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통합물류체계 구축과 붕괴 원인
                                                        

<편집자 주>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은 황해라는 하나의 바다를 공유하고 있어 한 나라와 같은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물류정책 기조도 자국의 이익만이 아닌 공동발전을 위하여 장보고, 칭기스칸 시대와 같은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와 칭기스칸이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탈국가적 사고의 실현을 위하여 동북아 권역의 물류체제의 역사적 원천을 탐구하고 선인들의 물류를 통한 협력과 발전에 대해 분석한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의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순>
1.장보고의 통합물류체계 구축과 붕괴원인
2.칭기스칸의 물류체계
3. 장보고와 칭기스칸의 물류패러다임 비교

1. 서론
오늘날 물류의 발전은 경제활동의 유발수요라는 소극적 기능을 떨쳐버리고 다른 부문의 수요를 창출하고 해결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현대물류의 개념은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물의 운송에 역점을 두던 협의의 물류개념에서 제품의 생산자에서 최종소비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의 경제활동과 서비스의 제공으로 활동범위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규모의 약 20%, 세계화물량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역사에 물류의 첫 장을 열었던 해상왕 장보고는 12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의 3국을 연결하는 해상항로를 장악하여 효율성이 높은 국제물류조직을 구축했다. 장보고는 최초로 청해진에 물류클러스터를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에 해외거점을 구축하여 하나의 통합된 물류체제로 경영했다. 그는 동북아 해상교역의 네트워크 창설자, 동북아 통상협력 모델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장보고가 신라시대에 구축한 교역과 물류시스템은 당시 나당일 3국의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로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에 동북아의 해상물류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장보고는 3국간 국제교역을 촉진시킨 해상무역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칭기스칸은 13세기에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흑해를 건너 유럽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몽골의 북쪽 초원부터 남으로는 말레이시아, 인도,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통합했으며 육로 물류네트워크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칭기스칸은 유라시아의 넓은 대륙을 통합하여 국경을 초월하는 운송 및 물류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동서간을 육상으로 연결하는 탄탄한 실크로드를 건설했다.  그 후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에 의해 바다로 나가는 수로를 개설하였고 남송을 통합하여 강남의 해양세력을 포용하게 됨으로써 육상과 해상을 아우르는 통합물류체제를 구축했다.

 
통일신라나 몽골의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장보고의 해상운송과 칭기스칸의 육상운송체제는 최적의 물류시스템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물류의 기본적인 관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장보고와 칭기스칸은 복합적인 물류기능을 통합하여 수행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물류를 역사 속에서 찾아보는 데는 9세기 신라 청해진에 본거지를 두고 통합물류체제를 구축했던 장보고대사와 13세기 몽골부족의 통일을 계기로 잠치라는 독특한 육상운송 물류체제를 구축한 칭기스칸의 물류체제를 오늘날 근대적 물류개념에 입각하여 비교해 보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줄 것으로 보인다. 
 
2. 장보고의 통합 물류체제 구축
1) 최초의 물류 클러스터 청해진

일찍이 장보고는 중국 당나라의 군인으로 있으면서부터 국제 정세를 내다보고 있었다. 중국에서 무역거래를 시작하면서 그는 조공무역의 시대가 퇴조하고 민간무역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재당신라인의 거점들을 파악하고 신라와 무역을 시작할 즈음 일본에도 시찰을 다녀오며 최적 물류거점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청해진대사로 임명된 직 후 동북아해상을 지배하면서 신라, 당·일 항로의 최적 요충지인 완도를 중심으로 대규모 무역, 물류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청해진은 무역 뿐 아니라 물류를 위한 선박, 항만, 조선, 항해 전문가 등이 결집된 이른바 물류클러스터(logistics cluster)였으며 허브포트(hub-port)였다. 완도는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대양을 항해하는 초대형 선박을 건조하며 최신식 하역시설로 이루어진 신항이었으며 뛰어난 도선사들과 항해사들이 머무는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기반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이러한 기능들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섬에 집중되어 존재하게 됨으로써 물류를 위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은 명칭은 같은 진이지만 단순한 연안의 관리와 방어만이 목적이 아니라 황해와 동중국해로 적극 진출하여 해상교역로를 배타적으로 관리하여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것이며 장보고의 뛰어난 리더십과 통찰력 등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2) 해외 거점과 글로벌 물류 네트워크
청해진은 동북아 해상을 지배하는 거점으로서 당과 일본은 물론 이슬람 상인들과도 교류하였다. 물류거점인 청해진은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경영체제를 인정받았고 해외 물류거점 역할을 하는 신라방과 신라소 또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이렇듯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당·재일 신라인을 연결하는 커다란 동북아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장보고는 신라, 당, 일본의 삼각무역에서 청해진을 중심항(Pivot Port, or Hub Port)으로 하고 당나라의 乳山浦, 楊州, 明州와 일본의 博多를 피더항(Feeder Port)으로 하는 체계적인 중심과 지선형(Hub and Spoke)물류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무역본부를 설치하고 황해와 동중국해로 해상세력을 펼쳐 나갈 때 당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연안일대와 주요 내륙수로의 요충지에는 재당 신라상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황해 횡단항로의 입출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산동반도의 적산에는 신라 관련 사무를 전담하여 처리하는 신라소(新羅所)가 있었고, 등주에는 신라인을 위한 국영호텔 격인 신라관이 있었다.


일본의 황해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북규슈지역의 하카다 대재부(지금의 福岡市)에도 신라 교역인들이 집단 거주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본에 집단 거주한 신라상인들은 다른 나라 상인들보다 특권을 가지고 상업에 종사했으며 어느 정도 독점적인 상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당나라와 일본에 형성된 신라상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청해진이 설치되면서 장보고 해상무역체제의 중요한 해외거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장보고 대사는 청해진을 본영으로 하고 신라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지역을 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네트워크로 구축하여 강력하고 효율성이 높은 종합물류네트워크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3) 글로벌 현지화 경영 전략
청해진에 본부를 두고 당나라와 일본의 주요 교역 요충지에 해외 거점을 구축한 장보고의 해상무역체제는 장보고의 글로벌 경영전략이 숨어 있다. 장보고는 당나라의 등주, 초주, 적산, 연수지역, 회하지역 등 해외지역의 특성에 맞는 요구조건을 수용하여 당해 중앙정부의 인허를 받아 현지 거점을 만들었다. 국제물류운송의 효율성과 시장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현지거점을 확보한 것이다. 해외거점의 중심에는 물론 재당, 재일신라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의 특성에 맞게 신라방, 신라소 등의 형태로 구성하였으며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극 참여시켜 현지화 경영에 나섰다. 이렇게 현지화 경영을 통해 해외네트워크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성공하였으며 글로벌 물류기업으로서 기반을 확고하게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가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인 완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의 교역 요충지에 해외 거점을 구축하여 본부와 신속하고 긴밀하게 무역업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만든 체제는,  오늘 날 다국적기업들이나 종합무역상사들이 세계를 대상으로 주요 해외 거점에 현지법인을 설립하여 본부와 일사분란하게 영업을 전개하는 시스템과 유사한 것이다. 장보고 대사의 청해진 체제는 1200여 년 전에 이미 오늘 날의 종합상사나 다국적 기업과 같은 해외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였으며 이러한 해외 현지화 전략이 모두 장보고 대사의 뛰어난 경영능력의 결과다. 장보고 대사는 당나라와 일본 등에 주요 해외 거점을 구축하여 청해진의 무역체제가 당시 주요 국제항로의 지배력을 높이고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이익극대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장보고 대사의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경영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4) 장보고 청해진 해상체제의 특징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해안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황해와 동지나해에서 자주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고 신라무역상들에게 큰 피해를 주던 해적을 소탕하고 해양질서를 회복시켰다. 황해의 해양질서를 회복시키면서 나당일 3국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고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해상왕이라는 명성까지 누리게 됐다.


장보고 대사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왕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된 것은 그가 미래를 내다보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효율성이 높은 해상물류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청해진 해상무역체제를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복합경영조직으로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청해진 무역체제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는 비전을 제시하는 뛰어난 최고경영자였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쌓고 널리 그 이름을 드높인 장보고가 대사가 완도에 설립한 청해진 해상무역체제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의 동북아시아 3국의 해상교통 요충지인 청해진에 국제무역항을 건설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지금의 완도 일대인 청해진은 중국 일본 그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로 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이 있는 동북아시아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해상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당·일 3국의 해상 요충지에 있는 청해진(완도)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해상실크로드의 동쪽 끝의 요충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장보고 해상무역체제는 단순히 중계무역에만 그친 게 아니라 자체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고부가가치 상품을 직접 생산하여 수출을 도모했다는 점에서도 특징이 있다. 당시 한중일 교역품 중 중국 월주요 도자기가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의 하나였다.
셋째, 장보고 해상무역체제는 인력, 정보, 운반시스템, 금융시스템을 종합적으로 활용했던 현대판 종합상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당나라에서 신라인들의 주요 거점지역은 산동반도, 강회지구, 동남연해지구였는데 이 지역은 중국 내에서 대운하와 회수, 장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신라와 일본으로 항해하는 출발점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신라방, 신라서등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넷째, 신라나 당나라에서 수입된 상품을 일본 국내로 유통시키는 교역 네트워크가 내해 요지들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일본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규슈지방에는 당나라의 신라방과 유사한 신라상인의 집단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해상무역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3. 장보고 물류체제의 성공비결
1) 장보고의 높은 식견과 뛰어난 CEO 자질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황해의 해상왕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첫째 근거는 그가 당시 해상무역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견식을 갖추고 있는데다 최고경영자(CEO)로서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재당 시절 이미 무령군 소령이라는 관직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 군사전략가로서의 전문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양민을 괴롭히던 해적 소탕에 능력을 발휘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한 장보고는 재당 시절부터 재당 신라인 상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해상교역에 관한 전문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2) 청해진을 3국 교역항로의 중심지로 활용한 점
장보고가 교역네트워크의 본영을 한반도 서남해안에 설치한 것은 국제무역의 성공을 위한 훌륭한 선택이었다. 당시 서남해안은 신라, 당나라, 일본 3국간을 연결하는 해상항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남해안이 신라시대에 동북아 항로의 중요한 발착지였음은 택리지의 저저 이중환의 기록에도 나오고 있다. 이중환은 신라시대에 바닷길로 중국에 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항로가 영암 구림리 또는 월남촌에서 흑산도, 홍도, 소흑산도, 중국의 영파로 되어 있다.


동북아 3국간 해상항로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인 서남해안에 장보고 교역네트워크의 본부를 둠으로서 인적, 물적 교류를 활성화시키고 황해의 해상왕으로 등극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리고 청해진을 본부인 중심항만(hub port)으로 하고 중국 동해안 지역의 등주, 적산포, 초주, 연수, 명주 등 주요 항구와 일본의 대재부, 하카다 등 주요항구들을 피더항만(feeder port)으로 구축하여 해상교역의 효율성을 높인 것이 또 하나의 성공비결이 될 것이다.

 

3) 국제사회의 신뢰와 공인
장보고는 당시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3국간의 전폭적인 신뢰와 공인을 받았다. 이것이 장보고 청해진 체제가 성공한 두 번째 비결이 될 것이다. 우선 장보고가 신라 정부의 신뢰와 인정을 받은 것은 청해진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입증된다. 중앙정부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해상무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흥덕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나라와 일본으로부터도 신뢰와 함께 인정을 받았다. 장보고는 당나라에는 견당사, 일본에는 매물사를 수시로 파견하여 현지의 무역상인들은 물론 관계 당국자들의 지지와 지원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또는 국제해상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을 과감하게 관계 국가에 기부하고 환원하는 조치를 취해 당국자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유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적극적인 홍보활동
장보고는 자신의 교역활동에 대한 3국간 여론의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에도 크게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천태종 스님 엔닌의 당나라 여행활동을 적극 지원했던 것은 일본의 지도층 인사에 많은 배려와 편의를 제공하여 장보고의 해상무역활동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장보고와 장보고의 교역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신라상인들은 엔닌과 함께 당나라 여행에 동행한 일본 유학승 엔사이나 이미 당나라에 건너와 중국 오대산 일대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일본 유학승 에가쿠 등에 호의를 베풀고 편의를 제공했다. 이러한 호의와 환대를 받은 일본인 수도승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장보고와 신라상인들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했을 것이다.
 
5) 교역상품의 탁월한 선택
장보고가 교역상품을 탁월하게 선정한 것도 그의 성공비결이다. 최근의 교역에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품을 수출할 것인가 또는 어떠한 상품을 수입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충분한 수요가 있는 제품을 선정했을 때는 성공하지만 수요가 없거나 수요가 충분하지 못한 경우 수익을 내기 어렵고 이렇게 되면 계속적으로 사업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장보가 중요하게 여긴 물품은 도자기였다. 장보고가 서남해안 지방인 강진군과 해남면 지역에 대규모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중국 도자기 기술을 이전시켜 도자기 생산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의 씨를 뿌린 것이며 고려청자의 개발도 그 산물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6) 신라인의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일본의 천태종 승려 엔닌이 기록한 ‘입법구당순례행기’를 읽고 장보고가 해상왕이라고 극찬했다. 동양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가진 라이샤워 교수가 장보고를 극찬한 이유는 장보고가 통일신라시대에 황해의 해상권을 지배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황해의 해상왕으로서 그 위세를 드높일 수 있도록 성공한 비결은 우선 무엇보다도 신라인들의 항해술과 조선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 장보고 해상물류체제의 붕괴 원인    
1) 장보고 사후 청해진
갑작스러운 장보고의 죽음 후에 청해진은 이창진이 이끄는 친 장보고세력과 친 염장세력으로 양분되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여 이창진 세력은 염장세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창진 세력이 토벌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청해진을 떠나 일본과 중국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청해진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과 갈등은 장보고 유산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도 이어졌다. 장보고가 암살되기 전에 무역선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던 회역사가 청해진으로 돌아오니 장보고가 암살되어 있었고 이에 다시 배를 돌려 일본으로 돌아갔다. 염장은 배를 찾으려고 일본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일본정부의 거절로 물건을 찾지 못하였다.

 

2) 후계자 양성의 부재
장보고의 암살에 성공한 염장은 장보고의 부하들을 앞에 두고 자신을 따르기를 강요하였다. 이때 염장에게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후에야 장보고의 부장이었던 이창진이 염장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를 보면 장보고가 죽고 난 후 청해진에는 염장에게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동안 청해진이 장보고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리더라면 자신이 없더라도 조직이 운영될 수 있도록 체재를 갖추어야 하며 뒤를 이을 인재들을 양성했어야 했다. 만약 장보고의 뒤를 이을 인재들이 청해진에 더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청해진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인적 관리체제의 붕괴
장보고대사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해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나 그의 사업은 신라의 경제기반과 연계되지도 못하였고 정부정책과도 멀리 있었기 때문에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단지 개인중심의 막강한 경영권과 경제력의 집중만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장보고 사후 대중국, 대일본 무역은 퇴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장보고에 의해 이루어졌던 재당, 재일신라인과의 네트워크를 염장이 이끌고 나가지 못하게 되어 인적 네트워크도 붕괴되었고 마침내 장보고를 정점으로 뭉쳐있던 해상 세력은 재당신라인, 재일신라인, 그리고 청해진 중심의 서남해 해상세력 이렇게 셋으로 다시 분리되고 말았다.

 

4) 조선기술의 퇴화
장보고는 자신의 능력으로만 청해진을 운영하였고 해상세력을 장악하였다. 뛰어난 리더였음에는 분명하나 결국 그의 죽음 후에 청해진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를 잇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청해진의 인적 네트워크는 붕괴되었고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인재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동북아 해상을 장악하고 독점해오던 장보고가 사라지자 그와 함께 신라의 해상세력도 사라지게 되고 군소 해상세력만 남게 되었다. 신라의 해상세력이 급격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 선박에 대한 필요성도 감소되어 결국 조선기술이 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선 기술들은 결국 이조시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게 된다.

 

5) 물류체제의 붕괴
⑴ 무역거점 역할의 상실
혼란스러웠던 청해진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으나 염장이 다스리는 청해진은 장보고가 있던 청해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서남해안의 많은 군소 무역업자들이 통제를 벗어나 불법적인 무역을 자행하기 시작하였으나 약해진 청해진의 군사력으로는 이들을 관리 할 수 없었고 결국 동북아 무역의 거점역할도 점차 시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⑵ 무역 독점의 부작용
일반적으로 독점의 상태에서는 장기간 막대한 이윤이 발생하게 된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방의 군소 해상세력은 반대로 이익을 잃게 되었다. 장보고 사후 신라의 해상권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만약 당, 일본과의 교역이 독점이 아닌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청해진 소멸 이후에도 신라의 해상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을 것이다.

 

⑶ 청해진 무역활동의 단절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청해진 붕괴 이후 인적 네트워크가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해상세력은 다시 재당신라인, 재일신라인, 서남해안 해상세력 등 셋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무역활동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간의 교류가 있어야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사무역 형태로 신라의 무역은 계속되었지만 인적 네트워크가 붕괴됨으로 인해 청해진을 통한 무역활동도 결국 함께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⑷ 물류클러스터의 기능 소멸
물류란 결국 무역을 뒷받침하는 기능이다. 청해진의 역할은 해상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물류클러스터였다. 장보고 사후 무역활동이 단절됨에 따라 청해진의 물류클러스터 역할도 점차 소멸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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