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극한 호우로 전국이 물바다가 됐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수재민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좌절을 딛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모두가 힘껏 도와야겠다. 요즘 지구촌이 온통 산불, 폭염, 홍수 등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원인은 이상기후 즉, 온난화라고 한다. 그동안 인간이 저지른 자원낭비와 환경파괴의 결과요 응분의 대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비상상황을 알리는 계속된 경고를 흘려버리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때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살려야 한다. 7월 콤파스에서 발표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인현 교수의 ‘탈탄소 관련 해상법적 쟁점’은 정리하여 다음 호에 개재할 예정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이라는 부제의 마이클 샌델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Democracy’s Discontent)’는 통제를 벗어난 경제권력과 민주주의의 폭주를 다룬 책이다. 한동안 화두였던 ‘정의란 무엇인가’와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잘 알려진 샌델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다.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성찰한 샌델의 담론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통해 옳음과 좋음, 특정한 목적과 공정한 절차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알아본다.

 

미국인의 시민적 삶이 마찰을 빚으며 삐걱거리고 있다. 심지어 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성난 군중을 선동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폭력행위를 조장했다. 의회가 선거 결과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조 바이든 시대인 지금까지도 공화당원들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돌아갈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트럼트 대통령 임기때 추진했던 일들과 그 여파가 민주주의의 본고장 미국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민주주의에 대해 성찰해볼 때가 됐다.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
과연 오늘날 미국의 정치는 미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불만을 누그러뜨릴 의지가 없고 또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의 정치적 주장에 생기를 불어넣는 공공철학에 있다. 공공철학이란 우리가 실천하는 행동에 수반된 정치이론 즉, 시민의식과 자유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을 뜻하며, 이러한 가정들이 우리의 공적 삶에 정보를 제공한다. 생활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공공철학은 정치적 담론을 펼치거나 정치적 행동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배경이다. 미국인이 잣대로 삼고 살아가는 정치철학은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한 버전으로, 이 철학의 중심은 시민이 지지하는 도덕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정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특정한 목적보다 공정한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이것이 지향하는 공적인 삶을 절차적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정치이론의 역사에서 자유주의는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 의미에서 인용되는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적 전통 즉, 존 로크와 칸트에서부터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적 전통을 뜻한다. 현재 미국의 공공철학은 이런 자유주의적 사상 중의 하나요 공화주의 정치이론의 한 부류로, 공화주의 이론은 자유가 시민의 자치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발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자유주의적 자유관과 달리 자치에 필요한 소양과 덕목을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심어주는 형성적 정치를 요구한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자유에 대한 개념 차이는 경제에 대한 두 가지 사고방식 즉 “경제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차이가 난다. 애덤 스미스는 “소비야말로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답을 내놓았다. 20세기에 케인스도 “소비는 모든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적이다”라고 반복해 밝혔다. 오늘날 경제학자 대부분이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의 견해가 경제의 목적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공화주의 전통에 따르면 경제는 소비뿐만 아니라 자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자유가 자치에 참여하는 시민의 능력에 달린 것이라면, 경제는 사람들이 단순한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 개념과 공화주의 개념은 모두 정치적 전통 전반에 걸쳐 존재하며 상대적 중요성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미국 역사 초기에는 공화주의가 대세였고 나중엔 자유주의가 우세했다. 미국인이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공공철학은 자유를 약속하되 무조건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적 자유관이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동체의식과 시민적 참여를 고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화시대가 시작되어 국가경제가 강화됨에 따라 자유주의적 주제와 공화주의적 주제는 독과점과 대기업에 맞서는 방법을 두고 펼쳐진 진보시대의 논쟁에서도 나타났다. 경제를 민주주의의 책임아래 두려는 여러 시도는 초기의 뉴딜정책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거시경제 수요를 관리하는 것에 맞춰졌던 초점은 이내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성장의 정치경제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밀어냈다. 세계화시대에는 시장에 대한 믿음과 금융의 역할이 커지면서 경제논쟁에서 시민적 노선은 설 땅을 잃었다.

 

공화국 초기의 경제와 시민적 덕목
현대 미국정치에서 제기되는 경제와 관련된 주장들은 주로 번영과 공정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금정책, 예산안, 규제개혁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거나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정책을 옹호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경제적 파이의 크기를 늘리거나 파이의 조각을 한층 더 공정하게 분배한다거나, 나아가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특정 경제정책을 합리화하는데 워낙 익숙하다 보니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여긴다. 따라서 경제정책을 다루는 토론은 늘 국민총생산의 규모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미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경제적 조치들이 자치에 더욱 우호적인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만약 자유가 시민적 덕목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또 시민적 덕목도 언제든 부패로 변질할 경향이 있다면, 공화주의 정치가 맞닥뜨린 도전과제는 시민의 도덕적 특징을 형성하거나 개혁하고, 사회의 공동선에 대한 시민의 애착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본질이요, 혁명의 이상주의적 목표로 이해했다. 하지만 정치의 요체는 서로 경쟁적인 이익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했다. 미국의 독립은 부패를 막고 미국인이 공화주의에 적합하도록 도덕적 정신을 갖추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독립 직후 이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1780년대 지도자였던 사상가와 정치인들은 영국과 싸우며 고취되던 공적 정신이 사치와 사리사욕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고 탄식했다. 조지 워싱턴도 “우리는 거기서 추락했고, 길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대통령 이임사에서 “덕목이나 도덕은 인민 정부에게 꼭 필요한 식수를 제공하는 우물”이라고 공화주의적 견해를 밝혔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연방정부가 주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전쟁 때 채권을 모두 떠안은 다음에 이것을 기존의 연방정부 채권에 산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지역정서가 국가 권위를 약화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사심 없다는 덕목이 국가를 향한 충성심을 고취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반면에 공화당을 탄생시킨 주역 제퍼슨은 해밀턴이 제안하는 정치경제학이 시민의 도덕성을 타락시키고 공화주의 정부에 꼭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정치논쟁 관점에서 볼 때 앤드루 잭슨 시대의 정치에서 기본적이던 관심사들은 요즘의 관심사와 비슷하다.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민주당과 휘그당은 은행업, 관세, 경제발전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경제성장과 분배정의에 대해 자주 충돌했다. 무엇보다 잭슨주의자들은 생산자와 생산자가 아니라고 여겼던 사람들, 즉, 상인, 자본가, 은행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우려했다. 잭슨주의 민주당원들은 로널드 레이건 같은 정치인이나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방임적 정부 철학을 선호했다. 그들은 부의 불평등이 늘어나는 현상에 반대했지만, 공정성 확보보다 부와 권력이 집중될 때 자치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반면에 휘그당은 경제발전 촉진정책에는 찬성했으나, 시민의 생활수준 향상이나 소비의 극대화보다 국가 공동체 발전과 노동조합의 결속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민주당과 휘그당이 벌였던 논쟁의 저변에는 시민의식과 정치경제학이 대립하고 있었다. 잭슨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 경제권력을 두려워했던 반면, 해밀턴을 추종하는 휘그당원들은 중앙집권적 행정권력을 우려했다. 하지만 잭슨주의자와 휘그당원들은 공화주의 정치에서 시민적 덕목의 함양이 필요하다는 인식 외에도 공공선 즉, 공공 이익이 개인의 선호나 이익의 총합보다 크다는 가정에는 동의했다.

 

자유노동과 임금노동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자 임금노동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유노동이라는 시민적 개념의 조화를 포기하고 자발주의적 개념을 채택했다. 그들은 임금노동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맺어진 자발적 계약의 산물이므로 자유 개념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서 경제성장과 분배정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공화주의적 공공철학에서 절차주의적 공화주의로 나아가는 자유주의적 버전으로 바뀌었다. 노예제 폐지론자 윌리엄 제이는 임금노동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자발적 교환이므로 임금노동을 자유노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자의 관점에선 임금노동은 자유노동과 반대 개념으로 완전한 시민의식과 양립할 수 없는 의존적 노동으로 받아들였다. 제이가 해방이라고 여겼던 것을 노동운동가들은 독립성을 가로막는 의존성이라 판단했다. 마침내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자유노동을 위협하던 노예권력이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임금체계와 산업 자본주의로 인해 새로운 위협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링컨은 자유노동과 소규모 독립생산자라는 깃발 아래 북부를 결집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는 자발주의적 자유관이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당시에 이 개념은 자유와 경제적 독립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화주의적 이념과 공존하며 경쟁했다. 남북전쟁 이후 수십년 동안 시민적 자유관은 미국 정치논쟁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시민적 자유관은 당시의 노동운동이 임금노동 체계에 맞서 마지막 저항을 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원동력이 됐다.

 

자유주의적 개혁가 고드킨은 임금체계가 자유 정부에 적대적이며 노동자의 도덕적 시민적 성격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하는 입법에는 “정부가 산업의 자유와 계약의 신성을 앞세워 자행하는 독재적 간섭”이라며 반대했다. 노동기사단의 맥닐은 하루 8시간 노동을 법률로 정하면 “계약의 자유라는 위대한 권리가 파괴될 것”이라는 발상을 비웃으며, 기존 임금체계에서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진정한 계약의 자유는 없다고 단언했다. 하루 8시간 노동은 결국 노동자들에게 임금체계 자체를 없앨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할 것으로 전망하며, “노동 착취의 결과인 이윤이 사라질 것이고, 임금노동 대신 협동조합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방임주의 판사들은 노동자에겐 노동을 임금으로 교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노동법을 무효화했다. 그러나 노동법 옹호자들은 빈곤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임금노동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노동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당시 노동기사단이 했던 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라기보다 공화주의적 원칙들을 산업체계에 접목하여 경제를 호의적인 방향으로 바꿔놓고자 했던 일종의 개혁운동이었다.

 

제퍼슨에서부터 링컨과 노동기사단에 이르기까지 임금체계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시민적 자유관에 입각해 주장을 펼쳤다. 즉, 자유노동이란 자치수행 능력이 있는 시민적 덕목을 갖춘 독립적 시민을 길러내는 노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힘을 잃자, 이를 뒷받침했던 자유에 대한 개념도 힘을 잃었다. 이렇듯 임금노동을 영구적 조건으로 수용하자, 미국의 법률적 정치적 담론은 시민적 자유관에서 자발주의적 자유관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임금과 교환하는데 동의한 이상, 이제 노동은 자유로워졌다. 미국인은 20세기 초 경제정책에 관련된 논쟁을 번영과 공정성뿐만 아니라 자치의 관점에서도 이어갔다.

 

독점금지법과 트러스트
자유주의 사상이 미국의 정치적 및 헌법적 관행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조차 개인적 이해와 통제를 무력화하는 비인격적 권력구조에 미국인이 사로잡혀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역설적으로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승리는 개인의 통제력 또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나타났다. 철학자 존 듀이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개인적 자아라는 이론이 “사회성이 짙은 일인데도 개인의 의미가 미미할 때, 즉, 기계적 세력 및 비인격적 조직들이 모든 것의 계획을 결정하던 시절에 형성됐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기업이 지배하는 경제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든지 “미국인은 현대의 경제적 삶의 규모가 자기가 생각하는 정체성을 갖추는데 필요한 조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진보주의 시대의 정치적 논쟁은 이런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대답에 초점을 맞췄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권력을 분산시키고 민주적 통제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자치를 보존하고자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제가 집중하는 것을 불가피한 기정사실로 보고 국가의 민주주의 기관과 제도가 가진 역량을 확대하여 경제집중 현상을 통제하고자 했다. 진보주의의 탈중앙화 노선을 주장한 가장 유능한 인물은 루이스 브랜다이스였다. 그는 독점과 트러스트에 반대했다. 트러스트가 자연스러운 여러 경제적 산물이 아니라 법률과 금융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트러스트는 시장을 지배할 목적으로 동일한 생산단계에 속한 기업들이 하나의 자본 아래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브랜다이스와 마찬가지로 윌슨도 트러스트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보았다. 그는 새로운 자유를 주창하며 정부가 시행하는 독점의 영향력을 줄이는 동시에 19세기 미국에서 자유의 기초를 형성했던 경제적 독립성의 여러 조건을 회복할 것을 약속했다. 윌슨은 경제권력의 탈중앙화가 공동체 보존의 필수조건이며, 그러한 공동체가 자치에 필요한 시민적 덕목을 배양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윌슨의 정치적 맞수였던 루스벨트는 독점 권력을 인정하고 규제할 것을 제안했다. 민주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놓고서도 탈중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대기업이 산업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인정하고 19세기의 탈중앙화 정치경제학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연방정부는 기업권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연방정부가 대기업을 통제할 수 있으려면 연방정부의 권력이 기업의 권력의 규모에 걸맞게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스벨트의 신국가주의는 국가권력 강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공화주의의 정치사상과 결별했다. 신국가주의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할 것이고, 또 민주적 통제력을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권력의 탈중앙화라는 공화주의적 충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신국가주의 이론을 뒷받침한 철학자 허버트 크롤리는 진보주의의 국가주의적 노선의 기초가 되는 정치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국가화는 단지 연방정부로의 중앙집중화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뜻한다”고 말했다. 민주적 삶의 형성 목적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히며,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나 개인의 자유 또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시민의 도덕적 시민적 개선을 무엇보다 큰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크롤리의 민주적 국가주의는 절차적 공화주의의 자유주의와 다르게 “인간의 본성은 제도나 법률을 개선함으로써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는 신념의 토대 위에 구상됐다.

 

독점금지법은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서 태어났지만, 20세기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성장 및 분배의 정의라는 정치경제학에 기여했다. 일부 논평가들은 독점금지법의 정치적 목적에 반대하면서 셔먼법이 오로지 경제적 효율성과 소비자 복지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90년 연방정부가 반독점에 초점을 맞춘 셔먼법을 논의할 당시에 이 법안은 독점가격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자치에 필요한 요소로 여겼던 소기업 및 소상점 중심의 탈중앙경제를 지키겠다는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반독점운동은 정치적 기반을 예민하게 인식했던 지도자들의 정치적 판단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셔먼법은 미국인이 권력집중화를 지속적으로 염려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발의자 존 셔먼 상원의원은 거래를 규제할 목적으로 기업결합을 제한하는 이 법률이야말로 “자유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고 정치적 삶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 즉, 민주주의 정부를 위한 소중한 주춧돌”이라고 말했다. 1978년 보수주의 법학자 로버트 보크는 “미국의 독점금지 법률의 유일한 합법적 목표는 소비자 복지의 증진이지 소기업의 생존이나 안락함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레이건 정부의 반독점국 초대 국장 윌리엄 백스터도 독점반대의 궁극적 목표는 경제적 효율성이라며, “독점금지법의 소비자 복지 기준은 전체 경제의 파이 중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의 크기가 아니라 파이 전체의 크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와 케인스혁명
번영과 공정성, 고용과 인플레이션, 세입과 세출, 재정적자와 금리들을 다루는 경제논쟁 관련 용어들은 매우 익숙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점금지의 사례가 시사하듯, 1930년대 후반은 경제논쟁의 주제가 자치에서 소비자 복지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점에 국가의 경제정책도 비슷한 변화를 거쳤다. 뉴딜정책 말기에서 시작하여 1960년대 초에 절정에 이른 성장 및 분배 정의의 정치경제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대체했던 시점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뉴딜정책이 시작되면서 진보주의 시대에 마련됐던 대안들을 반영하기 위한 정치적 논쟁이 계속됐다. 대공황의 와중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이때 개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전통은 경제회복으로 나아갈 서로 다른 접근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새로운 자유 및 브랜다이스 철학의 계승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점금지 및 경제회복을 추구하는 다른 여러 조치를 통해 경제합리화를 도모했다. 반면에 신국가주의에 뿌리를 둔 다른 집단은 국가 차원의 경제계획을 통해 경제합리화를 추구했다. 루스벨트가 신설한 국가부흥청의 수행과제는 국가의 주요산업을 대상으로 협상을 벌여 두 가지 합의에 이르는 것이었다. 하나는 실업률 감소, 노동조건 개선, 구매력 증가 등을 위해 고용주로부터 최저임금, 최대노동시간, 단체교섭, 아동노동 폐지 등을 약속받는 것이었고, 둘째는 산업단체들이 제품의 최저가격을 설정하고 일부 경우 생산을 제한하는 담합을 할 수 있도록 독점금지 법률의 적용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 산업별 협상이 경제회복을 촉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됐고, 국가부흥청이 규약작성 권한을 위임받은 것은 위헌이라는 대법원판결이 나오자 국가부흥청은 바로 폐쇄됐다. 국가부흥청의 소멸로 뉴딜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초기 뉴딜 조치 중에서 탈중앙주의자의 철학이 반영된 것은 증권산업 개혁과 테네시계곡개발청(TVA)뿐이었다. 1934년에 설립된 증권거래위원회는 증권가의 폐해를 막고 증권시장에서 공정경쟁이 이뤄지도록 이끄는 업무를 맡은 감독기관이었다. 시골에 값싼 전력 공급과 홍수 조절을 목적으로 1933년 설립된 테네시계곡개발청은 사실상 정부계획 노선이었으며, 탈중앙주의자의 관점에서 이 조직은 탈중앙화 행정과 지역개발에 대한 실험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케인스주의 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헌법에 등장한 현대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상대 개념인 절차적 공화주의의 경제적 표현이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경제기관이나 제도를 관리하지 않고도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통해 얼마든지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케인스주의 혁명은 존 케네디의 1964년 감세안으로 결실을 이뤘다. 그의 감세정책 덕분에 소비가 살아나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경제성장이 이어졌고, 케인스주의 재정관리의 성공사례가 됐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소비라는 용어를 가장 빈번하게 썼다. 고전이 된 케인스의 명저 ‘고용, 이자와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소비는 모든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적이자 목표”라고 선언했다. 케인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오늘날의 자유주의와 이어주는 맥락은 서민적 전통이라는 바람직한 시민적 덕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이런 특성은 소비의 강조와 관련된다. 케인스는 “정부 기능의 확대가 개인주의를 크게 침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존의 경제가 전체적으로 파괴되는 것을 예방하는 실용적 대안으로 유일하며, 개인의 선택을 토대로 하는 경제체제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테네시계곡개발청의 초대 청장이던 데이비드 릴리엔탈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했던 사람일 것이다. 릴리엔탈이 말하는 자유는 최대한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즉, 소비자가 돈을 쓰며 소비할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대치를 뜻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은 바로 사람들이 사회에서 가능한 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의 표시였다.

 

절차적 공화주의의 승리와 고난
절차적 공화주의는 미국이 세계 지배권을 쥐는 절묘한 순간에 탄생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미국은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별을 탐험하고, 사막을 정복하고 해저를 탐사하며, 질병을 근절하고, 또 예술과 상업을 장려할 것이며, 이 일을 위해 미국은 무한한 의지로 자신의 힘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아울러 “모든 과학자, 엔지니어, 군인, 기술자, 기업인, 공무원이 우주라는 무대에서 최고의 속도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모험에서 각자 전력을 다하자”고 호소했다. 그가 제시한 뉴프런티어 정신은 미국인 각자가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미국의 힘과 의지를 세계에 천명한 메시지였다. 현대 자유주의 공공철학에 내포된 사상은 좋음(the good)보다 옳음(the right)을 우선시하는 주의다.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바로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람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저마다 자기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에 목적 중립적 권리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버전이 지배적 공공철학이 됐다. 정치적 담론과 헌법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받기 위해 좋은 삶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에서 정부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 두드러졌다. 현대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해방적 견해를 견지했으나 자신들이 지향하는 자유는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발주의적 자유관이 우월한 철학으로 자리매김할 때 권력집중에 따른 개인적 자치 권한의 박탈감도 커졌다.

 

한때 케네디는 백인 노동자 계급과 소통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일컬어졌다. 월리스에서 레이건과 제시 잭슨에 이르는 정치인들을 볼 때 그는 저항을 상징하며, 무기력에 빠져 있던 양극단의 두 집단과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사면 조치의 여파 속에서 지미 카터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정직성과 개방성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는 공화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당대의 공공철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카터가 추구한 정치의 특징인 도덕주의와 관리주의는 본질적으로 같은 결함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카터가 열정 없는 대통령직을 수행한다고 비판했다. 정직성과 효율성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레이건은 미국의 지배력을 회복하겠다는 공약으로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절차적 공화주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의 발언은 자치와 공동체라는 미국적 이상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재선 출마를 선언할 때 그는 “미국은 다시 돌아와 우뚝 섰다. 정부의 존엄성, 가족의 따뜻함, 이웃의 힘 등 위대한 미국의 가치관을 우리는 이미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연설했다. 레이건이 제시한 해결책은 권한과 권력을 연방정부에서 주정부 및 지방정부로 넘기는 신연방주의였다. 그러나 레이건도 결국에는 미국인이 느끼는 불만의 밑바닥에 깔린 조건을 거의 바꾸지 못했다. 연설과 달리 그의 자본주의는 가족과 이웃 또는 공동체의 도덕적 구조를 복구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 다만 레이건은 미국 보수주의 내에서 대립하는 두 가지 노선을 하나로 통합했으니, 하나는 자유지상주의 또는 자유방임주의적 보수주의, 즉,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와 종교적 우파가 선호하는 시민적 윤리 또는 공동체적 윤리로, 절차적 공화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렇듯 뉴딜에서부터 시민권 운동, 위대한 사회까지 아우르는 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연방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지역사회가 보호하지 못한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불편한 공존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자본주의가 개인적 이익을 위한 생산적 활동을 추진했던 반면에 민주주의는 시민의 자치 참여를 위한 권한 부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당초에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두 개념을 조화롭게 만들려는 의도로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노동기사단은 독점 권력의 대안으로 철도, 전신, 전화를 공적 소유로 바꾸자고 요구할 정도로 반독점운동은 거대한 규모로 집중된 경제 권력을 해체하고자 노력했다. 1930년대에는 뉴딜정책이 은행을 규제했고, 노동자들이 단체교섭권으로 작업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법률도 마련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쇠퇴하고 경제성장 및 분배정의의 정치경제학으로 대체됐다.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교리를 넘어 세계화, 금융화, 능력주의라는 상호강화 관계의 특성으로 구성됐다. 이러한 세 가지 특성으로 정의되는 자본주의는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비교우위 경제이론에 따르면, 자유무역은 거래당사국 모두에게 이익을 안겨준다고 되어있다. 자유무역 조건이 거래당사국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여 전문화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국가의 비교우위가 노동자의 생계에 위협이 된다면, 이는 경제전문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민주적 시민이 토론하고 결정해야 할 도덕적 정치적 문제다.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은 해당 국가의 자국 경제 통제력을 허약하게 만들고 금융위기를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소득 중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몫이 줄어들게 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자본 흐름의 규제를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과정은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의 자본주의를 바꿔놓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이는 산업화시대에 기업이 지배하던 경제가 금융이 지배하는 경제로 자리를 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 대한 규제를 느슨하게 푼 것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2008년 금융위기라는 금융붕괴로 이어졌다. 연방준비제도 이사장이던 그린스펀도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라고 말했다. 마침내 오바마 정부는 엄청난 구조금융으로 월스트리트 구출에 성공했다. 납세자와 경제에 대한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감수하고 금융이 지배하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 버전을 만들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그들이 저질렀던 투기 폭주에 따른 비용을 일반 미국인에게 전가했다.

 

포퓰리즘의 전통은 오랜 세월 두 개의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엘리트, 불평등, 무책임한 경제권력에 맞서는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토착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등과 은밀하게 거래하는 노선이다. 포퓰리즘적 저항의 아바타로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트럼프는 둘 다 품고 이를 선거운동에 적절히 활용했다. 실제 현실에서는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기 어려워 능력주의의 이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불평등을 심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대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공적 담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층 더 완벽한 능력주의를 밀어붙여 경쟁의 장을 공정하게 만들고 모든 사람이 승자가 될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만들었고, 능력주의는 승자와 패자를 확연하게 갈라놓았다. 소득 불평등뿐만 아니라 이러한 분열이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줬고, 트럼프를 비롯한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은 이 굴욕감을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여 효과를 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가 상업과 교환을 쉽게 할 뿐만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고민한다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미덕이 무엇인지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세계화를 논쟁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여름이 지난 뒤에 과연 가을이 올까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게 그보다는 나을 것이다”라고 조롱했다. 한때 자연의 불변적 진리로 보였던 것이 지금은 자치의 대상이 됐다. 필요성과 가능성 사이의 경계는 우리 발아래 놓여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시민적 열망은 이제 여름이 지나면 과연 가을이 올 것인지도 진지하게 토론하고 판단하라고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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