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 못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리 해운에는 큰 도움 줘 -


세계경제와 남북문제, 그리고 그 담당국제기구인 UNCTAD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시들해진 문제로 세계경제에 남북문제라는 것이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으나, 경제사정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악화되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선진국에서는 후진국의 경제발전단계가 성숙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선진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해나간다면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격차가 해소될 것이라는 의견이고, 후진국에서는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선진국(중심국)이 교묘한 방법으로 주변국인 후진국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급기야 UN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문기구로 UNCTAD(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가 탄생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지금까지도 뚜렷한 개선효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토의 과정에서 한때 후진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신생독립국들을 경제발전이 진행 중이라는 뜻으로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이라고, 이에 비하여 선진국은 이미 경제발전이 끝났다는 의미로 Developed Country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단협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선진국은 OECD를 중심으로(소위 B 그룹), 공동대처방안을 협의하고, 개발도상국은 77그룹(명칭의 유래는 이 협의체를 결성할 때 참가국이 77개국이었던데 기인하고, 그 후 회원국이 훨씬 크게 증가하였으나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외에 사회주의국가 그룹인 D그룹과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중국이 있다.         
     
UNCTAD 해운위원회와 해운남북문제
해운문제도 남북문제의 주요아이템의 하나였다. 해운에서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견해차는 상당히 골이 깊었다. 후진국들은 독립하자, 외화 획득과 절약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경제의 국제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해운업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는 달리 투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고 기대하는 효과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무엇보다 의욕과는 달리 투자기회조차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개발도상국 측에서는 그 이유가 선진국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놓은 국제해운질서가 개도국 해운이 발을 못 붙이도록 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진국은 개도국이 해운업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본과 전문가 부족, 그리고 해운업의 하드웨어라 할 수 있는 선박과 항만시설, 그리고 그 운영체제의 미숙, 숙련선원과 해기사의 부족 등이 그 원인이므로, 개도국의 해운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미비부분을 보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구체적 개선안으로 개도국 측이 제시한 것은 ① 해운자유의 원칙, 특히 해운동맹에 의한 선진국해운기업의 시장과점상태와 개도국 해운기업의 진입금지, ② 해상운송 관련 민사법 분야에서의 선주에게 유리하고 하주(주로 원자재를 수출하는 개도국)에게 불리한 국제해상운송관련법제의 개선(하주에게 유리하도록), ③ 벌크화물분야에서도 수출입국간의 공평적취 원칙의 적용을 위한 제도 마련, ④ 편의치적선제도에 의한 선진국 해운기업 선대의 편법적인 유지(이 문제는 후에 편의치적제도의 철폐는 선진국보다는 개도국에 더 불리할 것 같다는 논리로 인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선진국 측에서는 ① 해운자유의 원칙만이 최선의 국제운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해운동맹제도는 해운자유의 원칙으로 인한 부정적인 기능(과당경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므로 그대로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② 선주(운송인)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는 법제도 해상운송의 특성상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면서, ③ 개도국 해운업발전에 필요한 인재(해운전문가 및 선원) 양성에 대한 선진국의 적극적인 지원, ④ 선박에 대한 수출금융제도를 활성화하여 개도국의 선박확보에 도움을 준다(그러나 이 제도는 실질적으로는 선진국 수출선박건조 융자제도에 대한 과당경쟁 방지용 제한설정으로 흘렀다). ⑤ 개도국 수출입발전의 장애요인인 항만개발에 대한 선진국의 적극적인 경제협력의 강화 등으로 대응하였다.

 

해운동맹제도
이러한 해운남북문제 중 하이라이트는 정기선동맹헌장조약으로 불리는 Liner Code의 채택 발효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후 결성되어 세계정기선시장을 독과점체제로 이끌어오던, 정기선사간의 국제 칼텔 조직인 해운동맹제도는 시장안정에 기여하였다는 해운업계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독과점 체제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주와 하주 세력이 강한 미국 등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해운동맹제도에 대한 그 간의 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별해 본다면 하주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선주보다는 하주보호에 관심이 많고 독점규제(Anti-Trust)를 강조하는 미국을 위시한 하주국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불가피하게 인정할지라도 독, 과점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동맹의 활동범위를 제약하는 소위 개방형 동맹제도(Open Conference : 동맹가입탈퇴의 자유, 이중운임제나 투쟁선 제도의 금지 등 독, 과점력을 억제하는 여러 가지 규정의 의무화)만을 허용하도록 법제를 만들었다(US Shipping Act, 1916).


이에 비하여 하주보호보다는 그 나라 발전에서 해운이 수행하였고, 수행하고 있는 중대한 역할을 중시하는 유럽제국(식민지 개척시대이래 유럽제국에서 해군과 해운은 식민지채척과 무역의 발전을 통한 이들 국가발전의 원동력이었다)은 해운동맹제도는 해운시장의 특성상 필요악이라고 보고, 해운업계의 자율에 맡겨야 하고, 여기서 나오는 부작용은 선하주 협의를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폐쇄형해운동맹제도(Closed Conference : 회원 가입, 탈퇴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이중운임제나 리베이트 제도, 회원사간의 적취율 배분 등의 인정)를 고수하여왔다.
  
해운 남북문제의 꽃, 정기선동맹헌장조약(Liner Code)
이러한 정기선동맹제도에 대하여 개발도상국에서 문제를 삼고 나왔다. 이유는 선진국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질서, 특히 해운동맹제도가 개발도상국의 국제해운업에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진국들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보호위주의 시장을 개편하여 새로운 해운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해운동맹제도를 다음과 같은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로 개편하기 위한 조약(정기선동맹헌장조약)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그 주요골자는 ① 동맹내의 회원사간의 적취비율 국가별로 공평한 적취권(수출국과 수입국의 5:5, 제3국선사가 상당한 쉐어를 점할 경우 4:4:2, 여기서 2가 제3국 선사 몫)을 인정하고, ② 관련항로의 당사국 선사(소위 내쇼널 라인)의 가입권보장, ③ 운임결정 등에 있어서 하주와의 협의 절차의 구체적인 명시 등이 골자다.


이 문제는 1960년대 후반에 UNCTAD에서 제기되어 거의 10여년의 토의 끝에 1974년에야 조약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발효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다가 1984년에야 겨우 발효요건을 충족시켜 발효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때는 이미 시장상황이 너무 변화하여 해운동맹 자체의 존립기반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 조약의 발효에 주목하지 아니하였다. 결국 이 조약은 발효하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효력을 발생하였으나 실무에서는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햇빛 못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리 해운에는 큰 도움 줘
이러한 Liner Code이지만 우리나라 해운 발전에는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첫째, 한국의 국제정기항로 개설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 해운의 대표선사라 할 수 있는 대한해운공사가 대미정기항로를 개설한데 이어 유럽정기항로를 개설하고자 하였으나, 유명한 FEFC가 신규 회원의 가입을 허용하지 아니하여, 개설이 계속연기 되어왔다. 그러던 중 이 UNCTAD Liner Code가 논의되게 되고, 이를 이유로 가입을 계속 불허할  경우 정부차원의 특별조치도 있을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자, 그렇게 완강하던 FEFC가 슬그머니 양보하고 대한해운공사의 가입을 허용하였다.


둘째, 무엇보다 큰 업적은 한일해운회담을 백지화시켰다는 점이다. 5. 16 군사 혁명 후 우리나라에서는 웨이버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었다. 그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선박이 없어 종이호랑이였다.

 

이 웨이버 덕분에 당시 한일 항로는 한국선박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이후, 일본은 이 웨이버 제도를 없애기 위한 전략으로 한일해운협정을 체결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해왔다. 이것은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의 의무사항이기도 하였다.

 

우리 측에서는 독점항로를 내줄 수가 없어 다양한 핑계로 이를 미루어왔으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1973년에 드디어 이 협정을 체결하도록 정부방침이 정해졌다. 마침, 그때 이 UNCTAD Liner Code를 제정하기 위한 전권대표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기간 중, 한일해운협정 체결을 위한 최종실무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 대표(대표라야 혼자지만)로 필자가 나갔다. 외교회의의 관례상 회의 시작 첫 순서가 양측 수석대표 기조연설이다. 필자는 기조연설에서 ①일본 측은 해운자유의 원칙이 국제적으로 확립된 기본원칙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선진국이 주장하는 원칙이지 국제적으로 확립된 기본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제네바에서 현재 진행 중인 Liner Code 채택을 위한 전권대표회의의 내용을 보면 안다. 잘 아는바와 같이 OECD그룹(선진국)에서는 자유적취를 주장하지만 77그룹은 공평적취원칙을 주장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77그룹 멤버다.

 

그러므로 일본과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입장이 현저히 다르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제네바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② 제네바에서 Liner Code가 채택되면 그 원칙을 그대로 한일해운협정에서 받아들인다면 국제적인 흐름과도 맞을 뿐만 아니라 두당사국의 기본입장과도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③ 그러므로 최종문안 작성을 제네바 전권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모여 하기로 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이 끝나자 일본대표들은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몇 마디하고는 30분의 휴회를 제안하였다. 30분이라는 휴회시간은 3-4시간으로 연장된 후 속개된 회의에서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측으로서는 이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해도 합의가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회의를 마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해서 필자가 동의하여 회의는 끝났고, 그 후 오늘까지 한일간에 해운협정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셋째, 예의 웨이버 제도에 대하여 일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비난하면서 철폐를 요청해 왔으나, 그때마다 UNCTAD Liner Code를 들먹이면 별수 없이 수그러들었다. 그런 면에서 햇빛을 못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UNCTAD Liner Code가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에는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새삼 고마움을 이 조약에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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