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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예/ 왕자와 철학자
[540호] 2018년 08월 31일 (금) 13:45:58 천태봉 (H-LINE해운 기관장) komares@chol.com
   
천태봉 (H-LINE해운 기관장)

실기사가 일과를 마치고 브릿지에 놀려왔다. 여기에는 같이 실습 온 동기 친구 실항사가 있다.
더운 데서 일하고 씻지도 않은 채 제 보러 올라온 친구를 실항사가 놀린다.
“지하실 촌 놈! 오늘 거기 좀 더웠지? 스카이라운지에 올라오니 어떻냐? 눈도 몸도 마음도 시원해서 세상이 다 훤하지?”

기관실과 브릿지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기사도 지지 않는다.
“그러다 파도치면 징징거리지 마라. 그때는 여기가 지옥이고 거기가 천국이지.”
파도가 치면 브릿지는 많이 흔들리고 기관실은 조금 움직인다.
친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실항사가 손을 들어 바다를 펼쳐 보이듯이 말한다.
“야, 저 광활하고 장엄한 바다를 좀 봐. 저 끝없는 수평선, 저 파란 하늘, 저 하얀 구름, 저 쪽에는 고깃배 한 척도 너처럼 쫄쫄 따라오고 있네. 저기 갈매기들의 유려한 날개 짓을 봐라. 얼마나 멋지냐? 아까는 돌고래 떼도 지나갔어. 돌고래가 우리 배와 나란히 경주를 하는 거야. 우리 배 선수가 일으키는 부챗살 물결을 봐라. 돌고래가 반할만하지 않니?”
실기사가 되받는다.

“야! 내가 엔진을 돌려서 선체를 밀어주니까 물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야지!”
온 바다가 제 것인 양, 실항사는 여전히 신이 나서 자랑을 이어간다. 오늘 바다가 유난히 잔잔하다.
“저 앞에 거울처럼 펼쳐진 바다를 봐라. 우리 배가 보이지 않는 신비한 장막을 가르고, 혜리공주님 사는 궁전으로 들어서는 것 같지 않니. 저 비단결 같은 해면은 나 밟고 오라고 공주님이 깔아주신 주단 같구나.” 혜리는 실항사가 제 애인이라고 우기는 걸그룹 멤버의 이름이다.
실항사는 홍조를 띠며 계속 잇는다.

“조금 있으면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뜨겠지. 바다의 밤하늘은 공주님과 손잡고 데이트하는 것처럼 감미로워. 수평선 위로 펼쳐져 있는 별들은 내 발 아래에 있는 것 같고, 머리 위의 푸른 별들은 마냥 우루루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공주님과 내 앞에 뿌려지는 축복의 폭죽이야. 우리 교수님이 기관사하면 좀생이 되고, 항해사하면 아주 스케일 큰 사람이 된다고 했어. 너는 어쩌다가 기름쟁이가 됐노? 지금이라도 항해과로 바꿔라!”
실기사가 이어 받는다.
“야, 세상 껍데기만 보고 헬렐레 하지 마라. 배는 달리는 것이 본분이야. 달리는 것의 주체는 엔진이야. 지하에 있는 그것이 배의 심장이듯이, 우주의 저런 현상들도 저것들을 있게 하는 본체는 따로 있다구. 거기로 가는 길이 우리 기관실을 통해서 있지.”

“기관실에 뭐가 있다고? 쇳덩어리 말고 뭐가 있어! 우리가 행사할 때 외치는 구호 있잖니.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말이야. 그 다음에는‘우주로!’가 되겠지. 나는 배에 와서 우주를 만났어. 오대양 육대주, 지구가 얼마나 커! 그러나 이제 이것이 조그만 발판 같애. 우주로 향해서 내가 딛고 선 동그랗고 푸른 발판 말이야. 나는 밤이면 지구를 타고 가없는 우주를 나른다. 바다에 와서 내 영혼이 우주로 확장되었어. 아니 우주가 내 마음이 되었다. 나는 월급 안 줘도 배 탈거야.”
“너무 흥분하지 마!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런 현상들은 물에 비친 달이나 구름같이, 무엇인가가 비추어진 그림자일 뿐이야.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영혼의 힐링을 이루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저런 것에 정신 홀리는 사람은 또한 저런 것으로 눈물 흘리는 거야.

“너 요새 고리타분한 만화책 읽더니 어설픈 철학자 흉내 내는구나.”
“책이 아니라 엔진이야. 기관실에서 엔진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철학자가 되는 것 같아. 프로펠러를 돌리는 엔진의 힘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스톤 위 연소실에서 그 힘이 만들어 지잖아. 그 속의 작용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거기야 말로 세상의 중심이고 우주의 근원이야. 우주 탄생의 빅뱅이 거기서 일어난다 말이야. ”
“그 시끄러운 기계 속에 뭣이 있다고?”

“우리가 한국을 출항해서 수천 마일을 달려왔지. 이 거리를 오기 위해, 우리 프로펠라가 백만 바뀌쯤 돌았을 거야. 그러면 엔진 연소실에서는 빅뱅이 몇 번 일어났을까. 6기통이니까 6백만 번의 폭발을 일으켜서 피스톤을 밀어주었어. 그 폭발의 과정을 세분하면 흡기 압축 폭발 배기니까 4배하고, 이 동작들을 위해서 일하는 기기들은 또 얼마나 많아! 연료펌프 배기배브 윤활장치 등, 그 모든 장치들이 작동하는 과정 하나하나에는 또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어? 흡입 과정 하나만 해도 과급기가 공기를 빨아들여야 하고, 냉각기가 이 공기를 냉각시키지. 이 냉각에는 펌프가 또 여러 과정을 거쳐서 돌아가지. 기계적 과정 뿐 아니라 전기도 공급돼야 해. 전기는 또 그 주파수대로 초당 60번을 오르내리고, 그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발전기가 또 수많은 과정으로 돌아가지. 그렇게 엔진을 돌리기 위해 생산되고 부산되는 에너지들을 각 센서들이 그 압력과 온도와 속도를 감지해서 디지털로 바꿔서 보내줘야지. 그것을 받은 제어반이 그 값들이 정상인지 판단을 해서, 다음 작동 명령을 내리는 거야. 이러한 과정이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는데, 어찌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돌아갈까? 놀랍지 않니?”

실항사가 말을 받는다.
“야, 그것은 기계니까 그런 것이지. 열역학을 비롯해서 동역학 유체역학 연소공학 등의 자연법칙에 입각해서 설계되고 만들어진 대로 엔진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니! 저절로...”
“맞아! 저절로... 엔진에 주입되는 연료유가 열역학 법칙에 따라 작용해서 우리 배가 나아가는 힘을 만드는데, 지구가 탄생하고 낮과 밤이 바뀐 횟수보다 더 많이 작동했을 거야. 그게 간혹 잘 못 작동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정확하고 한결같이 동작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냐고? 나는 볼수록 신비해. 그것은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역학작용이라는 방편으로 천체를 운행하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거야. 니네 항해학은 역학 가운데 동역학의 작은 한 부분이야.”

“...!” 
“우리 교수님은 말이야. 멋쟁이 항해사가 되는 것도 좋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관사가 되어서 역학작용을 공부하고 다루는 것이, 세계와 나의 본질을 손으로 만지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어. 엔진을 돌리는 역학은 천체 뿐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먹고 배출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구성과 작용에도 그대로 적용돼. 꽃이 피고 지는 근저에도 역학적 작용이 있고, 모든 생물도 역학적 법칙에 따라 생동하는 역학 생체이고, 사람의 마음마저 역학의 원리대로 작용하는 역학 유기체라는 거야. 사람을 영장류니 정신체니 인격체니 하지만, 뭐 특별한 것이 아니고 기계가 작동하는 모양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거지. 네가 바다를 보고 흥분하는 것도, 눌려지면 압축되어 솟아오르고, 오르면 퍼져나가는 물질계의 열역학 작용과 같이, 네 처졌던 마음이 떠올라서 펴지며 춤추는 것이라구.”

“뭐야! 너 지금 내 마음이 물질적 작용의 결과라는 거야? 유물론인가 뭔가에 이어서 빨갱이가 연상되네.”
“그렇게 본다 해도 그 바탕에는 양자역학이 있고, 양자 차원에서 물질과 우리 마음이 연결돼 있단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세상 모든 것이 나온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이 보여준다고 비약하는 사람도 있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이 바다도, 이 우주도 진짜로 우리 마음에서 나온다는, 더욱 심오한 유심론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깊이는 모르고, 다만, 화나고 기쁘고 괴롭고 행복한 우리의 삶이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역학적 작용을 느끼면서 엔진을 돌리고 싶어. 엔진을 운전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은 거지. 이제, ‘우주로!’ 다음에는‘내 마음으로’가 아니겠나.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 우주로! 그리고 나에게로!’다 이 말이지. 이렇게 세계가 완성되고, ‘나’의 회로도가 완결을 이루겠지.”
짝짝짝!

실항사가 손뼉을 친다.
“우와! 내 친구 최고! 만화책도 많이 보니까 도가 터지는구나!”
“아니야.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거지만, 바다와 하늘에 감동하는 네가 진짜 천재다. 아름다운 질서를 직관하는 능력자요, 진정 하느님을 알아보는 신의 아들이다. 너야말로 바다의 왕자를 넘어서 우주의 황태자다.”
실기사가 미소를 머금고 친구를 끌어안으려 한다.
실항사가 친구의 손을 밀쳐내며, 구석에 놓아둔 휴대폰을 바라본다. 한 처녀가 배시시 웃고 있다. 
“야, 혜리가 보고 있어!”

(해양문협, 부산문협,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회원. 글방 : 다음/카페/천태봉 놀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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