성과를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선사의 자율성 확대, 국내 건조 국적취득나용선(BBCHP) 허용, 해외신조선 도입 허용, 소형선의 중고선 도입 자율화, 해운시장 대외개방 등 주변환경 변화에 부합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정책 마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해운업계도 해운정책발전방향을 정부당국에 제안하기도 했다.


해운업계를 흉흉하게 했던 87년말부터 세계 해운경기가 살아나면서 이듬해인 88년 선사들은 정부의 자율정책과 북방해운협력 등의 지원책에 힘입어 불황을 탈출해 국제경쟁력 제고와 경영합리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같은 해 해운업계는 7년만에 흑자전환을 이뤘다. 88년말 외항해운업계의 운임수입은 총 2조 2,519억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업계는 자산규모 4조 1,194억원에 부채규모가 4조 2,227억원으로 부채규모가 자산규모를 초과해 다소 불안한 경영상태였지만 해운업계는 89년에도 2조 3,716억원의 수입으로 흑자를 이어갔다.  


80년대 중반이후까지 불황 속에서 한국해운은 기억하기에도 가슴아린 ‘해운합리화’ 시기를 겪은 끝에 88년이후 ‘격변하는’ 해운의 주변환경에 잘 편승해 흑자경영을 실현했다. 이 시기 해상운송사업법은 해운업법(83년)으로 개정되고, 해운진흥법도 해운산업육성법으로 개정(84년)됐다.

 

 
 

국제화기-1990년대
자율화·개방화 추진으로 세계 10위권 해운국
한중·한소 북방항로 잇따라 개설
세계일주서비스 개시, 외국인선원 승선시대 열어

장기불황을 딛고 일어난 한국해운은 90년대 접어들어 본격적인 ‘대외개방 시대’를 열고 다방면으로 ‘국제화’를 이루었다. 90년에 세계적인 ‘규제완화’의 바람을 타고 우리정부도 해운산업 규제완화(자율화) 추진계획을 확정하고 ‘해운산업육성기본계획’을 확정했다. 당시 업계의 현안은 ‘자율화’와 ‘개방화’였다.


90년대부터는 해운시장을 둘러싼 국제적인 환경변화가 급변하며 해운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해운업계에서는 아시아선주포럼(ASF)이 92년에 결성됐고, 93년에 동남아 6개국이 결성한 AFTA(아세안자유무역지대)가 출범했으며, 남미 4개국이 아순시온협정(91년)을 확인하고 95년 공동시장 발족을 선언했다. EC를 중심으로 유럽통합과 북미자유협정(NAFTA) 체결,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등의 국제사회 움직임이 해운서비스 시장의 개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로인해 외국선사들이 한국시장을 잠식해들어옴으로써 한국해운업계와 정부는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의 다급성과 이를 위한 체질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개방의 거센 파고에 정기선의 웨이버제도가 94년에 전면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자리했다. 90년 중반이후 정부의 해운정책은 ‘보호규제’에서 ‘자율개방’으로, ‘보유선대' 중심에서 ‘지배선대’ 개념으로, ‘자국화물 중심’에서 ‘세계화물 수송 중심’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해운이 개방과 함께 ‘무한경쟁’ 환경을 맞게 되자, 각종 규제는 터진 둑으로 밀려드는 물살처럼 완화의 물살을 탔다.  한국해운은 원양정기선 사업자의 항로확장이 허용됐고 한일및 동남아 면허권이 근해면허권으로 통합되어 사업영역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재래선 정기선사업과 부정기선 사업의 면허구분을 철폐했으며, 부정기선사업자의 LNG·LPG 수송참여가 허용됐다. 또한 선대확보와 관리 자유화가 진행됐다. 95년 외항운항사업 면허는 면허기준을 강화하고 나서 완전개방됐다. 이 때 조양상선의 ‘세계일주항로’가 개설(91년)되었고 한중간 카페리 정기항로가 90년 9월 개설됐으며, 이후 한중 컨항로와 한소항로등 소위 공산국가들과의 해상항로인 북방항로가 잇따라 개설됐다. 이로써 해운업계는 북방해운교류의 진전과 컨테이너 정기선사들의 도약, LNG수송분야의 성과, 남북협력 진전(95년 직항로 개설)을 이루었다. 거양해운이 포스코(舊포항제철)의 계열사로 설립, 삼선해운의 원양항로 면허권을 인수한 것은 91년이었다.


그러나 정기선사들이 증가하고 항로가 개방되면서 국적선사 간의 경쟁이 극심했다. 그 결과 한일항로의 선사중 삼정해운과 장영해운이 줄도산했고, 지중해항로에 세미컨선을 배선하던 보양선박이 사업을 접음으로써 해운업계를 긴장케 했다. 그럼에도 국적외항선사는 92년 5년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4조 1,837억원의 해운수입을 올렸다. 이때 23개선사는 흑자를 실현한 반면 10개선사가 적자를 기록했다.  95년에 한국해운은 외항상선대 규모가 1,000만톤을 넘어서, ‘세계 10위권’ 해운국의 대열에 올랐다. 60년대 걸음마를 뗀 한국해운은 25년만에 100배 기록적인 성장을 실현했다. 세계 10위권 지위는 선진해운국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선원법과 선박직원법의 개정도 추진됐다. 승선평균 임금제와 승선 예비원제도가 90년에 도입되었고 91년에는 한진해운의 선박에 최초로 ‘가족동승’이 성사되어 현재 많은 국적선사들이 선원의 가족동승제를 운영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외국인 선원의 혼승이 부원급에서 성사돼 91년 11월 한국계 중국인 선원이 척당 3인까지 국적선에 승선하면서 국적선에 외국인선원 승선 시대를 열었고 이후 95년 척당 6명으로 확대되며 외국인고용 확대가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90년대를 대표하는 해운계 중요사건(?)의 하나는 해운항만행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발족했고 같은해 ‘바다의 날’ 기념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해수부는 이후 한국해운항만업계의 획기적이거나 선진적인 많은 제도들을 도입, 활성화시킴으로써 해운은 물론 연관산업계 성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해운항만청이 20년의 역사를 해운인들의 기억속에 남겨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해수부의 등장(96년)시기에 해운법은 규제를 더욱 완화하게 된다. 외항해운업도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됐고, 권역별 면허도 폐지되었으며, 정기와 부정기만 구분해 등록하면 되었다. 대신 등록 기준이 적정 수준으로 논의된 3만톤 이상 또는 선박 6척에 1만톤 이상, 자본금 10억원 이상으로 개정되었다. 이 와중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써 해운의 전면 개방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한국해운은 사상 ‘두 번째 위기’를 97년에 맞았다. 우리나라가 외환부족으로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었고, 해운업계는 자금난과 선복과잉, 치열한 경쟁 등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금융의 위기는 아사아 역내와 러시아까지 확산되고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도 위기를 맞아 세계경제가 침체돼 해운업계는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99년 정부가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규정함으로써 해운업계의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신규선복의 확보가 힘들었고 부채율을 낮추고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선사들은 보유선박(86척)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 시기는 해운에 대한 몰이해로 해운업계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역사적 평가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중후반에는 많은 제도의 변화가 계속되었다. 외항화물운송업자 등록요건이 선박 5,000톤이상으로 완화되고 운임공표제가 실시됐으며, 지정화물제도 또한 98년에 전면폐지됐고, 선박도입관세가 철폐(97년) 되었다. 내항화물운송사업자의 면허제가 등록제로 전환된 것도 이 시기이다. 아울러 국제선박등록제도가 실효적인 방향으로 개선됨으로써 등록선박이 급증했다. 시행전년인 98년 36척이던 등록선박이 99년엔 346척으로 늘어난 것. 국적외항선사 보유상선대의 93%가 국제선박으로 등록했다. 당해년도 등록기준 완화와 함께 대양상선, 한성선박, 대한통운, 진양해운, 범한상선, 부성해운, 자원산업 7개사가 외항해운에 진출했고, 이후 2000년대에 등록선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재도약 ‘선진해운국’ 진입과 위기-2000년대
‘해운하기 좋은 나라’정책·호황으로 양적성장
美금융위기 ‘해운위기’에도 ‘세계 5위’

IMF시기 고통과 시련기를 거친 한국해운은 2000년대 접어들어 해수부의 ‘해운하기 좋은 나라’ 조성 기치아래 선진해운국으로 가는 다양한 제도와 환경을 갖추어나갔고, 때마침 다가온 호황을 타고 급성장함으로써 재도약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2008년 하반기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세계경기 침체로 사상 ‘세 번째 위기’를 맞아 또다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도 미치고 있다.


전 세계인을 설레게 했던 밀레니엄시대의 첫해 한국해운은 국제 원유가 상승과 경영압박을 겪어야 했고, 이듬해인 2001년에 우리나라는 IMF에서 벗어났으나 주변환경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 뉴욕 무역센터에 대한 여객기 충돌 테러사건은 사건만으로도 전세계인을 경악케 했지만, 이후 미국의 보안과 안전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세계 해운과 항만물류업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보안및 안전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선적전 24시간 사전적하목록 신고시스템이나, 항만내 화물검색 시스템 등은 미국행 화물을 선적지에서 사전검열하는 체계였다. 이러한 국제해운사회의 선박및 항만, 물류보안 강화는 2000년대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호전되지 않는 해운경영환경 속에 한국 정기선분야의 3대 선사였던 조양상선이 2001년 5월 회사정리(현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고, 같은해 9월 법원은 조양의 파산을 선고해 한국해운의 또하나의 ‘대형사건’이 발생했다. 조양의 패망은 무리한 서비스 확장과 부채율을 맞추기 위한 착실한 구조조정, 경영진의 속사정(?) 등이 그 원인으로 회자되었다. 어쨌든 조양상선 파산시기 즈음 금융감독원은 ‘고부채비율 업종에 대한 부채비율 탄력적용’ 방침을 확정했고 이때부터 부채율 상한은 채권은행의 자율에 맡겨졌다. 같은 시기에 선박 매각시기와 무관하게 양도차익의 과세이연제도가 허용되었다.


제도적으로는 한국해운의 ‘보험인프라’로 설립(2000년)된 한국선주상호보험조합(KP&I)이 꾸준히 성장해 해운위기 상황에서 국적 중소형 선사들에게 해외 P&I클럽의 대안 기능을 하고 있다. KP&I는 설립 10년만인 2011년 보험갱신결과 210개 회원사에게서 872척·1,001만톤·보험료 3,018만불을 달성했다. 제주선박등록특구제도(2002년)를 운영하면서 많은 국적선사들의 국제선박 등록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선복확충을 지원하는 정부의 선박투자회사제도 또한 2002년에 도입됐고, 수출입은행 자금을 이용한 신조선 확보도 실현(2003년)됐다. 이때부터 한국해운은 정부의 정책지원에 힘입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나갔다. 법정관리에 있던 범양상선은 2002년 5월 관리시대를 조기에 종결하고 성장을 위한 운신의 폭을 넓혀갔고 2004년 STX그룹에 인수되어 STX팬오션으로 거듭 태어났다. 


2003년부터는 선대확충과 선원인력 확보에 정책적인 지원이 집중됐다. 외국인 선원의 고용확대가 척당 8명으로 확대되고 이후 조금씩 더 확대돼 외국인 선원 고용확대 노사정 합의(2008년)를 통해 2010년부터 선장과 기관장을 제외한 부원과 사관 선원 모두에 고용자율화가 이루어졌다. 국가필수선대제도 운영(2006년)와 승선근무예비역 병역제도 도입(2007년)은 외국인선원 고용의 자율화와 함께 우수한 우리선원의 확보를 통해 해기전승을 실현한다는 취지에서 해운업계와 정부가 마련한 제도적 장치이다. 


제도적 기반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한국해운업계는 2004년부터 시작된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뒤 ‘중국효과’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 선박투자회사제도에 의해 도입된 선박펀드는 우리선사들의 선복확충에 일조했으며, 2005년에 도입된 선박톤세제도는 선사들이 계획적으로 선복을 확충할 수 있도록 해 한국해운은 세계해운의 주목을 받으며 눈부신 ‘외형성장’을 실현했다. 호황의 초입에서 법정관리에 있던 흥아해운도 관리시대를 졸업(2004년)했다.


ISL통계에 따르면, 한국해운의 지배상선대는 2006년 966척·3,171만1,000dwt로 세계 8윌에 기록됐으며, 2007년에는 1,063척·3,676만dwt로 세계 6위에 올랐다. 2008년에는 1,083척·3,801만5,000dwt로 7위로 한계단 내려갔다가 2009년에는 1,121척·4,436만dwt를 기록해 세계 5위의 지배선단을 갖출 정도로 한국해운의 외형성장은 괄목할만한 수준이었다. 

 
 

 호황기를 맞아 2004년 외항해운업계는 매출 24조 5,312억원·2조 3,53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사상최대의 흑자를 시현했다. 경영호전으로 해운업계는 평균 부채율이 235.9%로 크게 개선됐다. 2005년에도 해운호황은 지속돼 보유선복량(지배선단과는 다름)이 한국선주협회 회원사 기준으로 1,372만톤으로 늘었고, 2007년에는 126개 선사가 1,797만톤, 2008년 164개사 2,138만톤으로 크게 증대되었다. 중국효과는 지속됐고 해외에서는 인수합병을 통해 초대형 선사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규모의 경제’에서 경쟁하려면 국적선사들도 선복을 지속적으로 확충해나가야 했다.


선박펀드는 호황기를 타고 활성화되어 운용사가 여럿 생겨났다. 호황기 선박펀드는 국적선사의 선박확보 금융의 일환으로서 기능을 톡톡히 했다. 2009년 해운위기를 넘기며 구조금융 차원의 캠코선박운용사가 탄생해 국적선박의 헐값의 해외매각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렇게 선박투자회사제도에 의해 인가된 선박규모는 2011월 2월까지 113개 펀드에 6조 8,426억원 규모의 자금이 조달됐다.


2005년과 그 이후 2년이상 해운시황은 고공행진했고, 해운업계는 반신반의하면서 초호황의 분위기 속에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해운계의 호·불황에 대한 金言에도 무감각해진 것같다. 시황은 드라이벌크의 경우 2008년 5월 1만 1,793P까지 올랐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파로 해운시황은 불과 6개월만에 벌크운임지수를 663P까지 곤두박질했다. 세계해운은 공황상태에 이르렀고, 용대선 체인에 걸려있던 선사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국적선사 중 유동성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삼선로직스를 시발로 티피씨코리아, 대우로지스틱스 등이 2009년 잇따라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고, 국내 에너지전문선사인 대한해운도 이들선사보다 뒤늦은 2011년 2월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요청했다. 불황기 파크로드와 씨앤상선, 선우상선, 브라이트해운 등이 파산했으며 이름을 채 알리지도 못한 여러 소형선사들이 개점휴업상태를 지속하다 폐업정리되었다.

 

대형선사들은 회사채 발행과 자산매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금줄 대기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최악의 2009년을 넘기고 해상물량이 금융위기 이전수준으로 회복한 2010년은 다소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선복과잉의 구조적 요인에다 일부지역의 정정불안, 내분, 홍수와 지진 등 시황외적인 요인들이 해운시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벌크운임지수가 3월 16일 현재 1,538수준이다. 호황기 고가에 선박을 확보했던 선사들은 금융위기 발발 3년차를 맞는 지금까지도 LTV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호황기를 거쳐 선복이 크게 확충된 한국해운은 세계 5-6위의 지배선복량을 기록하게 되었고, 해운위기 국면을 지나면서도 그 지위는 유지하고 있다. 2009년 선주협회 회원사는 173개사 보유선복량은 2,380만톤이었으며, 이는 선사들의 자구노력과 ‘국적선의 해외매각 방지’차원에서 정부가 지원한 일부정책에 힘입은 결과이다. 그러나 2011년 해운업계는 또다시 악화된 시황과 주변의 외생변수들에 의해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선사들은 제각기 장기생존전략을 모색하며 해운위기에서 완전 탈출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신사업 창출, 녹색해운, 감속운항, 신규선복 확충 등 개별선사에 맞는 전략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녹색해운은 지속적으로 국제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각종 환경과 안전관련 규제들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적극 부합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에서 대비해야 하는 이슈로 부각됐다.


금융위기가 몰고온 해운위기도 혹독했지만 해수부의 폐지(2008년)는 해운업계에 심리적으로 구심점 상실감을 준 또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바다와 관련한 통합행정을 지향하던 해수부와는 달리 해수부가 해체 흡수된 국토해양부에서 해운정책은 건설과 주택, 교통정책들 속에서 부대껴 존재감이 약화되었다.


해운의 호황과 불황이 극명하게 교차한 2000년대 들어 해적의 활동은 세계 해운계에 큰 이슈로 부각했다. 특히 정정이 불안한 소말리아가 해적활동을 기업화하면서 해적활동은 흉포화 지능화되어 국제사회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국적선박들도 소말리아 해적의 표적이 되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이에 올해초에는 나포된 우리선박을 구출하기 위한 전격작전으로 해적에게서 선박을 구하는 일대사건이 발생, 전국민의 관심을 주목받기도 했다.


한국해운은 길지 않은 40-50년 사이 수차례 위기를 겪으면서도 눈부신 외형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 7-8년동안 체험한 초호황과 극도의 위기는 ‘외형의 확대와 함께 개별선사들의 체질개선을 통한 내실강화와 금융과 선박관리, 해운중개 등 해운연관산업과의 동반성장으로 한국해운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케 했다. 이로써 선사들은 선박관리의 아웃소싱과 장기화물운송과 연계한 선복확충, 신사업·신시장 개척 등 다양한 경쟁력 강화와 생존전략으로 미래를 보장받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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