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운공사의 사진실 10년 인연으로 해운항만 사진활동

<김기순 선생의 약력>△1924년 평안남도 안주읍 출생 △1944년 경성법정학교 理財科 졸업 △1952년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 문서계장 겸 사진실장(대한해운공사 10년간 근무) △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전서 ‘漁場’으로 입상 △66년 김기순 사진연구소 개설 △동북아국제사진전 수회 입상 △대한민국 국전 수회 입상 △83년 대한민국 사진전 심사위원 초대작가 운용위원 역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공식지정사진작가 위촉 및 관련사진 콘테스트 입상
<김기순 선생의 약력>△1924년 평안남도 안주읍 출생 △1944년 경성법정학교 理財科 졸업 △1952년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 문서계장 겸 사진실장(대한해운공사 10년간 근무) △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전서 ‘漁場’으로 입상 △66년 김기순 사진연구소 개설 △동북아국제사진전 수회 입상 △대한민국 국전 수회 입상 △83년 대한민국 사진전 심사위원 초대작가 운용위원 역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공식지정사진작가 위촉 및 관련사진 콘테스트 입상

 

 

사진은 카메라의 메카니즘을 통해 역사와 생, 순간을 기록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사진 속에 부산과 부산항의 역사와 순간을 기록하며 평생을 보낸 팔순의 원로 사진작가, 김기순 선생. 해운항만 관련 전문사진작가로도 기억되는 김기순 선생이 상경(上京)해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 선생의 사진과 함께한 50여년 인생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덥수룩한 구레나룻에 긴 턱수염, 꽁지머리에 빵모자, 빨간색 체크무의 남방. 차림새부터 예사롭지 않다. 평범한 사무실에서 맞닥트린 김기순 선생의 첫인상은 파격적이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항만사진을 찍기 위해 위험한 크레인에 오르기를 자처했다는 근황을 전해들은 바 있던, 김기순 선생의 예술가적인 기질은 외모에서부터 풍겨 나온다.

 

  소학교 수학여행길 사진관견학이

  사진작가로 인생을 열어준 계기
김기순 선생은 1924년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출생한 뒤 경성법정학교이재과(京城法政學校理財科)를 졸업하자마자 징병돼 일본군에 입대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 1948년 부산에 이주한 이래 지금까지 거주하면서 부산을 근거로 작품활동을 해왔다.


중국청도에서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시절을 보낸 선생은 6학년 대련 수학여행길에 사진관을 견학한 것이 사진과 인연을 맺게 해준 계기였다고 회고한다. 암실에서 현상하는 광경을 본 이후 그는 당시 1달러짜리 독일 카메라를 사서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
해방후 잠시 경찰생활을 하던 중 카메라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 만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순용씨)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당시로서는 무척 귀했던 사진장비를 한껏 사용하며 사진기술을 익힐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는 사진찍기를 업으로 삼게 되는 운명의 길로 접어든다.


이순용 장관이 해운공사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마침 선박부 산하에 사진실 신설의 요구가 있었다. 선박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의 사진을 찍어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선박부의 해무과에서 사진실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던 것. 사진실 신설과 함께 김기순 선생은 1952년 해운공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로써 해운항만업계와 인연을 갖게 된다. 당시 해운공사의 선박부에는 故 윤상송씨가 부장직을, 박현규(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씨가 해기계장을 맡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는 태평양을 횡단한 한국 최초의 선박인 ‘동해호’를 비롯해 많은 배를 타고 많은 사진을 찍었다. 10년정도 해운공사의 사진실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선생은 사진작가로 데뷔했고 왕성한 작가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창립전에 전국회원 호선 ‘어장(漁場)’이 동상으로 입상한 것을 계기로 韓國寫壇(한국사단)에 데뷔했고, 이후 50여년간 줄곧 자연풍경 사진작가로 촬영활동을 계속 해왔다. 선생은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을 통해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다진 뒤 開川藝術祭, 대한민국예술전 등에서 입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김기순 선생은 사진을 통해 사회에 공헌한 바를 인정받아 여러차례 포상을 받기도 했다. 부산개항 100년사진전, 자연보호운동, 부산시 향토문화 창달사업, 85년-88년 서울올림픽의 조직위원장 중책을 맡아 수행함으로써 부산시와 체육부, 자연보호협의회 등으로부터 유공을 인정받았다. 1990년에는 자연보호운동을 통한 국가사회발전에 공헌했다는 명분으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진예술 활동을 해온 선생은 15회의 개인전을 치렀으며, 여러 사진집을 냈고, 지금도 부산-호쿠오카 교류전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선생의 제2의 고향이 된 부산을 배경으로 활동한 탓에 부산의 문화와 풍광을 담은 작품이 많다. 물론 항만도시인 부산의 항만에 대한 기록이 빠질 수 없다.

 

<釜山 1952-1999> 사진집에는

50년대후 부산항 변천 한눈에 담겨
부산을 담은 사진들을 모아 1999년 <釜山 1952-1999>란 이름의 사진집을 내면서 사진집의 첫머리에 선생은 “우리가 사는 고장, 부산의 옛모습과 그 곳에서 살던 우리네 부모의 일상(日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을 찾아 1952년부터 1999년까지 47년간의 영상인, 부산항, 자갈치, 낙동강, 금정산, 민속, 요트 경기를 한데 모았다”고 썼다. 선생의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제항만도시인, 부산이 변화해온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의 사진집 <釜山 1952-1999>에는 과거로 통하는 산책로가 펼쳐져 있다고 축사를 한 이도 있다. 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독자들은 부산과 자갈치, 낙동강 등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사진집을 보면 부산시 전경과 부산항의 시대별 변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많은 말과 글이 아닌 살아있는 듯한 사진으로 부산의 변천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사료(史料)로서 가치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부산중앙부두의 하역장면, 부산중공업의 선박진수식과 당시 조선광경, 90년후반 부산항연안여객부두, 시대별로 점점 화려해지는 부산항의 야경 등이 담겨 있다. 


텅텅 비어있는 96년 부산항 감만컨테이너부두 전경 사진은 현재의 빼곡히 쌓여있는 컨테이너 더미들이 있는 모습과는 참 대조적이다. 당시만해도 부산항이 동북아의 물류중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선생의 사진을 접하고 있노라면 격세지감이 든다. 자연의 풍광은 세월이 지났어도 그 변화를 잘 구분할 수 없지만 도시의 변화는 그의 사진속에서 그대로 재현돼 있다.


“사진은 포착하는 예술이자 기다리는 예술이다. 비가 오면 날이 개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원하는 컷을 얻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사진작가의 기질에 대해 묻는 질문에 선생은 이렇게 답변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큰 가방을 메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는 선생의 우직한 외골수 인생을 시사해주는 코멘트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카메라의 가방이 가벼워졌다고 말하지만 선생의 어깨에 얻혀진 지금의 카메라 가방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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