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치열해지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라는 부제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을 읽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The Hundred Years’ War on Palestine)’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가 쓴 책이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양쪽 모두가 품은 환상을 잠재운 놀라운 책”이라는 평가처럼 팔레스타인 100년 투쟁의 역사요 온몸으로 겪은 전쟁경험이었다. 저자 할리디는 미국에서 태어나 유엔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수석총무를 맡으면서 한국의 서울미국인고등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예일대와 옥스퍼드대에서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 컬럼비아대의 현대아랍연구 교수이자 팔레스타인 연구저널 공동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저서로는 ‘팔레스타인 정체성’, ‘쇠 우리(Iron Cage)’ 등이 있다. 

 

원주민을 희생시키는 급진적 사회공학은 식민주의 정착민 운동이 구사하는 방법으로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이런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외부 열강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수행된 식민주의 충돌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두 민족 집단, 두 국민의 민족 대결로 바뀌었다. 이런 특징의 밑바탕에서 이를 더욱 증폭시킨 요인은 유대인과 많은 기독교인에게 역사적인 이스라엘 땅과 성경의 연관성이 불러일으키는 심대한 공명이다.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교묘하게 얽힌 이런 공명은 시온주의의 필수적인 일부분이 됐다. 19세기 말의 식민주의-민족 운동은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인에게 매혹적인 성경적 외투를 걸쳐 주어 시온주의적 전근대성과 식민주의적 성격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 팔레스타인은 그곳에 정착하러 온 사람들에게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이었다. 영국의 각료가 유대인의 민족적 고국을 창설해 주겠다고 약속한 1917년 밸푸어 선언은 이후 한 세기 동안 팔레스타인의 향방을 결정지은 내용이었으나 그 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정치 사상가 제에브 자보틴스키는 “세계 모든 토착민은 식민화의 위험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있는 한, 식민주의자들에게 저항한다”고 말했는데, 팔레스타인이 하는 행동이 바로 이런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지은 밸푸어 선언부터 2000년대 초반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포위와 간헐적 전쟁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 사건을 둘러싼 100년 전쟁은 식민주의적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역사학자 살로 바론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1917년부터 2017년까지 100년간의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애절한 개념화’에 다름 아니다. 적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고, 역사적 팔레스타인과 그 땅을 둘러싼 서사를 지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에서 지워진 흔적을 복원하는 일이다. 

 

첫 번째 선전포고-밸푸어 선언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전쟁이 시작된 사례가 많이 있다” 아서 밸푸어의 말이다. 1917년 11월 영국 내각을 대표하여 외무장관 밸푸어가 작성한 의미심장한 선언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폐하(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적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당시 영국 정부에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었는지는 지난 100년간 충분히 분석됐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경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1915년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인에게 독립을 약속한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1916년 프랑스와 비밀리 체결한 약속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가 전략적 이해에 의해 아랍 동부 지방을 각자 식민지로 분할하는데 합의한 것이었다. 밸푸어 선언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한 세기 걸쳐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팔레스타인인들은 영국의 통치와 영국인의 특권적 대화상대로 시온주의 운동을 내세우는 것에 맞서며 정치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시도는 무슬림-기독교인 협회의 전국적 네트워크가 계획하여 1919년부터 1928년까지 7차례 개최한 팔레스타인 아랍인 대회였다. 이 대회는 아랍 팔레스타인의 독립, 밸푸어 선언 거부, 다수결원칙 지지, 무제한적 유대인 이민유입 및 토지매입 중단 등을 요구했다. 대다수 사람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바랐지만, 일부는 더 커다란 아랍국가의 일부로 독립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아미르 파이살이 이끄는 정부가 1918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세워지자, 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자기 나라가 이 신생국의 남부에 편입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내세워 군대를 동원, 나라를 점령하고 시리아 이외의 신생 아랍국가들을 몰아냈다. 위임통치령을 비롯한 직간접적 형태로 유럽의 지배를 받던 아랍 나라들이 각자의 문제에 몰두하자 많은 팔레스타인인은 결국 의지할 것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1922년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를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시온주의 운동에 선물이라도 주듯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제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 문구에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민족 한 민족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중동의 여타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제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위임통치령 28개 조항 어디에도 민족적 정치적 권리를 지닌 한 민족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는 말은 없었다. 28개 조항 가운데 7개가 민족적 본거지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시온주의 운동에 특권과 편의를 확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임통치령 제2조에 따라 자치기관이 제공되지만, 이 조항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이슈브에게만 적용되고 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이런 기관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부정됐다. 특히 위임통치령의 핵심조항인 제4조는 경제 사회 영역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과 나라 전체의 발전에 조력하고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공적기구로서 유대인 기구에 준정부 지위를 부여했다. 나아가 제6조엔 위임통치 권력이 유대인 이민유입을 촉진하고 장려할 것도 요구했다. 이후 100년간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인이 끊임없이 다툰 인구와 토지 장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감안할 때 가장 의미심장한 조항이었다. 제7조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시민권을 쉽게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국적법을 마련해줬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남북 아메리카로 이주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법률 때문에 국적 취득을 거부당했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으나 영국이 통치할 때 해외에 나가 있던 팔레스타인 토박이 아랍인들은 국적을 얻지 못했다. 이로써 유대인 인구는 순식간에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배로 커져 1차 세계대전 종전의 6%에서 1926년엔 18%까지 늘어났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하고 몰아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도 차별적 이민법을 제정하자, 독일에 살던 많은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이렇듯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과 시온주의 양자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39년 봄 런던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 아랍 각국의 대표자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의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와 격앙된 여론을 달래기 위해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를 통해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유대인 이민의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히 제한하고, 5년 안에 대의기관을 마련하며,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팔레스타인인의 관점에선 결함이 있더라도 1939년 백서를 수용했더라면 미흡하나마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세계 판도는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가고 영국은 그저 이류 강대국일 뿐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나고 있었다. 

 

두 번째 선전포고-나크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주의 공격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전까지 지역 차원에서 소규모로 역할 했던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중동에 당도했다. 이슈브 내의 지배적 정치인 벤구리온이 이끄는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적 세력 균형의 이동을 선견지명 있게 내다보았다. 1942년 뉴욕 빌트모어 호텔에서 열린 시온주의 회의에서 이른바 빌트모어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전환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시온주의 운동은 미국의 많은 정치인과 여론을 이런 방향으로 유도했다. 당시는 나치가 유럽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홀로코스트가 계속 폭로되면서 국제 여론이 유대인에게 매우 동정적인 분위기였다. 마침내 트루먼 대통령이 전후에 아랍인이 다수인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를 지지한 뒤, 한때 영국의 지지를 받던 식민 기획인 시온주의는 이제 중동에서 새롭게 등장한 미국 패권의 요체가 됐다. 더욱이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한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1939년 백서는 사문화하였다. 영국은 이제 팔레스타인에서 결정적 발언권을 상실했고, 미국이 팔레스타인과 중동 나머지 지역에서 가장 지배적인 외부 조정자로 부상했다. 1947년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넘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 UNSCOP를 만들었다. 유엔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시온주의자들이 양국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며 재빠르게 이런 변화에 대비했으나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인 재조정은 UNSCOP의 활동과 소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 분할을 제안한 다수의견 보고서에서 잘 드러났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인 70만명을 추방한 나크바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됐다.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이 천년이 넘도록 이어진 땅에서 유대인이 실질적 다수를 차지하는 새로운 국가로 바뀌었다. 나크바로 인해 그 땅에서 쫓겨난 수십만 팔레스타인인이 그 후 오랫동안 시리아와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중동지역의 안정을 더욱 뒤흔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신성한 대의를 들먹이며 대변하는 행세를 했지만, 각국의 이해가 얽혀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크바 직후에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에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핵심 아랍국가들의 지지를 끌어내는데 실패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그 후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의해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를 창설한 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 대응으로, 아랍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 이러한 이집트 정부의 시도는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에 의한 대응 성격도 있었다. 이집트가 아스완댐 건설을 위한 세계은행 차관을 미국이 취소한데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영국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1956년 10월 이집트를 전면 침공했다. 2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독특하여 다른 전쟁들이 여러 아랍국가를 상대한 것과 달리 하나의 아랍국가만이 상대였다. 이스라엘과 프랑스 및 영국은 전쟁 전에 비밀리에 세브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939년 백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의 소원한 관계를 끝장내는 계기가 됐다. 놀랍게도 1947~1948년에 이스라엘 후원자였던 미국과 소련이 이집트 편을 들었다. 냉전의 경쟁 관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이 중동에서 손을 잡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삼국은 물러났고,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누가 대장인지 보여줬으며, 이집트의 나세르는 범아랍권의 영웅이 되었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같은 해 11월 가자의 소도시들과 칸유니스와 라파의 난민촌을 휩쓸면서 450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는 수에즈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한데 대한 보복 성격이었다. 1948년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군은 12차례 전면전 규모의 공격을 벌일 정도로 가자 지구는 표적이었다. 그곳은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팔레스타인 정당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를 창설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PFLP는 가장 열렬한 전사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다.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과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도하는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출생지이자 요새가 됐다.

 

세 번째 선전포고-6일 전쟁

1967년 6월 중동에서 6일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초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공군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됐다. 이스라엘 공군은 벼락같은 선제공격으로 상대 전투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대부분 파괴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공중에서 완벽한 우위에 섰으며, 사막에서의 공중의 우위는 지상군에 절대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아랍 지역인 동예루살렘을 비롯한 요르단강 서안, 골란고원을 6일 만에 정복할 수 있었다. 당시는 이른바 아랍의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때로, 이집트가 급진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을 이끌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보수 블록에 맞서고 있었다. 양쪽의 경쟁관계는 예멘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는데, 1962년 예멘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 내전으로 비화하자, 이집트군이 대대적으로 휘말려 6만이 넘는 이집트 병력과 다수의 공군이 예멘 내전에 묶여 있었다. 1966년 시리아에 새로 정권이 들어서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시리아가 제공한 기지를 근거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이 늘어나자 맹주국을 자처하는 이집트도 이에 호응하여 시나이반도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유엔평화유지군 철수를 요구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자극했다. 밸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였다.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한 것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호였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대표 캐러돈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전 이후 아랍 각국과 그의 후견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한 사정을 반영했다. 그 결의안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면 아랍국가와 강화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요르단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 수십년간 직간접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도 실렸다. 결의안 제242조가 아랍국가에게 양자협정과 분쟁의 파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시기는 달라도 아랍 나라들은 미국이 부추기는 가운데 개별적 타협이라는 덫으로 스스로 들어갔고, 결국 단합의 겉치레나 심지어 최소한의 조정도 포기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인조차 결국 결의안 제242조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갔다. 아랍국가들이 결의안 제242조와 양자간 접근을 분쟁 해결의 토대로 받아들이고 몇 년 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도 그 뒤를 따른 것이다. 1967년 전쟁 직후에 호전적인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들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장악하면서 이집트에 치우친 지도부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단체들 가운데 가장 큰 파타의 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장 자리를 유지했다. PLO는 1974년 아랍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로 인정받은 동시에 100개국이 재외공관을 개설하였다. 바로 그해에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연설자로 초청받은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국제연맹과 유엔, 강대국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 끝에 이룬 팔레스타인 역사상 최대의 외교적 성과였다. 팔레스타인의 투쟁목표는 1964년 PLO가 채택한 민족헌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헌장엔 팔레스타인은 아랍 땅이며, 1917년 이전부터 여기에 살아온 이들과 그 후손들만 민족적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이 집단에는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도 포함됐지만, 밸푸어 선언 이후에 이민 온 이들은 포함되지 않으므로 팔레스타인을 떠나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해방을 이루려면 밸푸어 선언과 영국의 위임통치, 팔레스타인 분할, 나크바 이래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사태를 되돌려야 했다. 1968년 파타를 비롯한 저항단체들이 PLO를 장악한 가운데 민족운동은 새로운 목표를 정식화하며 팔레스타인이라는 개념을 유대인과 아랍인을 아우르는 모든 시민을 위한 단일한 민주국가로 천명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이 나라의 동등한 시민이 될 자격이 있다는 선언은 민족운동의 사고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단일한 민주국가 제안은 이스라엘을 민족적 권리를 지닌 한 집단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국가나 시온주의의 정당성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 PLO는 국제사회의 압력 특히 소련의 촉구에 따라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나크바 이래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이 몇 차례 심각한 타격을 입고 난 뒤에야 PLO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에 근거한 두 국가 방식을 받아들였다. 베이루트에서 PLO와 계속 접촉하는 한편, 제네바에서 다자간 중동 평화회담을 준비하던 카터 행정부는 1977년 10월 소련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모든 분쟁 당사자가 참여한다”는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양자간 대화인 캠프데이비드 방식을 채택하여 결국 1979년에 독자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방식은 PLO를 축출하고 1967년에 차지한 점령지를 방해받지 않고 식민화하고, 10년 넘게 교착 상태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류하기 위한 이스라엘 베긴의 고안이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입장에선 이 조약으로 시나이반도를 되찾고, 베긴은 나머지 점령지를 굳건히 지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베긴과 그의 후임자들은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땅이며, 민족적 권리를 가진 팔레스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자치권을 주었지만, 그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네 번째 선전포고-레바논 전쟁

“무방비 상태의 도시와 마을, 주거지, 주택에 대한 공격이나 포격은 금지된다” 헤이그협약 제25조다. 1982년에 이르러 베이루트 사람들은 이미 오랜 전쟁을 겪으며 살아와 폭발소리에 익숙해져 그 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해 6월 4일 금요일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진 것이다. 이 공습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겨냥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의 신호탄이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미국 그리고 레바논의 동맹 세력이 거세게 압박하고 아랍 각국이 어떤 조치를 하지 않은 가운데, PLO가 어쩔 수 없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이 PLO를 베이루트에서 추방하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지지하는 동안, 아랍 정부들은 형식적인 이의제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해 말 열리는 아랍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회동한 아랍연맹 외무장관들은 전쟁에 대응하는 행동을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8일 PLO는 베이루트에서 무장세력을 철수하기 위한 11개 조항을 제시했다. 이스라엘 군대와 서 베이루트 사이의 완충지대 설치, 이스라엘군의 제한적 철수, 다국적 군대의 지속적 배치, PLO 전사들이 떠나면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될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국제적 안전보장 등을 요구했다. 아울러 난민촌의 안전에 관한 미국의 보장 즉, 베이루트에 남아 있는, 법을 준수하는 팔레스타인 비전투원들과 철수한 사람들의 가족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거주하는 것이었다. PLO는 이런 보장을 구속력 있는 약속으로 받아들여 베이루트 철수에 동의했다. 기나긴 교섭 끝에 8월 12일 PLO의 철수를 위한 최종조건이 타결됐다. 1982년 전쟁이 정치에 미친 파장은 엄청나 중동지역에 야기된 변화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하고 장기화한 것이다. 이 전쟁은 또한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한 집단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반감이 널리 확산했다. 1978년에 창설된 피스나우(Peace Now) 운동이 급속히 번지며,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조됐다. PLO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약해진 듯 보였으나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갔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인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이다. 이렇듯 인티파다가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을 뒤흔들었고, 무엇보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적이 됐다.

 

다섯 번째 선전포고-오슬로협정

1987년 12월에 벌어진 팔레스타인 봉기 인티파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하여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했고, 가자 지구는 용광로였다. 인티파다를 통해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계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를 이끌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런 풀뿌리 네트워크들을 군사점령 당국이 진압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피를 흘리면 이목을 끈다(If bleeds it leads)”는 말처럼, 중무장한 군인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뀐 것이다.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시점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점령이 20년 동안 이어진 뒤로, 이스라엘은 소강상태를 틈타 1967년 전쟁 직후부터 점령지의 식민화를 시작하여 200개가 넘는 정착촌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관계자들은 이른바 ‘계몽된 점령’ 아래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생활에 만족하고 완전한 통제 상태 아래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규모 풀뿌리 저항이 분출하자 이런 통념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인티파다가 여러 성과를 이뤘지만, 숨겨진 내적 위험도 존재했다. 기성 정치 엘리트들을 대체하는 풀뿌리 운동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것이다. 따라서 PLO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 했다. 

1993년 6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두 당사자는 워싱턴이 아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났다. 양쪽은 주관자 미국과 언론의 관심을 피하고 싶었다. 라빈과 아라파트는 여러 특사에게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겼고, 곧 1차 오슬로협정이 만들어졌으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노련한 이스라엘 대표에 비해 팔레스타인측은 디테일에 너무 약했다. 이스라엘이 말하는 자치가 무엇인지도 팔레스타인 교섭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밖의 많은 부분에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협정 일명 2차 오슬로협정에 합의하면서 1차 오슬로협정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됐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A,B,C 지역으로 쪼개졌고, 전체의 60%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 통제 아래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에 해당하는 A지역 행정과 치안권, 22%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았으나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 40%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였다. C지역은 한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관한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 권리도 갖게 됐다. 2차 인티파다의 격렬한 폭력사태가 최고조에 달한 2002년 이스라엘 군대가 라말라를 비롯한 A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사무실을 급습했고, 그해 9월 아라파트의 라말라 본부인 무카타를 포위하여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2년간 사실상 감금했다. 오슬로협정은 100년 묵은 시온주의를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미국이 묵인하지 않았더라면 팔레스타인인에게 오슬로협정이라는 굴레를 씌우지 못했을 것이다.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택했다.

 

여섯 번째 선전포고-100년 전쟁

야세르 아라파트가 2004년 11월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사망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아무드 아바스가 PLO와 파타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고, 이듬해 4년 임기의 자치당국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후 대통령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기에 2009년부터 줄곧 민주적 위임을 받지 못한 채 통치하고 있다. PLO를 오랫동안 지배한 파타 중앙위원회의 창립회원 가운데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인 아바스는 카리스마가 없고 용기도 없으며 언변도 시원치 않아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는 앞선 자치당국 선거와 마찬가지로 2005년 대통령선거도 보이콧했다. 오슬로 교섭 과정과 이 과정에서 등장한 자치당국 및 팔레스타인 의회를 거부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바로 하마스가 기습적으로 180도 선회하여 2006년 1월 의회선거에 후보단을 출마시키겠다고 결정했다. 아울러 이슬람주의 메시지나 트레이드마크인 무력저항을 크게 내세우지 않고 개혁과 변화를 강조했다. 후보단의 명칭 자체도 ‘개혁과 변화’였다. 하마스가 의원후보를 출마시킨 것은 자치당국의 정통성을 받아들인 것뿐만 아니라 자치당국을 낳은 교섭과정의 정당성과 두 국가 해법까지 수용한 셈이었다. 하마스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아바스와 함께 자치당국을 통치하는 책임을 공유할 가능성도 받아들였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하마스의 승리였다. 전체 132석 가운데 74석을 차지했고, 파타는 45석을 차지했다. 이런 결과는 이스라엘에 맞선 무장저항 확대보다 점령지에서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의 높은 열망에 힘입었다. 하지만 하마스가 의회를 장악하자 파타와 하마스 간의 갈등이 고조됐다. 2006년 5월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던 수감자 5인이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하여 정파 분열을 끝내자”는 내용의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압력 아래 하마스와 파타는 양당의 인물들로 이루어진 연립정부를 구성하려고 거듭 노력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연정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고, 미국도 하마스를 보이콧 했다. 미국의 2001년 애국법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경우 ‘테러리즘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워낙 폭넓게 정의한 탓에 하마스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처럼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룹과 연관된 조직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무거운 처벌을 받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화해를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타협적인 연립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무산됐다. 하마스는 가자에서 독자적으로 자치당국을 세웠으며, 라말라를 기반으로 하는 자치당국의 관할권은 초라하게 줄어들어 요르단강 서안의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 인정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심각한 분열과 고립을 틈타 가자 지구에 세 차례 걸쳐 공중과 지상공격을 감행했다.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과밀한 고립지역이라 사람들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포화를 피할 길이 없었다. 포격을 받을 것이라고 사전에 경고를 받더라도 달리 도망칠 곳도 없었다. 2008년에 시작된 공격은 2012년과 2014년에도 계속되어 여러 도시와 난민촌의 넓은 지역이 잿더미가 된 채 정전과 식수 오염에 시달렸다. 가자를 겨냥한 전쟁은 1982년 레바논 전쟁, 1차 인티파다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 변화하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 물론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자살 폭탄공격이 잇달아 벌어져 비판적 목소리도 있었으나 미국의 여론이 느리면서도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수립과 입법, 정치 담론 일반에서는 가시적인 변화가 거의 없었다. 2017년 12월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했고, 미국 대사관을 그곳으로 이전했으며, 이스라엘이 병합한 골란고원에 대해 주권을 인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팔레스타인 전쟁이 100년째를 맞이한 가운데 이스라엘이 행동의 자유를 누리는 미국의 수도는 100년전 밸푸어 시절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적 식민주의 기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시온주의에 있는 고유하고 체계적인 불평등의 뿌리를 뽑는 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분쟁의 해법으로 제시된 제안은 어떤 정식화라든지 평등의 원리에 분명하게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두 사회가 결국 어떤 미래 계획안을 받아들이든 간에 인권, 개인의 권리, 시민권, 정치권, 민족적 권리의 절대평등을 소중하게 보장해야 한다. 거창한 권고처럼 들리겠지만, 다른 어떤 방안도 문제의 핵심을 다루지 못하며 또한 지속가능하지도 못할 것이다. 평등과 정의에 바탕을 둔 이런 경로만이 100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전쟁을 끝내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야 평화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해방을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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