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기능과 국가주권의 상징

선박은 선미(船尾)에 국적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국제법상 의무다. 그 사실까지는 일반적으로 알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국기의 현대적인 의미는 많이 퇴색되어 경축일이나 큰 행사를 할 때, 국가를 상징하는 표지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선박의 선미에 게양하는 국기의 의미는 그런 상징적인 의의 이상의 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해외여행을 할 때 여권이 있어야 하고 여행할 상대국에서 입국해도 좋다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지금은 해외여행이 매우 간편해지고 해서 여권을 발급받기도 쉬워졌고, 비자를 받기도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국가간의 관계에 따라 비자가 면제되는 국가도 많아졌고, EU와 같은 곳에선 역내를 통행하는데 여권이나 비자가 전혀 필요 없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해외여행에서 여권과 비자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국제항행에 종사하는 선박의 선미에 게양하는 국기와 이 국기 게양권을 증명하는 국적증서는 바로 여권과 같은 기능을 한다. 원칙적으로 사람이 해외여행을 하려면 여권을 소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박도 국제항행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국적증서를 필히 소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적증서를 바탕으로 그 나라의 국기를 선미에 게양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국적증서는 여권의 기능을 하고, 국기는 이 나라 국적증서를 가지고 있소, 라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공시행위다. 사람이 해외여행을 할 때, 국경을 지날 때마다 여권을 출입국관리소에 제시하고 검증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박도 어느 항구를 출항하고 다른 나라 항구로 입항할 때 출입국관리소와 세관 등 관련기관에 이 국적증서와 여러 가지 필요한 서류를 제시하게 된다. 이점에서 국적증서와 여권은 같은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선박이 공해상이나 다른 나라의 영해를 통항할 때에도 합법적인 항행임을 대외적으로 공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다위에는 해적선이 우굴 거렸다. 이 해적선을 단속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어떤 선박이 합법적인 상선이고 어떤 선박이 해적선인가를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상선을 다 임검한다면 국제항행이 굉장히 번거로워질 위험이 높다. 그래서 합법적인 상선은 어느 나라인가 주권국가에 등록하면, 그 국가가 국적증서를 발행하고, 이 국적증서가 상징하는 국기를 게양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면 어느 국가도 해적선의 등록을 받고 국적증서를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선이 선미에 게양하는 국기는 이 선박이 합법적인 선박이라는 사실을 공해나 자국의 영해를 순시하는 해군함정에게 알리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선박이 어느 국가의 주권 하에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선박은 오랜 관습법으로 등록국가의 영토에 준하는 자격을 국제법상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박을 ‘움직이는 영토’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선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박을 움직이는 영토라고 한다는 정도로 이해하기 쉬우나 선박이 움직이는 영토라는 것은 국제법상 엄연히 인정된 선박의 특수한 법적지위를 나타내는 용어다. 그래서 공해 상을 항행하는 선박은 그 등록국(그래서 국기를 게양한 기국)의 배타적 관할에 속한다. 여기서의 배타적 관할이란 그 나라의 주권만 미치고 다른 나라는 이 선박에 함부로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수한 법적지위는 비단 공해 상에서뿐만 아니라 타국의 영해나 개항장에 출입할 때에도 무해통항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그대로 인정된다.
이러한 선박의 특수한 국제법상의 지위 때문에 상선에 대한 타국의 부당한 간섭은 곧 그 나라의 주권의 침해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어, 심할 경우 선전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1812년의 미영간의 전쟁).
위를 참고하여 선박의 선미에 게양하는 국기는 특별히 취급하여야 한다. 특히 유의할 사항은 냉전시대 선박의 국적에 따라 항행이 제한되는 수역이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선박이 북한, 중국(본토), 소련, 베트남 등을 방문할 때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다. 이런 때 흔히 국기를 갈아 달고(flag transfer) 가면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모르는 사람들은 간단히 이것을 태극기를 내리고 다른 적당한 국기로 갈아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남한에서 북한으로 쌀을 보낼 때도 아무런 조치 없이 태극기를 내린 일이 있는데 이것은 중대한 국제법위반이므로 국기를 갈아달기 위해서는 먼저 국적 변경절차를 반드시 이행하여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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