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가장 잔인하고 용감하였던 해적 바이킹
역사상 수많은 해적들이 있었고 속성상 해적은 잔인하고 야만적일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용감하였던 해적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이킹일 것이다. 그 후 바이킹이라는 말은 해적의 대명사 같이 되었으나, 원래는 놀만 민족의 이름이었다. 


바이킹들의 원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지금의 덴마크 등 북부지역으로서 극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후조건이 매우 열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경지가 없어 생필품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런 열악한 조건의 자연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 많은 인구가 정착하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들은 원주지에서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풍부한 산악지대의 나무를 이용하여 우수한 선박을 만들어 바다로 진출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것이었겠지만 오늘날과 달리 정상적인 무역이 이루어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활동이 실질적인 해적활동이 되었다.

 

용기의 원천은 그들의 신앙에 있었다
바이킹은 매우 잔인하였다. 정복지에 가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하였고, 성직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를 가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잔인하였나하면 정복지에서 잡은 포로 중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그 부모가 보는 앞에서 창에 꿰어 서로 주고받고 공놀이를 할 정도였다.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주민들은 글자 그대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또 매우 용감하여 전투에서 싸우다 용감하게 전사해도 결코 항복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 용기의 원천은 바로 그들의 종교였던 신앙에 있었다. 
그들의 민족 신앙의 골자는 남자는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죽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치고,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사람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기다리다가 정중하게 영접하여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장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기를 원하지 결코 싸움에서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가장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림일 것이다.                

 

1066년 잉글랜드에 놀만인이 상륙하였다!
해적과 해외무역으로 세력을 어느 정도 구축한 바이킹들은 스웨덴, 놀웨이, 덴마크 왕국을 만들어, 거기에서부터 무역이나, 이주지를 구하면서 해외로 진출하였다. 그들은 무역으로 활동하였으나, 때로는 해적으로 변신하여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북구제국의 박물관에는 1000년전에 활약한 바이킹의 목제 선박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죽은 사람을 다양한 부장품과 함께 선박에 담아서 해변가에 매장하여, 주총(舟塚)을 만드는 소위 「선장(船葬)」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보존된 것들이다. 바이킹의 배는 길이 20m에 높은 고물(선수)을 가지고, 갑판은 없고, 노와 돛으로 시속 10노트 정도의 스피드로 범주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25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대형선도 있었다고 한다.


바이킹들은 이와 같은 선박으로 각지를 침략하였다. 그들은 컬럼브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보다 500년도 전인 1000년전에, 이미 아이슬랜드를 경유해 북아메리카에 그 족적을 남기고 있다.


북프랑스에 침입한 바이킹은 거기에 놀만디공국(公國)을 세우고, 1066년에는 놀만디공 윌리암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놀만조를 세웠다. 그 외에, 지중해에서도 놀만인에 의하여 시치리아 왕국이 수립되었고, 동으로 진출한 놀만인은 스라브 민족을 정복하여 러시아에도 노브고로도 왕국이나 키에프 공국을 세웠다.


놀만인은 우수한 선박을 교묘히 조정하여, 각지와의 교역에 종사하였다. 놀만인의 교역 규모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컸다. 발트해, 북해, 대서양, 지중해에 연한 제도시들과 하천유역에는 많은 교역 거점을 만들어, 이들을 연결하는 교역로들이 완성되었다. 교역로의 하나는 볼가강, 카스피해를 경유하여 바그다드까지 내리뻗어, 바그다드에서도 활발한 거래를 행하였다.


아랍인들의 기록에는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 특산품인 「거세된 남자, 남녀 노예 비바 등의 모피」가 아랍으로 수출되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세계의 2대 교역민족이었던 바이킹과 아랍인이 바그다드, 기타 지역에서 교류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와 같은 바이킹의 활동은 그때까지 고립되어 있던 지역을 상호 연결시켜 융합시켜, 중세 유럽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바이킹의 교역활동은 11세기이후의 유럽의 무역과 상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유감인 것은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이다. 남아있는 것은 바이킹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정복지의 사람들이 기록한 단편적인 것만이어서. 그들의 전체 활동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유감이다. 그들의 잔인한 해적활동과 약탈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이야 말로 중세 유럽을 새롭게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민족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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