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수산 설립 참여와 아진해운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멘트값의 등락과 동양시멘트의 법정관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화되고 고속도로 건설이 속속 이루어짐에 따라 시멘트 수요는 폭증했다. 이에 1969년 5월에는 시멘트값이 협정가격인 258원을 훨씬 넘은 소매가 320원에 이르렀다(매일경제, 1969. 5.22). 이에 정부와 업계에서는 시멘트 생산능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그러나 급격한 생산능력 확대로 1970년 5월에 가서는 공급과잉 현상이 발생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2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 최종연도인 1971년은 시멘트업계에게 시련을 안겨준 해였다. 70년 초부터 정부의 정책방향은 고도성장에서 안정 내지 긴축으로 전환됨으로써 시멘트 수요가 급감하고, 재고가 누적되었다. 더욱이 71년 6월 말 환율의 대폭 인상에 따른 차관원리금 상환 부담의 증대와 시멘트 생산원가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벙커C유와 석고, 화약류 등의 급격한 가격인상으로 업계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양시멘트는 소요자금을 사채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71년에는 매월 2억원에 달하는 이자를 지급하게 되었다. 아울러 슬레이트의 판매 부진과 건축경기의 후퇴 등으로 방계기업인 동양건설진흥의 경영난이 겹쳐 동양그룹은 전체적으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이양구 회장은 1971년 9월 10일 법정관리를 신청하였다.


나는 시멘트가 계속 오를 것을 생각해 1970년 초에 막 설립된 아진해운의 조석행 상무와 논의해 30%를 투자해 시멘트 1만 5,000포를 구입해 놓았다. 그러나 5월에 접어들면서 공급과잉으로 1포당 300원 이하로 폭락하였다. 9월 10일 밖에서 일을 보고 들어와 퇴근하려고 하는데 회사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마침 지나던 송광용 경리과장에게 물으니 “오늘 자정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갈 준비로 분주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내 돈을 회사에 빌려준 게 있는지라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돼?”라고 물으니 송과장이 “사채 이자는 동결, 2년 후불”이라며 “회사에서 어음이라도 받아가야지 별수 있나”고 대답한다.


귀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새벽밥을 먹고, 명동성당 건너편의 우일해운(대표 이동규)을 찾아갔다. 자금난에 빠진 회사(동양시멘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 미수운임이 있는 우일해운의 어음을 받아두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출근하는 경리부장을 붙잡고 “회사 사정이 있으니 미수운임을 어음으로라도 받아갔으면 합니다”라고 용건을 얘기했다. 경리부장은 흔쾌히 미수운임 500만원을 3개월 200만원, 2개월 200만원, 1개월 100만원으로 나누어 어음을 발행해주었다. 회사로 출근해 경리에게 어음을 넘겨주고 회사수령증을 받아 우일해운에 넘겨주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는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든 지출마다 법정관리단이 파견한 재무관의 결제를 받아야 하니 업무처리가 원활치 않았다. 수출입 화물 담당자들도 ‘짐을 실어도 괜찮겠느냐’고 되물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시멘트 가격이 덤핑으로 폭락할 때 아진해운의 조석행 선배와 함께 1포당 250원에 사놓은 1만 5천포를 영업과장의 힘을 빌어 1포당 50원의 이윤을 남기고 처분해 석달 월급에 상당하는 이익을 거두었다.

 

조상욱 등의 아진해운 설립
1969년 말 아진해운이 조상욱(한해대 4기), 조석행(한해대 7기), 김동기(한해대 7기), 배병태(한해대 7기), 최계순(한해대 9기)의 합작하에 설립되었다.
조상욱은 대한해운공사 이맹기 사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조석행과 김동기도 해운공사 시절 과장급으로 선원과 선박 관리에 정통해있었다. 조상욱, 조석행, 김동기 등 세 사람은 해운공사에서 매각하기로 한   ‘부산호’를 매입하여 운항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당시 대한해운공사는 한양학원의 김연준에게 민영화되어 주요한이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새 사주인 김연준은 기존 해공 임직원 중 측근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인 백경순과 인척이 되는 백용흠을 대표이사 전무로 임명했다. 백용흠은 한국해양대학 4기생으로 해공에서 선장까지 역임한 해운 베테랑이었다. 민영화된 해운공사의 경영전반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해운공사 사주의 의중을 전달하는 핵심역할을 했던 백용흠은 조상욱과 한해대 4기 동기로 해운공사에서도 함께 근무했기 때문에 절친한 사이였다. 따라서 백용흠이 해공에서 부산호가 조상욱에게 매각되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호’ 인수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게 난제였다.
김동기는 동기생으로 한국해대 교수로 재직(1965.10-1978.11) 중인 배병태가 은행 간부와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배병태와 은행융자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배병태 교수의 전주고 동창인 정우풍이 산업은행의 담당자로 있었다. 두 사람은 전주고에서 우열을 나누는 경쟁자로, 배병태는 한국해양대로, 정우풍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진학했지만, 서로가 존중하는 사이였다. 배병태는 정우풍을 만나 해운산업의 중요성과, 선박의 경우 최악의 경우 고철 값으로 매각할 수 있으니 담보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득해 아진해운이 ‘부산호’매입 자금을 융자받는 데 기여했다. 배병태는 단순한 브로커 역할로 끝난 게 아니라, 아진해운의 주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진해운은 민영화된 대한해운공사로부터 ‘부산호’를 1969년 말에 인수하였다. 아진해운은 1971년 3월 16일 정식으로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등기하였다. 아진해운은 이러한 우호적인 여건 속에서 ‘부산호’를 매입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아진해운 설립의 배후에 조석행의 장인인 강준원과, 그의 부인인 강금숙의 고모부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1969.10-1978.12)의 역할이 있었다. 아진해운의 초대 대표를 맡았던 김성진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친형이었던 것이다. 최계순은 강릉고와 한국해양대 후배인 정선점(항해 10기) 선장을 발탁했다. 기관장은 조상욱이 이미 김경천을 발탁해 놓은 바 있었다. 조상욱은 부산호 매입을 위해 부산호에 승선한 바 있었던 해대 2년 선배인 김경천을 찾아가 부산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인수시 부산호 수리 및 운항을 부탁한 바 있었다. 김경천은 내가 ‘묵호호’에 실습할 때 1등기관사로 승선하고 있었는데, 입항할 때마다 공구상을 찾아가 자재를 구입해 공작기계를 직접 조립한 전설적인 엔지니어이자 애완조류 전문가였다. 김경천 기관장은 아진해운에 합류해 ‘부산호’를 운항할 때 8노트 이상으로는 절대 운항하지 않았다. ‘부산호’는 매입 뒤 곧 한일항로에 투입하였다.


부산항에서 화물을 선적하고 밤에 출항해 다음날 아침 일본에 입항해 즉시 접안해 바로 양하를 시작해 오후에 하역작업을 마치게 되니 선박회전율이 거의 100%에 가까웠다. 당시 호황일로였던 시황과 유능한 선원을 승선시킨 결과 1년만에 선가를 회수할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아진해운의 부산사무소장은 한해대 항해과 16기 전기철이 맡고 있었다. 부두사정이 좋지 못한 부산항 입항시 선석을 제때에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당시 교통부 부산지방해운국의 부두계장으로 재직 중인 강석천 사무관이 한국해대 기관과 2기 출신이었기 때문에 음양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상욱은 선박을 추가로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자금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아진해운은 1971년 재일교포 소유로 조흥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던 4,230톤급 원목선 빅토리 마치(Victory
March)와 스타 마치(Star March) 등 2척을 용선해 동남아항로에 배선하였으나, 2년만에 반선했다.

 

보양(寶洋)수산 설립 참여
내가 아진해운 계열 보양수산에 합류하게 된 것도 계획된 것이 아니었지만, 아진해운이 자회사로 보양수산을 설립한 것도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선사를 운영 중이던 오쿠야마 다모쯔(奧山 保)사장이 관광차 서울에 들렀다. 지인의 소개로 조상욱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오쿠야마 사장은 자기가 소유한 500톤급 냉동선 ‘가츠야마마루(勝山丸)’를 매각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가츠야마마루는 당시 핫코(八光)상운에 용선 운항 중이었다. 조상욱은 이 제안을 받고 한해대 기관과 5기인 황영성을 불러 협의하였다. 당시 황영성은 북양 트롤어선을 운영 중인 공흥산업의 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황영성은 수산대학 1기 졸업생으로 명태 수입도 매업을 운영하던 탁영수 회장을 소개해주었다. 아진해운 측으로서는 냉동운송도 승산이 있다고 보고 가츠야마마루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돌입 후 얼마 뒤 평소 친분이 있던 아진해운의 조석행 상무가 ‘맨날 남의 일만해서 뭐하겠냐?’면서 내게 합류를 권유해왔다. 동양시멘트를 퇴사할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멘트의 시황은 공급과잉으로 최악이었고, 회사는 법정관리 중이었다. 사직서를 제출하니 며칠째 사직처리를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고원룡 부사장에게 제출하니 “모두 그만 둬도 당신은 아닌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내며 마지못해 승인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1971년 11월 24일 등기를 마친 보양수산에 20% 지분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시청 옆 신탁은행 빌딩13층에 자리잡은 아진해운 맞은편에 마련했다. 사명 ‘보양(寶洋)’은 ‘보
배 같은 황영성 사장은 한국해대 기관과 5기생으로 아진해운 설립자 조상욱 사장과는 동향(대전)의 부잣집 장남이었다. 부친이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과 절친인 황영성 사장은 장택상(1893-1969)의 장남 장병은과 경복중학 동기로 함께 승마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누나는 성균관대학교 가정대학장을 지내고 궁중음식 인간문화재인 황혜성으로 궁중음식 중요무형문화재인 한복선의 모친이다. 황혜성은 남산 공원 근처에 ‘휫바람’이란 궁중음식 전문점을 운영했는데, 외국의 손님이 오면 찾곤 했다.


탁영수 회장은 해방 3년 전에 수산전문대 4기로 진학해 해방후 국립수산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수산대학 1기로 졸업해 수산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감사를 맡은 강준원은 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신문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조석행 상무의 장인이자, 아진해운 설립시 대표이사를 맡았던 김성진이 손위 처남이었다. 강준원은 서교동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대지 일부에 조석행 상무가 집을 지어 장인과 사위가 앞뒷집으로 살았다. 강준원은 소탈해 나와는 말이 잘 통했다.
아진해운은 ‘아(亞)’시아가 ‘전(進)’한다는 사명을 가진 만큼, 進의 영문자인 March를 돌림자로 선명으로 사용했다. 일본 용선선인 ‘빅토리 마치’와 ‘스타 마치’ 호가 그 예였다. 보양수산은 ‘가츠야마마루’를 매입해 ‘파인 마치 (PineMarch)’호로 개명했다. 


공무와 해무의 전문가들이 모인 데다, 남포동의 항도여관에 자리잡은 황영성 사장과 그 부인이 보좌 부사장(?) 노릇을 하니 일이 막힘없이 진척되었다. 탁영수 회장의 동생인 탁영완 사장의 트롤어선, 공흥산업의 어선, 이종국 사장이 한일회담 유상차관 자금 일부를 빌려 도입한 트롤선 ’클로버 (Clover)’호 등으로 선단을 이루어 홋카이도 3마일 밖에서 공동 조업했다. 이들 선단이 명태를 어획하면 냉동선인 ‘파인 마치’호가 실어 부산 남항의 공동어시장에 동태 상자로 부렸다.
동태 한두 상자는 집에 가져가 담장에 걸어 말리고,내장의 일부는 식용이나 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화분에서 기르던 석류나무에 동태 내장을 비료로 주었더니 두 손 크기만큼 탐스럽게 자라기도 했다. 한번은 ‘파인 마치’호의 선교에서 하역작업을 구경하던 큰아들(일호)이 그물로 양륙하던 중 떨어진 동태 한 꾸러미를 하역인부들이 잽싸게 끌어가는 것을 보고 “도둑놈 잡아라”라고 외쳤다. 나중에 내 아들이 소리 지른 것을 확인하고, “꼬마사장이었네”라고 웃기도 했다.


탁영수 회장의 사촌동생인 탁영완 사장의 성양(星洋)수산이 니혼(日本)어망으로부터 참치 독항선을 운항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기지 조업선이 주류였고, 소형 트롤선으로 홋카이도 근해 조업을 하던 게 전부였다. 탁영완 사장은 독항선을 도입할 여력이 없자, 탁영수 회장을 통해 황영성 사장에게 소개해주었다. 
이 제안을 받은 황영성 사장은 경복중학 동창으로 원양어업에 관심을 보였던 동양고속의 이민하 사장에게 협의하였다. 마침내 두 동창생의 합의로 보양수산과 동양고속이 50 : 50으로 동보상사를 설립해 독항선을 도입해 출어시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황영성 사장이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지분을 동양고속에 넘기고 말았다.

 

모기업 아진해운의 내분
아진해운은 1969년 말 창업 이후 부산호 한척으로 출범한 지 불과 3-4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원양선사로 성장하였다. 1972년 1월 ‘아진호’(1만 6,036중량톤), 1972년 9월 ‘용진호’(1만 7,337중량톤), 1973년 7월 ‘상진호’(1만 7,346중량톤) 등을 확보하였다. 이렇듯 급성장한 아진해운의 창립 이사진의 임기가 끝나는 1973년 11월 주주총회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손태현 교수를 영입하기로 의결됨에 따라 조상욱 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급성장하던 아진해운이 불과 제1기만에 주주간에 분쟁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자회사인 보양수산의 임원으로 아진해운의 내부를 지켜봤던 나로서는 설립 후 2~3년 동안 사실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진해운의 설립의 공헌도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조상욱 3, 조석행 3, 최계순 2, 김동기 1, 배병태 1 등으로 볼 수 있다.
발안에 가산점을 준다면 조상욱 4, 기획에 가산점을 주면 조석행 4, 영업에 가산점을 주면 최계순 4가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주요 임원 3인이 모두 아진해운의 실제 주인이라고 주장할만 했다.
아진해운이 짧은 기간에 급성장한 데는 경제개발 추진과 해운 호황이 주요 토대였지만, 조석행 개인의 정치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조석행의 처 외삼촌인 김성진이 설립 당시 대표이사로 등기되었는데, 김성진의 동생이 당시 정치 실세였던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민영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대한해운공사의 부산호 매각 건에 김정렴 비서실장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조석행으로서는 지분으로는 20% 밖에 안 되지만, 부산호를 매입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을 감안하면 조상욱의 지분 40%에 버금간다고 느꼈을 법하다.


회사의 거래은행을 바꾸는 문제로 조상욱 사장과 조석행 상무 간에 이견이 발생한 것도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진해운은 입주해있던 신탁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이용했다. 부산은행이 근처로 입주하게 되자 신생은행이어서 신탁은행 보다 금리가 높았다. 이에 조석행 상무가 회사예금을 부산은행으로 이전해 이자수입을 늘려보자고 제안했으나, 조상욱 사장은 이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치부해 묵살해버렸다. 게다가 현업에는 간여하지 않았지만, 감사를 맡고 있던 배병태는 실습선 선장, 교수, 해사법학박사 등 실무와 이론을 겸비했다는 자신감으로 조상욱 사장의 결정에 대해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게다가 임원 부인 간의 보이지 않은 시기와 질투심도 한몫했다. 조상욱 사장의 부인과 조석행 상무의 부인이 모두 서교국민학교 자모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남편들의 동업에 악영향을 끼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양수산의 황영성 사장의 부인은 조상욱 사장 부인과 대전여고 동창이었는데,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라 조상욱 사장과 조석행 상무 부인 간의 갈등에 촉매 역할을 했다.


결국 이러저러한 원인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아진해운의 한해대 7기 동기생 임원 3명(조석행, 김동기, 배병태)이 의기투합해 과반지분으로 조상욱을 밀어낸 것이다.
아진해운의 경영을 맡은 손태현은 한해대 1기로 졸업해 평생 교수로 살아온 사람으로 해운경제학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기업을 경영할만한 경험이나 자질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손태현이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1973년 말부터 제1차 석유파동으로 세계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운업 분야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폐쇄와 원유수요 급증으로 유조선 시황은 강세였지만, 건화물선 시장은 그럭저럭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한해 대후배이자 제자인 7기생의 지지로 아진해운의 경영을 맡게 된 손태현은 주주들간의 협력과 직원 인화에도 서툴렀다. 제1대 주주이고 창업자인 조상욱 전임 사장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못했다. 주주 간의 갈등으로 경영을 위탁받았다면 밀려난 최대주주에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1기만 하고 물러날테니 협조해달라’고 회유했어야 했다. 하지만 손태현은 전임 사장을 적폐 정도로 보고 옹립자들하고만 일을 하려 했다.


결국 1975년 7월 주주총회에서 손태현이 물러나고 조상욱이 경영권을 회복하고, 7기생 3인이 모두 물러났다. 지분률이 과반이 되지 않는 조상욱이 경영권을 회복한 데는 백원길(한해대 N4) 일본해사신문 한국지국장의 역할이 컸다. 조상욱은 자기 지분 일부를 백원길에게 양도한 뒤, 임시주총 소집을 요구했다.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지만, 1975년 7월 초 열린 임시 주총에서 조상욱, 백원길, 김경천의 연합세력이 경영권을 확보했다. 7월 21일 대표이사로 등기된 조상욱은 이사 김철부, 권경관, 정락준, 감사 김경천 등으로 제3기 임원진을 구성했다. 당시 주주총회에서 어떤 안건이 논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주들은 대체적으로 회사를 분사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4분사의 기본적인 구도는 다음과 같았다.

 

•최대주주인 조상욱이 아진해운을 인수한다.
•조석행이 아진해운의 자회사인 보양수산5를 인수하고, 
   용진호를 보양수산에 양도한다.
•김동기와 배병태는 상진호와 명진호를 양도받아 
   새로운 회사(중앙상선)를 설립한다.
•최계순은 지분에 상당하는 금액을 받고 보유주식 전체를 
   아진 해운에 양도한다.(후에 반포산업 창업)
•주식비율에 따른 자산, 선박, 현금 분배 등에서 
   차액이 발생할 경우 현금으로 정산한다.

 

조석행의 보양수산 인수
분사는 자산재평가과정을 거쳐 대체로 1978년 말에 완료되었지만, 대체로 합의시점인 1975년 7월부터 각자 독립적인 경영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황영성 보양수산 사장은 이미 분사 논의 이전(1974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조석행 상무가 보양수산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었다. 아진해운의 분사로 조석행이 보양수산을 인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해경에 근무할 때 계장으로 근무하던 이원영(한해대 N8)이 해경을 퇴직하고, 제동산업의 남태평양 출어 어선 선장으로 승선한 경력이 있었다. 워낙 성실한데다 조업실적도 좋아 제동산업의 수산관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조석행과 같은 충남(합덕·홍성) 출신이었다. 조석행은 이원영을 전무로 영입해 원양어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지분은 조석행이 50%, 나와 이원영이 각각 25%씩으로 하지만, 이원영은 현금 불입이 안되니 성과급을 받으면 후불로 납입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원영 전무는 세계적인 수산물가공회사인 Van Camp Seafood의 구매담당 부사장인 호너(Horner)씨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고, 나는 수산개발공사에서 선원 관리를 하며 참치 연승어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조석행 사장은 자타공인 선박, 항해, 해운경영의 전문가였다. 
이 분야의 전문가 세 사람이 모였으니 의욕이 넘쳐 다소 무모하게 사업을 벌여나갔다. 특히 어선의 조과(釣果)는 전적으로 현장의 선장의 능력에 좌우되었는데, 이를 간과하고 선원 중앙관리제도를 채택했다. 일본의 수산업계의 원양어업 초기 아프리카에 출어하여 어선 1척당 5-10톤씩을 어획하니 이를 가공처리할 대형선을 모자선(母子船)을 투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곧 어자원의 고갈로 이어져 일본 수산업계가 아프리카 어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해 일본어선이 고철 가격으로 시장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우리가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냉동선 ‘파인 마치’호를 보유하고 있던 보양수산은 곧 일본의 다이요(大洋)어업에서 1,000톤급 어선을 인수해‘파인 마치 2’호로 명명하고, 자선으로 101호와 102호 두 척을 거느리고 조업에 나서기로 했다. 기존의 500톤급 냉동운반선 ‘파인마치’호는 조업선으로 개조해 파인 마치 1호로 개명하고, 103호와 105호 자선 2척으로 선단을 이루어 태평양 중부에 출어하였다. 자선 2척은 목선이었고, 다른 2척은 FRP선이었는데, 4척 모두 도쿄의 파트너격인 Ocean Pioneer의 스즈키(鈴木)사장의 보증으로 마루베니(丸紅)의 자금대출로 구입하게 된 것이다. 


모두 중고선이었던 까닭에 수리를 영도의 동일조선(김성집 사장, 한해대 E7)에 맡겼다. 우리 회사의 자금사정을 잘 아는 김성집 사장이 수리비를 외상으로 해줄 것이니 일단 어음을 발행해주면 자기회사의 신용으로 은행에서 할인해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수리 완료후 일괄 정산하겠다고 조 사장이 약속했다며 어음 발행을 거절했는데, 이는 하급자인 내가 상급자인 조 사장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도크에서 수리를 마치고 2주일간의 항해 끝에 어장에 도착해 조업을 시작했는데, 자선 1척이 문제가 발생해 모선에 접현해 자체 정비를 시도했으나 모선까지 조업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자선 1척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3척이 모두 항구로 입항해 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대박의 꿈을 꾸며 출항한 첫 원양조업은 실패로 끝이 났다. 아무리 친구지간이라도 공과 사는 구분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절해야 하는데, 후배이자 상하 관계, 대주주와 소주주 등등 생각해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는 결국 보양수산이 보양선박과 보양상운으로 분리되는 단초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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