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운공사를 최상급의 국영기업체로 육성

 
 
필자는 해양대학 교수 직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연재하였다. 그때는 주로 사안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가 판단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양한국에 연재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지식과 자료 및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주견들이 일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표현이 불충분하여 그분의 참가치를 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책임과 잘못으로 생각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고 싶다.


1.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이맹기의 취임
5. 16혁명에 의한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양이 되면서 많은 군인들이 예편하였다. 이맹기는 군정기간 해군참모총장 시절, 그 당시 군정법령상 당연직으로 되어 있는 최고회의 위원직에 있으면서 그 의장인 박정희 의장과 의기가 투합하여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 후 이맹기가 예편하자 해군과 가장 가까운 국영기업체라 할 수 있는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에 기용되었다.
 

1)재임중 주요업적 개관
사장에 취임한 이맹기는 매우 청렴 강직하고, 적극적이고 의욕적인 사업 감각을 가진 훌륭한 최고경영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취임하자마자 의욕적으로 일하며 사업을 확장하여 ①해운업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선박을 대폭적으로 증강하여 외국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어렵게 사들인 노후된 미전표선 위주의 노후선대를 불과 몇 년 만에 현대적인 시설과 장비를 갖춘 신예선대로 탈바꿈시켜, 선대의 질을 국제경쟁을 할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②이러한 신예선대를 이용하여 대망의 원양국제정기항로를 개설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③만년적자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던 국영기업체 중에서 거의 최초로 경영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2) 재임중 선박증강실적
①정부계획조선으로 800톤급 여객선 아리랑 및 도라지호를 신조하여 아리랑은 대일(부산 오사까)항로 도라지호를 제주항로(부산 제주)에 배선하였다.
 

②정부 외화대부 500만불로 대형 중고선(중량톤 1만톤급) 4척(세종호, 동명호, 선덕호 진덕호)을 유럽으로부터 도입하여 기 보유 중이던 남해호를 합하여 5척으로  대망의 대미 서해안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한해운공사가 국책회사로 명실상부하게 부상하게 되었고, 항로 경영도 흑자를 계속하였다.
 

③대일 청구권 자금 중 일부자금을 배정받아 동남아 항로 적격선인 3천톤급 알테어 및 베가호를 신조하여 동남아항로에 배선(태국까지 배선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샴 라인이라고 불렀다)하여 동남아항로를 정상화하였다(이 두척 배선이전에는 노후 비경제선으로 명맥만 유지하였음). 이를 계기로 동남아 정기선사 간의 해운동맹에 대한해운공사가 정규멤버로 가입하여 국제해운시장에서 대한해운공사가 당당히 활동하게 되었다.
 

④한일국교정상화 후의 대일 협정차관 3,000만불 중 일부를 대출받아 대미항로 중 당시로서는 황금항로라 할 수 있는 극동-뉴욕 간의 정기항로를 개설하기 위한 대형선을 신조하였다. 이 뉴욕정기항로 배선 선박은 총 6척이었는데 대일선박차관 3,000만불로서는 부족하여 일부는 정부로부터 보유외화를 배정받아 건조하는 등 노력을 많이 하여 뉴욕 정기항로를 출범시켜서 정착단계가 되면서 민영화되었다. 이 뉴욕항로의 개설은 대한해운공사가 세계적 수준의 국책정기선회사로 발돋움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요한 상징적 사업이었다.
 

⑤대미항로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남은 항로는 극동 구라파간을 왕래하는 소위 유럽정기항로만 남았다. 이 항로를 개설하지 못한 것은 대한해운공사가 능력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이 항로는 FEFC(Far East Freight Conference)라는 강력한 폐쇄형 동맹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인데, 해공은 이 동맹에 가입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동맹이 워낙 강경하여 효과를 못 보고 있었다.   

  
⑥이상 주요선박 도입과 정기선항로의 정비만 간단히 살폈는데 그 외에도 당시 우리나라는 선박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으므로 기획실 산하에 선박도입실을 따로 두어 국제시장에서 적정한 선박을 골라 도입하였는데 그 양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시는 흑자가 계속되어 사내에 유보된 자체자금이 상당하여 이 자금을 이용하여  선박도입이 가능하였다.
 

3) 이맹기의 인사 스타일
공정한 이사의 표본-비서실장의 인선 : 이맹기 사장이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취임한 후 1968년에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어 퇴임하기까지 대한해운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회사를 탄탄한 기반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경영 노하우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사의 공정무사와 임직원 들을 적재적소에 배정하여 능률을 최대로 발휘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맹기 사장이 대한해운공사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의 비서실장의 인선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람에 달려 있다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위와 같은 대한해운공사의 성공도 이맹기 사장의 경영능력의 결과로 나온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그 경영능력의 두 번째 요소도 역시 사람을 쓰는 소위 인사人事에 달려 있다. 이맹기 사장의 경영능력의 하이라이트는 인사의 공정성과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유능한 직원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회사의 경영실적으로 연결시키도록 자율성을 부여하는데 있었다.

이맹기 사장이 취임하고 나서 인선을 하는데 가장 먼저 한 인사人事중 하나가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을 인선하는 일이었다. 이 비서실장 자리를 노리고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은 해양대학 출신인데 재학 중 해양대학 안에서 무슨 일이든 그에게 부탁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맹기 사장은 이 사람의 기용을 단호히 거절하고 전통해운인을 고르기로 하고, 그가 해군참모총장 시절에 잘 알고 지냈던 윤상송 전 해양대학 학장1)에게 비서실장으로 적격인 사람을 추천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윤학장은 서슴없이 조상욱을 추천하였다. 윤상송 전 학장이 조상욱을 추천할 때 조상욱은 해양대학 실습선이었던 반도호의 선장으로 근무 중이었다2). 이맹기 사장은 이 추천을 그대로 받아들여 비서실장으로 기용하였고 그후 이맹기 사장은 그가 사징직을 그만둘 때 까지 그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어 두 사람이 공히 해공을 떠나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즉 해공 사장직을 사임한 이맹기가 심사숙고 끝에 재직중 신임하고 따르던 사람들과 공동으로 코리아 라인을 설립할 때도 조상욱은 코리아 라인의 창업 멤버 중의 핵심적인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창업된 코리아 라인의 상무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출자지분도 이맹기 사장만큼은 못되었으나 제2 순위의 출자자 중의 한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맹기는 부하직원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주는 아주 유능한 경영자였다.
 

4) 이맹기 사장 체제하에서의 해공의 사내분위기
이맹기 사장은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두뇌가 비상하여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척척 잘 해낸다거나, 공부가 뛰어나서 성적이 1등이라거나 하는 일은 없는 아주 평범한 직업인 중의 한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높은 찬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의 평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의 특기를 찾아내어 그것을 조직 발전에 묘하게 작용하도록 하는 매우 뛰어난 특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 분의 특기 몇 가지를 들어내어 그가 CEO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사정들을 살펴 보고,  그 결과가 가져왔던 당시의 대한해운공사의 사내 분위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①현장 중심주의 :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이맹기 사장은 취임 후 사선을 방문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하였다. 그는 젊어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해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사람이므로 누구보다 선박을 잘 안다. 그런 그가 취임 후 첫 번째 행사로 사선을 방문하였다는 것은 이 분의 뛰어난 CEO 자질을 가장 잘 나타낸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해운회사라면 선박은 바로 해운서비스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공장이 잘 돌아가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CEO가 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임무다. 그러니 그가 한 방선은 자기의 가장 기초적인 업무를 말 없이 수행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돋보인 것은 그간 대한해운공사의 어느 임원도 사선방문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 신임 사장이 사선을 방선하였을 때 현장에서 당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방선의 경우 대부분이 시간의 제약 등에 의하여 선기장들과 만나 사관식당에서 차나 한잔하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분은 선박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면서,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후미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사관들도 잘 가보지 아니하는 구석진 곳까지 돌아보았다고 한다. 높은 사람이 가지 않는 곳은 아무래도 관리가 소홀하게 마련이다. 그가 특별히 마땅치 않은 곳을 지적하였는지 관심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렇게 선박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나자 그 입 소문 때문이었는지 해공의 사선들의 선박 정리 정돈 상태가 싹 달라졌다고 한다.
 

②공선사후(公先私後)의 업무처리 : 이맹기 사장의 경우 업무처리에서 우선순위를 항상 공선사후에 두었다. 필자도 선주협회의 실무책임자로 재임중 이맹기 사장을 선주협회 회장으로 모시면서 준 비서격으로 활동한 일이 있다. 그러니 이 분의 시간을 자주 할애받아 협회 업무에 동원하여야 하는 경우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있게 마련이다. 그때 찾아가거나 전화로 언제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 내실 수 있습니까? 하는 요청을 자주하였는데 이 분은 그때마다 좀 기다려봐 하시면서 자기의 스케즐이 적혀있는 수첩을 꺼내 그 시간을 보고  ‘응 시간 있어! 무슨일인데?’ 하시거나 ‘아 그 날은 약속있는데! 무슨일인데?’ 하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일의 경중을 따져서 가장 공적인 업무를 앞에 놓고, 사사로운 스케줄을 뒤로 미루는 공선사후의 자세를 철저히 지키는 분이었다. 필자가 같은 직에 재직 중 필자의 상사인 선협회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이 분의 업무자세는 정반대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회장을 어떤 모임 같은 곳에 모셔야 할 일이 있어 연락하면, 이 분의 경우, 무슨 일인가? 왜 내가 가야 하는가? 그리고 내용을 들어본 후 자기회사의 해당임원을 불러 이런 일이 있다는데, 우리 회사 업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등을 꼼꼼하게 따져 보고나서 자기의 행동계획을 결정하였다. 어쩌면 이 분의 이런 자세가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공과 사의 구별이라는 면에서는 이맹기 사장의 자세가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③청렴결백淸廉潔白 : 세 번째 이맹기 사장의 업무자세에서 본 받을만한 자세는 청렴결백淸廉潔白이다. 회사나 기업의 경우 회사 사정이나 업종 등에 따라 약간은 다르지만 소위 약간의 경제적인 이권이 업무처리과정에 부수되기도 한다. 해운업도 마찬가지인데 정기선 영업을 주로 하는 해공과 같은 기업의 경우, 이 이권이 좀 크다. 이 이권업무를 누가 챙기느냐 하는 것이 그 기업의  이미지 결정에 매우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이맹기 사장의 경우, 이런 일을 철저히 실무자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래 사람이 일하기가 수월해지고, 그 이해관계 업체와 잘 화합할 수 있어 업무능률도 오르고, 명절 때 같은 경우, 작은 선물이 오가기도 하고, 그것이 직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복지기능을 하기도 한다. 직원들의 사기 앙양과 능률향상에 도움이 많이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해공이 민영화된 후 향기롭지 않은 소문이 해운업계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맹기 사장과 새로운 오너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므로 여기 간략하게 설명한다.
흔히 경제관련 글을 쓸 때 비자금이니 리베이트니 하는 문제는 적당히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심한 것은 가리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특히 해공의 새로운 오너가 나타나자 마자 바로, 전에 없던 소문이 전혀 관계  없는 필자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심하게 들려 왔다. 소위 비자금 관리는 철저히 오너 몫이었다. 더구나 이 오너의 경우, 매년 계약 갱신을 할 때마다 거래금액의 몇 %는 미리 바칠 것을 강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갱신을 거부하고 파트너를 바꿀 것을 실무자에게 지시한다고 하니 해도 너무 한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이 소문이 업계에 퍼질 수밖에 없다.
 

④하후下厚상박上膊 : 끝으로 이맹기 사장의 경영이념의 하나인 하후下厚상박上膊에 관하여 검토해 보자. 이맹기 사장은 국영기업체의 장이므로 이론적으로는 그 회사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재직 중 계속해서 하후下厚상박上膊의 원칙을 지킬 것을 늘 강조하였고, 이를 솔선하여 실천하였다. 어차피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전 직원이 나누어 갖는 것이 직원들의 보수 체계라면 윗사람들이 많이 가지면 그만큼 아랫사람의 몫이 적어지니 웃 사람이 조금 양보해서 아랫사람들의 보수를 좀 올려주자는 생각이다. 이론이야 좋지만 그만큼 자기 봉급이 적어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데 그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이 원칙을 자기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라면 지키도록 노력하였다. 이맹기 사장이 평소 사석에서도 강조하는 원칙의 하나가 7:1원칙이다. 즉 어느 직장에서건 그 직장의 보수가 가장 낮은 사람의 보수에 비하여 가장 높은 사람의 보수가 700%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분이 하도 이 원칙을 강조하여 필자 나름으로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의 봉급인지를  대강이라도 계산해 본 일이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5) 박정희 대통령과 이맹기 사장
출세에 대한 무욕 : 이맹기 사장의 경영 철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의 하나가 자기의 출세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그리고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재임 중에 대한해운공사의 선대를 획기적으로 확장하는데 성공하였는데 그 배후에는 박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맹기 제독은 같은 군인이었으므로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군과 해군은 서로 근무하는 분야가 다르므로 그렇게 친근한 관계는 아니었다. 5. 16 후 국가 최고통치기구였던 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의장이 되고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된 이맹기 제독은 당연직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업무상 서로 긴밀한 관계가 되면서 군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의견의 차이가 있기도 하였으나 솔직하고 대담한 이맹기의 충고를 통하여 두 사람 간에 깊은 신의가 형성되었다. 군정을 끝내고 박정희는 군에서 예편하여 민정이양 후에 대통령이 되었고, 이맹기는 역시 해군에서 예편하여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최고회의에서 의기가 투합한 두 사람 간의 신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여기에다가 경제개발 계획을 계속 주도해나가야 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개발에 수반되는 해상운송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해운을 발전시켜야 하는 대한해운공사 사장의 업무가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에 이맹기 사장이 수립하여 정부에 요청하는 선대확장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가 박정희대통령이 만족할만한 수준의 결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두 사람 간의 신뢰관계는 더 두터워졌다. 이 해운발전이라는 공통의 목표에서는 박정희대통령과 이맹기 사장간의 의견과 가려는 방향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화기애애한 가운데 잘 진전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정부기관이 이러한 대한해운공사의 선대 확장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찬성한 것만은 아니다. 대한해운공사의 선대확장계획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기관 중 제한된 금융자원을 가지고 한국경제 전체의 발전계획을  고루 지원해야 하는 당시 재무부의 입장에서는 이 계획에만 집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관심사업을 외면하기도 어렵고하니 할 수 없이 지원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움이 쌓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이맹기 사장이 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자금줄을 쥐고 있는 재무부는  대한해운공사를 향한 미운 살이 박혀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을 감수하면서 계획을 강력하게 밀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해운이 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맹기 사장은 대를 위하여 자기와 관련된 소를 희생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2. 태평성대에 불어 닥친 날벼락
이맹기사장의 주도로 해공의 전사원들이 일치단결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 들이고, 회사가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섰다. 회사가 계속 흑자를 기록하니 처우도 매년 조금씩이지만 좋아졌다. 사내에서의 각자의 자리도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다 안정되었고, 각자가 열심히 만 한다면 사원들의 미래도 탄탄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수준이 되었다.
 

1) 청천벽력靑天霹靂인 국영기업체 4사의 민영화(해공포함)
이렇게 대한해운공사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1967년의 어느 날 신문에 국영기업체 4사의 민영화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뉴스는 적어도 당시 대한해운공사에 근무하던 임직원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이 기사가 의미하는 것은 이맹기 사장이하 전사원이 애써 키워온 대한해운공사가 어느 재벌의 손에 넘어가는 운명에 처하였다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1967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정부는 민간주도형 경제로 전환한다는 방침하에 주요 4개 국영기업체(대한해운공사, (주) 대한항공KAL, 대한통운, 대한조선공사)를 민영화하기로 하였다. 민영화 방법은 정부보유주식을 민간 대기업에 매각하는 방식에 의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정치자금 모금과 깊이 연관된었다는 것이 당시의 소문이었다.
 

①이 4개기업 중 대기업들이 가장 탐내는 기업은 단연 대한해운공사였다 그 이유는 (1)재무구조가 매우 건실하여 자산적 가치가 매우 높고, (2)사업전망이 매우 좋아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크고, (3)사업내용이 수출주도형의 한국경제의 구조적 특성상 국민경제적 의의가 매우 큰 사업이기 때문이다.
 

②두 번째로 인기가 있던 회사는 대한통운이었는데 이 회사는 지금과 유사하게 항만하역업과 철도 소운송업을 주로 하는 내륙운송 중심 기업으로서 트럭과 각종 하역장비 및 전국 각지에 창고 등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고, 재무구조가 건실하였다.
 

③다음은 상공부 산하에 있던 대한조선공사로서 자금 마련이 어려워 신조선을 건조할 엄두를 못 내어 선박수리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사업전망도 그리 좋지 않았다.
 

④4개 기업중 가장 인기가 없었던 업체는 대한항공KAL으로 창사이래 적자가 계속 누적되어  빚더미라고 소문이 나고, 경영정상화가 매우 어렵다고 모두가 외면하는 기업이었다.

2) 대한해운공사의 우리사주조합 운동
대한민국 건국이래 국영기업체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고 만성적인 적자가 누적되어 빚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는데 대한해운공사만은 독야청청하게 흑자운영 기조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직원들의 자부심과 애사심이 매우 높은 기업이었다. 특히 이맹기 사장이 해공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사장이하 사원 전체가 똘똘 뭉쳐 해운입국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력투구하여왔기 때문에 사원들의 애사심과 프라이드가 대단하였다.

이런 회사를 갑자기 민간에게 불하한다고 하니 사장이하 사원 전체가 당황하게 되었다.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애지중지 길러 온 회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회사와 사원들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민영화하기로 방침을 결정한 이상 이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원들과 해운에 뜻있는 인사들이 뭉쳐서 돈을 모아 이 기업체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우리가 직접 경영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발상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후에 KSS해운을 설립한 박종규였다. 당시 그는 과장급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사장이하 모든 사원들이 좋은 안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추진을 제안자인 박종규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 제안은 아이디어가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탄력을 받게 되었고, 이맹기 사장과 군인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이맹기 사장의 권유로 박정희 대통령도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하고, 주식인수를 약속하는 서명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국영기업체의 민영화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서 대한민국 경제발전사에 큰 업적의 하나로 남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백일몽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3) 정치 자금이라는 쓰나미에 휩쓸려버린 우리사주조합
이 4대 국영기업의 민영화의 실질적인 목적은 이 4대 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하면서 그 실수요자들로부터 정치자금을 왕창 마련해 보자는 정치권의 흑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치자금 흥정에서 가장 황금 알을 낳는 거위는 대한해운공사였다. 대한해운공사가 재무구조가 매우 건실하였고, 사업전망도 매우 밝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해운업의 국제경쟁력에서 가장 우수한 조건을 고루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사주조합으로 할 경우, 정치자금을 거둘 수 없게 된다. 우리사주조합으로 할 경우 수많은 주주들이 몇주식 보유하여야 하는데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가장 큰 목적의 하나인 정치자금의 모금이 안 된다면 그 정책은 시행할 가치가 없다고 정치권은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리사주조합은 정치자금이라는 쓰나미에 묻혀 멀리 흘러가 버렸다.
 

4) 학원재벌에게 불하된 대한해운공사
대한해운공사는 정부의 방침대로 어느 학원재벌에게 불하되었다. 그 결과 먼저 이맹기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사표를 내고 대한해운공사를 떠나야 하였다.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만 4년동안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모범 기업으로 키워놓은 결과가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 좋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 회사를 불하받은 학원 재벌의 경우 그들의 회사 경영방침이나 회사 운영이 정상궤도를 벗어난 것이어서 여러 가지 향기롭지 못한 소문이 업계에 나돌았는데 이러한 결과(학원오너에게 불하)가 정치자금 흥정의 산물이었다니 더욱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사장은 아주 훌륭한 신사고 지성인의 대표같은 분이지만 그는 실세가 아니라 새로운 오너가 모셔다 놓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실세는 오너가 보낸 다른 임원이 맡아 실질적으로는 그가 경영하였다.

하늘같이 믿었던 이맹기 사장이 떠나자 임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자의로 떠난 사람이 3분의 1 타의로 떠난 사람이 3분의 1, 그리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남은 사람이 3분의 1 정도 될 것이다. 그 빈자리에 오너가 자기 사람을 밀어놓는 방식으로 충원되었다. 하루아침에 임직원 전체의 3분의 2가 떠난다는 것은 가히 엑소더스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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