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항초기의 항만관리
1) 병자수호조약과 3포의 개항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항만의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에 의한 3포(浦)의 개항에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청(淸, 지금의 중국)과의 관계가 유일한 것이었고, 주로 육로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외국과 해로로 연결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청국 이외의 국가와는 엄격하게 교류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대외교역항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보다 약간 먼저 개국(開國)하고 개항(開港)한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새로운 발전 기반을 마련하고 대외교역을 확대하면서 그 교역대상으로 한국의 문을 두드리면서 개항하게 되었다.

 

여기서 개항(開港)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개항 또는 개항장이라는 개념은 대외교역으로 개방된 항만이라는 의미로 대외교역항 내지 국제무역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개항과정에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컬럼버스 이래 개막된 대항해시대는 서유럽의 백인들이 세계 각처로 진출하던 시기이고, 서유럽지역을 제외한 여타의 지역은 자의든 타의든 서유럽 백인들의 강한 영향권 안으로 빨려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대항해시대라는 거센 물결에 저항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 한말의 쇄국정책이다. 쇄국정책은 동양 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일본, 한국이 공히 택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폐쇄적인 국가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행사하여 문호를 개방시키는 방안으로 대외교역에 개방된 항만을 지정할 것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지정한 항만이 개항이고 개항장이다. 그러므로 개항이라는 용어 속에는 외세에 의하여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는 수세(守勢)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3포 중 가장 먼저 개항한 것이 부산항이다. 다른 두 항구와는 달리 부산항의 개항은 병자수호조약에서 직접 개항을 약속하고, 조약체결과 동시에 개항한 항구다.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부산항의 개항이 바람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왜 일본은 3포 중 부산항의 개항만은 병자수호조약에서 꼭 지정하여 개항하도록 하였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의 지도를 보면 명백하다. 부산과 일본의 구주(九州)지방은 가장 가까운 해로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개항기까지 일본과 아시아대륙의 연결통로의 1번지 격이 부산이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승선시킨 수백 척의 선박이 가장 먼저 당도한 곳도 부산이었다.


다른 두 항만은 원산(元山)항과 인천(仁川)항이다. 원산항의 개항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러시아가 동진해 와서 블라디보스톡항에 태평양 함대의 기지를 만들고 태평양으로 진출하였으나, 이 항구는 겨울에 결빙되어 사용할 수 없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보다 남하하여 한반도 인근에 부동항을 확보하여 태평양함대의 보조 기지항으로 삼기를 바라고 남진을 계속하였다. 이를 간파한 일본이 선수를 쳐서 원산항을 개항하게 유도하고 여기에 일본 세력을 심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인천항은 원산항과 함께 일본이 개항을 요구하였으나, 한국 측의 반대로 지연되었다가 몇 년 후 개항되었다. 이 인천항의 개항을 전후하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것은 개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시사해준다.

 

2). 개항초기의 항만관리
개항초기에는 항만관리라는 것이 거의 없었고, 자연 상태인 수역을 지정하여 외국선이 입출항 하도록 한 것이 전부이고, 여기에 세관 등 정부 관서를 두어 대외교역을 관장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개항초기 근대적인 항만시설이란 거의 없었다. 적정한 위치에 선박을 정박시키고, 이곳에 중소형선을 가지고 사람이 승하선하고 화물을 적양하 하는  수준이었다.

 

2. 일제치하에서의 항만관리
1) 일본의 수탈과 대륙진출의도
일본이 우리에게 정치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여러 항만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침략을 위한 경제적인 기반을 닦아 나갔다.

 

이 때 일본의 교통경제면에서 본 정책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한반도의 수탈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쌀, 면화(棉花), 각종 광산물 등을 수탈하여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이러한 수탈대상품의 산지와 가까운 곳에 항만을 개항하도록 하는 동시에 그 항만과 산지사이에 수탈품을 운송하기 위한 운송로(특히 철도)를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를 넘어선 대륙진출의 의도를 구체화시켜 나간 것이다. 즉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후에는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경부철도와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촉진해 나간다. 이 두 철도는 한반도를 종단하여 중국대륙으로 연결된다. 다른 한편 경부 경의선 철도부설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이 노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만주지방에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권리를 청과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으면서 일본의 중국대륙(초기에는 만주) 진출 의도는 더욱 노골화되고, 구체화된다. 일본은 본국 내에도 일본과 한국간의 항로상 가장 적정한 위치에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설치하고 이 항만과 부산항 간에 정기적으로 선박이 취항하게 함으로써 일본 세력의 만주 진출의 교통로가 완성된다. 즉, 일본의 시모노세키-부산항(선박)―서울(경부선 철도)―신의주(경의선철도)―만주(만주철도)로 연결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반도 각 지역의 수탈을 위한 교통로도 하나씩 정비해 나갔다. 한반도에 한말에 개항한 부산, 인천, 원산 외에 진남포,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울산, 포항, 묵호, 성진, 나진 등은 대부분이 한반도 수탈을 위한 항만이었다.  

 

2) 일본의 군국주의와 항만관리제도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항만 및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정책은 위에서 개관한 바와 같이 정치 군사적인 침략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대외정책의 근간은 서구에서 17-18세기에 팽배하였던 중상주의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중상주의의 실현은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부국과 강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즉 국가의 군사적인 목표와 경제적인 목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관계인 것이다.   


당연히 교통시설의 건설이나 운영이 국가에 의하여 주도된다. 특히 항만은 일본 군국주의의 전진기지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우리나라의 교통시설과 항만시설은 공히 일본 총독부가 직영하거나 일부 민간이 관여해도 총독부의 강력한 영향 하에서 총독부의 정책적 통제 하에 들었다. 그 결과 항만관리는 중앙정부의 고유업무로 여겨지게 되었고, 중앙정부 이외의 다른 세력(지방 정부 또는 민간 자본)은 항만에 얼씬거릴 소지가 전혀 없었고, 그것이 그대로 해방 후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3. 해방 후의 항만의 기능과 항만관리제도
2차 대전의 종전으로 한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하였다. 해방과 독립의 감격에도 불구하고 항만의 기능은 축소될 대로 축소되었다. 항만이 수행해야할 기능이 거의 정지되다시피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교통망(특히 철도교통)과 항만은 일제의 침략야욕인 한반도와 중국 대륙(특히 만주) 수탈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이러한 야망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한반도와 일본 간의 경제적 연결고리는 모두 끊어졌다. 그 결과 남한 기준으로 보아서도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울산, 포항, 묵호 등 주요항만의 대일 수출입 창구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교역 상대지역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항만의 기능이 기껏해야 연안여객선이나 화물선을 수용하는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부산항의 기능도 마찬가지였다. 관부연락선으로 일본과 유기적인 연계 교통 체계를 갖춘 부산항은 아시아 대륙의 경제 수탈 결과물을 일본 경제로 연결시키는 파이프라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와의 경제적 연계가 끝나면서 부산항의 이러한 기능도 정지되었다. 더구나 한반도가 38도선(후에는 휴전선)으로 양단되면서 부산항의 배후 경제권은 동북아시아 전체(일제 식민치하)에서 한반도의 남반부로 축소되었다.


한국의 주요 항만들은 해방과 독립을 계기로 자기가 해야 할 기능을 송두리째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개발해 놓은 많은 항만 하드웨어들이 무용지물로 전락하였다. 겨우 연안 운송이나 감당하면서, 아주 예외적으로 외항선이 한 두 척 드나들도록 기능이 위축된 것이다.


이러한 해방 후의 항만기능에서 약간의 예외가 있다면 부산항이다. 부산항도 다른 항만과 마찬가지로 일제치하에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아마도 부산항이 가장 심하게 자기기능을 상실한 항만일 것이다. 그러나 부산항은 6. 25 동란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필자가 다른 필요에 의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6. 25가 일어나던 그 날 아침 부산항에는 두 척의 선박이 접안하고 있었다고 한다. 접안 가능한 선석만도 30-40개(당시 기준), 정박능력까지 합하면 100여척의 수용능력을 가진 항만에 단 두 척의 선박이 정박 중이었다면 항만의 이용도를 알만하다. 그 중 한 척은 2-3,000톤 급의 화물선으로 미국이 대한 원조용으로 보낸 비료를 양하 중이었고, 다른 한 척은 대일 수출용 텅스텐을 선적하기 위하여 들어와 있던 6-700톤급 화물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의 참전으로 부산항이 한국전의 군수 기지항이 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어 전쟁발발 1년 후쯤에는 부산항에 정박 중인 선박이 2-300척에 달하였다고 한다. 6. 25 당일의 단 두 척과 잘 대조되는 선박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되고 다시 잠잠해지자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도 크게 감소되고, 다른 항만수요도 그리 큰 증가를 보이지 아니하면서 부산항도 다시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항만의 전체적인 침체는 해방 후 약 20여년이 흐른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그때까지는 일제치하에서 건설해 놓고, 무용지물화한 부두를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항만시설의 건설도 이루어지지 아니하였고, 항만관리제도도 일제치하에서 운영되던 관리체계가 그대로 답습되었다. 
       
4. 경제발전과 항만기능의 활성화
1) 경제발전에 따른 항만시설의 부족문제 대두
위와 같은 상황으로 항만 개발이나 발전 문제는 해방 후 20여년이 지난 1960년대 중반까지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고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그러한 과정 중 도시 기능이 발전하면서 일부 중요한 항만시설이나 항만건설 예정 부지들이 다른 목적으로 전용되는 등 오히려 항만의 퇴조를 가져오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항만시설이 무용지물로 방치된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용지물의 재활용이라는 생각이 일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군사혁명 후의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과 집행으로 유도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가 개막되었다. 수출이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공업화의 진전으로 새로운 임항공업단지들이 잇달아 건설되면서 경제건설에 필요한 원자재와 생필품 등의 수입이 급증하였다. 새로운 공업항이 필요하게 되었고, 기존의 항만시설의 활용으로는 감당 못할 수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 공업화 초기의 항만개발
공업화 초기의 항만개발은 공업단지의 조성과 이 공업단지를 지원할 공업항의 개발에 역점이 두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울산공업단지의 개발과 울산항의 건설이었다. 이 공업단지와 공업항의 개발은 일본 모델을 도입한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의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면서 수출 주도형 대외 지향 경제 정책을 추구하였고, 내륙 수송비의 절감을 위하여 임해공업단지를 개발하여 생산 공장을 해안에 집중시켰다. 해외에서 도입하는 원료와 생산된 제품의 수출에서 운송비를 절감하는 효과 외에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울산공업단지와 울산항에 이어, 포항종합제철과 포항항의 개발 여수에 제2 정유를 건설하면서 여수 및 여천항의 개발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임해공업단지와 공업항의 개발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다른 한편 경제개발계획의 시행이 효과를 나타내면서 대외무역도 활성화되어 일반 상항의 부족 문제가 나왔다. 지금도 기본적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당시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상품이 수출입하는 일반 상항은 부산항과 인천항이었다. 부산항이 우리나라의 관문항이라면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경인지역의 관문항이다.

 

두 항만 중 시설 면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던 항만이 부산항이었다. 부산항은 일제치하에서 일본과 만주지역을 연결하는 항만이었기 때문에 관부연락선이 연일 출입항하고 만주지역에서 철도로 부산항으로 운송된 각종 식량자원과 원자재들이 일본으로 연일 선적 운송되던 항만이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근대화된 항만시설이 비교적 잘 건설되어 있었고 1960년대 후반까지는 이 시설들을 활용하면 큰 문제없이 대외교역화물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반면 인천항은 심각한 항만시설 부족에 시달렸다.

 

우선 인천항은 서해안이 간만의 차가 심한 자연적인 핸디 캡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갑문식 항만이어야 하였다. 그리고 갑문식 항만은 건설비가 고가인 동시에 운영에도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요된다. 그러한 핸디캡으로 인하여 인천항은 8. 15 해방당시까지만 해도 근대적인 항만시설이라고는 3-4천톤급 선박 5-6척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선거(船渠)마저도 6. 25 동란 후 미군이 징발하여 전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반 상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상용 화물들은 모선을 해상에 정박한 상태에서 부선으로 해상에서 적양하하여 인천항 연안에 산재한 물양장에서 다시 적양하 하는 이중하역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1960년대 말 수출입 화물의 급증으로 인한 일반 상항의 증설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 부산항과 인천항 중 개발 우선순위의 결정에서 인천항이 부산항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된데에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다.

 

인천항은 일제치하에서 제1독크로서는 항만시설이 모자라서 제2 독크를 건설 중이었고, 이 제2 독크 건설초기에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죄수로 복역하던 김구 선생이 이 제2 독크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다가 탈옥하였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 격인 백범일지에 이 사실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어지간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제2 독크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여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였던 장기영씨 등이 인천항의 우선 개발을 역설하면서 이 제2 선거 건설 공사를 재개하는 방향으로 항만 개발 방향이 설정되었다. 그 후 공사의 진행과정에서 제2 선거만으로는 너무 규모가 작으니 인천항 내항을 전부 독크화하는 안으로 공사 계획이 확대되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 사정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정도의 공사비가 소요되는 대공사가 되었다.

 

이렇게 되어 시작된 인천항 내항 전면 독크화 공사는 1974년에 준공되어 공용 개시하게 되었다. 그 중간에 갑문의 위치 문제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고, 준공 후의 선박 입출항의 안전성 문제로 여러 가지 보완작업도 이루어졌으나 본 강의와는 무관함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5. 부산항 컨테이너 전용시설의 건설재원 문제와 IBRD 차관
1) IBRD 차관신청
인천항에 이어 부산항에도 새로운 항만시설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컨테이너화의 물결 때문이었다.

 

컨테이너 모선이 부산항에 직접 기항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1-2만 톤 규모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로는 안 되고 적어도 파나막스 형인 5만톤급 부두가 필요하고, 부두에는 본선에 컨테이너를 적양하하는데 사용되는 갠트리 크레인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부두 바로 배면에 본선에 적양하하는 컨테이너를 장치할 수 있는 CY가 필요하다.

 

이러한 부두는 부산항의 기존부두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산항뿐만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항만이 같은 사정이었다.


부산항에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정부안에서 이 건설 안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인천항 건설 소요 예산도 벅찬데 여기에다 다시 부산항의 컨테이너 전용부두건설 재원을 도저히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꼭 필요하다면 인천항에다가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만들면 된다는 안이한 의견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해운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이것이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부산항과 인천항의 차이는 부산항이 원양정기선의 주항로상에 있으나, 인천항의 경우 주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점과 인천항이 간만의 차이로 인한 갑문식 항만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재원을 국내에서 마련하지 아니하고, IBRD 차관으로 하기로 하였다. 정부 내에서도 IBRD 차관이라면 추진해 보기로 하여, 부산항에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여 IBRD에 차관을 신청하였고, 이 신청에 대한 예비 검토를 거친 후 IBRD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본격적인 조사용역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2) 차관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Port Authority 제도
IBRD가 차관을 제공할 때는 두 가지를 중점 심사한다. 그 사업이 그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꼭 필요하고 타당한 사업인가 하는 점과 다른 하나는 차관자금의 회수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IBRD는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조사용역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대하여는 이의가 없었으나, 항만관리제도상의 문제가 있어, 회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차관 제공의 전제 조건으로 우리나라 항만관리제도를 서구의 전통적인 항만관리 시스템인 Port Authority 체제로 전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렇게 건의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 항만관리 시스템이 항만의 계획과 건설은 건설부가 담당하고, 관리와 운영은 교통부가 담당하는 이원적인 관리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대단히 불합리한 관리 시스템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만관리제도를 기왕에 근본적으로 개편한다면, 항만의 기업적인 운영을 위한 시스템으로 서구제국에서 발전시켜 전 세계적인 시스템으로 정착된 Port Authority 체제가 좋겠다는 의견이다.

 

Port Authority 체제로의 전환을 건의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계획건설과 관리운영을 따로 분리한 것이 불합리하므로 계획, 건설 기능과 관리, 운영 기능을 통합할 것과 다른 하나는 이렇게 통합된 기구에서 항만을 기업회계원칙에 의하여 운항하여 독립채산제로 하라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차관자금을 그 프로젝트의 운영수익에서 상환하도록 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3) Port Authority 제도의 편법적인 수용
이 두 가지 의견을 수용하는데 정부가 난색을 표명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정부는 그 당시 Port Authority 제도가 어떤 기구인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두 번째로는 건설부와 교통부로 이원화되어 있는 정부 기구의 조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고, 당시까지 항만은 일반회계 소관사항이었으므로 정부 회계제도 상의 문제도 있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Port Authority 체제를 한국 항만에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때문에 단계적으로 시행하도록 절충하였다.


절충 결과 우선 대상 항만인 부산항과 묵호항(이 두 항만은 IBRD 차관사업이 직접 시행되는 항만임)의 항만 계획, 건설 기능과 관리, 운영 기능을 통합한 관리 기구를 만들고 공사 착공, 약 4년의 연구 조정 기간을 거쳐서 전국의 항만관리기능을 통합한 기구를 만들 것을 조건으로 하였고, 항만회계제도의 조정과 항만운영제도의 개선에 관하여는 통합된 항만관리기구에서 다시 IBRD와 협의하여 개선안을 찾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부산항의 기존의 지방해운국 기능과 건설부의 부산항 건설 기능을 통합한 부산항만관리청을 두고 묵호항의 기존의 지방해운국 기능과 건설부의 항만 건설 기능을 통합한 묵호항사무소를 두어 IBRD 차관의 집행기능을 전담시켰다.

 

그리고 약 4년 후인 1976년 3월 13일에 교통부의 항만관리 운영기능과 건설부의 일반항에 대한 계획, 건설 기능에 기존의 교통부 해운국 기능을 통합한 항만청이 설립되어 항만관리기구가 통합되었다. 그 후 다시 항만회계제도를 정부의 일반회계에서 분리하여 기업회계제도로의 전환 가능성에 대한 연구조사용역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 IBRD의 차관사업으로 건설된 부산항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비롯한 새로운 항만시설들이 속속 완공되어 운영에 들어갔으며, 별 다른 문제점 없이 이들 시설이 운영되었고, 얼마 후에 도래한 원리금 상환에서도 원리금을 차질 없이 상환하자 제도의 여하에 불구하고, 한국은 당해 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능력은 충분하다고 보고 더 이상 Port Authority 체제로의 전환을 IBRD가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6. 우리나라 경제의 지역적 구조와  항만의 발전
1) 항만적 관점에서 본 우리나라 해안선의 특징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로서 동, 서, 남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북은 중국 대륙에 연하여 있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로는 휴전선(6. 25전까지는 38도선)으로 되어 있다. 동서남 3해안 중 동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적고 해안선의 바로 뒤에 태백산맥이 있어, 해안선의 배후가 좁아서 인구와 산업이 집중되지 아니하고 항만의 적지도 적다.

 

그 대신 산악지대에서 각종 광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기 때문에 이 자원을 이용한 공업이 발달할 소지가 많다. 서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해안선의 배면에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농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경인지역은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하여 우리나라 공업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서해안의 경우,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항만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갑문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항만건설비가 높은 핸디캡이 있다. 또 세계 각지와 통하는 주요항로에서부터 황해를 거슬러 올라와야 하는 불편 때문에 재래정기선 시대부터 경인지역의 관문항인 인천항에는 차변운임이 부과되는 등 불리점이 많았다.

 

또 2차 대전 후 중국이 공산화되어 대외무역을 폐쇄하였기 때문에 대 중국 교역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서해안이 해안선이 긴데도 불구하고 인천항과 군산항을 제외하고는 항만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해안은 다도해로서 섬이 많고 해안선의 굴곡도 심하여 항만 적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주항로와 바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양항이 많이 발달하였다.

 

2) 부산항의 관문 기능과 우리나라 교통지리  
1960년대에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부산항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특히 경부고속도로가 건설, 개통되면서 부산항의 우리나라 관문기능은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우리나라 경제는 경인지역의 경제와 동해안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동남해안 인더스트리얼 벨트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동남해안 인더스트리얼 벨트를 보면 가장 북쪽에 옥계, 묵호, 북평, 삼척항이 있다. 그 일대에 태백산맥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암을 원료로 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의 건설로 시멘트의 선적항이 크게 발달하였다. 조금 남으로 내려오면 포항항이 포항종합제철을 위시한 철강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조금 다시 내려오면 울산공업단지가 나온다(이상 동해안).

 

남해안으로 들어서면 부산항이 우리나라 대외 교역의 상항, 특히 대외 교역 컨테이너항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서(西)로 더 나아가면 마산항(창원 중공업단지)과 여수, 여천, 광양항, 그리고 다시 서로 가면 목포항으로 연결된다(이상 남해안).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철도로 경인지역 경제와 연결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양 날개를 편 임해공업단지의 배치로 우리나라 대외 교역의 국내교통지리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역T자형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교통지리의 형성에서 서해안의 배후인 호남권과 충청권이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은 서해안의 항만적지 부족과 중국 대륙의 폐쇄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 서해안 연안의 개발 소외는 영남권 정치 세력의 장기 집권과 이에 저항하는 정치세력 간에 호남 푸대접과 충청도 무대접 시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3) 중국의 발전과 서해안 시대의 개막
중국의 개방과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으로 인하여 동아시아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의 구조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항만면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위축되었던 인천항의 기능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항만 개발 적지의 부족과 수도권의 비대화 억제 정책으로 인하여 개발이 정체되었다.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새로 나타난 항만이 평택항이다. 평택항은 우리나라의 경인지역과 중국 황해 연안을 연결하는 교역 기능을 인천항이 다 못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개발되기 시작한 항만으로서 최근에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인천항, 평택항 외에도 군산항과 서해안의 가장 남쪽 항인 목포항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서해안 항만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중국 요소 외에 또 하나의 기술적인 요소가 있다. 즉 지금까지는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갑문식 항만으로 해야 하였는데 최근의 기술 발전으로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바로 갑문 없이 부두에 선박을 접안, 하역할 수 있게 되었다. 간만의 차 때문에 부두 전면 수심을 더 깊게 해야 하기 때문에 건설비가 더 들기는 하나 갑문식 항만보다 저렴하고, 무엇보다 유리한 것은 갑문통과에 따른 비능률을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요인이 작용하여 우리나라 항만에서 서해안시대가 개막되고 있다.


이 서해안 항만의 발전은 컨테이너 물동량의 부산항으로의 집중을 완화시켜서 경부 축의 교통 정체를 크게 완화시켜 줄 것이다. 지금까지는 경인지역 컨테이너 중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역내 지역으로 가는 컨테이너도 육송으로 부산이나 광양으로 운송하여 여기서 선박에 적양하 하였으나, 앞으로는 경인지역 컨테이너 중 원양지역으로 가는 컨테이너만 부산항이나 광양항으로 가고 역내화물은 인천항이나 평택항을 이용하여 직접 운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 최근의 우리나라 항만의 발전방향
1) 글로벌화의 진행과 항만에의 민자 참여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2차 대전 후 세계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던 냉전체제가 붕괴되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모든 경제 활동도 지구 단위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글로벌화가 시작되었다. 세계의 경제운용방식이 전반적으로 바뀌었다.


그 방향은 규제 완화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규제의 철폐, 무한 경쟁의 허용이다. 항만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경제가 아닌 국제 경제 체제하에서는 항만의 공공성을 어느 정도 강조하여, 항만의 개발과 운영을 공기업 방식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보다 더 공공성을 강조하여 국가(한국)나 지자체(일본)가 직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세계 경제 체제하에서는 항만도 하나의 경제시설이라는 관점에서 기업원칙으로 운영하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해졌다.

 

이것이 항만관리제도의 민영화다. 항만관리에서 공공성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다. 보다 능률적인 항만관리가 보장된다면 민간기업에게 항만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기업적인 항만관리 기구로 창안되었던 Port Authority가 주식회사로 전환되고(Port of Singapore Authority), 항만의 개발 단계부터 민간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건설된 항만의 사실상 사유화를 인정하는 시스템을 널리 채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항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항만의 기본시설인 방파제 등 외곽시설과 항로의 준설 등을 제외한 항만 기능시설들의 건설은 대부분 민간 기업에게 건설하도록 하는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아주 잘한 것이다. 민간기업은 적자가 나는 사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항만시설이 적자가 나는 이유는 수요가 없는 곳에 항만시설을 건설하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으로 항만을 건설하던 시대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필요한 항만시설을 건설하게 한 예가 많다. 그러나 민자로 건설하게 할 경우, 이럴 염려가 훨씬 줄어든다. 만약 불필요한 곳에 잘못 판단하여 항만시설을 건설하였다면 그 손실은 투자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2) Port Authority 체제의 도입
항만관리제도를 Port Authority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70년대 초, IBRD가 차관을 제공하면서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아니하고, 국유국영의 항만관리체제를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오랫동안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뚜렷한 이유 없이 유보되어 왔던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항만도 Port Authority 체제로의 전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Port Authority 제도는 항만자치제도이므로 지방자치와 기본적인 성격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2000년대 초에는 부산항과 인천항의 관리 체제를 Port Authority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완할 사항이 많으나, 진일보된 방향이다. 앞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미비점을 보완하고 부산, 인천항에만 국한하지 말고 전국 중요 항만으로 그 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Port Authority 제도에 대한 개요는 따로 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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