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추석을 지나 오곡백과(五穀百果)가 결실하는 시월 상달이다. 코비드가 아무리 우리 삶을 위협해도 자연과 계절은 어김없다. 10월에도 콤파스 개최는 어려워졌다. 또 해를 넘길 것인가? 회원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사색(思索)과 명상(瞑想)의 계절 가을. 여는 것과 열지 않는 것, ‘무엇이 옳은가’ 생각이 많아 머리가 무겁다.
담론 ‘무엇이 옳은가(Right/Wrong)’는 후안 엔리케스가 제시한 인간과 윤리에 관한 성찰이다. 철학은 끝없는 질문이라고 한다.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의 방향이 된다” 하버드대학 최고의 경영학 교수로 불리는 엔리케스는 현세에 도발적인 이슈를 던지는 가장 인문학적인 미래학자다. 그는 기존의 미래학자들이 보지 않고 말하지 않았던 과학기술 시대에 살아갈 인간과 그들이 만들 미래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이야기했다. 그의 관심은 공상소설 같은 신세계보다 미래기술이 만들 새로운 문명과 그 안의 다양한 인간성에 두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가치관이 흔들리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미래를 예지하는 샘솟는 지혜와 같은 책이다.

 

뜨거운 이슈, 옳고 그름의 문제
성 또는 그밖에 다른 주제의 옳고 그름의 핵심적 발상은 빠르게 바뀐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피임, 체외수정, 대리모, 유전자 편집 등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과 매우 다르다. 당시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윤리적인 것들이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기술은 우리의 믿음을 바꾸어 놓고, 또 윤리라는 기준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은 혼란스러워하고,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며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극우나 극좌에 속하는 사람들만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떠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은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단위의 집단을 벗어나 극좌에서 극우까지 펼쳐진 넓은 스펙트럼 상에서 보면, 우리는 과거보다 한층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규칙은 변한다. 우리가 올바르고 윤리적이며 표준이라 여기는 것들이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바뀌고 있다. 확실성, 신념, 진리라고 믿었던 기둥들이 이미 무너졌다. 오늘날 올바르다 혹은 그르다고 생각하던 대상들은 과거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들과 사뭇 다르다. 옳음과 그름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다.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보편적 규범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어떤 시점에 가서는 그 행동 때문에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변화하는 윤리적 규범을 판단할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조차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기술은 윤리를 바꾸고, 오래된 믿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며, 더는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제도를 뒤엎는다. 우리는 지금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거보다 더 많은 선택지와 더 높은 수준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폭넓은 선택권 덕에 조상들의 과거 행동을 비판하기도 한다. 도덕적 상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옳고 그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더 나은 판단을 하고 실천하고 관대해지려면 여러 사회와 사람들의 가치를 수용해야 하며, 이를 위한 새로운 기술과 관련된 선택권이 필요하다.

 

인간을 재설계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진화, 유전자, 신경과학에 관한 지식이 축적되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 생명체를 변형하는 도구들이 개발되고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이에 따른 윤리적인 문제는 없을까? 오늘날 진행되는 문화전쟁 속에서 성에 대한 논의는 질풍노도처럼 밀어닥친다. 낙태, 줄기세포, 생식 옵션, 진화, 성소수자 LGBTQIA 등과 같은 주제들은 절충적인 입장이 거의 없다. 찬성이냐, 반대냐 둘 중의 하나다. 일단 신기술이 세상에 나오면, 과거에 존재하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윤리적 또는 비윤리적이라 여기는 것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바꾸어 놓는다. 거듭 말하거니와 기술 변화는 우리 일상과 사회의 근본 규범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은 성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기술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여러 선택권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에게 끔찍해 보이는 것들이 미래 세대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를 바꾸려는 시도는 스타트렉의 다차원 체스게임과 유사하다. 한 평면에 있는 어떤 조각 하나를 이동시키는 행위는 꽤 복잡한 과정을 통해 다른 많은 차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지금 인간은 여러 차원에서 특정 조각들의 이동을 배워나가고 있는데, 이런 이동 중에 어떤 것들은 전체 유기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인간 게놈의 본질적 정보를 해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신체의 특정 부분을 생장시키거나 바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미래 세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 과연 윤리적일까? 인간의 재설계가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이 특이하게도 다양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과거에 인간이라는 생물종은 도태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멸종을 면했다. 인류는 아프리카 어머니를 단일 조상으로 둔 단일 종족이며, 전염병에 취약하여 극단적으로 말해 언제든 멸종할 수 있었다.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지구의 다양한 환경에 적합하게끔 자연 선택되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만일 인류가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자 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쾌적한 우주선을 타고 간다 해도 우주의 잔인한 진공 환경 등에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할 것이다. 은하계에 속한 어떤 곳으로 우주여행을 하려면 인간을 소소하게 수정하고 조정할 게 아니라 재설계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와 구조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하진 못했다. 우주는 매우 거친 이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성운은 끊임없이 폭발하며 태양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별들이다. 블랙홀, 은하와 은하의 충돌, 전파를 보내는 별 펄서, 초신성, 태양 표면의 거대한 폭발 등 우주에선 행성과 그 행성의 모든 생명체를 수증기로 만들어 날려버리는 일들이 다양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간과 그 후손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살아남길 바란다면 이 지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앞으로 수백 내지 수천년에 걸쳐 인류가 자기 신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설계해야 함을 뜻한다. 우주여행과 우주 식민지화가 실제로 시작되면 지구와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도록 인간의 기본적 생리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압박은 점차 거세질 것이다. 만약 다른 어떤 행성에 가서 대기와 식품, 연료저장소를 만들고 새로운 문명의 씨를 뿌리는 일이 그곳에 이미 존재하던 생명체를 변형하거나 새로운 생명체의 싹을 심어야 가능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까?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과학으로 유사 장기인 오가노이드가 있다. 과학자들은 4개의 화학물질을 인간의 피부세포와 섞으면 미분화 상태의 줄기세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체의 가장 기본 세포인 미분화 줄기세포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성된 단일 착상 세포다. 또한 연구팀들은 줄기세포를 배양접시에서 배양해 미니 뇌로 성장시키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어 신경망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오가노이드 관련 연구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윤리 관련의 쟁점이 떠올랐다. 대리 뇌가 점점 커지고 정교해짐에 따라 인간의 직감인 즐거움이나 고통, 괴로움을 느끼고 기억을 저장하고 소환하는 능력, 심지어 자아정체성을 지각하는 능력까지 포함될 수 있게 됐다. 뇌를 바꾸는 것은 곧 인간성을 바꾸는 것이다. 과연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기꺼이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이렇듯 뇌 지도를 작성하여 뇌 기능에 개입하는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디까지 뇌 기능 조절을 허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약리학과 뇌 연구 분야가 발전하면 지금보다 더욱 복잡한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환자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바꾸어 놓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한편, 사람을 한층 더 이타적으로 만들거나, 약물과 여러 합성물을 이용하여 뇌 회로의 지도를 작성하는 일과, 감정을 유도하거나 끊어내는 일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오늘날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기술이 우리의 윤리를 바꾸고 있다. 기후변화는 점점 심각해진다. 지구가 점차 뜨거워져 계속 이렇게 가다간 곧 재앙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에너지 소비 패턴을 바꾸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기존 에너지 자원의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대책이 없어도 마구 쓰는 행태를 비윤리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속하게 대안 에너지를 배치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기후 비상사태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지구를 구하기 위한 지구적인 맨해튼 계획이 필요하다. 윤리적 차원의 전쟁터는 판단 기준의 변화와 함께 그 위치가 달라져 매우 복잡해지고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 시대의 존재론적-윤리적 쟁점이다.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지만, 미래 세대의 평가를 받을 때 기본적인 평가항목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후 비상사태에 대처해야 하는 이유이며, 과거의 평가에 한층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롭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복잡한 윤리적 과제는 종 교량이다. 유전학적으로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 게놈의 보석들’을 특정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어떤 유전자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일련의 기능들을 유전자별로 하나씩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원숭이의 유전자는 인간과 98%가 같으므로 이론적으로 인간의 유전자를 원숭이에게 보내 인간과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의 과학자들은 인간 두뇌 발전의 핵심인 유전자 하나를 레서스원숭이에게 이식하여 그들의 단기기억력을 개선했다. 그러나 여기에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 까닭은 우리가 포유류 동물들에게 행하는 짓은 고문을 가하고 살해하는 것만큼이나 악하기 때문이다. 기술발전에 따라 동물과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가까워질 때 동물의 권리와 관련된 윤리는 한층 빠르게 진화하며, 생명의 암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생물을 대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윤리적 선택도 한층 어려워질 것이다. 수많은 합성생물학자가 세상에 쏟아져 나오고 있고, 오픈소스 기술과 키트 그리고 플랫폼 기술까지 마련되어 있어 생명체 조작 분야의 문을 걸어 잠그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동안 크리스퍼와 같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 주목을 받았고, 깁슨 어셈블리처럼 고도로 발전한 유전자 합성기술도 등장했다. 이렇듯 단순해진 도구들 덕분에 유전자 암호를 잘라내 다양한 생명체에 붙이는 일은 한결 쉬워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기능과 특성은 DNA 암호 안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생명체의 암호를 읽고 쓸 수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서든 그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단기적으로는 인플루엔자 백신을 설계하여 배송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장기적으로는 다른 행성으로 생명체를 미리 보내 우주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음식, 연료, 물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할 수도 있다. 효과적인 유전자 드라이브를 설계하고 구축하고 배치할 수 있는 일이 머지않아 대학 나중엔 고등학교 과학실에서 실행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생명체 재설계에 대한 윤리가 시급하고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양극화, 정치화, 공포, 불확실성 시대에 살면서 예전보다 더욱 종족적으로 바뀌어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을 한층 더 경계한다. 표현의 자유는 대화나 경청으로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으나 불관용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행여 정치적 시각으로 스스로 검열관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주요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중요 기관이 진실성을 무너뜨리면 폭넓은 신뢰와 믿음에는 진공 상태가 발생한다. 핵심 질문은 상식적인 진실과 타당성이 사라진 이 진공 상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 의미를 원한다. 인간은 아주 작은 원자에 불과하고, 우주는 광대하고 텅 비어있으며 목적이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기업인이자 엔지니어인 일론 머스크는 “우리는 실존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아가는 가상의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어제의 세계는 오늘도 옳은가
요즘 같이 자기중심적으로 도덕을 판단하는 시대에는 오직 한 번의 행동이나 한 통의 이메일과 댓글이 평생 일군 성과와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다.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과거의 행적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커졌다. 잠이 덜 깬 아침 인터넷에 올렸던 농담 하나, 트윗 하나,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위해 두둔한 말 한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유령처럼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 무언가 옳은 점이 있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도무지 옳지 않은 것도 정당한 것으로 우긴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지금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알고 있는 것을 과연 예전 그때에는 얼마나 깨닫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건 누구일까?” 어떤 행위나 제도가 잘못된 것임을 빠르게 자각하고 변화를 도모했다 하더라도, 어떤 문명사회에서든 훗날 윤리적이라 인정받지 못할 행위나 제도를 얼마든지 계속 실행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무언가 잘못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법률을 통해 실제로 고쳐지기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노예해방론자 링컨조차도 처음엔 노예해방에 반대했고, 1967년에야 미국 대법원이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계율과 실천은 시간이 흐르면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신도들의 일상적인 관습과 끊임없이 충돌하거나 지지자들을 계속 깎아내는 종교에는 결국 근본주의자들만 남게 된다. 종교가 기술과 문화로부터 그 권위를 도전받을 때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그런 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층 더 근본주의적이고 배타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종교와 기술을 상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 이 둘은 공생하며 공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진리는 관계성의 문제다. 각자는 내면으로부터 자기가 놓인 환경과 문화와 삶의 처지에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표현한다”라고 말했다. 종교의 실체는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와 기술을 반영하고 적응함으로써 도덕적 계율의 실천은 진화가 허용되고, 종교와 윤리적 학습이 혼합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세월이 흘러 개별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사라지는 동안에 핵심적인 윤리적 영적 발상들은 다음 세대로 전승되고 진화하며 새로운 과정을 거쳐 바뀐다. 그리고 타당한 핵심 개념들이 점차 세계로 퍼져나가고, 그 개념들은 주요 종교와 비신자들에게 공통적인 원리로 수렴된다.


우리 사회는 향후 더 개방적이고 관대한 사회가 될까, 아니면 더욱 엄격한 도덕적 판단이 지배하는 구속적인 사회가 될까? 다른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결과를 알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왔던 행동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일탈 또는 표준에서 벗어난 도덕률을 더 폭넓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그럽게 수용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에 더욱 깊은 양극화의 골을 만들지도 모른다. 이렇듯 급격히 발전하는 기술은 장차 우리의 삶을 투명하게 드러내어 윤리적 행동과 비윤리적 행동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우리의 발상을 바꿀 것이다.

 

지금의 사회구조 시스템은 옳은가
이런 상상을 해보자. 지금 도시건설전략 게임에 나오는 심시티를 건설하며 건물과 제도 그리고 규범들을 만드는 중이고, 그 일이 끝나자마자 그 도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자신의 강점과 약점,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 지능이 어느 정도인지, 성별과 인종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채로 말이다. 존 롤스의 고전적 저작인 정의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현재 대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추운 겨울날 신발도 없이 벤치에 웅크리고 있는 노숙자, 허기져 눈이 퀭한 채 편의점 밖에서 서성이는 고아들과 고통과 절박함에 시달리는 누군가를 봐도 우리는 그저 가던 길을 걸어간다. 이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것도 날마다. 그리고 자신이 결코 받고 싶지 않은 대우를 아무렇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한다. 도대체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은 정규직보다 계약직이나 임시직으로 운용하는 형태인 긱 경제(gig economy) 대상으로 연주자와 미술가를 예로 들어,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생산성이 거의 제자리지만 비용은 꾸준히 오르는 분야가 많이 존재한다는 이른바 보몰의 비용병폐 이론을 발표하였다. 우리 경제의 많은 부분이 비용질병에 희생되었고, 비정상적 비용병폐가 만연한 교육과 의료 등의 서비스 부문에선 수없이 많은 윤리적 악행이 발생한다. 부당한 것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과 잘못된 것을 바꾸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윤리적 기준이 빠르게 이동하는 현상은 부가 늘어나고 비용이 줄어들 때 나타난다. 제도를 대대적으로 바꾸어야 함에도 그러기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부당한 행위를 계속 용납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독점하고 있다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때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파는 행위는 매우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보몰의 비용병폐 이론이 작동하고 있는 여러 분야에서 우리 스스로 이를 허용하고 있다.


국가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은 시민에게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급한다(pay to live)’는 패러다임은 선진국마다 특이한 윤리적 변수로 존재한다. 의료제도의 작동원리는 장애보정생존연수 개념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치료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즉, 의료서비스가 개입할 때마다 건강연수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먼저 측정한다. ‘결과를 위한 지급’ 방식을 취하는 정부로서는 환자의 평생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치료절차를 우선 밟으며 그 비용을 치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절차를 위한 지급’ 방식으로 처리하면 기업은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된다. 어떤 제약회사가 질병에 한 차례만 처방해도 치료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약과 백신을 개발하면 환자나 사회는 엄청난 편익이 발생하지만, 제약회사로선 그다지 남는 장사가 아니다. 반면에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난치병 환자가 연명할 수 있는 고액의 치료제를 개발하면 제약회사는 큰돈을 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다수의 목숨을 구하는 저렴한 치료법은 뒤로 밀리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새로운 항생제나 백신을 개발하는 제약사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기업윤리 면에서 정체된 미국이 제도적 측면에서 권위적 힘을 가진 글로벌 금융시장이다 보니 세계 약학 분야의 연구와 수많은 치료방침 역시 미국에 의해 좌우된다. 약학 관련 프로젝트들은 거의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 세계백신연합, 세계보건기구 같은 기관이나 단체의 보조를 받는다는 특수한 조건과, 미국시장 출시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제품개발 논리를 따른다. 말하자면 장애보정생존연수의 개발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심각하게 비윤리적인 제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또 거기에 돈을 퍼붓는 중이다. 보몰의 비용병폐라는 전염병은 여러 곳에 창궐해있다. 더 빠르고 우수하고 저렴하게 진행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고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 것에선 기본적으로 잘못된 행위도 내버려 둔다.

 

그래서...결론은?
상황이 점차 더 개선되고 있으나 절대적으로 옳은 해답을 찾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윤리는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윤리의 기준이 바뀌어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로부터 얼마든지 비난받을 수 있으므로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 세대의 행동을 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역시 미래에는 다른 이들로부터 비판받을 것이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허용하는 것들로 인해 훗날 우리 후손들이 분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가 심각하게 비윤리적이라고 여길 행동들을 우리는 지금 태연히 하고 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과 재인식은 늘 이어져 온 일이다.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숱한 시행착오를 저지르면서 더 윤리적이고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왔다. 옳음과 그름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영원불변하다는 발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로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촉구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일이 지금보다 쉬워져야 한다. 지금 하는 행위에 잘못된 점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기술발전 덕분에 한층 관대하게 행동하면서도 현재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선택권을 누릴 것이고, 그에 따라 윤리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봤을 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현재의 행위 가운데도 좀 더 좋은 게 있고, 또 나쁜 게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영웅적으로 행동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제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극단적으로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비판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각성하여 올바른 존재가 될 순 없다. 따라서 토론이나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선 특정 시대의 법률이나 종교적인 잣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수수함, 관대함, 공감, 공손함, 겸손, 연민, 예의 바름, 진실함 등의 여러 핵심 원리를 잣대로 판단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윤리적으로 옳기 위해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덕목임과 동시에 인간성과 시민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치들이다.

 

이제 누가 판도를 바꿀 것인가
우리는 단 하나의 가정을 근거로 현재의 윤리 구조와 믿음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 특히 서구 인간과 그들이 가진 믿음이 가장 우월하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윤리적 질서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것은 대체 어떤 유형의 믿음일까? 과연 우리는 지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윤리체계를 만나거나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초래하는 결과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새롭게 부상하는 세계적 강대국, 인간을 넘어서는 독립적 인공지능, 세계적 팬데믹, 심지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윤리 척도를 가진 외계 문명과의 접촉 등. 이런 것들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중국은 미래 예측 시나리오에서 미래기술 윤리를 결정하는 핵심당사자로 지목된다. 수백년간 주변국들을 지배하는 제국으로서 위대한 문명을 일구어낸 중국이었음에도 기술을 외면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뒤 쇠락의 길을 걸었다.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중국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과학과 기술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기술을 공유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중국과 미국, 유럽은 윤리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다수를 위한 보다 큰 공동선, 공동체, 안정성, 통제 등을 우선시하고, 유럽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 그리고 미국은 기술분야의 거대 기업과 사업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인의 권리나 보호가 아닌 사회 총체적 복지를 우선하는 중국의 경향을 전제할 때, 만약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경제 문화면에서 지배적인 국가가 된다면 세계는 예전과 전혀 다른 윤리적 우선순위와 법칙이 확산될 것이다.
 SF 작가 버너 빈지는 미국 항공우주국 컨퍼런스에서 놀라운 발언을 하였다. “앞으로 30년 안에 우리는 초인적 수준의 지능을 창조해낼 기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에 인간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빈지가 머릿속에 그린 임계점은 기계의 지능이 발전하여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때로 그 경로를 4단계로 제시했다. 1단계 생물학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를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한다. 2단계 인간 생체에 기계를 이식하고 기계와 인간이 뇌를 공유한다. 3단계 컴퓨터가 의식을 가진 초지능의 실질적 존재가 되고, 인간이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무장하는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4단계 인간적 지능이 탑재된 기계가 스스로 고도의 지능을 습득하여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보다 한층 강력한 지능을 갖추어 인간을 지배한다. 미래학자 레이 아마라는 아마라 법칙으로 알려진 논리로 “우리는 기술 효과를 단기적으로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섭게 진화하는 인공지능이 아닐까 싶다.
 
남은 이야기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사람들이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나면 리스크도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각적이고 자동화된 의사결정의 논리와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면 파괴적인 왜곡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계와 프로그램은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여러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기계가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또 무엇을 하겠다고 선택했는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이들은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장기적으로 어떤 충격과 편향을 가져다줄지 면밀하게 계산하지 않은 듯하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진화하는 기계를 인간이 갖게 되면 결국 기계를 기반으로 하는 윤리적 논리는 최초에 인간이 설정한 것과는 전혀 다른 논리를 나타낼 것이다. 또한, 기계 인공지능의 윤리가 진화과정에서 인간과 독립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이렇듯 과학은 우리가 직면하는 윤리적 선택들에 영향을 주고 그 선택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코로나 감염병을 겪으면서, 초기에 필요했던 검증 예산을 삭감하거나 미적거리며 국제공조를 생략한 탓에 한 지역의 팬데믹이 세계적인 재앙으로 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유로운 정보 흐름을 제한하고 과학과 의학 분야의 조언을 차단한 탓에 많은 국가에선 코로나-19 대응이 늦어졌고, 그로 인해 죽지 않아도 됐을 수천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질병은 우리에게 많은 후유증을 남기며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극명히 보여주었다. 뒤늦게 깨달은 통찰이지만, 팬데믹은 재설계와 재건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저자 찰스 아이젠슈타인은 “코로나-19는 중독 치료와 비슷하다. 중독된 상태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깬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동안 고조된 위기가 가라앉고 나면 사람들은 과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갈지, 아니면 위기 시기에 접한 것들을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팬데믹을 겪으며 바이러스와 인간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고, 대의와 목적을 신봉한다. 인류의 시간이 처음 시작된 이래 줄곧 그래 왔다. 잠재적인 외부의 적을 공동으로 가진다는 것은 목적과 공동의 과제, 두려움, 가능성 등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감각을 발동시키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류는 하나가 된다. 새로운 생명체와 평화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윤리적 법률과 조건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생태계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다른 존재들이 가진 이런저런 믿음과 관습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 윤리는 어떻게 진화할까?”라는 의문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다.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 입헌군주국 영연방의 상징이요,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가 지난 9월 8일 96세로 서거했다.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지켜본 여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영국 왕실의 존엄과 명예를 지켜왔다. 영국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God sa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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