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를 넘긴 자동차 사고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82년 초겨울인 12월 18일이었다. 일본의 닛뿌우(日朋)해운의 후쿠다와 대만의 왕항(王恒)과 함께 타이뻬이-홍콩-마닐라로 여행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니 대설주의보가 발령되어 다음날 예정인 일본 출장이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부산 김해공항은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고, 도쿄행 좌석도 여유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김해공항을 통해 출국하기로 하고, 차를 몰고 대전을 향했다. 눈이 많이 내려 평소 1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거리인데, 시속 50킬로 내외로 서행해 2시간여만에 대전에 닿았다. 대전에 접어드니 적석량도 눈에 띄게 적어 내심 안심하며, 조금 쉬어갈 겸해서 금강변을 달려 금강유원지 대교에 이르렀다.


지금은 강 양안을 가교를 통해 직선으로 대교를 연결했지만, 당시는 거의 90도 정도로 좌회전으로 꺾어지는 구간이었다. 강에서 발생한 안개와 눈발, 저온으로 노면이 빙결(氷結) 구간에서 차가 미끄러지면서 우측 난간에 부딪혔다. 차가 난간을 넘어 강으로 추락하는 순간 운전석 쪽 차문이 열리면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덕에(?) 문밖으로 튕겨 나와 강으로 추락했다.
강의 수심이 그리 깊지 않은 탓에 강 밑에 부딪혀 부상해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몰아쉬었다. 본능적으로 서쪽 강안이 가깝다고 판단해 개헤엄으로 수영을 해가는데, 코가 뭔가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약간 들떠 있던 얼음에 코가 받친 것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얼음판을 타고 올라가기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디선가 ‘애앵, 애앵’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차 뒤에서 따라오던 버스에서 추락사고를 목격하고, 정차한 뒤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사람 살려’라고 외치니, 그쪽에서 ‘조금만 기다려라’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사라졌다. 제자리에서 유영을 계속하고 있자니, 힘이 빠져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강의 동쪽의 작은길로 자전거로 하교 중이던 고등학생들이 나를 발견해 서두르다 자전거가 넘어지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얼마 지나 도착한 경찰이 대교 위에서 던져준 줄을 몸에 감았지만, 경찰 3명의 완력으로 성인 1명을 30미터 위의 대교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일단 강의 가까운 쪽으로 이끌어가 달라고 부탁해 겨우 얼음판으로 올라왔다.


강안에 이르러 대기하던 순찰차에 타고 옥천 성모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당직 의사에게 ‘안정제를 놓아달라’고 부탁하니 반응이 냉담했다. 그날 따라 교통사고가 많아 응급실이 만원이었던지라 당직의사가 간호사에게 ‘피나는 코에 반창고나 붙여줘요. 뜨거운 물도 한잔 주고’라고 지시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당직의사로부터 ‘서서 구경만 하지 말고 주물러 줘요!’라는 요청을 받자 경찰들이 내 몸을 주물러 주었다. 그러니 응급실 주변에서는 나를 마치 VIP로 치부했다. 몇 시간이 흘러 안정을 되찾고 내복과 바지도 거의 말라 병원비를 정산하고 옥천 시장으로 가서 입었던 양복을 벗어버리고, 점퍼와 바지를 구입해 입었다.


경찰이 데려다 준 금강 휴게소 모텔에 숙박한 뒤 저녁을 시켜 먹으며 맥주를 1병 주문해 경찰에게 1잔을 권했지만 근무 중이라 사양하며 돌아갔다. 돌아간 줄 알았던 경찰이 저녁 10시에 다시 찾아와 동승자가 있는지 묻길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은 ‘치안본부에 보고하니, 사장님을 잘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답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경찰이 재차 방문해 ‘차 옆에 흑색 핸드백이 보이는 데 동승자 물건이 아니냐’고 묻길래 ‘아니요’라고 짧게 답했다. 경찰이 이렇게 여러 번 방문해 동승자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보니 나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피의자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갈수기에 강물의 흐름도 없이 떠오른 자동차 백미러를 보고 넘겨 짚어 한 말인 듯 했다.
다음날 아침, 천해식 전무가 차를 몰고 달려와 ‘사장님, 대교 위에서 큰 사고 났던데요?’라고 하길래, ‘그게 내 차’라고 짧게 대답했다. 인양된 차를 폐차 처분하고, 대교 난간 파손 확인서를 작성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이미 예정된 여행을 취소할 수 없는 저가 상품이라, 12월 21일자로 부산에서 도쿄로 출국해 예정된 일정대로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다라마린과 가나엔터프라이즈 설립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양상운의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부산에서 많은 업무가 이루어지게 되어 부산에 사업장을 마련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 선박의 입출항 업무와 수리 등을 전담할 회사로 1983년 8월 선원선박대리점으로 다라마린㈜을 설립하고 매부인 박한용을 대표로 임명했다. 
선원관리와 해운대리점업을 영위했던 다라마린은 모회사인 ‘보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명이어서 그룹 차원의 통일성을 위해 1995년에 ㈜보양마리타임으로 개명하였다. 그 뒤 1999년에 경신원양과 합병해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이 되었다가, 2001년에 ㈜보양사로 사명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새’ ㈜보양사인 셈이다.


일본에서의 업무가 폭증하자 더 이상 일본의 대리점에맡기기엔 한계에 이르러 1983년 8월에 가나엔터프라이즈를 설립했다. 가나엔터프라이즈를 도쿄에 설립할 때 VanCamp의 동경지사장인 쿠와하라 히로시(桑原博)의 처남인 히라이 쯔네찌카(平井每親)를 대표로 앉혔다가, 2대 대표에는 Van Camp의 과장으로 있던 하야시 히사오(林久雄)를 영입했지만 하야시(林)사장도 건강악화로 오래 하지 못했다.
일본 수산업계의 유지인 이들을 통해 미츠비스상사를 비롯한 마루베니의 수산사업부, 다이요(大洋)어업, 니혼(日本)수산의 간부들과 안면을 트고 교류를 해 포클랜드 어장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보양수산을 보양선박과 보양상운으로 분리할 시점인 1976년 경, 100톤급 중량화물을 중동 건설현장으로 운송하던 1만톤급 구마노 마루(熊野丸)와 기비 마루(吉備丸) 2척을 도입했다. 12기 동기생 중 가장 성실한 김경구는 범진상운을 설립해 이란 선원대리점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고전하고 있었던 지라, 그에게 선장으로 승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김경구는 ‘나보다 더 뛰어난 14기 선두주자’ 박만현을 추천하기에 그를 선장으로 승선시켰다. 김경구의 말대로 그는 성실한 자세로 근무해 선박을 성공적으로 운항하였다. 구마노 마루와 기비 마루 두 척은 파나마에 치적해 닛신(日伸)해운의 와타나베의 협력으로 전 선주인 소와(昭和)라인에 재용선계약을 성사시켰다.


당시 소와라인의 실무자는 스와 히로시(取言訪浩) 영업기획과장이었다. 그는 명문 히토츠바시(一ツ橋)대학 출신으로 재주가 많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나와는 잘 맞았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하야시 사장이 사망한 뒤, 그를 가나엔터프라이즈의 3대 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나엔터프라이즈는 자형인 진태수 회장, 스와 히로시 사장, 타구치 세이이치(田口誠一) 상무, 오오하라 시게루(大原重) 부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Orix Corporation의 하시모토 에츠오(橋本悅男) 선박 상무가 이마바리(今治)조선에서 건조한 선박을 인수해 제1포하호로 개명해 비약을 시도하려던 시점인 1988년에 진유(仁勇)해운과의 분쟁이 발생했다.

 

포클랜드 어장 출어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포클랜드 섬(혹은 말비나스섬)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포클랜드 섬을 무력점령함으로써 포클랜드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은 근해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며, 또 남극대륙에 전진기지로서의 포클랜드 방위를 위하여 급거 기동부대를 파견, 4월 26일에는 포클랜드제도의 동남쪽 1,500km에 있는 남조지아섬을 탈환하였다. 
5월 20일 유엔 사무총장의 조정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포클랜드에 상륙, 75일간의 격전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포클랜드 휴전과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에 양측이 합의하였다’고만 발표해 여전히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었다.
포클랜드전쟁 종전과 더불어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몰려들어 영국 정부는 입어 신청을 허가해주는 것만으로도 돈벌이가 되고, 아르헨티나는 대륙붕에서도 오징어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일본, 한국, 중국, 대만의 어선들로부터 입어료를 징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소형어선(Jigger)이다수 출어하여 때아닌 오징어선의 선가가 치솟았다.

 

아르헨 연안 오징어 어장 개척 [1985. 3. 18, 동아일보]
수산청은 아르헨티나 어업이민사업 추진과 함께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섬 사이에 있는 파타고니아 어장 주변 공해상 오징어조업을 위해 오징어 채낚이어선 10척을 오는 4월 중으로 파견키로 했다.
3월 18일 수산청에 따르면, 82년 신해양법 발효 이후 줄어드는 원양어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경제수역과 포클랜드 경제수역(연안 150마일) 바깥 공해상에 300톤급 오징어 채낚기어선 10척을 내보내 오징어잡이철인 1-7월까지 오징어 1만 5천-2만톤을 잡고, 8월부터 연말까지 참치잡이에 나서 참지 3, 4천톤을 어획하는 등 오징어 참치 연계조업을 시도키로 했다.

 

우리는 가나엔터프라이즈와 아르헨티나 현지 법인과 공동으로 Espe-ranza del Mar S.A.를 설립했다. 1985년에 자기자본으로 에스페란자 우노(Esperanza Uno)호와에스페란자 도스(Esperanza Dos)호 두 척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조업을 시작했다. 첫 출어에서는 조업이 크게 성공해 파인마치호를 만선시켜 귀환했다. 수산 관련 신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고, 오징어 채낚기어업협회에서는 불법조업으로 우리 회사를 고발하는 등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사태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출국해 도쿄에 머물면서 추이를 지켜보았다. 민영복 전무가 해상법 전문가인 채이식 고려대 법대 교수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공해상에서 조업한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는 의견을 내었다고 전해왔다. 나는 채이식 교수와 협의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해 민영복 전무로 하여금 채이식 교수를 도쿄로 모시고 오도록 했다. 마침 고소사건의 담당이 채이식 교수의 지인 부장검사여서 ‘내가 일본에서 출생하고 성장해 사업을 기획해, 자산을 반입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인연으로 채이식 교수는 1992년 장남(일호) 결혼식의 주례를 봐주었다.

 

한글자모로 선명 명명
나는 단순하고 발음하기 수월한 것을 선호해 한글자모를 활용해 선명을 지었다. 1978년에 도입한 가나호를 시작으로, 다라, 마바, 자차, 카타 등이 그것이다. 제1포하호는 오노미치(尾道)조선소에서 신조했다. 1988년 1월에 있었던 준공식에는 금융선인 오릭스의 Orix Corporation의 이누이 쯔네오(乾恒雄) 회장 부부를 초청했는데, 부부가 이종남매 간으로 부인이 누나뻘이었다. 명명식의 하이라이트인 샴페인 터트리기는 이누이 부인이 맡았고 라인 커팅은 자형과 누님이 했다.
명명식 후 축하파티에서 관계자들에게 팁으로 ‘만엔, 2만엔’권을 현찰로 뿌리니 누님이 ‘timely hit’이라고 추켜세워주었다. 그 뒤에도 코나, 가나(2), 마바(2), 카타(2), 조초, 소오, 제2포하, 수아(2), 도라(2), 다라(2) 등 한글자모를 활용한 선명 작명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나는 여러 척의 선박을 신조했지만 라이커팅은 대개 외부인사를 초청해 하도록 배려했기에 나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게 아쉬워 2019년 1월 8일 보양 베링호 명명식에서 처음으로 라인 커팅을 했다.


베링해 냉동화물운송 시장 개척
나는 ‘인류의 마지막 어장’이라는 베링해로 눈을 돌렸다. 처음으로 베링해에 진출한 1985년 무렵에는 Seed Leaf호를 닛스이(日水)선박에 항해용선계약으로 알래스카 어장에 투입하였다. 몇 년 간 운항 경험이 쌓이고 연어 철을 맞아 어획물을 직접 집화해 운송해보기로 했다. 1989년 말 Sea Tac 공항 근처의 김동진 박사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며 다라호를 투입했다.
왕항(往航)에 9일, 냉동어획물 선적 5일, 복항(復航) 9일, 일본 내 양하 3일 등 최단기간 내에 입항 후 하역해 어가를 최고로 받아내니 하주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효율적인 업무 추진을 위해 김동진 박사, 코오롱상사 미국지사에 근무하던 Vivian Lee를 영입해 1991년 9월 초에 Boyang USA Inc.를 설립하고, 시애틀 갑문 부근의 피셔맨스 터미널(Fishermen’s Terminal) 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개소식에는 시애틀 교민은 물론 일본 세에 눌려 있던 현지인 선주들까지 와 축하해주었다.


당시 현물 항해용선료(spot trip charterage)는 큐빅피트당 8달러를 초과하니 나로서도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업황이 호황을 보이자 성균관대 출신 사원12명과 함께 공채1기로 입사한 외국어대 출신 장희성을 과장으로 보임하여 시애틀에 파견했다. 알래스카에 진출할 초창기에는 지역의 대표적인 대리점사인 Alaska Maritime Agency(Alarmar)의 더치 하버지점에 업무를 위탁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고객인 일본의 교쿠요(極洋)의 반대로 더 이상 우리 업무를 봐줄 수 없다기에 할 수 없이 우리도 사무실을 개설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라비니아와의 악연
포클랜드어장에 진출한 지 1년여가 경과한 1986년 즈음, 일본을 무대로 활동하며 NHK에도 출연하던 Bill Court를 통해 포클랜드 오징어운반선사인 그리스의 라비니아(Lavinia)의 라스 칼디스(Las Caldis) 사장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만나게 되었다. 라스 칼디스 사장은 대뜸 ‘보양사의 운반선을 자기회사에 용선주거나 매각하지 않으면 포클랜드어장에 입어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버텨 결국 만남은 결렬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 측에서 운반선 배선을 강행하니, 라비니아 측에서 운반선 2척을 붙여 어선 선주들에게 운송계약을 변경하라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선주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해상벙커링도 하지 못하게 한다며 우리 측 선적을 지연시키고 방해했다. 라비니아는 어선 선주들에게 선적 톤수별로 리베이트를 제공하니 어선 선주들로서는 ‘양 손에 떡을 쥔 격’이었다. 결국 우리로서도 몇 년간 버티었으나 1990년 12월 남대서양 오징어잡이가 전면 금지됨에 따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운반선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남대서양 오징어잡이 12월 말부터 전면금지[동아일보, 1990.11.30]
한국 원양어선단의 오징어잡이 보고인 남대서양상 말비나스 섬 가까운 해역에서의 어로작업이 오는 12월 하순부터 전면 금지돼 국내 수산업계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
28일 발표된 영국 아르헨티나간 남대서양어업협정에
따라 오는 12월 26일부터 말비나스 주변 영국측 어로보호수역(폭 150마일) 밖으로부터 동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의 수역에서 상업적 어로활동이 일체 금지돼 이 수역에서 조업 중인 한국의 오징어잡이어선들은 물론 대만, 일본, 소련, 폴란드, 스페인 등의 어선단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됐다. 현재 이 수역 안에서 주로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는 한국 어선은 70여척에 달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매년 12월 경부터 이듬해 3-4월까지 계속되는 오징어잡이 시즌을 맞아 상당수의 한국어선단이 이곳에서 추가로 파견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큰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나는 눈을 일본 수산업계로 돌렸다. 일본의 도쿄수산대학 출신들이 좌우하는 일본 4대 수산회사인 다이요(大洋)어업, 닛스이(日本)수산, 교꾸요(極洋), 니치로(日魯)에 접근하여 적극적으로 인맥을 쌓아갔다. 그 즈음에는 진유(仁勇)해운과의 인연을 종식하게 되었다.

 

진유(仁勇)해운과의 합작
진유(仁勇)해운의 근거지는 하카다지마(伯島)로, 오카야마(岡山) 현의 오노미치(尾道)항에서 섬 4개를 연결한오오하시(大橋)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무라카미 아키라(村上顯) 사장은 선원 출신이던 진유해운의 창업자 무라카미 이사무(村上勇) 사장의 장녀와 결혼해 데릴사위로 무라카미 가문으로 입적하고 회사를 물려받았다. 일본의 선원관리회사인 진유(仁勇)해운의 무라카미 아키라(村上顯) 사장과는 사업이나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라, 수아, 자차, 마바, 카타 등 5척을 포클랜드 어장에 출어시켰으나, 어려움을 겪자 기존 배선했던 SeedLeaf호와 함께 1989년 경 마루하(丸は)와 닛스이(日水)해운의 협조를 받아 베링해에 출어하여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70-80년대 일본의 조선업계는 두 차례 구조조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70년대 조선사들의 과열된 설비투자 경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970년대 말에 오일 쇼크가 발생해 수주량이 급감해 공급 과잉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 운수성은 1976년 11월 업계의 조업 단축을 권고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1978년 7월 운수성은 다시 5,000톤 이상 건조가능한 도크를 보유한 61개사의 생산설비를 35%로 감축하도록 했다. 그 결과 138기이던 건조 도크 수가 73기로 감소했다. 이로써 건조능력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종전까지의 조선업체 간 분업방식이 붕괴되어 조선소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계 경제의 정체와 급격한 엔고로 일본 조선업의 경쟁력이 저하되면서 수주 점유율이 하락해 1985년부터는 40% 이하로 급락하였다. 이에 일본 운수성은 1986년 6월 전체 600만 CGT에 달하는 건조능력을 1987년까지 20% 감축하고 조선업계를 그룹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전국 44개사 22그룹이던 것이 26사 7개그룹으로 재편성되고 도크 1개만 가진 중소 조선소들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미쯔비시, 가와사키, 이시가와지마, 스미토모, 미쯔이, 츠네이시, 구루시마 7개 그룹만이 살아 남았고, 73개이던 도크는 47개로 줄어들어 전체 설비의 23.6%가 감축되었다.
시코쿠(四國)의 마츠야마(松山) 출신인 쓰보우치 히사오(坪內壽夫)사장은 구루시마(來島)조선 등 간사이(關西)지방의 조선소 10여개를 총괄하는 조선업자다. 그는 시코쿠의 자민당의 숨은 실력자로 토호(東邦)은행과 일본채권신용금고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쓰보우치 히사오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모리 슈조우(森 修三)과장은 교토대학 출신의 엘리트 사원이었다. 말 그대로 쓰보우치(坪內) 사장은 시코쿠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 조선업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10개 조선소에 20개가 넘은 선대를 완전가동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흔히 ‘기적의 경영자’로 통하는 쓰보우치(坪內) 사장과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사서 읽어 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 그의 사무실의 응접실의 바닥은 양탄자는 고사하고, 타일이나 시멘트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이었다. 소파도 어디 중고품 하치장에서 가져다 놓은 듯 착석하면 먼지가 풀풀 올라왔다. 그런데도 그는 게의치 않은 듯 ‘내가 고급가구를 가져다 놓으면 선박 건조비가 상승하지 않겠어요?’라며 내게 되물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일본 조선소에서 선박을 신조하는 것은 말 그대로 ‘누워서 떡 먹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신조 브로커 역을 했던 닛신해운의 와타나베, 진유해운의 무라카미 사장, 구루시마 조선그룹의 쓰보우치(坪內) 사장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모리 슈조우(森 修三) 과장이 선대를 둘러보면서 선대 장부를 펼치고, 진수 일정에 맞추어 기입하면 그것으로 발주계약이 성립했다. 발주자는 진유해운의 파나마 페이퍼 컴퍼니로 하고, 금융은 구루시마조선그룹 산하의 토호은행과 일본채권신용금고가 제공하고, 보양상운은 선박을 용선 및 운항해 선가를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선가 상환이 종료되면 이익의 절반씩을 보양상운과 진유해운이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개수수료는 보양상운이 와타나베에게, 진유해운은 모리에게 각각 5%씩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1988년 즈음 원양 부정기사업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진유해운이 금융선인 토호은행과 일본채권신용금고가 진유해운의 파나마 페이퍼 컴퍼니 소유선박으로 되어 있는 5척을 반선받아 매각해 대출금을 상환해줄 것을우리 측에 요청해왔다. 무라카미 사장이 애원하는 통에 자초지종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최신 선종인 카타호를 먼저 반선해주었다.
그러자 진유해운 측은 카타호의 선명을 바꾸어 닛스이해운에 매각해버렸다. 상기 5척의 건조에 브로커 역할을 했던 와타나베 코이치(渡邊鋼一)가 더 이상 진유해운의 반선요구를 들어주면 안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진유해운은 계속 나머지 4척의 반선을 요구해왔으나, 와타나베의 조언에 따라 일체 응하지 않았다.

 

진유해운과의 분쟁
카타호의 반선으로 촉발된 진유해운과의 분쟁은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갔다. 가나엔터프라이즈의 스와 히로시 사장이 회사를 사직하고, 다구치세이이치(田口誠一)와 작당하여 회사를 퇴직한 뒤 진유해운 도쿄사무소를 설립해 사무소장으로 취업하였다. 


스와 히로시는 금전적으로 나와 와타나베에게 상당히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선박 도입 관련 이면 계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데다 진유해운의 무라카미 사장의 회유 등으로 우리 측이 억지를 쓰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스와(取言訪)는 나와 와타나베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긴자(銀座)의 야쿠자인 사이토(齊藤)란 자를 동원해 선박을 돌려주라고 협박했다.
1989년 1월 어느날 아침에 출근해 사무실이 있는 강남제일빌딩 지하에 주차를 하고, 좁은 2층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보양, 김 사장님’하고 부르길래 뒤돌아 ‘그렇다’고 대답하니, 거구 3명이 달려들어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제일 덩치 큰 놈의 허리를 잡고 ‘사람 살려’라고 외치니 스스로 물러나자, 정신을 차려 보니 머리를 가격 당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출혈 부위를 압박하며 현관으로 올라가 수위를 통해 김성진 대리를 불러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가 12바늘을 꿰매었다. 부러진 앞니는 며칠 뒤 보철로 떼웠다. 


며칠 뒤 윤보선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일화 삼백만엔에 수탁했으니, 같은 가격에 반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윤보선은 해양대 3기를 중퇴하고 해결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이른바 야쿠자의 ‘지부’로 호칭되는 서울 파트너 중 한명이었다.
진유해운의 무라카미 사장은 그의 소유원목선에 한국 선원 매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인연으로 사업상 최대 파트너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구루시마조선의 모리 영업과장과 함께 시코쿠의구루시마(德島)조선소에서 다라, 수아, 자차, 가나, 마바등 5척을 신조할 때 진유해운의 파나마 페이퍼 컴퍼니에 치적했다. 그러나 부정기선 사업이 어려워지고 자금 조달을 주도한 토호은행에서 추가 담보를 요구하게 되고 보양상운에서 용선 운항 중인 냉동선 5척을 회수해 닛스이선박에 용선를 주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스와를 자기 회사에 영입해 나머지 4척을 우리 회사로부터 반환받아오려고 획책했던 것이다. 스와가 퇴직하자 게이호쿠(京北)해운의 선박관리부장인 혼마 무츠오(本間睦夫)를 가나엔터프라이즈의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스와는 긴자의 야쿠자 중간 보스인 사이토(齊藤)란 자로 하여금 나를 협박했고, 일본 대리점격인 와타나베도 협박했다. 이렇게 되자 와타나베는 부인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부인과 합의해 이혼수속을 완료했다. 이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시일이 경과하다보니 부인은 교사로 복직하였고, 결국 서류상 이혼이 실질적인 이혼이 되어 버려 안타까웠다. 그러자 Orix에 근무하던 지인이 사이토(齊藤) 주변을 탐문해 야쿠자들에게 염라대왕으로 통하는 도쿄상선대학 출신의 오가와 히로시(小川宏) 변호사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오가와 변호사에게 진유해운과의 분쟁을 ‘온건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해 주도록 의뢰했다. 이번 사건이 진유해운의 원목선 시황 부진에 따른 경영난에서 비롯된 것임을 납득한 나는 결국 마바호 1척을 진유해운에 반선해주었다. 그리고 다라, 수아, 자차 등 3척은 노르웨이의 Den Norske Banking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토호은행과 일본채권신용에 남아있는 선가 잔금을 상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들은 후문으로 스와는 Van Camp Seafood의도쿄사무소의 구와하라(후일 지사장), 가나엔터프라이즈의 하야시 히사오(林久雄) 사장 이후 나의 배려로 가나엔터프라이즈의 취체역으로 근무 중 내가 일본인의 재산을 강탈한다는 진유해운 측의 일방적 주장에 편승해 그릇된 애국심을 발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경위로 와타나베는 심리적 고통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타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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