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마린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여신리스의 선박 압류와 더치 하버에서의 기름무단 배출에따른 벌금 납부 등으로 회사는 씻을 수 없는 이미지 손상과 영업  및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 법! 우리가 실질적으로 운항하는 선박 중 일부가 파나마 치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2002년의 암울한 상황이 지나가자 선박 및 선원 관리, 벌크선 운항 등을 위해 2004년에 ㈜가나마린(대표 정기웅)을 설립하였다. 설립 이후 ㈜가나마린(현 대표 양인석)은 꾸준히 관리선박 및 선원 수가 증가하고, 오징어조업선 등의 운항을 통해 꾸준히 사세가 안정적으로 성장해 오고 있다.


포하1호 선원들의 기지(機智)로 모면한 쓰나미 사태 2011년 3월 11일, 일본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등에서 리히터 9.0의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일본은 후쿠시마원전이 붕괴되고, 사망자 및 실종자 2만여명, 피난민 10만명이 발생했다. 쓰나미 사태가 발생한 당일 우리 회사 소속(당시 Oswego LTD.)의 제1포하호가 시오가마 항에 정박해 냉동화물을 하역하고 있었다. 하역 도중 지진과 그로 인한 쓰나미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하역인부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를 파악한 김태환 선장 등 선원들은 계류줄을 끊고, 기관을 작동해 피항을 시도했다. 시오가마 항의 방파제를 통과할 시점에 쓰나미가 들이닥쳐 몇 차례 진퇴양난을 거듭하다 자위대소속 함정과 스쳤지만, 다행히 방파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외항을 빠져나온 제1포하호는 몇 차례 쓰나미가 지나간 뒤 시오가마 외항에 닻을 내렸다.
당시 제1포하호에는 김태환 선장의 빠른 판단과 선원들의 일사분란한 협업으로 가자미와 대구, 이면수 등 1,000만달러에 달하는 화주 Fisher-men’s Finest Inc.의 화물과 800만달러에 달하는 제1포하호 등의 재산과 선원 19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원들의 공로에 대해 화주는 감사편지와 메달을 보내왔고, 우리 회사측도 선장 이하 전 선원들에게 기념패와 상금을 수여했다.

 

제1포하호 김태환 선장의 회고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당시 제1포하호에 승선중에 겪었던 긴박한 그 날의 기억을 재정리한다.
사건 당시 본인은 냉동운반선 제1포하호에 선장으로 승선 중 2011년 3월 10일 알래스카 더치 하버에서 현지 어선들로부터 선적한 어획물을 하역하고자 일본 시오가마(塩釜 )테이잔(貞山) 2부두에 접안하여 양하 중이었다. 다음날 3월 11일 16시경 차항지 부산으로 출항을 목전에 두고 14시 40분경 선교에서 출항 후의 항로를 검토하고 있었다. 쓰가루해협을 통과하는 항로와 간몬해협을 통과하는 항로 중 기상여건을 감안하여 간몬해협 통과를 위한 항로설정을 검토하던 중에 갑자기 극심한 선체 진동을 느꼈다. 깜짝 놀라 어창 쪽을 쳐다보니 현지 하역 인부들이 공포에 질려 본선 상갑판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하역장비인 데릭 붐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요동치며 흔들리고 있었고, 부두는 콘크리트 바닥이 갈라지고 전봇대가 넘어지며 육상의 일부 건물들이 흔들리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재난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들이 처음엔 현실감이 떨어져 내 눈을 의심하였다.


길게만 느껴지던 선체 요동이 멈추자 하역 인부들은 앞을 다투어 본선에서 탈출하여 육지로 내달렸으며 육상에서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고함소리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선내 VHF 채널 16에서 경고음과 쓰나미 경고 방송이 계속되었다. VHF 방송은 해상자위대 무선국에서 부근을 지나는 선박에 계속 경고방송을 하였다. 경고방송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무선전화로 대리점 담당자에게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본선에 설치된 위성전화를 이용하여 다시 담당자에게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전화를 받는 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본선 운항사인 가나마린의 양인석 사장께 전화하여 현재 일본 상황을 설명하고 쓰나미 대비 긴급 출항하여야 함을 전달하였다.
양 사장도 상황의 심각함을 양지하고 선장의 현명한 판단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출항하라는 격려를 받고 즉시 선내 안내방송을 통해 ‘전 선원비상배치’ 지시를 발하였다. 본선 선원들 역시 공포와 충격으로 우왕좌왕하던 중 선장의 비상 배치 방송을 듣고 각자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나는 1등항해사에게 비상 출항을 위한 1단계 조치로 하역 작업을 위해 육상으로 돌려졌던 데릭붐을 정리하고 각 어창의 해치커버 폐쇄를 지시하였다.


모든 출항 준비 후, 16시 경 최종적으로 본선 계류색을 풀어줄 라인맨(line man)이 없어 결국 선수 헤드라인(head line) 2, 스프링 라인(spring line) 2, 선미스턴라인(stern line), 선미 스프링 라인(spring line)2등을 칼로 절단하였다. 본선 주기관과 바우스러스터(bow thruster) 사용을 병행하여 어렵게 출항할 수 있었다.
이후 시오가마 요가사키 수로에 진입하기 전, 9번 부이와 방파제를 지날 무렵 본선 속력이 급속히 떨어지며 과도한 선체 진동을 감지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쓰나미 영향으로 시커먼 뻘물이 밀물처럼 육지 쪽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즉시 선수에 대기 중인 1항사에게 닻 두 개를 동시에 투묘하여 쉐클에서 고정하도록 긴급히 지시하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온갖 부유물(어망, 양식장 부유물 등)이 탁유와 함께 밀려와 더 이상 본선의 기관을 사용하기 불가하여 엔진을 정지하고 본선의 표류방향을 점검하던 중 갑자기 양현 닻에 장력이 생기며 표류하던 본선이 급제동되었다. 9번 부이와 투묘한 본선 닻이 한 데 엉키며 본선을 급제동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육지로 끌리던 본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넓고 수심이 깊은 해역에 정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2차 쓰나미 영향으로 다시 닻 끌림이 발생해 해상자위대 선박과 본선 우현 선수부가 접촉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본선은 1번 부두와 본선 좌현 중간부위가 접촉이 발생하였고, 일본 해상자위대 선박은 육상과 계류 중인 계류색이 모두 터져 몰려왔던 쓰나미와 같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 육상에 좌초되었다. 주위의 온갖 쓰레기 및 육지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잡동사니에 본선이 둘러 있었으나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나는 1번 부두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닻을 감아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양현 닻과 9번 부이 9에 온갖 잡동사니가 뒤엉켜 본선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쓰나미 현상이 없었다.
3월 12일 23시경 이종평 일항사가 2-B, C 어창 온도가 상승한다고 보고해 왔다. 나와 1항사, 기관장 세 명이 2번 냉각기실(cooler room)을 통하여 C-갑판 바닥을 확인하여 보니 어창 내 바닥에 소량씩 해수가 유입되고 있었다. 유입된 해수는 얼어붙어 해수 유입과 함께 점점 높아져갔다. 정확한 해수유입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본선 우현 구명정을 하강해 1번 부두와 접촉했던 좌현 중간 부위를 중점으로 조사해 보았다. 2-B 어창 부위(수선하부 약 50cm)가 상당부분 곡직이 발생한 것을 확인하였다. 2-B 어창 중앙부분에 화물 약 100톤 정도와 어창 좌현 쪽 데미지 부분에 화물 약 100톤 등 200톤 화물을 2-A 어창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파공 부위 3곳을 찾아 응급수리로 용접하였다.


다행히 더 이상 해수유입은 없었고 화물이동부터 응급 수리까지 약 10시간의 강행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따라준 본선 선원들 및 특히 기관장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고가 화물인 연육(練肉)과 명란을 특별한 손상없이 화주에게 인계할 수 있어 큰 보람과 뿌듯한 사명감을 느낀다.
회사에서는 오션 터그를 이용해 제1포하호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 하였으나 쓰나미의 영향으로 주위에 있던 해상 양식장 및 어장 부유물들이 수로를 막아 제거 작업 없이는 항로 이용이 불가하였다. 수로의장애물 제거를 기다리던 중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로 피폭 위험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본선과 불과 50미터 정도 떨어진 해역에서 해상자위대 선박에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수습된 시신을 목격해야 하는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3월 21일 15시 20분 경부터 제1포하호는 오션 터그 2척에 이끌려 항계 밖으로 이동한 뒤 본선 기관을 사용하여 NKK선급의 안전 검사를 받기 위하여 오사카 항으로 출항하였다. 3월 23일 오사카 항에 도착하여 PSC 검사와 NKK선급의 선체 안전 검사를 받고 출항해 부산으로 향했으며, 3월 27일 꿈에도 그리던 부산항 감천부두에 입항하였다.

 

재탄생한 ㈜보양사
2001년 12월 부산 소재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을 ㈜보양사로 개칭함으로써 모기업명인 ‘보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서울 소재 ㈜보양사는 한국리스여신과 새한신용정보로부터 채무 상환압박으로 인해 더 이상 사업 영위가 어려워 2007년에 해산된 뒤 2010년 12월에 최종적으로 청산되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의 주된 영업은 부산소재 ㈜보양사를 통해 자회사인 ㈜가나마린, 일본의 가나엔터프라이즈, 미국의 Trans Pac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10년에 서울 소재 ㈜보양사가 청산됨에 따라 부산 소재 ㈜보양사를 더 이상 부산에 소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13년 부산 소재 ㈜보양사를 서울로 영업지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회 공헌
나는 앞을 보며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여느 사람들처럼 로타리나 라이언스클럽 등의 봉사활동에는 간여하지않았다. 그러나 2015년부터 모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2015년에는 해사대학 Seamanship 장학금이라는 명칭으로 10명에게 지원했으나, Freshman Award로 장학금 명칭을 정하고, 신입생 5명에게 매년 200만원씩 지원해 오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총회에서 자랑스러운 해대인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나는 2015년 ‘자랑스러운 해대인’으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항해학과 전공자로서 수산업 분야에 진출한 동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원양수산업과 냉동선 운항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것에 대해 공로를 인정해 준 것이라 여기고 있다.


2015년은 모교인 한국해양대학교 개교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70주년 기념사업으로 70주년기념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동문들로부터 모금을 하였다. 
그 전에도 적은 금액이나마 모교의 발전기금을 희사했던 적이 있던지라 모교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바탕이라 생각했기에 1억원 정도를 기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뜻을 읽은 큰 아들(일호)이 이사회 의결로 5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며 내게 통지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기부한 돈은 모교 정문 옆에 자리한 70주년 기념관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사단법인 한국해운물류학회에서는 2007년부터 ‘해운물류경영대상’을 시상하고 있다. 해운물류경영대상은 “해운물류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해운물류기업 경영인을 발굴하여 경영의욕을 고취하고 해운물류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도록 치하하며, 나아가 해운물류 경영인에게 경영의 성공모델을 제시하고, 건전한 해운물류기업인상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여 우리 해운물류업계를 선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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