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6. 25 사변 당시 우리나라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였던 신성모는 국가운명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전쟁 상황하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전국(戰局)을 크게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관련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의 휘하기관에서 국민방위군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이 잇달아 터졌을 뿐만 아니라 그 수습 과정에서도 별로 설득력 없는 변명으로 사태를 호도하려하다가 국내외여론과 야당의 진상규명 공세에 밀려 국방부장관과 겸직하였던 국무총리 서리직에서 물러난 사람으로서, 우리 국민들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인 정치인의 한사람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요직에 등용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해운 60년사를 정리하면서 이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신성모가 해운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기능과 업적을 남긴 사실을 발견하고는 주의 깊게 그의 업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영국 상선의 갑종선장(특히 선장중의 선장이라고 추앙받는 엑스트로 마스터 면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이 갖추어야할 전문지식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이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1950년대 우리나라 해양정책의 수립과 집행과정, 그리고 해기사를 양성하는 해양대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정치인으로서의 신성모와 해운인으로서 신성모의 업적은 또 다른 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고 여기에 그 개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본문의 전개과정에서 그때마다 설명하겠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아주 단편적일 수밖에 없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그의 기능과 역할을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글의 진실성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신성모의 해방전 이력과 이승만의 총애
신성모(申性模:1891-1960)는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국권이 피탈되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안희제(安熙濟)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1913년에 우쑹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와 난징항해대학(南京航海大學)을 거쳐 런던에 소재하는 플리머스해양대학(Plymouth Marine College)에 유학하여 1등 항해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영국 상선의 선장을 지낸 후 인도상선회사의 고문으로 있다가 8.15 광복이후 귀국하였다. 또 신성모는 영국의 선장 중 특히 우수한 선장에게 부여하는 엑스트라 마스터(extra master)의 면허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것도 확인된 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성모의 엑스트라 마스터 면허의 취득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도 있다. 신성모는 항해사로서 선상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지독히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아마 그랬으니까 자존심이 강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선장이 될 수 있었고, 엑스트라 마스터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엑스트라 마스터는 선장 중의 선장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명예면장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는 잘 주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면허 시험을 신성모가 보러 간 것이다. 그때 면접을 하였던 시험관이 이 면허는 유색인종인 당신에게는 줄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신성모가 물러나오면서 “당신이 안주어도 좋소. 지금은 그대로 돌아가지만 당신이 죽고 나면 나는 다시 와서 이 시험을 보고 엑스트라 마스터가 꼭 될 것이요.” 하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의 끔직한 총애를 받은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였다. 신성모와 이승만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왜 그렇게 좋아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일설에는 영국선장을 하면서 이승만 박사가 하던 독립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항해하면서 밀명(密命)을 전달하는 심부름도 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기는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승만대통령과 신성모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매주 목요일 오후를 ‘민성일’(民聲日)로 정하여 국민과의 대화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할머니 한분이 민성일 행사에 참석하여 “대통령 어른께서 내 아들을 좀 데려와 주이소”라고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이 “당신아들이 누구요?”라고 묻자, “내 아들이 신성모입니다”라고 답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승만은 “오, 캡틴 신! 선장하는 신성모말이지”라며 “신성모씨는 얼마 전에 내가 불렀어, 아마 곧 돌아올 거요”라고 했다. 실제로 12월 중순(1948년) 신성모는 경무대로 이승만을 찾아왔고, 12월 23일 윤치영의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뒤 곧바로 국방부장관, 대한청년단 초대단장, 국무총리서리 등을 맡으며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1) 신성모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늘 신성모가 선장 출신이라 하여 ‘캡틴 신’이라고 불렀다.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신성모가 공직에서 물러난 얼마 후인 1951년 5월 20일 경 국무회의에서의 일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변영태 외무장관이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내정했다는 안건을 설명했다. 이에 5월 18일 이시영의 후임으로 선출된 부통령 김성수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이것 보시오, 부통령. 우리는 개인감정을 초월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네다” 이에 김성수는 “신성모씨로 말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대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지금 재판에 회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요직에 중용한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라며 맞섰다.


이승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국무회의는 격론 끝에 토론을 거쳐 신성모의 주일공사 임명안을 부결시켜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변영태 외무장관을 불렀다. 변영태가 들어서자마자 이승만은 “캡틴 신의 아그레망을 보내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변영태가 “그러면 국무회의 의결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반문하자 “대통령은 나야.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면 되는 것입네다. 내가 임명하니 장관은 내지시대로 하면 그만입네다” 이렇게 해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신성모는 오히려 일본공사로 떠나게 되었다.2) 신성모는 그때까지 주일공사를 역임하였던 대한해운공사 사장인 김용주의 후임으로 1951년 8월에 주일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평화선의 선포와 관련된 해양관련 정책의 전개와 신성모의 역할
1952년 11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해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신성모가 위원장이 되었다. 이 해사위원회의 주 임무는 선박의 검사와 선원의 자격시험에 대한 입회였기 때문에, 교통부 해운국의 업무와 중복이 불가피한 것이어서 옥상옥(屋上屋)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해사위원회는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를 위해 마련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의 자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해사위원회가 아무 일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해사위원회 설치를 전후하여 정부가 전개했던 다음과 같은 해양관련 주요정책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고 생각된다.


위와 같은 해양관련 정책의 결정에 신성모가 어느 정도 관여하였는지, 그리고 해사위원회의 업무성격 상 관여할 성질의 업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해사위원회가 깊숙이 관여한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무청을 설립하던 무렵을 전후하여 부산해사국장을 역임한바 있는 이성환(李星煥)의 증언에 의하면, 이성환은 어느 날 신성모 위원장으로부터 장기간 서울에 있을 준비를 하고,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고 올라갔다. 그리고 신성모의 바로 옆방에 책상하나를 놓고 해무청(海務廳)을 설치하기 위한 준비작업 지시를 받고 작업을 하였다. 약 한 달의 준비과정을 거처 어느 정도 안이 완성되자 수고했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해서 다시 부산의 본직으로 돌아왔다. 그 얼마 후에 해무청을 설치하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어 해무청이 설치되었다. 위와 같은 이성환의 증언으로 보아 해무청의 설치작업에 신성모가 실무적으로 깊이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업무에 관하여는 불확실하나, 당시 정부안에서 해양관련 국제법의 동향과 원칙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이승만대통령이 스스로 실무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평화선의 선포, 그리고 이를 집행할, 포획심판령(捕獲審判令)의 제정과 집행, 해군에 의한 외국어선의 나포가 국제법위반이라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해군의 장비와 인력 일부를 할애하여 해양경찰대를 설치한 일, 그리고 해무청의 설치라는 일련의 정책 입안과정에,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여 신성모씨가 깊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평화선으로 부르는 인접수역에 대한 대통령의 주권선언은 신성모가 주일공사로 있을 시점에 선포되었으므로 평화선의 선포와 관련된 신성모의 역할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쉽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평화선은 신성모의 주일공사 취임과 평화선의 선포는 밀접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화선은 1948년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발표한 인접해양과 대륙붕에 관한 주권선언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실직한 신성모를 부통령 김성수와 국무회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일공사로 임명한 것은 단순히 신성모에 대한 총애만이 아니라 이 평화선의 선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평화선의 선포안을 작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전술한 바와 같이 국무회의에서 부통령 김성수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을 때, 이승만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이것 보시오, 부통령. 우리는 개인감정을 초월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네다.”라고 반박한 점은 이 대통령으로서는 신성모에게 중대한 밀명을 주고 주일공사로 보내는데 그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고 답답해서 나타낸 불쾌감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의 국내사정은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으므로 어수선하여 차분히 이런 문제를 연구할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자료를 구하기도 쉽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극동군사령부가 있어, 미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쉽게 구득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평화선 선포직전까지 일본의 해상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던 크라크 라인의 철폐 문제를 미군당국이 검토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므로, 크라크 라인 철폐와 관련된 정확한 정보와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평화선의 선포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기로는 신성모 밖에 없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성모는 영국 선장이 되고, 영국의 엑스트라 마스터가 되기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는 점, 그리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한국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후에 보인 그의 학구적인 자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급 선장의 필수 지식이어야 할 해양법에 대하여 통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의 고급 해양정책 결정에 자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 대통령도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국제법에 대하여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1950년대의 우리나라 해양 정책의 큰 줄거리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화선은 또 한가지 이승만의 신성모에 대한 총애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신성모가 해양대학 학장으로 부산에 머물고 있을 때 자유당의 실권자이며 2인자였던 이기붕이 부산지역에 내려올 경우, 가장 먼저 신성모를 찾아와서 큰 절을 하고, 무슨 용건으로 부산에 왔다고 보고를 한 후 일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이기붕이 정말로 신성모를 존경해서 그랬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가 남다르고 이승만 대통령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신성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좋다고 보고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실제 그는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서리라는 전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위와 같은 총애를 바탕으로 정부 관계기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해양대학이나 해운행정부서에서 타부처의 협조를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 신성모를 방문하여 정중히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면 관계장관 등에게 전화해서 해결해주기도 하였다고 하며, 후일 해양대학 학장에 취임하고 나서 대학개혁을 할 때 예산 등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 등이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황을 종합할 때 적어도 포획심판령의 제정, 해양경찰대와 해무청의 창설에 깊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성모의 해대학장취임과 대학개혁
1956년 11월의 어느 날 신성모가 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해양대학은 국립학교이기는 하였지만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업무를 학교가 스스로 자치적으로 운영하여왔는데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신성모가 새로운 학장으로 취임하자 적지 아니 당황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상 이를 거절할 명분도 힘도 갖고 있지 아니하였다. 신성모는 취임하자마자 대학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의 업적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에 대한 처우개선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한국해양대학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린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해양대학이 관비학교(官費學校)로서 수업료가 면제되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정부가 제공하는 제복을 입고, 급식도 무상으로 받았으나 비슷한 여건에서 교육을 받는 사관학교와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사병수준의 처우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였고, 교직원들의 처우도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것을 사관학교 수준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처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러한 신성모의 업적 때문에 신성모의 취임을 전후하여 재학하였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신 학장이야 말로 한국해양대학의 위상을 한 계급 격상시킨 공로자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신성모가 취임이전까지만 해도 학교 급식이 너무 나빠 학생들이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였으나, 신성모가 취임한 후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2. 교육 제도의 전면적인 재정비
한국해양대학의 해기사 교육제도는 일본식 해기사 교육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실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학교 교수들이나 사용가능한 교재가 일본의 그것밖에 없었고, 서구의 해기사 교육제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안된 상황이므로 급한 대로 일본식의 교육을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성모는 취임하자마자 “일본식 교육으로는 안돼”라고 하면서 교육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여 미국의 킹스 포인트3)의 교재를 구하여 이를 해군 인쇄창에 부탁하여 복사하여 교재로 활용하도록 하였고, 커리큘럼도 하나하나 점검하여 고칠 것은 고쳤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각 교수의 수업에 참관하여 직접 강의를 수강하고 교수에게 질문하는 등 아주 적극적이었다. 또 교수들을 공부하도록 유도하여 많은 교수들이 박사학위를 받도록 하였다.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높이기 위하여 학생들의 주말외출을 금지시키고, 학생들에게 영어교육을 강화하도록 조치하는 등 대학다운 교육제도를 하나하나 정비해나갔다. 특히 해양대학의 교재를 미국의 킹스 포인트의 교재로 대체하고 이 교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어교육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해대 졸업생들의 영어실력이 월등하게 향상되어 그후 해대졸업생들의 국제사회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3. 해군예비원령의 제정과 시행
신성모의 업적 중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업적은 해군예비원령을 제정하여 해군예비원(海軍豫備員) 제도를 창설하였다는 점이었다. 한국해양대학 졸업생에 대한 병역문제는 6.25동란으로 우리나라에 징병제도가 생긴 이래의 문제였다. 대체로 징병제 시행초기는 전시(戰時)였으므로, 선박들이 전시 통제 하에 있었고, 군 당국에서도 전쟁수행에 선박과 그 선박을 운항하는 요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선박 운항요원들에 대하여 병역면제(兵役免除) 조치를 해 주었다. 또 일부는 해군 측의 수요에 응하여 해군장교로 복무하게 되어 병역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한국해양대학 졸업생들의 병역이 문제가 되어 사병으로 징집되는 사례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해양대학 동창회가 적극적으로 해운당국과 병무당국을 설득하여 큰 물의가 없이 잘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신성모가 취임하자 신성모는 한국해양대학 재학생에 대하여 군사교육을 시키고, 졸업과 동시에 해군장교로 임관시키고, 필요한 사람만 현역으로 복무하게 하고, 나머지는 바로 예편하도록 하여 병역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비상시에 해군예비역 고급인력을 확보하는 제도를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958년 10월 7일자 대통령령 1305호로 해군예비원령(海軍豫備員令)이 공포되어, 한국해양대학 재학 중에 소정의 군사학을 이수하면 졸업과 동시에 해군 예비역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임명된 날로부터 5년 이내에 2년 이상 승선 근무하면 퇴역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은 한국해양대학의 위상을 크게 격상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학생들이 해양대학을 지원하게 유도하여 60년대 이후 한국을 해기사 강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유수한 선원공급국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4. 연습선 반도호의 확보
신성모는 상선의 사관을 양성하는 학교에 연습선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정부와 대한해운공사를 설득하여, 대한해운공사의 소유선인 김천호(金泉號, 3,081총톤)를 매입하였다. 김천호는 1946년에 조선우선이 일본으로부터 반환 받은 5척의 선박 가운데 하나로 이미 선령(船齡)이 23년에 이른 노후선(老朽船)이었다. 한국해양대학은 1959년 수리비 4,500만환을 대한해운공사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 선박을 1억 900만환에 구입하였다.


한국해양대학은 1960년 2월 2일 김천호를 조선공사 선거(船渠)에서 인수하였으나, 원래 화물선이었던 이 배를 연습선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개조(改造)가 불가피하였다. 그래서 조선공사 선거에 다시 입거(入渠)시켜 개조공사를 진행하던 중 4. 19가 일어나 이 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후임인 윤상송 학장이 마무리 지었다.

 

신성모에 대한 인물평
정치인으로서 신성모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운인으로서의 신성모의 면모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그에 대하여 좋게 말하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여 그의 인물됨을 판단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이준수 전 해양대학 학장의 기억
이시형 선생은 신성모 학장을 매우 존경하였다. 바다를 제패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세계의 최강자가 되었던 영국의 선장 중의 선장인 엑스트라 마스터(이 엑스트라 마스터 면장을 가졌다고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일종의 명예 면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면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지위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장을 가진 해기사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통과 명예를 존중하고 백인 우월 사상이 강하였던 당시 영국에서 이러한 면장을 국권도 상실한 나라의 선장에게 준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시형 선생은 해방된 얼마 후 신성모가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찾아뵙고, 자신이 맡고 있던 한국해양대학 학장직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신성모도 이시형의 제안에 큰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신성모가 이승만 박사에게 발탁되어  요직을 맡게 되자 이 일은 자연스럽게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 후 이시형은 학장으로 있으면서 신성모를 대선배로 깍듯이 모셨다. 신성모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이시형은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면 이준수(당시는 학생과장이었다고 함)를 대동하고 자주 신성모를 방문하였다. 이시형이 깍듯이 예의를 갖춘 후 업무를 보고하고 협조를 요청하면, 신성모 위원장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청렴강직한 자세
신성모의 아들이 당시 육군의 장교였다고 한다. 신성모가 학장으로 재직 중 이 장교인 아들이 아버지를 방문할 때 군용 지프차를 타고 왔는데 군용차량을 사용으로 사용한다고 아버지가 야단을 치는 통에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 시켜놓고 걸어서 찾아뵈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차를 자유롭게 사용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한 번은 군의 고급장교가 찾아와 생색을 낸다고 그랬는지 “다음 있을 군 인사에서 아드님을 승진시키겠습니다”라고 하자, “장교의 인사는 군사기밀인데 귀하는 그런 군사기밀을 왜 사전에 누설하는가!”라고 야단을 치는 통에 혼비백산하고 달아났다는 일화도 전한다.

 

매우 학구적인 자세
그가 학구적이고, 선장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가졌다는 것은 엑스트라 마스터 면허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나, 학장 재직시 강의중인 교실에 들어와 질문하고, 잘못알고 있는 것을 해설하는 것을 들은 당시 학생들은 그가 많은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① 1952년 1월 18일 : 평화선 선포(정식 명칭 :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
② 1952년 10월 14일 :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여, 평화선을 침범하여 불법어로를 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여 심판함. 포획심판업무는 해군이 관장
③ 1952년 11월 : 해사위원회를 설치하여, 해사업무에 관한 대통령자문기구로 함.
④ 1953년 12월 23일 : 해군의 장비와 인력 일부를 분리하여 해양경찰대 신설, 평화선의 수호 업무, 특히 불법 조업하는 일본 어선의 포획심판업무를 담당하도록 함.
⑤ 1955년 2월 7일 : 해사행정업무를 통합하여 해무청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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