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Outside the Box)’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요 저널리스트인 마크 레빈스가 쓴 책이다. 그는 무역, 경영전략, 세계화 등 거시경제에 대한 깊은 통찰로 복잡한 국제경제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해설했다. 특히 관심사인 세계화에 따른 해운 물류의 역사와 동향도 심도 있게 분석하였다. 대표적인 그의 저서로는 ‘자유시장을 넘어’, ‘로널드 레이건 이후’, 세계화 문제를 처음 다룬 ‘더 박스(The Box)’ 등이 있다.

 

세계화의 물결
2006년 8월 덴마크의 오덴세조선소 도크에서 길이가 축구장 4배에 이르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엠마 머스크호가 진수됐다. 엠마 머스크호는 세계화에 대한 도박이었다. 머스크라인이 발주한 이 선박은 50년 컨테이너해운업 역사에서 이전의 모든 선박을 난쟁이로 만들었다. 머스크의 경영진은 세계 경제가 확장되고 장거리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비용 우위를 통해 해상운송 시장에서 더 많은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 후 1만 1,000대의 트럭을 실을 수 있는 더욱 커진 선박들이 엠마 머스크호의 뒤를 따랐다. 기항하기에 너무 커서 항만을 확장할 수밖에 없던 거대선박들의 건조는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이요 초기 지표였다.

 

세계화(globalization)는 최근의 개념이 아니다. 1929년 벨기에의 의사이자 교육자 데크롤리가 어린이들은 혼자만의 세계가 아닌 더 넓은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에서 세계화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첫 번째 세계화는 유럽의 식민세력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전역에 상업적 연결망을 구축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던 19세기 산업자본주의 탄생과 함께 분출됐다. 그리고 두 번째 세계화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1940년대 후반에 새롭게 시작됐다. 세계화의 진전은 과거보다 덜 경직된 환율 시스템과 원자재 및 공산품 무역의 장벽을 낮추려는 여러 나라의 일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두 번째 세계화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진정 세계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3차 세계화가 등장하면서 인프라인 장거리 공급망이 일상화했다. 소매업체나 제조업체들은 국경을 고려하지 않고 한 나라에서 부품을 설계하여 다른 나라에서 제작하고, 다시 다른 곳에서 완제품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실용화하면서 국제무역의 성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물리적 위치와 국적 사이의 연결은 지워졌다.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은 지난 2세기에 걸쳐 진화한 세계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새로운 학술연구검토를 통해 21세기 초 세계화를 열정적으로 수용한 수많은 기업과 국가가 어떻게 비생산적으로 진전됐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세계화의 과거에 대한 이해는 세계화의 미래를 분명히 할 것이며, 이러한 미래는 과거 국가들이 주변 이웃 나라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번영을 추구했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대체로 세계화는 좋은 일이었다. 소비자들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제품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과거에는 무관했던 기술 덕분에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들도 세계 경제와 연결될 수 있었다. 외부 공급업체에 의존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세계화는 거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세계화는 결코 축복만은 아니었다. 최근까지 가난했던 국가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산업화는 북미와 일본 및 유럽에 걸친 지역사회의 잔인한 탈산업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긴장은 국제협력 촉진을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고, 민족주의적 담론이 지구적 담론을 대체하여 불확실성이 커졌다.

 

세계적인 꿈
상품은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먼 거리를 이동했다. 4000년전 아시리아인들은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에 무역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1000년경 낙타가 가축화하자 낙타 등에 향료를 실은 대상들은 아라비아를 가로지르는 여정을 시작했고, 1000년후 예멘 연안의 작은 섬 소코트라는 인도와 로마 간의 무역 중심지가 됐다. 그로부터 1000년 후인 11세기 초에 북유럽의 모험가들이 북미에 도착했을 때 무역의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1271년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여행을 떠났고, 북부 독일 도시들의 한자동맹은 1400년대 후반까지 3세기 동안 발트해 주변의 무역을 독점하며 뤼베크나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 큰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현대 기준으로 볼 때 규모는 미미했다.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는 길드가 11세기부터 1800년대까지 상품 생산을 통제하고 수입품과의 경쟁을 막음으로써 길드 회원들은 상품가격을 높게 유지할 수 있었다. 1500년대 초반에 시작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은 큰 사업으로 성장했다. 1750년 이후 영국 상인들은 총, 주전자, 옷감, 신발을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교역거점에 수출하고, 이 상품들을 노예로 교환하여 아메리카에 팔고, 영국으로 귀환하는 배에 설탕과 담배를 채웠다. 노예무역으로 최소 1,250만명의 노예가 강제로 대서양을 횡단했는데, 노예무역은 수익성이 매우 높았으며 완전한 세계화였다. 근대 이전 시대에 외국 무역이 미약했던 까닭은 느리고 비쌌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큰 배가 바다를 떠다녔으나 운임은 여전히 높아 부피가 크거나 값싼 물건들은 운송할 가치가 없었다. 금과 은은 무게와 부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높아 가장 널리 거래되는 상품 중의 하나였다. 국제무역의 육상운송 비용은 해상운송보다 더 비쌌다. 배를 이용하는 것이 육로 운송보다 저렴했으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수로에 접해 있지 않은 도시들은 엄청난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상인의 역할은 무역비용을 증가시켰다.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의 상인에게 물건을 공급했고, 더 큰 마을의 상인에게 그것을 팔았으며, 큰 마을의 상인은 해외운송할 수 있는 항구로 보내 항구 도시의 상인이 수출하는 식이었다. 이때 단계별로 수수료가 부가됐고, 이를 해외 고객에게 전가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수출입에 2%의 관세를 부과한 이후 세금은 무역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1500년대 한 스위스 무역상은 31번의 통행료를 내야 했고, 바이에른에서만 500여 곳에서 부과된 세금에 직면했다. 중국은 1685년 모든 수입품에 20%의 관세를 부과했으며, 모든 대외무역은 광저우에 있는 세관을 통과하도록 요구했다. 상인들이 그러한 부과금을 냈든 회피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들였든 수입업자의 청구서에는 통행료와 관세가 부과됐다. 

 

원자재를 수입하고 완제품을 수출하여 부를 창출하는 것은 수세기에 걸친 정통적 경제행위였다. 이러한 개념은 1700년대 중상주의 방식으로 알려졌지만, 루이 14세 시절의 재무장관 콜베르는 이보다 한참 전에 중상주의 개념을 법률에 포함했다. 세계화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교역을 가로막는 각종 통과세 극복과 함께 대양을 항해하는 증기선, 전선 케이블 그리고 국제무역에 대한 극적인 아이디어라는 혁신이 필요했다. 

 

첫 번째 세계화
세계화로의 길을 열어준 사상가는 데이비드 리카도였다. 리카도는 곡물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영국 농민들을 외국의 경쟁자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급진적인 논리를 폈다. 그보다는 곡물 수입을 허용함으로써 곡물 가격이 인하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익이 줄어들면 지주들은 자본을 제조업 부문에 투자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영국은 공산품을 수출하여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수입할 수 있으며, 이는 지주와 국가 모두를 유리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칙’이라는 저서에서 각국은 자연스럽게 자본과 노동력을 가장 이익이 되도록 분배할 것이라며, “개인의 이익 추구는 전체의 보편적 이득과 훌륭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비교우위 이론이다. 제조업을 독점하기보다 서로 무역을 통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리카도의 주장은 반이민법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섬유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로 인해 높아지던 실업률은 그들이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폐지하는데 유리한 근거를 제공했다. 

 

저렴한 운송비용은 면화 산업을 세계적인 규모로 운영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수출업자들의 수요 증가는 더 큰 선박 건조를 이끌었고, 2세기 후 엠마 머스크호와 마찬가지로 항해할 때마다 더 많은 화물을 실어 나르면서 운송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의 클레르몽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증기선으로 뉴욕시에서 허드슨강 상류로 승객을 실어날랐으나, 세계화가 가능하도록 증기선을 제조한 사람은 영국인 엔지니어 브루넬이었다. 600톤의 화물을 실은 그의 그레이트웨스턴호는 1838년 대서양을 횡단했다. 물레방아 같은 외륜 대신 스크루를 사용하고 나무 대신 철로 만들어진 개량된 증기선이 정기적으로 리버풀과 뉴욕 사이를 항해했다. 비교적 정확한 입출항 시간의 증기선은 해운사업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정 날짜에 항해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원양증기선은 제조업체나 상인이 구매 및 판매에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수입화물의 도착 전후도 계획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증기선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열쇠는 전신이었다. 전기를 이용한 전신은 1800년대 통신의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대양을 항해하는 증기선과 마찬가지로 전신의 발명과 혁신 사이에는 오랜 시차가 있었다. 최초의 상업용 전신 메시지들은 영국이 1838년, 미국은 6년 후에 모르스의 획기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전송됐다. 증기선과 전신이라는 두 가지 기술이 결합함으로써 장거리 국제무역에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스의 바글리아노 형제는 1860년대에 흑해의 러시아 항구를 비롯해 콘스탄티노플, 마르세유, 런던, 유럽 북서부 등에서 수십만톤에 이르는 곡물과 석탄의 구매, 판매 및 이동을 조정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시작되어 세계 경제를 재편한 변화와 마찬가지로 1차 세계화도 혼란스러웠다.

 

산업기술이 국경을 넘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광범위한 사람들의 이동을 수반했다. 대이동이던 이민자들의 물결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20세기 초반 매년 3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국경을 넘어 이주했는데, 중국 남부에서는 2,000만명의 사람이 동남아를 비롯한 인도와 아프리카 등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무역의 약 37%가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 사이로 이동했는데, 이는 대이동과 함께 유럽 식민주의의 결과이기도 했다. 1차 세계화의 절정기에 국제무역 가운데 4분의 1 미만이 비유럽 국가들 사이를 이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산업화하던 세계 경제는 다른 국가의 산업 간에 복잡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더욱 복잡한 공급망을 이루는 방식으로 진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채 1914년 1차 세계화는 급작스럽게 중단됐다.

 

후퇴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각국의 증권거래소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했으나 뉴욕증권거래소는 오전 10시 개종을 알리는 놋쇠 종을 울리지 않았다. 훗날 뉴욕증권거래소 소장은 “그날 아침 문을 열고 거래를 시작했다면 뉴욕시장은 세계의 패닉을 분출하는 유일한 시장이 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미국 재무장관은 외국인들이 미국내 주식과 채권을 마구 던진 후 금을 사서 전쟁비용 충당을 위해 유럽으로 가져갈 것이 두려워 거래소 폐쇄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안 하면 은행의 자금과 대출이 고갈되고 기업은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돈이 없어 경제가 마비될 것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은 기간산업인 섬유공장, 타이어공장은 물론 27억달러의 철도채권과 미국 최대 기업 유나이티드스틸 주식의 4분의 1을 소유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이런 자금 유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금융 세계화를 일시 중단해야만 했다. 세계화의 중요한 매개체였던 뉴욕증권거래소는 이후 거의 9개월 동안 정상 운영을 하지 못했다. 금융시장 붕괴는 상품과 돈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다니는 세계화라는 이상에 가한 첫 번째 타격이었다. 두 번째 타격은 국제무역의 급격한 쇠퇴였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첫해인 1915년 세계무역 규모는 1913년보다 26%나 감소했다. 1918년 휴전으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유럽 대륙은 전후 복구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승리한 유럽 국가들은 추가적인 식민지 획득, 전쟁 이전의 금 보유량 확보,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병합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고, 무역 및 투자 회복은 협상의제에서 낮은 순위로 밀려났다. 역사가 마이클 밀러가 지적했듯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위상 하락이 세계화를 촉진했고, 미국과 일본은 세계 경제의 조직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세계화의 척도는 한 국가의 경제가 세계무역에 얼마나 개방되어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국제무역은 1924년경에 회복됐으나 1920년대 후반의 수출 규모는 세계생산량의 10%에 불과하여 전쟁 전 수준보다 훨씬 낮았다. 세계 경제는 예전보다 덜 개방된 상태였다. 1929년의 대공황은 상품, 투자 및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복구하려는 희망을 수포로 돌렸다. 공황 상태에 빠져 뉴욕증권거래소의 시세 표시기가 몇 시간 뒤에야 가격을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경기침체는 그 자체로 국제무역을 감소시켰다. 주식시장 붕괴 8개월 후에 제정된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의해 관세부과 대상 제품의 수가 늘어나고 세율도 인상됐다. 이 법은 수입가격에 대한 백분율이 아닌 품목 단위 또는 무게를 기준으로 관세율을 설정했기에 디플레이션이 지속되고 가격이 하락함으로써 관세가 수입품 가격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1932년까지 스무트-홀리 관세는 광물, 농산물 및 공산품을 수입하는 미국의 비용을 59%나 높였다. 더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겨우 20년이 지난 1939년 9월에 150만명의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군하면서 세계를 황폐화시킬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북쪽과 남쪽 문제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44개국 경제전문가들이 미국의 휴양지 브레턴우즈에 모여 전후 계획을 구상했다. 논의의 핵심은 전쟁 전의 위기와 같은 경제위기를 일으키지 않고 무역과 국제 투자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환율을 관리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브레턴우즈에서 도달한 해법은 유연한 금본위제였다. 각국은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환율을 정하고, 미국은 외국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를 온스당 35달러 비율로 금으로 바꿔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에는 두 가지 허점이 있었다. 첫째는 환율을 시작점에서 최대 10%까지 변경할 수 있도록 각국에 허용하여 국내 경제 관리를 위해 금리변경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국가가 근본적 불균형 상태에 있는 경우엔 환율을 변경할 수 있되 국제통화기구 IMF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 불균형이 어떤 상태인지는 결코 정의된 바 없었다. 자유무역은 브레턴우즈 체제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관건은 바로 돈이었다. 브레턴우즈 협상가에게 국제무역 확대는 단순한 경제 문제 이상의 것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가 간의 긴밀한 경제 관계가 세 번째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는 근본 요인이라 깨달았다. 브레턴우즈의 협정에 따라 세계무역을 주도할 국제무역기구를 창설하려 했으나 각국의 이해가 얽혀 훨씬 약한 권한을 가진 기구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를 설립했다. GATT의 목표는 합의로 수입관세를 낮추는 것이었다. 

 

1948년 GATT 협정이 발효되면서 2차 세계화가 시작됐다. 이로써 세계 무역량이 빠르게 증가했으나 무역패턴은 1차 세계화와 비슷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고도로 산업화한 지역인 서유럽, 북미, 일본을 중심으로 상품이 유입됐다. 이들은 ‘북쪽, 중앙, 선진’ 경제로 불렸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보수가 좋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기에 국제무역은 북쪽에서 인기가 있었다.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은 이러한 선진국에 원자재를 공급함으로써 2차 세계화에 참여했다. ‘남쪽, 주변부, 저개발’ 경제로 불린 이들은 북쪽 사람보다 공산품을 훨씬 적게 소비했고 생산품도 별로 없거니와 삶의 질도 떨어졌다. 그러자 남쪽 사람들은 외국과의 무역과 투자는 번영이 아니라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라 인식하고 자신을 패배자로 간주했다. 자연히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었고, 피폐한 남쪽 나라들엔 이런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배양됐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자유무역이 대규모 산업국가에 혜택을 주지만, 세계 경제의 주변부에 있는 나라에서는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주변부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기계와 공장 설비는 수입하되 소비재 수입은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후에 높은 관세로 보호받는 공장에서 소비재를 만들어 부유한 나라로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전략이 주변부 국가들의 생산성을 높이게 되어 점진적으로 경제를 개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수입 대체’ 효과로 알려진 프레비시의 제안은 전 세계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구상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는 대안이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지라는 지배적 경제적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침이 되었다. 그 후 원자재 상품가격의 안정을 위해 G-77 국가 그룹의 주장에 의해 1964년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가 설립됐다. 이 기관의 책임자로 지명된 프레비시는 상품가격 안정을 위한 협력, 개발도상국의 제조업 강화를 위한 수입대체 지원, 더 많은 해외원조 등을 포함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간의 근본적 관계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제안과 방안은 신국제경제질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컨테이너 혁명
긴 역사에서 1956년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해였다. 하나는 공산품 국제무역이 처음으로 원자재 무역 규모를 초과한 해였으며, 둘째는 완전히 새로운 화물운송 방식인 컨테이너 운송이 처음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두 가지 모두 2차 세계화의 획을 그었으며, 3차 세계화 기간 세계 경제는 극적인 변화의 문을 열었다. 컨테이너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민간에 불하하여 개조된 유조선 아이디얼-엑스가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텍사스주 휴스턴까지 58개의 알루미늄 컨테이너를 갑판에 싣고 운항하면서 시작됐다. 아이디얼-엑스는 맬컴 맥린이라는 트럭 운송업자가 고안한 것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대공황시절 트럭 운전사로 시작하여 트럭회사를 경영했고, 전용 터미널을 제안했으며, 화물을 실은 트레일러 본체를 차축과 바퀴에서 분리하여 본체만 배에 싣고 이동하는 방법에 착안, 컨테이너를 해상운송에 접목하는 컨테이너선 시대를 열었다. 맬컴 맥린의 시랜드서비스는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을 배선하여 미국과 북유럽 사이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미국이 치른 베트남전쟁에서 복합운송의 물꼬를 텄다. 미군은 베트남으로 향하는 모든 화물을 통합포장한 후 컨테이너를 이용하여 일관 복합운송을 했다. 컨테이너 운송은 세계화를 세계적인 현상으로 바꾸었고 국제무역 촉진에도 박차를 가했다. 컨테이너는 일본을 수출 강국으로 만들어 일본의 공산품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시장에 침투하며 일본의 해외투자가 뒤따랐다. 일본 기업들은 개발도상국에 판매하기 위한 물품을 대만과 한국의 공장에서 일본 부품을 사용하여 조립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기업들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및 필리핀의 공장에서 미국산 부품으로 조립하여 모듈화한 서브어셈블리를 만들어 미국 공장으로 돌려보냈다. 해외에서의 조립은 세계적인 공급망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로써 급진적인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네 번째 세계화
중국 연안의 번화한 산업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3차 세계화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영향이 극심했다. 제조업 생산이 멕시코, 아시아, 동유럽으로 이전되면서 도시들은 통째로 비워지고 실업과 황폐함만 뒤에 남겨졌다. 글로벌 공급망의 생성은 부유한 경제권에서 진행되던 제조업 일자리의 지속적, 단계적인 감소를 고통스럽고 급속한 붕괴로 바꾸어놓았다. 기술적 변화가 일부 노동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으나 사무실과 공장 현장의 통상적인 작업이 자동화로 대체됨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부유한 경제권의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제조업자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더 빨리 늘어날 국가에 투자하게 됐고, 높은 실업률이 뒤따랐다. 정체된 임금과 직장의 불안정은 세계화의 대가였다. 금융의 세계화는 고소득 그룹의 사람들이 소득과 자산을 조세 피난처로 이전하는 일을 훨씬 쉽게 만들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세 번째 세계화는 무역협상의 기초가 되는 정치적 계산을 어렵게 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3차 세계화 기간에 제조물 가치에서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더 커졌다는 점이다. 인터넷 덕분에 다양한 서비스를 국가 간에 쉽게 거래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내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 무역정책은 국내 서비스 산업에 피해를 주었다. 무역정책에 대한 비난이 마땅하든 아니든, 세계화가 안정적이며 높은 급여를 보장하던 일자리를 위협하고 사회 안전망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믿음이 훨씬 견고해졌다. 세계화가 가난한 나라의 빈자보다 부유한 나라의 다국적 기업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좌파 정치세력으로부터 시작됐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민, 금융 및 무역에 대한 보다 강력한 국가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우파에 의해 더욱 효과적으로 수용됐다. 드디어 2017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엘리트 모임 세계경제포럼에서 메이 총리는 “더 큰 세계화에 대한 그림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 수 있다”고 인정했다. 

 

항공화물은 3차 세계화 시대에 번영했다. 척도인 톤·킬로미터 지표가 1987년보다 2017년에 다섯 배나 증가했는데, 주로 항공화물이 훨씬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항공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온실가스 및 오염물질 배출 감소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해운업계도 비슷한 난관에 봉착했다. 대부분의 원양 선박은 원유를 휘발유, 항공유 및 기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정제한 뒤 남은 끈적거리는 낮은 품질의 연료를 사용한다. 선박연료는 엔진의 연료 탱크 즉 벙커라고 하는 저장공간에 보관되기 때문에 보통 벙커유라고 불린다. 국제 해운산업은 유엔 기구인 국제해사기구 IMO에 의해 감독되는데, 개별국가들이 점차 국제해상운송에 영향을 미칠 환경규제들을 연이어 채택함에 따라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2005년에 새로 만들어진 IMO 규정은 선박의 질소산화물 배출을 제한했으며, 산성비의 원인인 이산화황 배출을 통제하기 위해 선박연료의 황 함량 허용치를 제한했다. 2018년에는 2050년까지 선박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는 전략을 발표했다. 게다가 요즘은 이산화탄소 저감을 위한 탈탄소와 탄소제로를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환경문제의 압박은 세계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자와 소비자가 기업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 알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기업이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운송할지 결정할 때 환경비용에 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기에 가치사슬은 기업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더 비싸졌다. 

 

세계화의 종말
무엇보다 3차 세계화를 주도한 것은 물질적 생활수준의 급격한 향상 추세였다. 상품, 자동차, 주택 등 모든 면에서 물질이 풍성해져 3차 세계화 시기는 ‘물건의 시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물건을 살 수 있었으나 기술과 인구, 소비자 취향의 변화가 경제 지형을 변화시켜 2010년 후반부터 세계화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WTO부터 IMO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규칙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많은 국제기구가 공격을 받고 있다. 중국이 만리방화벽을 설치하듯이 여러 나라가 디지털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려 했고, 거의 규제되지 않던 글로벌 인터넷이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국가적 인터넷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커졌다. 테러와 불법 이주에 대한 두려움에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경이 폐쇄되고 각국은 사업을 중단시켜 가치사슬이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제공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세계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떠오르는 4차 세계화로 인해 아이디어와 서비스 및 사람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이동시키는 일이 화물선에 실린 상품을 운송하는 일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전과는 매우 다른 승자와 패자를 만들 가능성도 커졌다. 제조업은 3차 세계화를 주도했다. 생선, 과일, 꽃, 석탄, 석유가 긴 가치사슬을 통해 이동했으나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 훨씬 더 많았다. 제조업은 점차 경제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기술발전으로 인건비가 축소되어 원거리 가치사슬 구축의 주요 근거 하나를 없애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2015년 중국이 ‘중국제조 2025’ 계획을 발표하고, 2016년 영국이 브렉시트 투표를 실시하고, 2017년 미국이 다자간 무역협정과 거리를 두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 직전에서 물러서거나 세계가 점점 지역적 무역 블록으로 분열되는 일과 관계없이 지속될 것이다. 제조업체와 조선소 및 해상 운송업체에 대한 관대한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긴 가치사슬은 더 비싸고 더 위험하고 신뢰성이 떨어지며, 덜 중요해졌다는 인식으로 인해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창궐하기 훨씬 이전부터 21세기 초반의 세계화를 종식시켰다.

 

다음 물결
그렇다면 세계화는 끝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세계화는 제조업 및 외국인 투자와 관련하여 후퇴하고 있으나 서비스와 아이디어의 이동과 관련해서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3차 세계화의 비전은 선진국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임금이 낮은 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설계하고, 그 대기업이 전 세계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차 세계화에서 세계화하는 분야는 연구, 엔지니어링 그리고 디자인 작업이다. 세계 모든 기업의 R&D 지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 100대 기업은 지역 인재를 활용하고, 지역적 취향에 적합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국가의 기술센터에 연구개발비를 배정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필요한 기술교육을 받은 근로자는 임금이 높은 고도로 자동화된 공장에 취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많은 서비스 산업의 근로자들은 그들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외국과의 심각한 경쟁에 직면할 수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대량 공급은 3차 세계화 기간에 일부 국가의 산업화를 도왔지만, 4차 세계화에서 가장 경제적인 힘의 원천은 유연한 기술을 가진 고도로 훈련된 노동력일 것이다. 따라서 일자리가 갑자기 사라지는 서비스와 정보 부문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재교육하는 사회보험제도가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4차 세계화에서 한 국가의 성공은 통계학자들에 의한 흑자나 적자계산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경제 속에서 국민의 생활수준이 상승하는지 그리고 세계화한 세상이 이익을 국민에게 공유하도록 보장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4차 세계화의 경제적 윤곽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동안 세계화를 장려하고 한 세기에 걸쳐 국제관계를 형성해 왔던 협정들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일 것이다. 2010년 세계화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주요 목표는 국제협력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의해 세계화가 지역화로 대체될 수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미국과 중국의 공동노력으로 “세계를 정치적, 경제적 블록이라는 역사적 규범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화 역시 새로운 장해물들이 있기에 그렇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엠마 머스크호는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지 않았다. 그 배의 항로는 수십년에 걸쳐 이미 구축된 무역규칙, 투자정책 및 금융규제라는 틀에 따라 안내됐고, 이러한 틀은 세계화를 통제불능 상태에 이르게 만들기도 했다. 앞으로 강도가 약한 형태의 세계화가 밀려온다고 해도 그 역시 나름대로의 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을 만드는 일은 기존의 틀을 깨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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