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자나 후배가 진정으로 이시형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
이상에서 약간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까지 거론하면서 해양대학과 이시형 선생, 그리고 해양대학 졸업생들의 이시형 선생에 대한 깊이를 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보았다. 그렇다면 이시형 선생의 어느 면이 제자들의 마음을 종교적 신념을 방불하게 할 정도로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그간 여러 곳에서 들은 것과 본인의 회고록, 그리고 신상초 선생의 글을 통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강한 민족의식과 애국지사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들을 제외한다면 이시형 선생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고, 이것을 직접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상선학교 졸업 후 조선우선에 취직을 하였는데, 일본인 선장과 자주 다투었고, 그 연유인지 승진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일화는 이시형 선생이 아니면 못할 일이다. 즉 2차 대전 중 승선중인 선박이 일본군에 징발되어 동남아 지역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때는 전황이 불리하여 일본군이 패퇴하는 중이고 일본 상선은 미군의 폭격과 잠수함 공격으로 곳곳에서 침몰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은 이시형 선생의 회고록의 한토막이다.


‘나는 한국선원 30여명을 구명정 갑판에 소집하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일본은 머지않아 전쟁에 질 것이고 우리도 오래 배를 타고 있으면 죽게 될지 모르니 일본을 위하여 개죽음하지 말고 일본으로 돌아가거든 하선하여 고향으로 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 굴수독(堀秀篤)선장이 “자네 어젯밤 선원들 모아놓고 무슨 연설을 했느냐?”고 끈질기게 물어오기에 적당히 얼버무린 적이 있었다. 본선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꾀병으로 군의관의 하선허가를 받고 인천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후일 들은 바로는 그 배는 다음 항해 때 월남‘캄란’항에서 격침되어 불과 수명만이 생존하고 그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상초 선생이 지적한대로 이시형 선생의 직정경행한 성격의 한 발로라 할 것이다. 2차 대전 말기의 일본군의 광분을 직접 경험한바 있는 신상초 선생은 이 학장의 이 일에 대하여 그 당시 그런 연설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2) 명리를 초월한 생활태도
해방 후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용어가 전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전문기식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해기사와 같은 전문직이 태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해기사의 경우, 선박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가용 고급해기인력이라야 1~200 명에 불과하였는데 미군대여선 등 수십 척의 대형선(당시 기준으로)을 운영하여야 하였고, 해군(초기에는 해안경비대)측에서의 수요도 있고, 행정부서에서의 수요 등, 공급에 비하여 수요가 월등하게 많았다. 그러므로 취업을 하거나 돈벌이 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실제 고급해기사들은 그런대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해양대학은 예외였다. 명색이 관비의 국립대학이라고 했지만 쥐꼬리만 한 예산도 변변히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빈약한 국고사정으로 공무원이나 국립대학교수의 봉급은 쥐꼬리 반도 안 될 상태였다. 후진양성이라는 원대한 뜻이야 좋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장은 한번 후진 양성의 길에 나선이후, 평생의 천직으로 알고 자리를 지키면서 학생들과 함께 강냉이밥으로 만족하면서 청빈한 생활을 장기간동안 영위하였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소위 생계형 부정(생활비 조달을 위한 부정)이라는 것이 일부 묵인되기도 하였으나, 이 학장님의 경우 그런 것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재정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여유가 있다고 해도 그럴 분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학장님은 학장직이라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거의 안하셨다. 그러한 단적인 예로 정부수립 후 오랫동안 해운국장직에 있던 황부길(역시 일본 상선학교 출신 해기사)씨가 해난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러자 이 학장님이 황부길씨를 만나 ‘당신이 해운국장을 해서 관계에 발도 넓고 행정도 잘 알 것이니 당신이 학장을 맡아 주시오’라고 하면서 학장직을 황부길씨에게 인계하고 스스로를 부학장으로 강등해서 근무하였다. 세상의 명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대쪽 같은 선비기질이 아닐 수 없다.     
 
3) 영원한 바다 사나이
이시형 선생은 정말 승선 생활을 즐길 줄 아는, 그리고 바다에서 죽기를 결코 겁내지 않는 바다 사나이 중의 바다 사나이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선박에서 승선생활을 시작한 후 해방될 때까지 계속 승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선원들을 모아놓고, 일본을 위해 개죽음하지 말라고 역설할 때, 목숨이 아까우니 개죽음하지 말고 도망가라가 아니라, 일본이 패전할 경우, 한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목숨을 아껴두었다가 조국을 위해 이 목숨을 바치자고 한 것이 바로 이시형 선생의 바다사랑 정신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아낀 목숨을 해방된 조국에 바치면서 해양대학을 설립하여 헌신하였다. 그때, 해대의 학훈을 정할 때 그 제4조에서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埋骨)”을 집어넣었다. 해기사, 즉 바다사나이라면 바다에서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학훈을 스스로 실천하기도 하였다. 타의에 의하여 해대학장직을 물러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바로 다시 승선생활을 시작하여 10여년 이상을 승선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승선생활은 정년으로 더 이상 승선생활을 못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시형 선생은 “마도로스는 바다사람이다. 바다사람이 바다에 나가 일하기를 꺼리거나 싫어하면 그는 벌써 바다사람으로서는 끝장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시형 선생은 신상초 선생과 직장을 달리한 후에도 의기  투합하여 기회만 있으면 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언젠가 신상초 선생에게 말씀하시기를 “글 쓰는 사람이 펜을 버리면 글을 쓸 수 없지. 이와 마찬가지로 마도로스가 배를 떠나면 그는 마도로스가 아니라네”라고 말씀하셨다(신상초 선생의 글에서). 신상초 선생은 당대의 이름 있는 평론가였다. 반면에 이시형 선생은 바다를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고 평생을 해기사로서 헌신하였던 진정한 바다 사나이였던 것이다.   
       
5. 한국해양대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끝으로 한국해양대학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사적 의의는 단순하게 일제 36년의 노예적 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았다는 것 이외에도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농경문화 중심의 알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1의 물결에서 벗어나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제2의 물결로 갈아타는 역사적 전환기이기도 하다. 또 이 나라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숙명적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근대적인 잘사는 선진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이러한 민족사적인 과도기에서 한국해양대학,그리고 여기서 양성된 해기사들이 기여한 공로를 시대사적인 순서에 다라 간략하게 짚어 보고자 한다.

 

1) 민족상쟁(民族相爭)의 6. 25 극복에서 맹활약
해양대학에서 양성된 해기사들이 가장 먼저 한국현대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유사이래 한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6. 25라는 민족상쟁의 비극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비극은 2차 대전 후의 세계가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어 세계지배권을 놓고 건곤일척의 쟁패를 거듭하던 갈등의 산물이다. 이 6. 25 민족상쟁이 북의 승리로 끝났다면 이 나라는 지금도 지구상의 가장 낙후된 국가체제중의 하나인 공산주의 국가로 남아 지금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가난을 넘은 굶주림의 지옥 속을 헤매고 있을 공산이 크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6. 25를 맞이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이 비극을 극복할 아무런 준비도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미국이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하여 최악의 결과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선박운항이라는 면에서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양대학에서 양성된 해기인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2차대전시 건조하였던 수많은 전표선을 이용하여 최전방을 지원하는 후방해상 수송활동을 충분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개입에 의하여 1. 4후퇴라는 전술상의 후퇴를 감행할 때 북한의 주민들의 피난길을 도와 대량으로 해상 수송하여 자유를 찾을 수 있게 한 공로는 흔히 군사작전상의 공로로 기록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 해기사들이 이룩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해기사들이 전시에 수행하여야 할 해군고급인력의 비상공급과 후방수송임무의 수행을 창립한지 채 10년도 안된 해대출신 해기사들이 훌륭하게 수행하여 민족의 비극을 최소한에서 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 60년대 이후 경제건설에서 중추적 역할 수행
4. 19 민주화 의거에 이은 5. 16 군사혁명으로 경제건설이 시작되자 해대출신의 해기사를 주축으로 한 선원인력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부(否)의 유산인 ‘보릿고개’를 추방하는 것이 경제건설의 현실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경제개발의 여건은 너무나 열악하였다. 좁은 국토에 빈약한 자본, 그리고 자본축적이 전혀 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하는 인구가 많은 암담한 현실이었다. 그래도 뜻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넘쳐나는 인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인력을 활용하여 경공업 제품을 제조, 수출하였고, 그래도 남는 인력은 노동력자체로 수출하였다. ① 월남파병과 이에 부수되는 각종용역(다양한 무기와 군수품의 운송과 보관, 관리 등), ② 서독으로 간호사와 광부의 파견, ③ 중동 건설 진출, ④ 그리고 선원의 해외취업 등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력수출이 선원수출이었다. 다른 인력 수출과는 달리 선원인력수출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 때마침 국제선원노동시장에는 능력을 갖춘 해기사를 주축으로 하는 팀워크가 좋은 선원을 구하지 못하여 고심 중이다가 한국선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제선원노동시장에 일단 한국선원의 우수한 기술수준과 근면, 성실한 업무자세가 알려지면서 한국선원에 대한 수요는 무한대로 증대되었다. 그 많은 해대졸업 백수들이 하루아침에 고갈되었고, 선원임금은 천정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인력수출 중 선원인력수출이 가장 떳떳하고, 고임금을 엔조이 할 수 있었고, 선주들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선원수출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수출 선원의 임금수준은 국내의 비교 가능한 유사직종의 7배내지 10배, 그리고 다른 해외취업자들의 임금의 2~3배를 기록하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인력수출과는 달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스컴에 의한 홍보가 덜 되어,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잘 몰랐다는 점이다.

해양대학이 양성한 고급 해기사 중심의 선원인력은 비단 해외수출에 의한 외화 획득뿐만 아니라, 국내취업에도 적극적이어서 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해운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임금수준은 국제임금수준을 유지하였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해기사를 주축으로 한 선원인력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의 ‘보릿고개’ 조기추방에 크게 한몫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원인력의 유지는 우리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여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미 자국 내에서 양선한 선원에 선박운항을 위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만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동남아 선원의 국제선원노동시장에의 대량 진출 등으로 한국선원의 해외취업은 한계상황에 돌입할 시점이 되었음에도, LNG선 등 고가선에서는 여전히 한국선원의 수요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이는 임금 수준보다는 선원의 자질이 더욱 중시되는 고가선의 속성에 따른 현상이다.     

 

3) 70년대 조선공업의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
1960년대와 70년대는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산업사회의 조기정착에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중화학 공업과 기계공업의 발전이다. 해양대학 기관과 출신들은 당시로서는 대형발전기 등을 다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력공급원이었다. 또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이루어진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해양대학 출신의 해기사가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특히 70년대 초 현대조선이 울산에 거대한 독크를 건설하여 세계조선시장에 진출할 때, 외국의 해운관련 전문지들은 ‘아무런 경험도 없는 한국이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데, 이 선박이 진수될 때, 과연 선박이 물위에 뜨는지에 대하여 세계의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할 정도로 세계해운 조선계가 경이와 질시의 눈으로 바라본 일이 있다. 그 결과 이 선박은 훌륭하게 물위에 뜰 수 있었고, 선주에게 성공적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이 세계조선사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도 바로 한국해양대학이 배출한 해기사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조선 산업은 다시 한 번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고,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 역시 해양대학 출신의 경험이 풍부한 고급 기술인력 덕분이었다.

 

4) 수많은 해운업경영자 및 세계주요항만의 한국해기인력 네트워크
그 외에 한국해양대학 출신들은 60년대 이래 꾸준히 자기의 전공과 숙련 노하우를 활용하여 해운업과 그 부대사업의 경영분야에 진출하여 많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이후 두드러져서 현재는 수적으로만 보면 해운업 및 그 부대사업의 과반수가 해대 출신 해기사들이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우세를 보이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해운의 중심은 런던, 놀웨이의 오솔로, 그리고 뉴욕이었다. 지금은 이 중심이 싱가포르, 홍콩, 도오쿄, 그리고 서울로 바뀌었다. 특히 2000년 이후 서울은 세계해운중 가장 잘나가는 한 중심축으로 우뚝 솟고 있다. 이 서울 중심의 해운세력의 오너쉽의 과반수 그리고 CEO의 상당수가 해기사 출신으로 서울의 해운 클러스터는 해기사들이 주역이라고 할 수 있고, 이 해운클러스터는 앞서 본 선원수출의 예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동력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고 발전하였던 것이다. 한사람의 위대한 희생적 봉사가 한나라와 한산업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 외에 해기사의 직업 속성상 세계각지를 누비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정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다른 대학에 비하여 월등하게 많다. 특히 그들은 세계의 주요항구를 중심으로 정착한 경우가 많고, 그 생계도 항만과 해운 및 선박에 대한 서비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의 주요항만에는 많게는 100여명, 적어도 10~20명의 해기사 출신 중소기업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전술한 해대출신들의 독특한 결집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단단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한다면 전 지구를 커버할 수 있는 해기사 연계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상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인력들이 다양하게 일하면서 한국과 해양대학을 빛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백지위에 해양 한국의 건설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하나만 가지고 해양대학을 출범시킨 이시형 선생에서 시동되었다는 것을 한국현대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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