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송 박사
윤상송 박사
해양한국 발행사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4월 1일로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이에 연구소는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창립자인 윤상송의 자서전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본고는 그 자서전의 첫머리 대학진학이전 시기를 그리고 있다. 앞으로 본지는 9회에 걸쳐 연구소 창립자 삼주 윤상송의 자서전을 특별 연재한다.

연재순=▶1회-대학진학이전 시기 ▶2회-대학입학이후 상선학교 학창시절 ▶3회-상선학교 학창시절 ▶4회-졸업이후 취업과 마지막 승선 ▶5회-육상(서울)에서의 새 생활 ▶6회-전쟁, 그리고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7회-해양대학을 떠나 만학, 해사문제연구소 설립 ▶8회-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9회-해운산업합리화위원장과 해운학회 설립

경성행 기차
빼액---------
기차가 기적을 힘차게 울렸다. 나는 이제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부푼 가슴과, 아버지의 눈을 용케도 피하였다는 안도감을 안고 열차의 층계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었다. 그 힘에 열차에 한 발을 올려놓았던 나는 끌려 내려졌다. 아버지였다.

1929년 2월 말 오후 6시 50분경이었다. 이미 날은 어두컴컴해지고 있었고, 영하 30도의 매서운 추위가 귓불을 때리는 날이었지만, 그날 회령역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회령보통학교 졸업생 14명이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떠나는 마당이어서, 많은 학부형과 선생들이 이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경성고보에 응시하기 위해 기차를 타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끌려 내리면서 창피하다는 생각보다는, 아 이제는 틀렸구나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경성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지 못한 이상 상급학교에 입학한다는 꿈은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요?”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 웅성거렸다. 그래도 나는 당황한 나머지 창피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한 채 아버지에게 끌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버님인데..... 정신이 좀 이상하셔서요.”
등 뒤에서 선생님에게 변명하는 얘기가 들렸다. 그 때서야 나는 창피함에 귓불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상급학교의 진학을 한사코 말리는 것인지 나로서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린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 만취해서 돌아온 형(利松)은 아버지에게 마구 대들었다.

“아버지 생각이 다 옳은 건 아니에요. 설혹 다 옳다 하더라도 그걸 강요할 권리는 아버지에게 없어요.”
대개 이런 내용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미 만취해 버린 큰 형을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멀거니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큰 형은 더욱 화가 나는지 얼마 되지도 않는 가재를 마구 부셔대기 시작하였다. 나는 나로 인해 일어난 가정불화에 대한 죄책감으로 겁에 질려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지켜보기만 하였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분이 좀 풀린 큰 형이 나에게 다가와 넌지시 속삭였다.

“문 밖 변소에 가 있어라.”
나는 큰 형이 시키는 대로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변소 옆으로 갔다. 냄새가 몹시 심하였지만 나는 큰 형이 시킨 대로 코를 막고 변소 안으로 들어섰다. 큰 형이 이내 따라 들어섰다.

“걱정하지 마라.”
술 냄새를 풍기면서도 큰 형은 또박또박 얘기했지만, 나는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기차가 또 있으니까 그걸 타면 돼. 알았지?”
나는 큰 형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걸 타면 청진에 있는 도송(道松)이가 수성까지 마중 나와 있을 거야. 수성에서 도송이를 만나 같이 경성고보로 가거라. 그리 되면 내일 예비소집에는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외삼촌에게 전화를 해 놓았으니까 시험을 볼 수는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도록 해라.”

그 때서야 나는 큰 형이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외삼촌이 경성고보 서무과에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역시 철부지일 수밖에 없는 어린 나는 그런 북새통이 벌어졌음에도 기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누구인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나를 흔들어 깨는 바람에 눈을 떴다. 6시에 떠나는 기차를 타려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큰형이 만취했던 탓에 일찍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큰 형의 재촉으로 부엌으로 나가 고무신을 신으려는데 아버지의 큰 소리가 들렸다.

“너 어딜 가려고 그래.”
그 바람에 나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울타리를 뛰어 넘어 정거장을 향해 내달렸다.

“빼액------”
그 순간 기적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기차가 떠나고 있었다. 이제 만사가 다 틀렸다고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엊저녁 아버지에게 끌려 돌아올 때보다 더 큰 허탈감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기차는 9시에 또 있어.”
큰 형이 끈질기게 나를 타일렀다.
“도송이에게 다시 연락을 할 테니까 넌 9시에 떠나기만 하면 돼."

9시에 기차를 타도 과연 될 수 있을지? 미심쩍기 한이 없었지만 나로서는 큰 형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8시 경 나는 큰 형을 따라 집을 나섰는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본체만체 하였다. 6시 차를 놓친 이상 시험을 치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여 안심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도 옆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큰 형은 나를 데리고 유유히 집을 빠져나와 기차에 태웠다. 꽤나 철이 없었던 나였지만 오로지 상급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홀로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가 수성역에 도착하였을 때 창밖을 두리번거리자 둘째 형이 나를 발견하고 기차에 올라탔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40분 쯤 뒤 둘째 형과 나는 경성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려 삼촌댁으로 갔다. 이렇게 하여 나는 다음날 경성고보 입학시험에 무사히 응시할 수 있었다.

국경도시 회령
일제강점기 회령읍
일제강점기 회령읍
내가 아버지(尹圭漢)의 정체와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지만, 아버지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가정 일에 거의 무관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상 술에 절어 허송세월로 보내, 이웃 사람들 모두가 정신이 좀 나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하는 파평 윤씨의 39세손으로, 함경북도 최북단인 회령군 봉의면 둔투터에서 4형제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땅을 개척한 분이 파평 윤씨의 5세손인 윤관(尹瓘) 장군이라는 사실을 늘 자랑하였다. 그리고 입북(入北)한 파평 윤씨의 시조로 추앙받는 윤관장군이 개척한 땅으로 조선 세종 때에 설치된 6진 가운데 하나인 회령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였다.

회령은 함경산맥이 시역(市域)의 중앙을 가로질러 뻗어있어 산지가 많은 곳이다. 동서길이 22 킬로미터, 남북길이 16 킬로미터, 평균고도 230 미터의 회령분지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과 그 지류인 회령천, 팔을천 및 보을천 등의 하식작용으로 형성된 지역인데, 그 주변은 600 내지 700미터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갈탄의 매장량이 많은 고장이다.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연교차(年較差)가 크고,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이다. 연평균기온 섭씨 5.6도 내외, 1월 평균기온 섭씨 영하 12.6도 내외, 8월 평균기온 섭씨 21.1도 내외, 연평균 강수량 500 밀리미터 정도인 곳이다. 회령분지는 회령시의 주요 농업지대로 옥수수, 쌀, 콩, 잎담배 및 백살구 등이 생산되는 곳이다. 북쪽은 두만강에 접해 있고,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두만강 연안에 위치해 있고 중국 지린 성(吉林省)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龍井)시와 접해 있는 곳이다.

윤관장군의 후손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으로,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집형(執衡)의 아들로 태어난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내고 1087(선종 4)년에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郞中)이 되어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1098(숙종 3)년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송(宋)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가되었고, 2년 뒤에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다. 110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했고, 이어 추밀원부사가 되어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1103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에 올랐다.

숙종 대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지금의 서울)의 건설, 금속 화폐의 유통시책 실시 등 일련의 새로운 법(新法)을 실시했다. 또 숙종 대 후반에 이르러 여진족의 흥기와 고려 동북면 침입이라는 객관적 정세 변화 외에 국내의 정치상황이 한 요인으로 제기되는 여진 정벌론을 제기하였다. 숙종의 뒤를 이어 예종대의 정책 수행과 여진정벌 추진에서도 중심세력으로 활약했다.

윤관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한 일이다.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 일대의 여진 부족들은 고려의 기미주(羈 州, 국경 지대 또는 그 밖의 지역에 사는 이민족 집단. 또는 그런 국가를 간접 통치하던 곳)로 존재하면서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하였다. 고려는 그들 추장들에게 무산계(武散階)나 향직(鄕職)을 주어 회유하기도 하였고, 투화해 오는 여진족에게는 투화전(投化田)을 주어 정착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11세기말에 이르러 쑹화강(松花江) 지류인 아르추카하(阿勒楚喀河) 유역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가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이러한 관계가 변동되었다. 완옌부 여진은 갈라전 일대의 여진 부락을 경략하고 이어서 고려로 투항해 오는 여진인을 추격하여 정주(定州)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이르러, 고려와 여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104(숙종 9)년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 싸우게 했으나 패했다. 이에 추밀원사였던 윤관은 2월에 동북면 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완옌부 여진과 대적했으나, 고려군 과반수가 죽는 등 패하여 일단 저자세로 강화하고 돌아왔다. 다음해 6월 태자소보판병부사(太子少保判兵部事)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11월에 예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07년 12월 원수가 되어 17만 명의 군사를 중, 좌, 우의 3군으로 편성했으며, 수군(水軍)까지 동원해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일거에 쳐들어가 여진족을 쫓아내고 9성을 쌓고,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고려사 윤관 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사민(徙民)된 수는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및 공험진에 병민(兵民) 6,466정호(丁戶)였다. 1108년 3월에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하였다.

비운의 시대, 인텔리
보성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윤관장군의 자손으로서, 윤관장군이 개척한 땅을 고향으로 둔 아버지는 어린 시절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기는 하였지만 신동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만큼 머리가 좋은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라던 시절은 조선말로서 세상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이러한 때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 우선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였던 듯하다.

아버지는 1908년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제2회 졸업생이었는데, 졸업사진에 찍혀 있는 사람은 45명이었다. 그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졸업증서와 우등상장 등 2매의 증서를 들고 있다.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던 아버지는 신학문을 익히는 데에도 향학열이 결코 식지 않았던 듯한데, 그것은 오로지 어떻게 하든 어지러워진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조그만 기여라고 해 보겠다는 조국애에 불탔던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아버지의 열정이 오히려 아버지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었던 듯하다.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普成學校)는 광무 11 (1901)년에 이용익(李容翊)이 창설한 학교로 서울 전동(轉洞)에서 개교하였다. 이용익은 구국(救國)의 이념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국운이 쇠퇴하자 외세의존은 구국의 방도가 아님을 깨닫고, 자력으로 장래 국가의 청년을 교육할 것을 결심했다. 그 뒤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융희 원(1907)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서거한 후 손자 이종호(李鍾浩)가 학교의 경영을 책임지다가, 융희 4(1910)년에 외유한 뒤 천도교에 학교의 경영을 인계하였다.

1915년 4월에는 일제의 지시로 사립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되었고, 1918년 9월에 낙원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1921년 12월에는 김기태, 박원호 등 58명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조선총독부로부터 다시 받았다. 1932년 3월에는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주도로 설립된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인수 경영하여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1934년 9월 현재의 안암 캠퍼스의 위치인 안암동에 본관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아버지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1910년은 이른바 한일합방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국권(國權)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간 해였다. 따라서 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열혈청년들은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어 러시아 등지로 망명의 길로 떠났다. 그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였다. 아버지 역시 망명의 길을 택하고자 하였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를 무릅쓰지도 못하였다.

“세상이란 다 그런 게야“
하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뿌리치지도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日帝)에 협력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듯하였다.

뒷날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의 성격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아주 철저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좋게 얘기하자면 전형적인 선비였지만, 매우 우유부단한 선비였다.

아버지와 큰 형의 반목
나는 1916년 8월 15일 아버지 윤규한과 어머니 신경철(申卿澈)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둘째 형 도송(道松)이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였는데, 이처럼 터울이 큰 것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도 뜻이 꺾인 채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1915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모범청년이었다는 아버지는 귀향한 28세부터 술 담배를 시작하여 거의 일생을 주정꾼으로 일관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시집 뒷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분가하여, 친정이 있는 벽서면의 연대라는 곳을 오가며 두 아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귀향하였을 때 두 아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장성해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는지, 셋째 아들인 나게만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훈련을 시켰다.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다투는 것을 많이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가계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외면하였다.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음은 물론, 술만 마셔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회령 읍내로 이사하였는데, 그 때에는 흉년까지 자주 들어 밥을 굶은 때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모두를 세상과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은 때문으로 생각한 듯 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태어나, 그토록 어려운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에 조그만 보탬이나 되고자 하는 청운의 뜻을 갖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는데, 졸업하자마자 국권마저 잃게 되었다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그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상처가 된 것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의식이었던 것 같다. 동료들처럼 러시아 등지로 망명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사정도 아니었고, 그러한 사정을 뿌리칠 용기도 갖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듯했다.

물론 일본인들의 개가될 수 있었다면 가계쯤은 어느 정도 책임질 수 있었겠지만, 윤관장군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자긍심과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굳어진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인식이 아버지에게 그러한 결심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고등교육만 받지 않았다면 그러한 인식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무 일에나 종사하여 어느 정도의 가계는 책임질 수 있었겠지만, 이미 아버지의 머릿속에 자리를 곽 잡은 자의식이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들의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신념 때문에 두 형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상업학교만을 졸업하고 소시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큰형은 그러한 아버지의 처사에 크나큰 불만을 가졌다. 자신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독선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동생인 나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힘으로 고등교육을 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처럼 나의 교육에 대한 큰형의 집념은 매우 강렬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고, ‘고등문관 시험을 보아서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말 뿐이 아니라 내가 보통학교 5학년만 마치고 고보(高普)에 입학하여야 한다고, 6학년 과정을 집에서 시키는 등 이른바 조기교육(早期敎育)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버지와 큰형이 반목하는 큰 원인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철없는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1916년은 한일합병이 된지 이미 6년이니 지난해로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穀)가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영전되어 가고, 육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2대 총독으로 부임한 때였다. 조선독립운동은 아직도 곳곳에서 그칠 줄 모르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일제 강점기 체제에 서서히 익숙해 질 수밖에 없는 과도기였다. 시대적으로도 그러하였지만 위에서 얘기하였듯 집안 형편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굳이 우리 집안만이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집안이 겪은 비극은 보다 처절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일제에 대한 반항, 즉 집안의 누구인가가 독립운동에 종사하여 일제의 핍박을 받아야 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거니 하였겠지만,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은 철저히 아버지의 좌절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로서 다행스러웠다고 할 것은, 아직 철부지여서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해서 이상스럽게도 생각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안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내 성격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둔든터에서 회령읍으로 이사한 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무언가 작은 직업을 얻어 먼저 회령읍으로 나가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하숙집을 ‘주인집’이라고 불렀다. 그 얼마 뒤 형들이 학교에 가게 되어 온 식구가 회령읍 사동에 셋방을 얻어 이사하였다.

당시 회령읍은 인구 약 1만 명가량의 두만강가의 국경도시로서 농산품과 임산품의 집산지이며 교통도시였다. 우리가 사는 셋집 맞은편 집은 이른바 객주(客主) 집이어서 무역상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친구와 함께 백태무역상(白太貿易商)을 운영하던 큰아버님도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고는 하였다.

나는 그 곳에서 동내 아이들과 딱지치기도 하고, 팽이치기도 하는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비교적 얌전한 편이어서 싸우는 일도 별로 없었고, 장난이 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이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제대로 해낼만한 배짱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마음 속 깊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어린애다운 용감성도 천진난함도 없었다.

그즈음 회령읍과 시골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개통 당시에는 역에서 차표를 팔지 않고 차장이 차안에서 현금을 받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장의 눈을 피해 기차를 공짜로 타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래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양심상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 쯤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 만큼 용기가 없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병신......”이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감수해야만 하였다.

그 뒤 일본 육군 하사관의 관사촌이 있는 요동에 독채를 얻어 이사하였다. 어머니는 살림에 보태려고 군속으로 있는 사람에게 방 하나를 세놓았다. 그 군속으로부터 사탕을 얻어먹기도 하고, 쌀을 얻어먹기도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대단히 부지런하였다. 조그만 마당에 야채밭을 일구고 도랑물을 길어다가 거름으로 주기고 하였다. 또 살림을 꾸려나가는 방편으로 한 쪽 옆에 몇 마리의 돼지와 닭도 키웠는데, 그로 인한 악취로 주위의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자주 유행하였는데, 의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일찍 죽는 일이 많았다. 우리 집안만 해도 한 달 사이에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조카까지 모두 네 아이나 죽어, 매장지까지 따라가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울지도 못하였고, 형수도 우두커니 서서 슬픔을 참아냈다.

이런 형편에 흉년도 잦아서 소나무 껍질을 베끼어 먹거나 콩죽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것은 그래도 나은 일이었고,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집에서 6킬로미터 쯤 떨어진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는 지금의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6년제였다.

회령은 교육도시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보통학교 외에 공립학교로서 갑종상업학교가 있었고, 6년에 고등과 2년이 더 있는 고등학교도 있었다. 이밖에 조선인 학교로서 2년제 미션계 여학교와 사립학교인 신흥보통학교가 있었다.

겨울이면 대개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매우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얇은 솜을 넣은 구멍이 난 양말과 고무신을 신고 다녀야 했던 나는 손발이 꽁꽁 얼어 항상 울면서 다녔다. 그 때 보통학교의 선생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이었는데, 학생들에게 있어서 선생이란 무서운 존재였을 뿐이었다. 지나치게 엄격하였을 뿐 아니라 매질이 일상사였다.

나의 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우등생이 되어 본 일은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우등생이 되는 것쯤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성적은 늘 그렇고 그런 상태였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그 때에도 치맛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예회 같은 것이 열리는 경우 나도 거기에 뽑혀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역할은 내 차례가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종종 학교에 찾아오는 아이들만이 우등생이 되고, 학예회에서 좋은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할아버지(時薰)는 향교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있었고, 외할아버지(申彦鳳)는 금융조합의 이사로 있었고, 아버지도 일시적이긴 하였지만 회령면의 부면장직을 맡았던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좁은 면의 면장은 대개 조선인들이 맡고 있었으나 군청 소재지의 면장은 일본인이 맡고 조선인은 부면장을 맡았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회령의 요직은 서촌 출신의 윤 씨들이 독차지하고 있던 셈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회령읍 사람들의 모략을 받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는 일찍부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부모가 학교에 찾아가 성적을 올리는 일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나는 어려서부터 어린아이답지 않게 정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비겁한 면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영에는 꽤 능통하였다. 집 앞에 군인들이 사용하는 큰 웅덩이가 있었기 때문에 몹시 더운 여름철이면 거기에 들어가 논 덕분이었다. 어쨌든 외가가 있었던 두만강 변은 비교적 폭이 좁은 편이기는 하였지만 매우 급한 급류가 흐르는 곳이었음에도 헤엄을 쳐 왕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강을 건너가 값이 싼 만주의 담배나 돼지고기를 사서 머리에 이고 헤엄쳐 건너오기도 하였다.

혹독한 아버지의 교육
나의 손에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나는 무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무산에서 보낸 시절은 남들이 겪어보기 어려운 일들을 겪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가겠다면 국수도 사주고, 가방도 사 주겠다.”
“................”
“뿐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건 다 사 줄 거니까....... 어때 같이 가겠니?”

아버지가 왜 나를 꼭 데리고 가려고 하였는지 나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지만, 여러 가지를 사 주겠다는 말에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도 형들도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아버지가 무섭기도 하였지만, 한번 약속한 이상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나는 따라 나서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동안 전혀 가계를 돌보지 않던 아버지가 마음을 돌려 조금이나마 가계를 돕고자 결심하고, 단신 무산으로 가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회에 나를 무산으로 데려가 자신의 뜻대로 훈련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물론 아버지의 그러한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무산에 도착하자마자 무산향교 안에 있는 사랑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내가 보통학교 6학년에 올라가자 마자였으니까 불과 열세 살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주 엄하게 명령하였다.

“이제부터 모든 살림은 네가 꾸려야 한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무산은 읍에서 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지점부터 회령시 용천리 일부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매장량 17억 톤 노두(露頭, 鑛脈, 암석이나 지층, 석탄층 따위가 땅거죽에 드러난 부분)의 연장이 243미터나 되는 북한 최대의 철광석의 매장지이다. 무산광산 일대는 1,000미터 높이의 산 전체가 광맥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광산 앞에는 성천수가 흐르며, 산비탈에는 선광시설과 제철소가 있었다. 무산읍 가까이에 있어서 광석의 채굴과 수송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발견 당시에는 철 함유량이 35~38%로 품위가 낮아 광산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전쟁물자로 이용하기 위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곳이다.

아무튼 무산은 회령에 비하여 시골이었는바, 내가 무산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하자, 시골 아이들은 도시에서 온 나를 마구 놀리며 야유를 서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엄한 명령보다 아이들의 놀림이 더 견딜 수 없었다. 낯선 고장에서 친구도 없이 놀림을 받다보니 서러움에 북바쳐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겁도 없이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나 여기서 안 살래요, 집으로 갈래요.”
그런데 의외로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 이유를 묻고는 타일렀다.
“괜찮아, 내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잘 타이를게.”

모처럼 부드러운 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뜻을 더 이상 거스르지는 못하였다. 이튿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선생에게 얘기하고는 학생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 때문인지 그 이후에는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그 중 몇몇은 아주 친절하게 보살펴주기까지 하였다.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생각하는 머리가 있어야 해. 그러니 살림은 모두 네가 생각해서 꾸려나가야 한다. 우선 밥그릇부터 네가 만들어라.”
참으로 막연한 명령이었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솜뭉치를 묶었던 철강 밴드를 얻어다 잘라 날을 세워 식칼을 만들었다. 또 맥주병에 실을 감은 다음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여 열을 가한 다음에 물로 식혀 깨뜨려서 컵을 만들었다. 나뭇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드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밥을 지을 때 좁쌀과 물의 비율이 1대 1이라든가, 쌀과 물의 비율은 1대 1.5이어야 한다든가, 쌀과 조, 조와 보리, 쌀과 콩을 조합할 때에는 물과의 비율이 어때야 한다든가, 하는 등등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터득해 나갔다. 아버지는 나에게 김치도 여러 가지를 담그도록 하였는데, 손가락의 상처는 그 때 생긴 것이었다. 하도 피곤했던 나머지 김치를 하다가 벤 자국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무산향교에서 경영하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이라는 비정규 2년제 중학과정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선생은 아버지를 포함하여 단 두 분뿐이었는데, 허 선생이라는 다른 분은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이 분은 혼자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분은 자주 어울려 바둑을 두었다. 나는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워 이따금 아버지와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무산령을 넘다
무산에서 생활한지 넉 달이 지나 마침내 기다리던 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에게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

“자동차도 있고 기차도 있지만, 자연공부도 할 겸 걸어가 보자.”
“............”
나로서는 도대체 가늠이 안 되는 일이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나도 처음 하는 일이지만, 지도를 가지고 무산령을 넘으면 사흘이면 갈 수 있을 게다.”
무산에서 회령까지는 200리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중에 넘어야 하는 무산령은 아주 험한 곳이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점심으로 호떡을 준비해 가지고 길을 떠났다. 중간에 자동차가 먼지를 풀풀 풍기며 달려오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꽤 더운데 자동차를 타고 갈까?”
나도 더위에 지칠 지경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덥다 한들 한번 약속한 일을 내 입으로 번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이 없자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그냥 걸어가지.”
“네.”
오기였을까? 미련이었을까? 나는 뒷날 이를 되돌아보았지만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였다. 어쨌든 나는 그 뒤에 누구와도 잘 약속하지 않았다. 반면에 일단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려고 하였고, 지켜냈다.

드디어 무산령을 앞두고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되었다. 어린 아이와 무산령을 넘는다는 얘기를 듣고는 모두가 말렸다. 물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무산령은 함경북도 청진시 부령구역과 회령시 사이에 있는 높이 613미터의 고개로 함경산맥의 북단에 있는 신봉산과 옥성산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남쪽 사면은 급경사로 수성천계곡으로 이어지며, 북쪽 사면은 완경사로 회령천 계곡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부근에 부령8담(富寧八潭)이라는 경승지가 있는 곳이다. 청진시와 회령시 등을 비롯한 두만강 연안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서의 구실을 하는 곳이지만, 인적(人跡)이 아주 드문 곳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무산령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이 30리나 될 뿐 아니라, 맹수들이 들끓는 곳이요.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게 다 공부입니다.”

이튿날 날씨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두 부자가 고개 마루에 가까워지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울창한 초목 사이로 묵묵히 걷는 것이 무료하여서 나는 나뭇가지를 꺾어 나무 밑동을 둥둥 치면서 걸었다.
무산령 정상에 이르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쓰인 장승이 서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다닌 흔적은 좀체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맹수를 만나지 않았고, 공기도 매우 좋아 상쾌하였다. 6시간쯤 걸어 드디어 큰 집이 있는 둔투터에 도착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발견한 할머니가 뛰어 나오더니 냅다 야단을 쳤다.
“에이 나쁜 놈.....”
할머니의 노기가 등등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형들을 만나고 싶어 할머니의 노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고대하였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큰 비로 바뀌어 홍수가 나 철도가 불통되는 바람에 큰집에서 하룻밤을 더 묵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철없이 노는 사이에 한 달이 훌쩍 지나 방학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무산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무산으로 돌아가 가을을 맞았다.

두만강의 물을 긷다
“추운 겨울에 매일 쌀을 씻으려면 손도 시리고 무척 번거롭지?”
아버지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멀거니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니 날이 좋은 날에 한꺼번에 씻어 말렸다가 저장하면 좋겠지?”

그래서 나는 좋은 날을 골라 겨우내 먹을 쌀은 두만강가로 가지고 가서 말끔히 씻어 말리고, 김장김치도 담갔다. 그러나 물만은 한꺼번에 저장할 수 있는 독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두만강에서 길어 와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3킬로미터쯤 걸어서 낭떠러지기 밑의 두만강 물을 길어야 했다. 두만강이 꽁꽁 얼어붙은 추운 날에는 곡괭이를 들고 가서 얼음을 깨어야 했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니요?“
동네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였지만 아버지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래도 겨울방학 때는 자동차와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회령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3학기를 맞아 무산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상급학교에 대한 진학문제도 있고 해서 나는 매일 같이 초조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동차 멀미로 반죽음이 된 어머니가 들이닥쳤다. 보다 못한 동네의 아낙네들이 상의하여 어머니에게 편지를 붙인 까닭이었다. 큰 싸움 끝에 졸업을 몇 개월을 남겨두고 아버지의 반허락을 받고 나는 회령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뒷날 나는 왜 아버지 아버지가 그토록 상급학교 진학을 말리려 했고, 무산에서 그토록 혹독한 훈련을 시킨 것인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큰 형의 크나큰 의지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의 행로를 걸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성고보에 합격
당시 회령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응시한 학생은 그 해에 졸업한 9명과 이른바 재수생 4명 등 열 세 사람이었는데, 그 해 졸업생 3명과 재수생 1명 등 네 사람이 합격하였다. 그럼에도 이 같은 합격률은 전에 없는 큰 회령의 경사라 하여 환영 속에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극성스러운 반대를 무릅쓰고 합격하였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듯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기뻤다.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는 함경북도에 있는 유일한 공립학교로서 함경북도의 수재만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오늘의 경기고등학교)나 제3고등보통학교(오늘의 경기여자고등학교)와 서울사범학교 등과 함께 수재들이 몰려드는 학교로서 전국에서 제4고등보통학교라고 불리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이외에 함경북도에는 경성공립공업학교와 회령에 있는 3년제 상업학교가 있었고, 일본인 중학교로서 나남중학교(羅南中學校)와 나남여자중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2년제로서 실중농업학교와 회령공업학교가 있었다. 이들 학교밖에 없어서 많은 학생들이 서울이나 간도(間島)의 룽징(龍井)사립학교 등에 유학하였다. 그 뒤에 청진과 회령 등에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나는 경성에 있는 외삼촌(申璣澈) 댁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다. 큰 형이 매달 3원씩 송금하여 주어서 그 집의 큰아들인 외사촌 동호와 한 방에서 기숙하였는데, 그 뒤 많은 친척들이 그 집에 하숙하였다. 이때부터 내 행동이 나도 모르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에도 용기를 갖지 못해 참기만 하였던 행동이 조금씩 빚어 나오기 시작하였는지 장난이 심해졌다. 그러나 철부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외삼촌은 친척들을 돌보기 위하여 자진하여 군청에 서 경성고보의 서기 직으로 전직하여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선견지명을 지닌 외삼촌과 그의 현부인 외숙모(吳水蓮)의 은덕을 크게 입은 셈이었다. 내가 입학한 다음 해에는 이종사촌(오맹호)까지 경성으로 와 세 사람이 한 방을 썼는데, 외숙모의 속을 어지간히도 썩였다. 세 사람은 장난만 심한 것이 아니라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세 사람 모두가 자기 고집만 내세워 1년 가까이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한 방을 쓴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동기생 중에는 자식까지 둔 나이 먹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술과 담배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이 많은 학생들 틈에 끼어서 공부하면서도 나는 좀처럼 철부지 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외삼촌 집에 하숙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마당에서 공을 차 빨아놓은 빨래를 새카맣게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이런 경우 대체로 외사촌이 야단을 맞고 했는데, 나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듯 뉘우칠 줄도 몰랐다. 공부는 썩 잘하는 편도 못하는 편도 아닌 중간 정도였다. 외사촌이나 나는 엇비슷해서 하나는 43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44등이었다.

큰형은 편지마다 공부 잘하라고 써 보냈다. 여름방학으로 회령역에 내리자마자 마중을 나와 있던 큰 형은 몇 등을 했는가? 부터 물었다. 나는 겁이 났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어 43등인가 44등을 했다고 하니 큰 형의 얼굴이 한 순간 새하얘졌다.

“그래도 동호보다는 1등 더 잘했어요.”
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변명하였다. 그러자 형은
“그걸 자랑이라고 하니?”
하고 눈을 흘겼다. 나는 큰 형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형은 말과는 달리 그런대로 대견해 하는 듯했다.

광주학생사건과 엉뚱한 연루
2학기 말 겨울방학을 앞둔 때 광주학생사건이 터졌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 31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암성금자 및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운동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으로 항의하였다. 당연히 조선인 학생들로서는, 자기 나라에서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던 일본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민 자격으로 조선에 와서는 지주 행세를 하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자식들까지 무례하게 굴자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이 일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뒤늦게 경성고보에까지 파급되었다. 이에 따른 경성고보의 항일운동은 매우 격렬하였다. 당시 5학년생은 상급학교 입시준비 때문에 주동세력에서 빠지고 4학년생이 주동하고 나섰는바,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희생되는 결과만 빚어내었다.

어쨌든 겨울방학을 앞둔 매우 추운 날 교실에 모여 담임선생으로부터 겨울방학 동안의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도중에, 전원 운동장에 모이라는 4학년생들의 외침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운동장에 나가보니 이미 열을 지어 경성농업학교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마침 농업학교 학생들도 방학식을 진행하다가 돌팔매질로 유리창을 깨며 경찰서 앞까지 진출했다가, 거기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해산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담을 넘어 피신해 있다가 밤중이 되어 외삼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며칠 뒤 회령으로 귀향하였는데, 학교에서 무기정학이라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야 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였지만, 머지않아 풀리리라 생각하고 그다지 개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큰형은 크게 걱정하였다.

“학생들의 태도가 그러면 못쓴다. 네가 비록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기정학이 학적부에 올라가면 상급학교 진학하는 데에 지장이 있다. 알겠니?”
그래서 은근히 걱정을 하였는데, 후에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데에 이 문제가 장애로 된 일은 없었다. 그리고 무기정학도 20여일이 지난 다음에 해제되었다. 주동하였던 우수한 4학년생들이 많이 투옥되었고, 결과적으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그 뒤 나는 그저 평범한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3학년에 진급할 때까지 나는 외삼촌댁에 계속 머물렀다. 그 뒤 청진에 있는 둘째형이 결혼을 하여 새살림을 차렸다. 그래서 나는 청진시 신안동에 마련한 신혼 단칸방에 딸린 부엌방으로 이사하여, 경성으로 통학하였다.

그 몇 달 뒤 둘째형이 시장 근처에 새 집을 사서 다시 이사하여,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천마산을 넘어 20분 쯤 걸어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천마산을 넘어 돌아올 때에는 천마보통학교 근처에 있는 호떡가게에서 호떡을 사먹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고개를 넘는다는 것 자체가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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