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의 폭염은 가히 기록적이다. 지난 겨울 혹한이 대단했는데, 여름 또한 엄청나게 더워 기상관측 이래 최고인 정점 41도를 찍을 정도로 더욱 혹독했다. 기상청의 설명인즉 태평양의 거대한 고기압 영향으로 제트기류인 편서풍이 사라져 한반도 근처 고기압이 정체하여 열돔 현상이 발생한데다가 태양의 흑점현상까지 활발, 복사열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시베리아 보다 춥고 아프리카 보다 더운 한반도로 변해 4계절이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얘기가 무색해졌다. 그나마 겨울에 눈을 보고 여름엔 해수욕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얼마나 되겠나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는 산업요원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올해도 콤파스는 방학에 들어갔다. 8월은 무덥고 초순엔 직장의 여름휴가가 몰리는 때라 그렇게 하였다. 타오르는 광화문 열기를 뚫고 교보문고에 들렀다. 진열된 책들의 표지와 제목만 훑어봐도 힐링이 된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 읽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성서에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추수철 얼음냉수”라는 말이 나온다. 독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차디찬 샘물 같은 책과 더불어 유달리 더운 올 여름을 견디어 내리라.

폭염이 극심했던 8월 8일 한국해기사협회 회장을 역임한 서병기徐丙機 전 동지상선 회장이 별세했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으로까지 비유된 개방론 주창자로 우리나라 외항해운업의 새 지평을 열었으나 돌연 은퇴와 함께 잠적,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퇴가 분명한 분이었기에 아쉬움을 더한다. 격의 없이 선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아들 같은 직원들에게도 이형, 강형! 하며 소탈하게 대해주던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불안’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trauma) 불안不安의 뜻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이다. 정신적 외상(外傷), 마음의 상처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불안의 속성이다. 잠 못 이루는 걱정과 근심, 초조, 번민으로 인해 정신적 공황까지 생긴다. 그렇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에세이 ‘불안’에서 그 원인과 해결방법을 담론 형식으로 제시했다. 보통은 스위스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삶의 영역에 대한 폭넓은 통찰로 철학적 의미를 다룬 ‘철학의 위안’과 ‘행복의 건축’, ‘일의 기쁨과 슬픔’ 등의 철학 에세이들을 발표하여 ‘일상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보통의 ‘불안’을 읽으며 밀려오는 불안과 숨 막히는 무더위를 달랬다.

‘불안’은 불안의 정의부터 시작하여 그 원인을 살펴본 후 그 해법을 제시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많은 불안요인 중에서 지위로 인한 불안을 가장 먼저 제기했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status)인 신분에 의해 신체적 경제적 보장과 함께 상응한 배려와 대접을 받는데, 이것을 상실할 수 있다는 염려로 인해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높은 지위를 얻기가 좀체 어렵거니와 이를 평생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에,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고, 공동의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집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욕구가 그렇듯이 이러한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불안의 원인은 첫째가 사랑결핍이다. 사회에서 밀려나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방 안에 들어가도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 만나는 사람마다 죽은 사람 취급을 할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 울화, 무력한 절망감이며,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극단적 행동인 자살까지도 단행한다. 사랑의 결핍은 이렇듯 불안을 넘어 죽음으로까지 이끈다.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정서불안은 주로 사랑의 결핍에서 야기된다. 두 번째는 속물근성이다. 속물근성(snobbery)이란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요즘은 거의 정반대 의미인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는 의도가 있어 그 사람은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펀치(Punch)지에 실린 만화에 나오는 모녀의 대화를 소개한다. 어느 봄날 아침에 런던 하이드파크를 걷던 딸이 말한다. “엄마, 우리와 사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이번 모임에 부를까요?” “안 돼. 얘야,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사람들은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사람들은 처음엔 다른 사람들의 속물근성에 분개하나 점차 자신도 모르게 속물이 되어가는 습성이 있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셋째는 기대이다. 20세기의 인류는 물질적인 진보를 이루자 평등, 기대, 선망도 중요해졌다. 서양문명 2000년의 장점은 부, 식량, 과학지식, 소비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수명, 경제적 기회의 증대였다. 물질적 발전에 의해 실제적 궁핍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증가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친구와 동창들의 소유물과 비교하여 내가 열등하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고 따라가기 힘들 때 불안하다. 그래서 가장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발전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여 우리를 더 부유케 하였다. 그럼에도 더욱 궁핍하게 만드는 까닭은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돈을 많이 갖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해질 수 있다. 우리는 조상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에서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넷째는 능력주의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능력주의의 반대는 평등주의이다. 19~20세기에는 능력주의 이론이 우월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되므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에 합당한 능력 또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없거나 게을러서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유행어인 기울어진 운동장과 금수저 흙수저로 인해 능력주의의 한계가 보인다. 다섯째는 불확실성이다. 불안은 현대인의 야망의 하녀이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이를 확신하지 못할 때 불안이 온다.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 고용주의 이익, 세계경제이다. 사랑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변함이 없어 유아시절과 비교해 봐도 줄어들지 않고 집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요구와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시는 다섯 번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는 해법은 무엇일까? 첫째가 철학이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지위로 인한 심리적, 물질적 결과에 괴로워하지 않으며 모욕이나 비난이나 빈곤 앞에서도 늘 차분했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 대제에게 “옆으로 좀 비켜주세요. 해를 가리고 있잖소.”라고 말할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라고 반문했고, 엠페도클레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자 “이런, 내가 뭘 잘못했지?”라고 말하며 환한 대낮에도 등을 켜들고 돌아다녔다. 철학자들은 친절과 조롱,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았다.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않으며, 논리적 사고를 거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中道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았다.

 둘째는 예술이다. 예술은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대한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로,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답을 제시한다. 예술작품은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불을 붙이고, 감정이입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해 도덕적 균형을 다시 잡아준다. 비극과 희극 또는 심지어 만화나 삽화를 통해서도 불안이 공감으로 승화된다. 셋째는 정치로,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와 이념이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임시변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버나드 쇼는 ‘지적인 여자를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안내’에서 말했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이므로 이성적 분석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여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넷째는 기독교로,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제어되고 경감된다. 다섯째 보헤미아는 일탈로 인한 자유로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였다. 인간의 영원한 난제인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쓰시마일기津島日記’
북캉스 8월에 읽은 또 하나의 책은 ‘쓰시마일기’다. 국립해양박물관의 번역총서인 쓰시마일기津島日記는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간 있었던 12번의 통신사 중 마지막 통신사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에 대한 기록으로 일본의 학자 구사바 하이센草場佩川이 쓰시마에 머물면서 썼다. 그 당시는 국서교환이 에도江戶가 아닌 쓰시마對馬에서 이루어진 역지사행易地使行이었다. 에도막부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에도사행의 물자를 조달하기 어려워 역지사행을 요청하였고, 조선이 이를 거절하여 한동안 중단됐으나 순조純祖때 이를 받아들여 성사되었다. 쓰시마일기에는 신미통신사에 대한 상세한 글과 다양한 삽화가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통신사 관직성명, 숙소인 객관도, 행렬도인 산사노부도, 복식과 소지품에 대한 복식도 등 다양한 삽화들은 통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기록에 능한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실린 일정과 행적, 도록 등의 세밀한 묘사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구사바 하이센은 규슈 북서쪽 사가현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적 재능이 남달랐으며, 당대 학문적 대가였던 고가 고쿠도에게 발탁되어 사사를 받았고 에도에 상경하여 에도 막부의 교육기관인 쇼헤이코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쇼헤이코에는 사가 출신 유학자 고가 세이리가 있었고, 구사바는 세이리에게 입문하여 2년간 사사를 받아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그는 동행하자는 세이리의 권유를 받아 1811년 쓰시마에 도착한 조선 통신사를 맞아들이는 일을 맡게 되었고, 통신사 영접 이후에는 고향인 다쿠多久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시와 그림들도 많이 남겼다. 구사바가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1867년은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가 교토에 조정을 이양하고 260년간의 일본 통치를 마감한 해이기도 하여 사람들은 그를 에도시대 최후의 유학자로 불렀다.
마지막 통신사행인 1811년의 신미사행은 1793년 계미사행 이후 조선과 일본의 오랜 교섭 끝에 이루어졌는데, 그 배경에는 두 나라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놓여 있었다. 18세기 말 일본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20만명 가까운 사람이 아사했으며, 냉해로 인한 흉작과 물가폭등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져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통신사행을 치를 여력이 없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기근이 발생하여 재정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국서교환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역지통신으로도 불리는 역지사행을 시행하게 되었다. 신미사행단은 1811년 2월 12일 한양을 떠나 3월 3일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같은 달 12일에 배를 타고 쓰시마로 출항하여 다음날 쓰시마의 사스나우라 포구에 도착하였다. 5월 22일 국서를 전달하고 6월 27일 쓰시마를 출발하여 7월 26일 복명하였으니 쓰시마에는 3개월가량 머문 셈이다. 사행에 참여한 조선측 인원은 336명인데 비해 일본 사절단은 3천여명에 달했다. 국서를 전달한 후 양국의 문사들은 필담을 나누고 시를 수창하며 교류하였는데, 하급관리와 하인배들은 불법임에도 붓, 종이, 먹, 부채, 호랑이가죽, 인삼 등의 물품을 몰래 교역하였다. 일본 문사文士들은 조선의 제술관 이현상의 문재文才를 높이 평가하여 고가 세이리는 특히 서문과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인 제발題跋을 많이 부탁하였다. 통신사를 응대한 일본 문사들은 주자학과 고증학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특히 하야시 줏사이林述齋는 문서와 외교를 담당하였는데, 막부의 정치와 외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자였다. 그리고 구사바 하이센의 스승이며, 막부 학문소의 유관儒官인 고가 세이리도 참가하여 필담을 나누었다. 그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통신사들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세이리의 명성은 추사 김정희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쓰시마일기’의 저자인 구사바 하이센은 그림에도 능하여 일기 곳곳에 지도, 풍경, 건물배치도, 사물실측도 등을 삽화로 제시하여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통신사행렬도에는 격군, 풍악수, 기수, 국서를 실은 용정, 가마를 탄 사신 등 통신사 행렬을 22면에 걸쳐 상세히 그려 보였다. 이밖에도 조선의 국서와 일본의 회답서를 삽화로 제시하고 국서를 감싼 봉투, 국서를 넣는 나무함의 모양과 크기까지 정확히 실측하여 제시하였다. 복식도에 통신사들이 쓰고 있는 여러 종류의 관과 옷, 신발, 모자, 허리띠는 물론 일상적으로 휴대하는 부채, 담뱃대, 담배봉투 등의 그림을 제시하고 재질, 쓰임새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또한 식기도에 통신사가 일상적으로 쓰는 밥상과 수저 그릇 등을 그려 놓았고, 객관도에는 통신사가 머문 숙소의 평면도를 상세하게 그렸으며, 그밖에도 일본의 소형선이 통신사의 배를 끌고 가는 그림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서술의 중간 중간에 관련된 삽화를 수록하여 글과 그림이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함으로써 내용이 풍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렇게 상세한 삽화가 수록된 통신사 자료는 달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면, 일본 각지의 문사들이 통신사의 숙소를 찾아와 자신들이 고심하여 지은 시를 통신사에게 보여주고 차운次韻한 시를 받거나 자신의 문집에 서문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실지로 통신사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명성을 얻어 막부나 번의 관리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통신사와 일본 문사들이 나눈 필담과 창화시가 일본에서 출판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까지 전해진 필담창화집이 200종 이상이나 되는 것으로 볼 때 통신사 교류에 대한 당시 일본의 관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6월 21일조에는 하이센이 스승인 세이리와 함께 통신사 숙소를 방문하여 필담을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엔 통신사 숙소의 평면도와 건물 내부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의 하권에 나오는 객관도처럼 절을 개축하여 통신사 숙소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의 숙소는 고쿠분지 절을 당나라 풍으로 단장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만나고 헤어지는 예식, 필담이 이루어지는 순서, 술을 마시며 수창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통신사 용모와 목소리, 의관의 모양 등이 잘 묘사되어 있어 필담의 현장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하이센의 일기 중에 인용한 문서에는 막부가 쓰시마에 교부한 문서가 있는데, 막부는 일본 문사들이 통신사와의 문화교류에 열중하여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데 대해 우려하고 이를 막기 위해 필담 현장을 감시하고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간에는 문화적 차이는 있었지만, 짧은 만남에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정서적 교감으로 이어졌음이 나타난다. 제술관 이현상 역시 하이센에게 ‘천하사유우연자위가天下事唯偶然者爲嘉’ 즉 “천하의 일은 우연한 것이 아름답다”는 글이 새겨진 인장을 선물하여 양국 문사의 우정을 상징으로 삼았다. 이처럼 쓰시마일기를 통해 사행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문화교류를 통해 양국의 편견을 시정하고 상호이해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엿볼 수 있다.

‘쓰시마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른 새벽부터 이키 지역 가쓰모토 포구에서 배를 띄워 쓰시마가 있는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 때 동북풍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예인선 12척, 본선에는 미즈사키水先라고 불리는 수로 안내인이 히라도에서 2명, 쓰시마에서 1명이 와서 함께 뱃머리에 앉아 지휘를 했다. 이 해로海路가 다른 지역 뱃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키사키, 하야시 휘하의 관선 삼십여척과 히라도에서 쓰시마로 송영하는 하야부네 수 척이 일제히 닻을 올리고 각각 예인선을 따라 오전 열시 무렵에 칠, 팔리쯤 나아갔다. 바람이 약간 동남쪽으로 바뀌어 각각 돛을 올려 고정했다. 이윽고 안개와 같은 는개가 피어올라 쓰시마 섬의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풍파가 점점 거칠어져 섬의 남단을 지나칠 뻔했다.” 자세한 묘사와 서술이 놀랍다. 끝 부분도 소개한다. “고귀한 이들의 언어는 신분이 낮은 이들의 언어와 비교해 매우 온화했다. 발음이 달라 통하지 않았지만, 웃음소리만은 다르지 않았다. 제술관은 병이 들어 나오지 않았다. 서기 두 명은 동파관을 쓰고 쪽빛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상판사 등은 고후관과 방건을 하고 흰 옷이 저포 옷감과 비슷해 깔끔했다. 속옷은 두 겹, 세 겹 정도 받쳐 입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칼이나 수저 등을 찰 수 있는 것이 옷의 안쪽에 있었다. 자세한 것은 그림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쓰시마일기’를 보며, 조선시대에 부경사행赴京使行과 통신사행의 정사와 부사를 수행하며 기록을 맡았던 종사관從事官,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학문과 문화를 대표하는 제술관製述官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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