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품? 모조품? 근사품? 대용품? 돌팔이? 이미테이션? 듀프리케이션? 그리고 근년에 맹위를 떨치며 인구에 회자되고 유행하는데 큰사전에도 없는 신조어 이름하여 “짝퉁?” 그런데 뭣보다 이런 어휘들이 진품이나 정품을 최고로 치는 보석류나 유명 브랜드 혹은 귀중품이나 명품의 세계에만 따라 다니며 판을 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케이스를 찾아보면 어느때고 어디에고 무엇에나 다 있을법 하며 심지어 사람들에게서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고위직 관리나 유명인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신분을 위장하는 불법사례가 많았고 이는 주로 부도덕한 사이비 결과를 낳기가 일쑤였다. 비근한 예로 면허없는 돌팔이 치과의사가 이에 해당될 듯하다. 나아가 우리 해운계 종사자에게도 이와 닮은 돌팔이 내지는 짝퉁이 있다면 바로 나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되며 영락없이 내가 바로 짝퉁인생을 살아온 장본인일 것 같다. 그것도 국가자격증인 해기사 면장없이 수십년을 그 바닥에서 정품 시늉을 하며 일해왔으니 바로 내가 해운업계의 돌팔이 짝퉁인생인 셈?

오늘도 지공거사로 요금 안내고 3호선 일산 주엽역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2가 사무실로 나왔다. 이 나이에 아직도 해운계 머슴살이 그것도 이젠 우리나라도 아닌 서양사람들 밑에서 얼마 안되는 세경을 받고 꼴머슴이나 새끼 머슴살이를 나가며 이 바닥에서 평생 심부름꾼으로, 그리고 면장없는 짝퉁해기사 노릇을 했던 지난 40년을 요즘 와서 부쩍 자주 뒤돌아 보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직도 해운 일선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존경스러운 원로 선배님들에겐 버릇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 나이도 나이라서 이젠 이 노릇 할 세월도 얼마남지 않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니 울컥 서러움 같은 게 목을 치받친다.

인문계 출신으로는 법학계열이나 경상계열이 아니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입사 응시 자격마저 주어지지 않아 암담했던 60년대 중반을 뒤돌아보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와 취직이 어려운 실수를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당시 유일하게 전공 불문하고 누구나 공채에 응시할 수 있게 문이 열린 곳은 언론계 뿐이었으니 각사 약간명 모집에도 주말행사처럼 돌아가며 각사 시험이 있는 매주 일요일엔 밥자리 찾아 요즘의 이태백 같이 이력서를 든 서글픈 군상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우신조인지 행정착오인지 수차례의 도전끝에 용케 이 몸도 M경제신문에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워낙 취직이 어려웠던 시대라 당시는 그 정도만 해도 가문의 영광(?)으로 연일 축하를 받기도 했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 경제도 모르고 경제신문 기자?
한두번 나룻배 탄 경력으로 외항해운단체 해무총책?
그러나 영문도 모르는 영문과까지는 좋았는데 경제도 모르는 경제신문 기자가 되어 경제원론부터 읽어야 했으니 이때부터 계속 엇박자로 짝퉁인생으로 살아가야할 어려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었다. 6개월 수습을 마치고 월급으로 거금 8,000원을 받으며 선배기자들을 따라 당시 경제부처와 서울시청 상공부외청 관세청 출입을 거쳐 흔히 얘기하는 교통부 출입기자단 27명에 말석으로 가입하는 영예(?)를 얻게 됐었다. 경제신문 특성상 60~70년대 고속 경제성장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걸맞는 해운분야를 중점적으로 뛰라는 데스크의 주문에 따라  “바다 海자” 가 붙은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않고 발로 쓰는 일선기자가 되겠단 일념으로 해운국을 위시하여 해운회사를 열심히 취재하며 외곬수로 한 길만을 중점적으로 파고 들었다.


운명은 자주 바뀐다고 했던가?  5~6년 지나 제법 정들 때쯤 해서 어느날 느닷없이 당시 대한해운공사(KSC) 사장으로 한국선주협회장을 맡고 있던 주요한 회장께서 급하게 종이쟁이(?) 출신이 한사람 필요하니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솔깃해 크게 주저함 없이 첫직장 고수란 절개와 지조를 변절하여 정들었던 교통부 출입기자실을 접고 선주협회 조사부장으로 옮겨 직종을 바꾸게 됐으니 또 한번 짝퉁인생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는 자충수를 두게 된 것이었다. 유신으로 온 나라가 시끌 벅적하던 73년 7월의 일이었다.


업무 분장에는 해운의 통계작성 시황분석 홍보활동 자료발간 등등으로 돼 있으나 우선은 1주일에 20쪽 이상의 회원사와 업계소식을 전하는 선주협회보를 발간 배포하는 일이었다. 출근 하자 마자 첫째날은 원고작성, 둘째날은 공판타자한 스텐실 교정보기, 셋째날은 납품받아 회원사를 비롯한 해운조선업계 경제단체 정부의 각부처와 유관기관 외에 대학을 위시한 각종 도서관 그리고 관심있는 인사나 원로들에게 발송하는 일로 뭐누며 뭐 볼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고 예비군 훈련 불참으로 생기는 애로사항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기자실과 출입처 및 관련단체와 업체를 돌며 하루에 한 두건 정도 취재 기사를 작성해서 데스크에 넘기기만 하고 거들먹이며 대접받고 돌아다니던 시절의 향수가 마냥 그리워도 이미 때는 지났고 조직이탈의 쓴맛이라듯 직종을 변절한 쓴맛을 달게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76년 3월 13일 교통부 산하 외청으로 해운항만청이 발족했다. 1군 직할 화학중대에서 육군대위와 ROTC 소위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전방 복무를 마친 육군하사 서하사가 수직 업무라인을 우러러 쳐다보니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교통부장관 산하에 보안사령관 출신의 항만청장,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선주협회장 및 역시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협회 사무국 이사장 그리고 중앙정보부 울산분실장 출신의 육군대령 비상계획부장등 별들의 집합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운정책 입안 라인들과 함께 일한다는건 사병 출신인 나에겐 조직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CPX 훈련이나 기동훈련처럼 매일 일과가 힘들긴 해도 한편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좁은 사무실이었지만 현역 및 전역 별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주월사령관 출신의 브라질 대사는 현역시절의 직속상관이었던 참모총장 이사장을 방문할때 현지 커피를 선물로 주기도 한 기억이 새롭다. 특히 고인이 되신 육군대장 출신의 이사장이 상배로 재혼을 하던 육군회관 결혼식장은 수백명의 전현역 장성들이 주렁주렁 훈장단 정장 차림으로 은하수 같은 별들의 행진은 스펙타클한 장관을 이뤄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한 진면목을 보이기에 충분했던 같다.

 

해기사출신 선사간부를 스승으로 해무 동냥공부
그러나 설상가상에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어느날 갑자기 내겐 청천벽력이요 천지개벽 같은 메가톤급 대형 사건 사고가 터졌다. 남들이 볼때는 단순한 자리이동이지만 내게 있어선 눈앞이 캄캄한 날벼락이요 진짜 소름끼치게 가공할만한 그리고 본격적인 짝퉁인생의 험난한 길을 예고하는 처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퇴근길 서소문동 사무소 근처에서 간부 몇명과 소주를 한잔 하던 중에 인사권자인 엘리트 고급관료출신 C전무이사 왈 느닷없이 “서부장! 당신이 낼부터 토달지 말고 해무부를 좀 맡아 줘야겠어!”  


어린시절 고향서 한두번 낙동강 나룻배를 타보고 서울와서 창경원서 보트 한두번 타본게 승선경력의 전부인데 해양계 대학을 나와서 상당기간 승선경력을 쌓고 그것도 선장이나 기관장을 거친 중견 해기사 출신이 맡아야할 선주협회 해무부장을 갑자기 명령하니 배에 올라 본선을 당장 운항하는 일은 아니로되 당시 해무분야에 산적한 업무를 일람하면 눈앞이 캄캄하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일이었다.


알아야 면장을 한댔는데 알고서도 어려울 배를 바다에 띄워 돈을 버는 해운기업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본선자체에 대한 지식이나 이들 운항요원들의 교육훈련 및 선박과 선원에 관련되는 각종 법령및 안전문제와 보험문제 그리고 국제항로에서의 제반 협약 이해및 대책수립 외에 산별노조중 10만 조합원이란 막강 선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사용자 측의 각종 대책 등등.. 제목만 보고도 머리에 쥐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 천만에! 이건 그럴 사안이 아니었다. 본선과 해상경험이 풍부한 해기사 중심으로 운영되는 해무위원회를 소집한 협회의 해무부장이 내용의 이해나 대책수립은 고사하고 모든 게 처음 듣는 용어와 내용이라 말귀를 못 알아 들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힐 일이니 통할리가 없었다. 고무새총도 안쏘아본 나에게 LMG나 박격포를 안겼으니 우선 어디를 당겨야 발사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마침 70년대는 급속한 수출신장에 따라 우리의 외항 선복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데다가 안전을 중시하는 국제해운 시장도 IMO(당시는IMCO) 및 ILO라는 세계해운 총독부(?)를 만들어 UN기구가 직접 관장하는 체제하에 새로이 개편되는 과정이었다. STCW를 비롯해서 SAR,  MARPOL,  CORLEG에 FGMDSS,  PSC니 해서 규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각종 국제협약이 수도 없이 쏟아지는가 하면 해운분야 역시 동서문제는 물론 남북문제를 야기시켜 70년대에는 배의 척수 증가만큼이나 각종 국제법령 협약등이 그 제목만 따라잡기에도 힘들 정도로 늘어만 갔다. 업무를 맡자 마자 연일 회의 소집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고 경력많은 해기사출신 회원사 요원들의 능력을 빌려야 했다.


우선 수능시험 공부하듯 해양계 대학의 양대 산맥 한국해대 목포해대 교과목 개론을 제목만이라도 익혀 서당개가 풍월을 읊고 식당개가 라면을 끓이듯, 어깨너머 공부를 시작했다. 아울러 선사의 해기사 출신 간부들은 모두가 스승이란 기분으로 동냥공부를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틈 나는대로 제목만이라도 익히기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인맥을 파악하기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리고 협회라는 조직이 유리한 점은 한 업종의 대표기관에서 전체를 일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또 전직에서 익힌 인맥으로 인해 해운행정 당국과의 업무협의 및 실무 조정이 용이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수삼년 짝퉁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반풍수가 지관인양 행세하게 되고 청출어남이라 해기사들과 어울려 완전히 그쪽 족보에 편입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싱글 기수들과  일하며 심부름을 하다보니 한국해운 선박 선원정책에 깊숙히 개입하지 않을수가 없게 되어 가는 게 아닌가. 하선해서 육근을 시작해 선주협회에 일보러 오는 해기사들이 짝퉁인 나더러 몇기 되시느냐는 질문에, 빠르면 16기 늦으면 17기 대충 16.5기 상당이외다 하는 소수점 찍는 기수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79년에는 한 해대 35기들 틈에 끼어 한바다호를 타고 키룽과 나가사끼, 랑군과 캘카타등 원양실습으로 승선경력을 늘였고 목포해대 유달호도 타고 도선료율 산정을 위해 항만마다의 파이럿 스테이션에서 도선실습(?)도 많이 했다. 해운이 어려울 때 계선지를 물색한다고 전국 해안을 샅샅히 뒤지며 통선을 타며 연안 승선 경력(?)을 늘이기도 했다. 아무리 삶아 빨아도 걸레가 행주 될 수는 없고 호박에 줄친다고 수박이 될 수 없듯 아무리 노력해도 항해사, 기관사, 통신사와 해양계인력 양성 교육기관의 노하우 그리고 예선 도선 항만행정 등을 고루 알아야 하는 만능기능을 섭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기를 십수년 그냥 이름만 알고 얼굴만 익힌 게 아니라 외항해운과 관련되는 업종이라면 어느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일하고 사귀었다. 가끔 외형으로는 닮은 꼴이 돼가는 착각을 느끼기도 했고 진품에 가깝게 흉내를 내는 꾀가 생기기도 했다.

 

해양대 출신이 붙여준 별명 ‘조커’ ‘와일드 카드’
스스로 준 작위  “대한민국 해운 평생 홍보대사”
그럴싸한 포장으로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처럼 조직의 기능상 약방의 감초같이 그럴싸하게 짝퉁해기사로 업무의 중심에서 그래도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해 본다. 무엇이건 아는 것도 없지만 또한 모르는 것도 없는 봉도 아니지만 학도 아닌 것이 특히 해운계에서 기술직이라 할 수 있는 그 틈바구니에서 안기생(졸업 기수가 없는 즉 비 해양계 출신)이 허덕이며 보낸 세월이 이제 우리의 세계해운 세력이 G-10을 넘은 입장에서 되돌아 보면 참으로 초창기에 짝퉁으로 참여했던 그 시절이 값지고 가슴 뿌듯한 환희를 느끼게 한다.
7~80년대 양대 해양대학 출신 싱글기수 원로님들을 비롯해서 외항해운계에 참여한 웬만한 중진들을 모시고 입안하던 각종 정책의 수립이나 시행에 이 짝퉁이 동참하여 심부름 하지 않은 분야가 있었을까? 그래서 누가 내게 붙여준 이름이 해양계 출신들에게 ‘조커’요 ‘와일드 카드’였으니 당시 필요할때 어디든지 끼워서 프레시나 포카드를 만드는 업무분야에 만만하게 쓸 수도 있고 해양계 인맥을 두루 샅샅이 알고 있으니 대화중 자기 동기나 가까운 기수 외에는 모를 때 어느 기수고 간에 근황을 전할 수 있는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어준 영광스런 별명이리라.


바다와 배라는 깃발과 이름아래 꼭 40년을 채웠으니 한가하면 이제 그간 모은 몇만장의 명함을 정리할 생각이다. 실속은 고사하고 오지랖을 넓히려고 정계나 관계, 경제계 업계 그리고 국제회의 등으로 여러나라를 쏘다니며 한뼘짜리 작은 발을 마당발로 만들려고 내 직함에 버겁고 넘치게 오버도 해가며 홍보물이나 광고전단 뿌리듯이 하찮은 명함을 뿌리고 다니던 시절의 열정을 다시 회상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추억해 보리라! 어느날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수여한 작위다. “귀하를 종신직 대한민국 해운계와 양대 해양대학 및 월간 해양한국의 국내외 평생 홍보대사로 명하노니 마지막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지어다!” 그 어느 업종보다 보람있었고 그 무슨 직위보다 자랑스러웠으며 그 어떤 영예보다 영광스러운 짝퉁 40년도 저문다. 그러나 “한국 근세해운 역사 40년은 이 머리 속에 있소이다!” 하는 자긍심도 있다.


끝으로 보석도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정도는 되고 명품도 롤렉스나 구찌 수준은 돼야 유사품 짝퉁이 성행하듯 해운계에서 나같은 유사품 짝퉁이 해기사 출신처럼 평생을 그 속에서 희노애락을 같이하며 동행한건 역시 해운업이 오늘의 한국경제를 이룩한 도약의 발판이며 국민경제의 젖줄이라는 보석이요 명품이며 유명브랜드 였기 때문이란 생각에 짝퉁으로 살아온 해운계 40년 후회는 없다. 참으로 해운이 값진 보석이니 짝퉁마저도 연한 빛과 추억을 새기며 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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