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선박보유량 10만톤에 불과했던 우리나라는, 그리스, 일본, 중국, 독일 다음으로 선박 보유량 4,000만톤(2014년)을 웃도는 세계 5, 6위의 해양강국이요, 선박 수주량 제1위의 조선대국, 막강한 시파워(sea power, 해양력), 정부조직에 해양수산부가 있는 국가, 제7위의 수산업국가, 해양대통령 격인 국제해사기구(IMO)의 사무총장 배출(유일한 연임), 남극과 북극의 해양 조사 기지, 21세기 AI기술시대에 꿈의 무인화선(無人化船)을 개발하여 최초로 태평양 횡단 실험 항해 성공 등 탁월한 해양강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선진국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배와 우수한 선원 없이는 국가 경제를 지탱해 나갈 수 없는, 수출무역 의존국가다. 바다는 우리의 생명선이다. 근대 해운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한 때 바다를 지배했던 바이킹의 바다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해한다면 해양강국, 한국의 탁월한 발전을 위해서 국민의 왕성한 해양진출 사상을 높여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복지 천국, 스칸디나비아
스칸디나비아인은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그리고 덴마크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고, 북유럽인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국제해운계에서 미국, 영국에 이어 노르웨이가 선박보유량 제3위를 차지한 해운대국이었고, 지금도 제6위에 오르는 해양강국이다. 북유럽 3국은 언어도 비슷하고 통화단위도 같으며 모두 기독교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국기에는 모두 십자가가 들어 있는데,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른바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특징이다. 세계에서 복지 천국으로 이름나 있고,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덴마크이다. 한국보다 앞서 있는 선진국들이지만 3개국의 인구 모두를 합쳐도 한국 인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구 1,000만명 이내인 작은 나라들이다. GDP 3만불이 넘고 인구 5,000만명 이상인 이른바 ‘3050국가군’(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한국, 이탈리아)에는 들지 못한다. 이 작은 나라들이 복지국가로 발전하게 된 동인(動因)은 무엇이고, 해양민족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들은 바다로 진출한 바이킹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바이킹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래에 와서 약탈을 일삼은 해적집단으로만 알고 있는 바이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984년에 나는 북구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녀온 일이 있다.
현지에서 구입한 바이킹에 관한 출판물은 당시만해도 그들의 찬란한 문명·문화의 소개가 빈약했다. 근자에는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조명된 자료들이 실린 출판물이 나오고 있어서 놀랍고도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은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져서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북유럽을 찾아가고는 있으나 아직도 북구 해양문화에 관한 학술적 연구물은 찾아보기 드물다.
1984년에 정리한 북구 기행문에 바이킹선에 관해서 언급했었는데, 우리나라의 고대선 연구가들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물을 발표한 실적이 없는 상태였다. 세계의 주요 박물관을 순방한 저명한 학자 한 분이 바이킹 박물관을 방문한 일이 없었기에 이 기록을 읽어 보고 관심을 표한 일이 있고, 목포해양유물전시관(해양문화재연구소)의 ‘신안선’ 복원 작업에 도움이 되도록 스웨덴의 인양선 ‘바사(WASA)’호의 복원 과정에 관한 자료를 제공했는데, 학예연구관 한 분이 WASA호 복원을 견학하기 위해서 스톡홀름 현지 방문을 하는 데 도움을 준 일도 있다.
나는 1955년에 해양대학 4년차에 승선실습을 할 때, 운이 좋아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병원선이었던 스웨덴 선박을 국가에서 도입해서 화물선으로 개조한 CIMAVI형 최신화 선박 ‘부산호’에 배정되어, 스웨덴과의 첫 번째 인연을 맺었었다.
내가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스칸디나비아에 관한 기행문 ‘북구기행-해양민족 바이킹의 고장을 찾아서’의 속편으로 이 글을 적어본다. 

 

바이킹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이킹(Viking)은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 해안을 노략질한 북유럽인이라고 알려지고, 해적(pirate)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인(the Scandinavian)을 일컫는 말이다. 어원(語源)은 다양하나 고대 아이슬란드어(Old Icelandic, Old Norse, ON)로는 Vikingr이다. 
서부 노르웨이의 피오르(fjord, fiord, 협만, 협강)는 초기의 바이킹들의 활동기지로 활용되었지만 <Viking>이라는 말의 유래와도 관련이 있다. inlet(어귀), bay(만)의 뜻을 지닌 ON의 “vik”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vik’는 강어귀, 바다, 강, 호수 등의 작은 만(creek)이라는 뜻이 있고, ‘ing’는 ‘~의 아들, son of~’을 뜻한다. Viking은 ‘강어귀에 사는 사람, creek dweller’로 알려져 있다. 아이슬란드 어 Vikingr는 해적이라는 뜻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방향을 바꾸다, 옆길로 새다’의 뜻인 스웨덴 말의 동사, ‘vi-kja’에서 ‘고향을 떠나 원정에 나선 사람들’의 뜻이 있다고 보는 설도 유력하다.
Viking이라는 말은 집단이나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직업을 뜻한다. 끊임없이 활동적인 북구인들은 약탈(raiding)의 뜻이 담긴 ‘go viking’(바이킹하러 가다)을 직업으로 삼았다.
깊숙이 들어간 북해 해안의 양쪽이 매우 가파른 협곡 어딘가에서 보트에 숨어 있다가 North way(북으로 가는 길)를 따라 해상을 이동하는 선박에 갑작이 나타나서 덤벼들어, 적재한 화물을 약탈하는 하나의 직업이었다. ‘Norway’(노르웨이)라는 지명(국명)은 러시아 북서부 북극해인 백해(白海, White sea)까지의 해상무역로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바이킹(Original Viking)은 이처럼 해석하고 있는데, 본래 선원(seafarer)이었다.
바이킹은 훗날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으로 알려진 옛 스칸디나비아 사람, 옛 북유럽 사람이다. 바이킹 시대(Viking Age)에 그들은 자신이 Danes(덴마크인), Norwegians(노르웨이인), Swedes (스웨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충성심은 국가나 민족과 관련되지 않았고, 오직 지방적(local)이었으며, 이웃이나 개인적인 수장 전사(首長戰士, war chief)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민족성(nationhood)의 개념을 띠게 된 것은 바이킹 시대에 이룩한 업적으로 후에 나타났는데, 해양민족으로 알려지고 노르만(Norman) 민족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북유럽인, 해적집단 바이킹에 대한 이미지 쇄신
러시아와 튀르키예(Turkey)에서부터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에 걸쳐 지리적으로 광대한 지역에서 발견된 바이킹 유물은 예술성이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판명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바이킹은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해적(뱃사람 집단)이라는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고, 이제 새롭게 조명되고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극상의 황금 장신구에서부터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무기, 놀랍고도 정교한 목각품(woodcarvings), 북구민족이 사용한 룬문자(rune)를 선명하고 간결하게 새긴 룬문자판(runestone)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성(sophistication)을 지닌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북유럽의 찬란한 문명·문화는 특출한 창작성이 넘치고 있기에 항상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되기 마련이다.
북유럽 출신의 전사(戰士)·탐험자인 바이킹은 모험, 약탈품, 정복과 영광 등과 더불어 교역 통로인 해로에서 쓰인 그들만의 특별한 항해술, 끊임없는 도전정신 등으로 호감을 안겨준다.
오딘(Odin), 프레이야(Freyja), 토르(Thor), 로키(Loki)와 같은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의 판테온(pantheon, 萬神殿), 전사한 전사들의 내세(來世)의 거처인 발할라(Valhalla), 바이킹 수장(首長)의 장엄한 롱쉽 선장(longship burial, 船葬) 의식과 헌신, 헬(Hel) 여신이 지배하는 저승세계, 광폭하고 무서운 신출내기 전사(Berserks) 숭배 등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유럽에 산재한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이나 바이킹선 박물관의 뛰어난 주변 풍경(landscape), 전설적인 탐험의 삶과 전통적인 예술작품에서 우리는 잊혀진 북구 문명과 문화의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대하게 된다.
‘북유럽인은 해적이다’라는 강한 이미지는 그들이 신비롭고 경탄을 자아내는 정교하고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게 되어, 특유한 문화를 창조했고,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받아들여 북유럽에 전파한 사람들이라고 새롭게 쇄신하기에 이르렀다.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약 250여 년 동안에 바이킹들 때문에 유럽은 일대 변혁을 겪게 된다. 그들은 약탈자(raider), 무역상인(trader)으로 활동하기 시작해서 탐험자(explorer), 정복자(conqueror), 입법자(lawmaker)가 되고, 나아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마을을 개척한다. 아이슬란드에 북유럽 최초로 공화국(republic)을 세웠고, 남동쪽으로 2,000마일(3,200km) 떨어진 곳에 러시아 국가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아일랜드에 노르웨이 인 정착자들은 도시를 건설했다. 한편 멀리 떨어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스웨덴 인들은 비잔틴(동로마제국) 황제와 그를 호위하는 친위대를 임명했다.
바이킹은 본래 뱃사람(seafarer)이었기에, 대형 보트(long ship)를 타고 어느 유럽인들보다 먼저 더 멀리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고, 그린란드 서해안에 집단 거주 부락을 개척했다. 또한 콜럼버스보다 거의 500년 먼저 북미 신대륙을 발견했다.
바이킹은 해적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에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전달하여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바이킹의 정신과 기상
793년에 기독교적인 유럽에서 상상할 수 없는 잔학 행위가 벌어졌다. 배를 타고 북해를 건너온 침략자들이 ‘신성한 섬(Holy Island)’이라 일컫는 영국섬 북부지방의 ‘Lindisfarne’을 급습했다. 영국에서 유명한 수도원(monastery)의 풍성한 보물들이 약탈당하고 수사(修士)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미개한 야만시대에 유럽의 수도원은 문화와 학문의 천국으로 오랫동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제 수도원은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sacrosanct) 영역이 아니었다. ‘Holy Island’가 겪은 대변동(catuclysm)은, 최초의 바이킹 강습이었지만 또 다른 침략이 뒤따라 일어났고, 이듬해에 게릴라 습격(hit- and-run)으로 영국 해안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성직자 집단 거주지도 황폐화했다. 오래지 않아 많은 마을들이 침략의 대상이 되었고, 바이킹의 최초 침공 이후 60년 내에 영국의 왕국들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바이킹 침략은 유럽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중부지방의 옛 Mercia 왕국의 Offa 왕(796년에 졸)과 유럽대륙의 샤르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와 같은 통치자의 지배하에 있는 확고한 정부가, 로마제국의 붕괴에 따라 혼란했던 몇 세기가 지난 후에, 질서를 회복하는 중이었던 시점에서 바이킹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의 신성한 장소와 분열된 세계(strife- torn world)에서 평화와 학문의 피신처를 접하게 된다.
동시대의 신성한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야만적인 무종교의 바이킹(pagan viking)은, 사악한 이 세상을 응징하도록 공의로운 하느님(Righteous God)께서 보낸 테러와 파괴의 화신(化身)처럼 보였다. 이와 같은 바이킹의 이미지는 좀처럼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바이킹의 활동을 기술한 자료의 대부분이 성직자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이와 같은 부정적인 묘사(portrayal)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일련의 고고학적인 놀라운 발굴물을 바탕으로 무역상인(trader), 여행자(traveler), 장인(craftsman), 탐험자(explorer), 정착민(settler), 그리고 최종적으로 통치자(ruler)로서 이룩한 북구인(Norsemen)들의 긍정적인 성과면을 강조하고 있다. 점차적으로 바이킹들을, 파괴적인 집단의 위력 못지 않게, 진실로 창조적인 집단으로 보게 되었다.
바이킹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잔인했지만, 정체되고 부패한 세상에서 변화를 위한 기폭제(catalyst)로서 혹독한 결심과 불굴의 용기로 행동했다.
바이킹시대의 남녀 북구인들은 가정에 머물면서 남쪽지방 사람들처럼 농경작에 종사하는 일을 감수하면서도 모험과 흥분의 센스(scent of adventure and excitement)는 바이킹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비교적 소수일지라도) 토지 유산 혜택이 없었던 젊은이들을 부와 영광을 찾아서떠나게 했다. 대담 무쌍한 그들은 세계의 무대에서 도전하고 정착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세계를 바꿔놓았다. 6·25전쟁후 가난했던 시절, 부를 찾아 조국을 떠난 해외취업선원, 해외근로자가 생각난다.

 

바이킹의 연혁(沿革)
옛 스칸디나비아 인(Norseman)들은 전사 귀족(warrior nobility), 자유민(freeman, 상인, 장인 그리고 ‘bond’라는 토지 소유농민 등), 노예(thrall, slave) 등, 세 계급의 하나에 속했다. 좋은 농지는 한정된 자원이었기 때문에, 귀족과 농민 중 상속 농지가 없는 젊은이들은 약탈자 바이킹(Viking raider)이 되었다.
그들은 2세기부터 시작된 대이동시대(The Age of Migrations)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간 게르만 인(The Germanic people)의 후손들이었다. 그들 중에 ‘barbarians’(미개인, 이교도인)로 불리는 무리들이 5세기에 로마 제국을 넘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시대부터 그들은 전통적으로 상거래업을 이어왔다. 사치품의 수요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유럽 지역에 북구인들의 모피와 호박 구슬(Baltic amber bead)이 인기가 있었다.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침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선박 건조 기술의 향상으로 배를 타고 고향을 등지며 멀리 떠날 수 있었는데, 역사가들은 갑작이 그렇게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을 과감히 고향을 떠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두고, 아직도 의논이 분분하다.
바이킹시대 당시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걸쳐 인구는 대략 200만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토지를 갖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바다로 진출했다.

 

맨 먼저 상당수의 스웨덴인(Swede)이 지형상 동쪽을 향하여 집단적 이동(exodus)을 하기 시작했다. 주로 발틱 해를 건너 강줄기를 따라 러시아 쪽으로 내려갔다. 슬라브 인들의 정착지(노브고로드, Novgorod)를 점거하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는 두 개의 주요 통로를 통제하는 교역소(交易所)로 삼았다.
드네프르 강(The Dnieper)을 따라 키이우(Kiev, 키예프)로 내려가서 그곳을 제2의 중심 기지로 삼고, 두 갈래 길을 열었다. 흑해(The Black Sea)를 건너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을 열었고, 또 배를 타고 카스피 해(The Caspian Sea)까지 볼가 강(The Volga)을 따라 2,500마일(4,000km)을 내려가서 대상로(隊商路, caravan route)를 이용하여 바그다드(Baghdad)에 이르는 길도 열었다.
무역상인들을 유인한 매력적인 상품은 바로 은(銀)이었는데, 특히 아라비아산(Arabia 産) 은화였다. 흑담비(sable), 다람쥐, 비버(beaver) 등의 모피 제품과 전리품, 약탈품 또는 공물(貢物)인 대다수의 슬라브 인 노예(slave)와 교환했다. ‘slave’라는 단어는 교역품인 슬라브인(Slavic people)의 ‘Slav’에서 유래한다.
바이킹 전사들은 강대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860년에 이어서 907년 두 차례의 침공을 잘 방어했다. 두 번째 침공시에는 동로마 제국 황제와 협상이 성공해서 무역권을 따냈고, 평화 보장의 증표로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친위대를 설립해 주었다. 이 친위대는 북구의 방랑적 부족인 바랑고이 족(Varangian)으로 구성된 ‘Varangian Guard’ 로 불리는 유명한 용병 출신 조직이다.
러시아에 미친 바이킹의 영향은 한층 현저했다. 슬라브 인에게 루스(Rus)로 알려진 정착민들이 첫 번째 슬라브 국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투고 있었던 부족들의 지도자들이 루스 족의 수장인 류리크(Ryurik)를 찾아가서, ‘우리 땅은 광대하고 풍요로우나 무질서한 상태로 있으니 와서 우리를 통치해 주시오’라고 청을 했기에, 류리크는 Swedish-slave 합동국을 최초로 건설하고, ‘루스(Rus)’의 이름을 딴 Novogorodrus, 다음에는 Kievrus라고 불리는 공국(公國)과 그 후의 러시아(Russia)를 통치하는 류리크 왕조의 선조가 되었다. 러시아는 북구인 바이킹 루스족이 세운 나라로 그 이름은 바로 ‘Rus’에서 유래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1990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350년 동안 기다린 독립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중에서 누가 키예프루스 공국의 직계인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이런 문제가 부상하면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일어나 국제전으로 확전(擴戰)하고 있다.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
스웨덴인(The Swedes)이 동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 덴마크인(The Danes)은 남쪽으로 향하였다. 영국은 덴마크인으로부터 격심한 영향을 받게 된다. 샤를마뉴 제국(Charlemagne's Frankish Empire, 742~814, 서로마 제국)도 큰 영향을 받는다.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과 ‘The Low Countries’(지금의 Benelux 3개국)도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제국의 국력은 침략에 대항하는 성채(bulwark)를 마련했으나, 840년에 상속자가 셋으로 분열되었고, 서로 적대적인 상태였다. 바이킹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845년 부활절(Easter Day)에 세느 강(The River Seine) 상류 100마일(160km) 지점을 침공 후 파리를 습격했다.
850년대부터 덴마크 인들은 전술을 바꿨다. 겔리라 습격(hit-and- run) 약탈 방식 대신 약탈지에서 월동을 시작했다. 강어귀에 반영구적인 기지를 마련 후 단계적으로 전면적인 점령을 했다. 865년에 강력한 많은 육군병력이 영국에 도착했다.
당시 영국은 여섯 왕국으로 분할되어 서로 적대적인 관계 상태였다.

 

대부분의 왕국이 침략자를 격퇴할 만한 힘이 없었다. East Anglia가 먼저 함락되고 나머지 왕국 모두 잇따라 함락한다. 결국 880년까지 Wessex의 남부지역만 남는다. 걸출한 지배자, 앨프릿 대왕(Alfred the Great, 849~899, West-Saxon 왕국의 통치자)이 이 형세를 꺾었지만, 덴마크 인들은 이미 영국 영토의 절반이 넘는 지역에 요새를 설치했었다. 그들의 지배하에 놓인 지역을 ‘The Danelaw’라고 한다. ‘Danelaw’는 9~11세기경 데인 족이 점령한 영국 북동부지역에서 시행된 법률(데인 법)을 말하지만, 그 지역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데인 법’이라는 영원한 흔적을 남겼는데, 성문법(成文法)과 배심제도에 관한 개념을 앵글로색슨족에게 깊이 심어주었다. 데인인들은 영어 형성에도 지속적으로 기여를 했다. take, die, sky, anger, heel, ugly 등과 같은 일상 영어의 어원은 ON(Old Norse, 옛 북구인의 언어)이다. 영문법에 관한 대작, ‘The Philosophy of English Grammar’를 저술한 Otto Jespersen (1860~1943)은 덴마크의 언어·영어학자이고, ‘Essentials of English Grammar’는 널리 알려진 그가 쓴 영문법 대학 교재다.
‘The Danelaw’는 프랑스 침공기지이기도 했다. 911년에 프랑스 국의 Charles 3세는 The Danelaw의 지도자, Rollo에게 침략자 바이킹을 퇴치해 준다면 세느 강 입구의 주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Rollo는 이 제의를 수락하고, 그의 휘하에 있는 북구인들은 프랑스 인의 언어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왕의 매수 계획은 성공했다.
영국해협에 면한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정착하여 민족 혼합을 이룬 이들 북구인을 노르만인(Norman) 또는 노르만 프렌치족(Norman- French)이라고 부르고, 이 지방을 노르망디(Normandy)라고 부른다.
1066년에 프랑스 William 1세(William Conqueror)가 이끄는 노르만 인은 영국을 침공하고, 전국민을 지배하에 둔다. 이 역사적 사건은 노르만 정복(The Norman Conquest)이라고 기록되었다. 노르만 정복 후 영국의 공용어가 되었던 노르만인이 사용한 언어도 노르만 프렌치(Norman-French)라고 부른다.

 

데인인들이 영국의 여러 왕국들을 정복하는 동안, 노르웨이인 바이킹(Norwegian Viking)은 아직 덜 알려진 미지의 지역들을 탐험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특히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그곳 연안에 정착지를 개척했다. Dublin, Wexford, Waterford, Limerick 등은 모두 북구인이 최초로 이룩한 마을들이고, 근해 앞바다 The Isle of Man, The Orkneys, The Shetland와 같은 섬들에도 정착했다. 그들은 노르웨이의 서쪽 450마일(700km) 떨어진 곳에 있는 The Faroe군도에도 영구적인 거주지를 마련했다. 그 전에는 이 섬들은 아일랜드 수사(修士, monk)들의 여름 피서지(summer retreat)였다.
860년경에 노르웨이 인 바이킹은 두패로 갈라져 고향을 떠났다. 한 패는 스코틀랜드 위쪽에 위치한 Hebrides 섬으로, 또 한 패는 Faroes 섬으로 향해서 진출했다. 항해 중 바람에 밀려 침로를 벗어나고, 알려진 바 없는 섬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10년 사이에 새 땅의 빈 토지를 이용해 보고자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1세기가 지나자 아이슬란드는 독립 왕국으로 발전한다. 북구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정부 조직을 갖추고, 통치자 한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족장(patriarch)이 ‘Althing’으로 알려진 야외 의회(open-air assembly)에서 연차대회를 열고 국사(國事)를 논의했다.
10세기 말엽에는 아이슬란드에 거주하는 주민은 약 6만명이었는데, 당시 노르웨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 인구였다.

 

아이슬란드의 방목권(pasturage) 승인이 요구하게 되면서 탐험 기질의 노르웨이 인들은 다시 미지의 땅을 찾아서 떠난다. 10세기 말에 Eirik the Red(붉은 털보에릭)이라는 무법자가 새 땅을 찾아 서쪽으로 450마일(725km)을 항해한 끝에 Greenland를 발견한다. 그는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살인자로 선고를 받은 버림받은 자였다. 여러 해에 걸쳐 그 섬의 존재가 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정착민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가 발견한 광대한 땅을 Greenland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그의 계략은 적중했다. 980년대까지 수백 명의 이주민들의 거주지로 발전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고래와 바다코끼리(warlus, 海象)을 사냥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동 중인 무리들이 휴식을 취하고 떠난 후, 뒤에 쳐져서, 도중 길을 잃은 한 정착희망자는 낮은 언덕의 해안선 가까이에 당도했는데, 그곳은 그가 찾아갈 방향의 남쪽에서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린란드에 간신히 도착해서 그가 겪은 일을 들려주었을 때, Eirik the Red의 아들인 Leif Eirikson은 호기심이 일어나서 신비의 새 땅을 찾아 더 서쪽으로 탐험의 여정을 떠났다. 그는 미국이라는 육지를 초인(初認, landfall)한 첫 번째 유럽인이 되었는데, 때는 1001년이었다. Leif는 Baffin에 먼저 도착했고, 다음에 이어서 뉴펀드랜드의 최북단 가까이에 있는 L'Anse aux Meadows에 도착했다. Leif의 모험과 탐험은 북구의 전설, 모험담, 무용담 등을 담은 ‘saga’에 가장 어울리며 정점을 찍은 특별한 사건이다.
약 2세기 반에 걸쳐 북구인들은 고향인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동쪽으로는 바그다드와 흑해를 건너 지중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나아가서 북미까지 최초로 진출하였으며, 유럽의 여러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였다.
약탈을 일삼은 해적 집단이라는 바이킹에 대한 이미지는 새롭게 바뀌고 있다. 바다에 도전한 용맹하고 담대 무쌍한 해양민족으로 유럽에 영향을 크게 주면서, 한편으로는 서유럽의 문화와 기독교를 스칸디나비아에 전달, 세계에서 으뜸가는 오늘의 복지국가를 이룩하게 한 기반을 닦아 놓은 민족으로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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