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 부가가치의 산실産室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그림 1] 예인선과 피예인선 간 상호작용
[그림 1] 예인선과 피예인선 간 상호작용
정체성 혼란 속의 조선 중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엄청난 병란을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는 국왕 인조가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았던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6월에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연암 박지원은 답답한 조선을 벗어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을 여행하며 보고 관찰한 선진국 물화에 대한 소감과 자신의 논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달하였지만 때로는 픽션(소설) 형식을 빌려 당시 답답한 지배계층의 안목을 틔워주는 대안도 제시하였다. 그 중 허생전은 물류활동의 한 부분인 창고 보관을 통한 부가가치의 증대를 극대화한 시대소설이라 할 수 있다. 허생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권10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으며 원래는 제명이 없이 수록되었으나, 후대에 《허생전》이라는 이름이 임의로 붙여졌다.
최근 연구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 허생원은 실존 인물로 밝혀지기도 하여 주목받고 있지만, 이 소설은 춘원 이광수에 의해 각색되어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국민 계몽서로 재활용되기도 하였다. 보관기능 뿐 아니라 수레를 사용하지 않아 야기되는 국가경제의 취약성은 연암의 『허생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소설로 현실의 문제점 적시
허생전은 그 배경이 18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로 역사적 전환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극심하고,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신분 계층(=변씨)이 등장하는 사회 변동이 심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현상은 조선 봉건사회를 굳건하게 지탱하여 온 신분제의 붕괴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선구적 지식인들에 의해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성리학의 비현실성이 극복되고, 현실 문제에 눈을 돌린 실학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른바 ‘이용후생1), 실사구시2)’를 내세운 실학파가 등장하여 사회전반 개혁에 대해 관심을 두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허생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허생은 십 년을 작정하고 묵적골 오두막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가난에 시달리면서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마침내 선비의 풍자를 비방하면서 벼슬도 못하는 공부는 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하였다. 사실은 과거를 보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인의 성화에 견디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다. 서울에서 제일 부자라는 변씨卞氏를 찾아가 만금을 빌려 지방으로 내려간다. 그 돈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서 도적들도 올바른 생활로 인도했고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남은 돈 십만금을 빌린 변씨에게 갚는다. 이에 놀란 변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허생의 뒤를 몰래 따라가서 남산 밑 작은 오막살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 후 왕래가 잦아지고 변씨와 허생은 매우 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당시 어영대장으로 있는 이완이라는 사람을 허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허생으로부터 심한 비웃음만 사고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튿날 이완은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다시 허생을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허생전' 실제 모델이었던 변승업
 '허생전' 실제 모델이었던 변승업
보관의 시간적 효용 제시
그런데 이 허생전에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군데군데 물류활동의 한 부분인 창고의 보관을 통한 부가가치의 증대를 극대화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 씨에게서 손쉽게 만 냥을 빌린 허생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즉시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가 만나는 곳이면서 삼남의 입구인 안성 땅으로 내려갔다. 그는 안성에 머물면서 대추와 밤, 배, 귤, 주차 등 여러 가지 과일들을 그때의 시세보다도 배나 되는 돈을 주고 사들이자 서울에서는 과일이 아주 귀해졌다. 어느 곳을 가나 과일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과일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하인들을 안성까지 내려 보내어 허생으로부터 높은 값을 주고 과일들을 사갈 정도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배의 값으로 허생에게 과일을 판 사람들이 찾아와서 열 배를 더 줄 터이니 제발 다시 팔라고 사정하여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허생은 장사치들을 돌려보낸 후에 혼자서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겨우 만 냥의 돈을 가지고도 몇 가지 물건을 모두 사들여 나라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었으니 이 나라가 얼마나 얕고 깊은지 짐작할 수 있겠구나.”

허생은 이번에는 다시 호미와 괭이며 칼 등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농기구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베와 명주, 솜도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그 물건들을 주고 말총을 전부 사들였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상투를 틀고 그 상투머리에 망건을 썼다. 망건은 말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허생이 망건을 만드는 말총을 모두 사들였으니 양반 선비들은 상투를 틀고 말총으로 만든 망건을 써야 하는데 원재료가 바닥이 나서 육지로 올라오지 않으니 망건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금세 열 배나 뛰었다. 허생은 그제야 자기가 사들였던 말총을 풀어내어 팔았다. 허생은 말총 장사로도 수만 냥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에서와 같이 허생전에서는 단순히 매점매석의 관점이 아니라 오늘날 물류의 5대 기능 중 하나인 보관 기능, 특히 보관의 시간적 효용을 극대화 한 실례를 보여 준다.
즉, 시간적 효용이란 상품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상품의 생산시점과 소비시점을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소비지에 가까운 창고에 미리 만들어둔 상품을 보관 해 놓고 소비자의 소비욕구(수요)가 있을 때 최대한 빨리 대응토록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통구조의 문제점 지적
또 이 허생전에는 그 시대의 유통구조를 꼬집는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년 동안에 어떻게 만 냥으로 백만 냥의 돈을 벌었느냐?”는 변씨의 물음에 허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중략-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 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는 고로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 가지 물종이 한곳에 묶여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됩니다.”

이처럼 허생은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는” 유통구조의 취약성을 활용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허생의 말은 곧 연암 자신의 말이다. 허생은 자신의 상술을 말하고 나서 “이것은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라는 당부를 덧붙이는데, 이것은 돈 만 냥으로 나라 경제를 마비시킬 만큼 허약한 유통구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허생전에 나타난 연암 박지원의 사상은 실학의 이용후생과 선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비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미 도식화되고 형식주의에 젖어 쓸데없는 공론만을 일삼는 당대의 보통 사대부와는 구별되는 생존의 가치관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18세기, 부정과 부패·임병 양난과 같은 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사고가 요청되었다. 이에 연암은 연경에 가서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문물제도를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풍속·경제·병사·천문·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한족을 대신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소개하여 경제생활의 향상과 기술의 존중을 주장하고 이용후생을 고취시켰다.
나라 경제가 허약한 원인으로, 배를 부림(용주;用舟)과 수레를 굴림(용거;用車)이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상업의 발전을 위해 용주, 용거의 당위성을 역설했던 것은 이용후생을 주창한 실학자들의 공통적인 사상으로, 이는 『열하일기』의 「일신수필」에서도 지적하였다. 또한, 용주가 가능한 무인도의 설정과 해외 무역은 사사로운 이윤추구나 도피나 안주가 아닌 이용후생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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