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서 맛보는 ‘미국의 숨결’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메모리얼(memorial)’의 도시이다. ‘메모리얼’에는 ‘기념비’, ‘기념비적인 것’, ‘추도’의 뜻이 담겨있다. 대체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추도한다는 것일까. 무덤과 묘지들이 단순히 참배객들을 위한 장소가 아닌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유는 무엇일까. 워싱턴의 베스트 명소들은 하나같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지도자들과 자국민이 흘린 땀과 피와 노력은 결코 쉽게 잊혀지거나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함을 보여줬으며, 동시에 미국이 우주과학기술과 문화가 어우러진 세계 강국임을 새삼 알려주었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일주일간의 미국여행을 다녀왔다. 이 중 미래로 흐르는 역사의 도시 워싱턴. 미국사가 살아 숨 쉬는 그 현장을 스케치했다.

 

 내셔널몰
 내셔널몰
8월 5일 워싱턴의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새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진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강한 햇빛 탓에 거리의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대부분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여름임에도 우리나라처럼 후덥지근하거나 찌는 듯이 덥지가 않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더라도 금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그야말로 관광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아까부터 버스는 워싱턴DC 중심가에 자리한 ‘내셔널몰(National Mall)’을 향해 달리고 있다. 창밖풍경은 띄엄띄엄 세워져 있는 창고 같은 단층형 건물들과 구걸하는 흑인 노숙자들을 지나쳐 어느새 성조기가 펄럭이는 정부 빌딩들로 바뀌어 있다. 내셔널몰은 도시 한가운데에 조경된 거대한 녹지공원으로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물이 있는 미국의 심장부다. 거리는 유럽풍 빌딩들로 이색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나라 여의도를 연상시키며 고풍스러운 예배당과 ‘국가를 위해 젊음을 바친 군인들을 책임진다’는 미국 국가보훈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의 커다란 빌딩이 인상적이다.
버스가 신호대기로 잠시 멈춘 사이, 우연찮게도 빨간 벽돌의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이 창 밖에 나란히 서 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은 1993년 미국 내 유대인들의 기금과 미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됐으며 전 세계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이날은 시간관계상 건물 외관을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무릎 위에 놓여진 얇은 워싱턴 가이드북을 다시 펼쳐 읽어 본다. 워싱턴DC는 1790년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의 수도로 지정됐다. 정식명칭은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이며, 워싱턴 DC로 약칭된다. 어느 주에도 소속되지 않은 특별구이자 미국의 입법·행정·사법부의 중심지로서 내셔널몰에는 잘 구획된 넓은 도로들이 교차돼 있으며 십자 형태로 동쪽에는 국회의사당과 워싱턴 타워가, 서쪽에는 링컨기념관이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에는 백악관이, 남쪽에는 토마스제퍼슨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다. 또한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국립미국역사박물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알링턴 국립묘지, 국립미술관, 국립공문서보관소 등 대표적인 관광지가 밀집해 있다. 모든 박물관과 기념관의 입장료가 무료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어느새 버스는 목적지에서 우리들을 내려주고 금새 사라졌다. 워싱턴이라는 도시를 담아내기에 하루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지만 우선 가까운 동선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흰 장미 한 송이처럼 우아한 ‘백악관’
백악관은 미국 대통령이 거주하고 업무를 보는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다.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이고 중대한 결정들이 내려지기에 항상 각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TV에서만 보았던 백악관의 첫 인상은 마치 흰 장미 한 송이처럼 우아하고 단정했으며 소박했다. 맑은 하늘 아래 빨간 꽃들로 잘 정돈된 녹지 위에 자그마한 분수가 틀어져 나오고 있다. 미국 권력의 상징이지만 외관상으로는 그저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평범한 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백악관
백악관
1800년 완공된 백악관은 수도인 워싱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아일랜드 건축가인 제임스 호번은 아일랜드 국회건물 ‘렌스터하우스’를 모델로 백악관을 설계했다. 백악관이라는 명칭은 1814년 대영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 후 외벽을 하얗게 칠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백악관에는 130여개의 방이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이 관저의 2층에서 살고 있다.


백악관 감상을 마치고 뒤를 돌아본 순간 한 중년의 미국인이 성조기를 단 팻말을 들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베트남 참전용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1인 시위를 하는 듯 했다. 백악관 정문 건너편에는 흰색 비닐로 만든 누더기 천막에 전쟁반대 구호 플랜카드를 덕지덕지 붙여 놓고 반전시위를 벌이는 캠프가 보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백악관을 배경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쁜 모습이다. 점점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들자 어느새 경찰차 한 대가 이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웅장한 ‘링컨기념관’, 기념비적인 ‘리플렉팅풀’
다음으로 워싱턴의 랜드마크인 링컨기념관에 도착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압도적이다. 1922년 설립된 링컨기념관은 36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웅장하게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이 암살된 당시 북부 연방 36개의 주를 가리킨다.
계단에 올라 내부로 들어가자 중앙에 거대한 링컨대통령의 좌상이 단촐하게 놓여있다. 조각상 뒤편 벽에는 ‘아브라함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조각상의 좌우 벽에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게티즈버그 연설문과 링컨의 두번째 취임 연설문 일부가 각각 새겨져 있다.

 

워싱턴의 랜드마크 '링컨기념관'
워싱턴의 랜드마크 '링컨기념관'
특이하게도 조각상의 얼굴 좌우 표정과 손의 형태가 다르다. 좌측이 다소 딱딱한 표정에 주먹을 쥐고 있다면 우측은 온화하게 미소 짓는 따스한 리더의 모습으로 손을 활짝 펼치고 있다. 조각가가 남북전쟁 전후의 링컨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날도 미국인들과 각국의 관광객들이 링컨기념관을 가득 메웠다. 조각상을 바라보고 벽에 새겨진 글들을 유심히 읽는 그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으며 링컨이 얼마나 미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성인의 반열에 넘어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듯 하다.

 

기념관 내부 중앙에 놓인 링컨조각상
기념관 내부 중앙에 놓인 링컨조각상
밖으로 나와 계단에 다시 서자 기념관 앞에 조성된 넓은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호수의 이름은 ‘리플렉팅풀Reflecting Pool’로 워싱턴DC의 또 다른 명소이다. 베르사유 및 퐁텐블로 궁전의 대운하를 본떠 만든 인공연못으로 링컨기념관이 문을 연 직후 일반에 공개됐다고 한다.
링컨기념관과 리플렉팅풀 주변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기초를 놓은 기념비적인 장소이자 현재도 미국에서 평화시위, 항의집회, 대통령 취임식,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등이 열리고 있는 유명한 장소이다. 마틴루터킹은 1963년 8월 28일 링컨기념관 대리석 계단에서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을 남겼으며 영화 <포레스트검프>에서 주인공 톰행크스가 베트남전 반대연설 도중 이 호수를 가로질러 연인에게 뛰어가던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링컨기념관 반대편 호수의 끝자락에는 워싱턴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우뚝 솟아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형상으로 높이 169m의 대형 첨탑인 워싱턴기념탑은 1948년 조지워싱턴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기념물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워싱턴은 영국의 통치에서 조국을 자유로 이끌고 여러 위대한 선례를 남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기념탑 내부의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워싱턴DC의 전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날은 지난해 8월 지진으로 인한 균열 보수공사가 한창이어 내부 관람은 할 수 없었다.

 

리플렉팅풀
리플렉팅풀
리플렉팅풀을 옆에 끼고 쭉 펼쳐진 보행도로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수의 물은 더운 날씨 탓인지 녹조가 심해 보였지만 먹이를 찾아 물 밑으로 잠수하는 오리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천천히 걷다 보니 멀리 신전 분위기의 링컨기념관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현기증이 난다. 새파랗고 투명한 하늘에는 햇빛과 흰구름을 뚫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커다란 나무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간질인다. 얼굴색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오리, 새, 다람쥐들과 어우러지고 있다.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영화인지 헷갈린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느낌을 받으며 문득 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Freedom is not free” 한국·베트남 전쟁참전비
링컨기념관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여전히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진 19명의 군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로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5만 4,246명의 미국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이다. 키 작은 향나무 숲에는 판초우의를 입고 어깨에 장비를 멘 19명의 군인 조각상이 디테일하게 표현돼 있다. 머나먼 한국 땅에 와서 전쟁을 수행한 이들의 표정에는 금방이라도 적군의 총알이 빗발칠 것 같은 긴장과 중압감이 역력하다. 조각가 프랭크 게이로드는 1995년 이들 조각상을 새기면서 실제 한국전쟁 당시 사진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6.25 참전용사비
6.25 참전용사비

지난 5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어 7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미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전쟁에 지친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잊어버리고 싶어했으나 우리는 수십년간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곳에 여러분들의 희생이 새겨진 기념비를 세웠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그 어떤 전쟁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떤 참전용사도 소홀히 취급받지 않는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미국의 한 복판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추모비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며 기념비 한 쪽 벽면에 새겨진 글귀는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Freedom is not free”

 
 
반대편에 있는 베트남전쟁참전비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희생을 애도하고 민주주의와 미국의 단결을 상징하는 기념비이다. 1980년 당시 예일대 학생 마야린의 디자인을 채택한 베트남전쟁참전비는 건축물 자체로도 미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딱딱하고 엄숙한 조형물이나 건축이 아니라 매끈한 검정색 대리석 담벼락에 월남전에서 죽거나 실종된 희생자 5만 8,000여명의 이름이 연도별로 새겨져 있다. 어느새 관광객은 추모객들이 되어 담벼락을 천천히 돌아보며 벽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을 읽거나 어루만지며 자연스레 전쟁이 낳은 희생에 애도를 표하게 된다.
점심은 포토맥Poromac 강가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벚꽃나무와 수양버들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며 마음껏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강에서는 사람들이 카약과 카누를 즐기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너머 아름다운 알링턴 기념교(Arlington Memoiral Bridge)를 바라보며 풀밭에 앉아 점심을 먹으니 마음도 즐겁고 밥맛도 좋았다. 다만 말소리가 안들릴 정도로 시끄러워 하늘을 쳐다보면 비행기와 헬기가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참전비
베트남전쟁참전비

미래의 힘 ‘항공우주박물관’ ‘국립미술관’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후에 본격적인 박물관 투어에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스미소니언박물관 중 가장 현대적인 외관의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tional Air&Space Museum)이다. 입구에는 단체 수학여행을 온 체육복 차림의 중국 학생들로 이미 긴 줄이 서 있었으며 엑스레이 등 철저한 보안 검색이 이루어졌다.
과학기술강국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하는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은 연간 1,000만명이 찾는 워싱턴에서 손꼽히는 인기 박물관으로 1946년 첫 문을 열었다. 2개의 대형 전시관과 20여개 전시실에 전 세계에서 운행되었던 항공기의 실물과 모형, 전투기, 우주선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엔진, 로켓, 항공복장, 비행복 등 5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등 항공우주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국립항공우주박물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
1층 로비홀에 들어서자 천장에는 다양한 비행기들이 떠다니고 있다.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의 비행기 ‘스피릿 오브 세이트 루이스’와 세계 최초 동력 비행기인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플라이어’, 세계 최초 민간유인우주선 ‘스페이스십원’ 등 기념비적인 실물 비행기들이 공중을 나는 듯 매달려 있다. 1969년 최초의 달착륙선 ‘아폴로11호 사령선’과 1962년 미국 첫 유인 우주선인 ‘머큐리 캡슐’을 보며 별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 최초의 우주 정거장인 스카이랩의 내부에는 실제 우주선에서 사용되는 침낭, 냉장고, 화장실, 운동장비, 샤워시설 등이 실감나게 보존되어 있었다.


세계 1ㆍ2차 대전에서 사용된 전투기, 군사무기 등을 포함하여 냉전시기 경쟁하던 미국과 소련의 미사일과 로켓들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으며 록히드 마틴에서 제공하는 ‘3D아이맥스’ 영화관 등 난생 처음 보는 볼거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촉박한 시간 탓에 눈도장만 찍다시피 하고 박물관을 나섰으나 여전히 입구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바로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이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1941년에 개관한 미국 최대 규모의 미술관으로 국립이지만 소장품과 건물은 대부분 개인과 재단들의 기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스신전풍의 미술관 서관은 주로 13~19세기 유럽 미술작품을, 동관은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미로 등 20세기 현대미술작품 위주로 전시하고 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
워싱턴 국립미술관
간단한 가방 검사를 마치고 미술관에 들어서자 뭔가 물밀듯 밀려오는 감동을 느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빛의 대가’ 램브란트의 자화상과 그림들이다. 힘주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풍스런 액자들이 그림에 더욱 긴장감을 주고 있다. 벽면에 널찍하게 떨어져 있는 그림들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하다. 시대별로 방마다 그림들이 나뉘어 있었으며 덕분에 그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조각상들과 조형물로 가득한 방에서는 그 생생함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으며 동시에 미국도 유럽에 버금가는 문화강국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루벤스 <사자동굴속의 다니엘>, 1615년경, 캔버스에 유채
루벤스 <사자동굴속의 다니엘>, 1615년경, 캔버스에 유채
국립미술관은 항공우주박물관보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느긋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방마다 푹신한 소파가 마련돼 있으며 사진도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다. 다만 곳곳에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으며 매의 눈으로 절대 작품을 만지지 말라고 경고를 주고 있었다.
국립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네브라 드벤치’와 고갱, 고흐, 마네, 르누아르 등 거장들의 그림이다. 아쉽게도 이 그림들은 직접 보지 못하였다. 사전에 박물관 지도를 확보하지 못한 탓에 작품들의 방들을 일일이 찾기가 힘들었다. 다만 이날 운 좋게 뭉크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뭉크의 드로잉 습작, 판화 등 다양한 소품그림을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소품임에도 광고를 극대화하여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야 볼 수 있는 처지임을 생각할 때 워싱턴 가까이에 살아서 매일 이 곳을 구경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미술관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희한한 기분에 반쯤 넋을 홀린 채 미술관을 나왔다.

 

잘못 찾은 길의 행운 ‘국립문서보관소’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나온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꼭 가고 싶었는데 길을 헤매게 되었다. 몇 번이나 신호등을 건너고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마침 웅장한 석조건물이 나타났다. 자연사박물관 후순위로 보려고 했던 미국역사박물관일 것이라 내심 확신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제일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입구 앞에 늘어선 긴 줄이다. 대체 얼마나 인기가 많길래 햇빛 아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까 기대감이 들었다. 마치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듯 노트북, 휴대폰, 사진기 등을 꺼내놓았다.

 

미국 국립공문서보관소
미국 국립공문서보관소
반시간 정도의 기다림 끝에 들어간 주 전시실은 마치 종교적인 공간처럼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20여명 정도 제한된 인원만 입장이 가능한 둥근 방의 벽에는 미국 독립선언 당시의 각 주지사들이 회의하는 모습과 독립전쟁 후 헌법 초안을 만들 당시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미국 역사상 중요한 문서들이 보관돼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곳은 미국역사박물관이 아니라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내셔널 트레져>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국립공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Archive)이다. 미국 정부의 독립기관으로서 전쟁 기록문, 파리조약 체결 문서, 워터게이트 사건 도청 테이프, 900만장의 항공사진, 1억장의 서류문서 등 미국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관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관광객 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들르는 곳이며 우리나라 신문에는 ‘NARA 사진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등이 보도된 바 있다. 최근 국가기록물 유실 문제로 연일 떠들썩한 우리나라와 달리 기록을 국가의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하는 미국의 태도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특히 중앙에 헬륨이 채워진 방탄 유리관 안에는 미국의 국보로 여겨지는 ‘독립선언서’와 ‘헌법초안’, ‘권리장전’이 전시돼 있으며 좌우에 제복을 입은 경비원 2명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다. 이들 문서는 단순히 종이에 기록된 인쇄물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과정을 담은 소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졌다. 하지만 오래된 유물, 유적 등 구체적인 형상의 사물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설립정신과 민주주의라는 무형의 신념을 보존하고 기념하고 기록한 것이 매우 낯설고도 놀랍게 다가왔다.


내셔널몰 관광을 마친 후, 미국을 새롭게 만났다는 충격과 감동을 천천히 곱씹기 위해 공원에서 3달러를 주고 아이스티를 샀다. 한국의 보통 컵 크기의 2배에 달하는 컵을 들고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다양한 얼굴색의 사람들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빠져 있는 모습이 자유롭게 느껴진다. 조깅하는 사람, 잔디밭에 누운 사람, 개와 산책 나온 사람, 사진 찍는 사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사람, 전단지 돌리는 사람 등등이 주변에 가득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 돔이 우뚝 솟은 하얀 미국 국회의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워싱턴DC에서 만난 미국사는 흘러간 옛 이야기 수준이 아니라 다양한 메모리얼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기념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미국이 현재 서 있는 든든한 기반을 알게 해주었다. 여기에 무료 박물관들의 오픈마인드는 창조의 힘을 갖게 하는 원천이다. 미국 국립공문서보관소는 보유한 공개 기록물을 2011년 7월부터 위키미디어 공용에 총 10만장이 넘는 사진을 기부했으며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최근 '오픈 액세스'로 2만 5,000개 이상의 미술품 이미지를 웹페이지에 공개하고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하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미국의 심장 워싱턴DC는 지금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피가 뜨겁게 박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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