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과 도선사로서 ‘최초’ 꼬리표 달아

배순태 회장.
배순태 회장.

우리나라 근대해운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해방년을 기점으로 한다. 변변한 배 한척 없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의 한국해운은 세계 8위라는 위상을 통해 해운선진국 대열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해운강국으로 우뚝서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60년동안 급성장한 우리해운의 현재에는 근대해운의 초창기에 활약했던 원로 해운인들의 노고가 밑거름이 되었다. 


인천지역에 근거를 둔 예선회사인 (주)흥해의 배순태 회장도 척박했던 한국해운의 초창기에 선장과 도선사로서 ‘최초’라는 표현을 꼬리표처럼 달고 한국해운의 초석을 놓은 원로 해운인 중의 한사람이다. 이같은 공로는 이미 바다의 날 포상(97년)으로 인정된 바 있고, 올해는 한국해운물류학회가 시상하는 ‘해사문화상’의 열다섯번째 주인공이 되게 했다.


우리나라 해운 60년사의 산증인인 배순태 회장을 북창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리부리한 눈에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의 호남형. 기자가 대면한 배순태 회장의 첫인상이다. 거친 바다와 싸워도 끄덕없을 것 같은 강인한 뱃사람의 풍모를 80의 노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배순태 회장은 1945년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우선에 입사해 승선근무하다가 부산수산대학 등에서 교수직을 거쳐, 1952년 선장 면허를 취득함으로써 본격적인 선장시절에 이어 34년간 도선사업무를 통해 해운업계에서 기록될만한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다. 

 

세계일주항해 제1호 한국 선장
그는 1953년 동해호의 선장으로서 대권항법으로 태평양을 처음 횡단해 7일간의 항행기간을 단축했고 미화 2만불의 운항경비를 절감했다. 이어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유럽의 여러 항구에 입출항하였고, 귀로에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부산항에 입항함으로써 세계일주 항해를 성취한 대한민국 제 1호 선장이 되었다.

 

 


승선생활중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당시에도 도선사는 선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58년 이전에는 경력자들을 임의로 부산과 인천, 목포 등에 배치했으며, 기득권을 가진 도선사들이 독점적으로 도선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도선사 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당시 외국의 선박이 우리항만에 입항해도 도선사가 부족해 수척의 선박이 도선사가 승선한 선행 선박을 따라 줄줄이 입항하는 진풍경까지 연출되었다고 배회장은 회고한다.
 

58년 첫 도선사 시험통해 인천서 도선생활 입문
배 회장은 수년간의 국제항행을 통해 현장에서 외국인 도선사에게 배우고 익힌 도선기술을 국내에서 활용하려 해도 도선사가 되는 길이 막혀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에 국가시험을 통한 도선사 면허제를 건의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3년 이상 선박에 승선한 경력이 있으면 도선사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도선법의 규정에 의거해 1958년 처음으로 시행된 도선사시험에 응시한 그는 10월 도선사 면허를 획득하고, 이듬해 인천항에 도선사로 취직하면서 도선사직에 입문했다.

 

1959년 시작된 그의 인천항 도선사 시대는 1993년 은퇴한 34년간 이어졌으며, 그동안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의 안전운항과 항만시설의 보호 및 효율향상에도 크나 큰 업적을 남겼다.

 

인천항 도크 준공 첫도선 장본인
1974년 준공된 인천항 도크를 통해 처음으로 입거한 여수호의 도선을 맡은 장본인이기도 한 배순태 회장은 1987년 인천항에 최초로 입항했던 자동차 전용선을 입거시켰으며, 88년에는 인천항 갑문통과 기준치를 초과한 대형 양곡선 아니카호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입거시키는 조선(操船) 기량을 보였다. 또한 안전문제로 모든 도선사들이 기피하는 10만톤급의 LNG선박이 86년 국내 최초로 입항시 평택항 LNG기지에 접안을 시키는 등 과감하고 치밀한 운항기술로 ‘도선신(導船神)’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75년에는 ‘인간승리’라는 모 TV 방송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일반인에게 도선업무를 알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천시 성화봉송의 최종주자로 나서 인천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기차게 뛰었던 감격은 배 회장의 평생의 보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과감·치열한 기술 ‘導船神’ 별명
배순태 회장은 1970년대에는 한국도선사협회의 창설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직을 맡아 도선사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으며, (주) 흥해를 창업해 예선사업과 조선사업의 경영자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식민시대와 전쟁 등등. 우리민족의 수난과 격변의  시절을 살아온 세대가 그러하듯 배 회장은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으며, 그렇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도 소홀함이 없었다. 한국해양대학교에 7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하고 해외 유학생의 장학금도 후원하는 등 해운계 후진양성에 기여한 것은 물론 고향인 경남 창원군에서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선사를 ‘항만의 인적시설’이라고 역설하는 배순태 회장은 요즘 선원직을 기피하는 사회적인 현상을 깊이 우려한다. 국비로 공부하고도 직업은 마음대로 선택하는 지금의 세태를 꼬집으면서 이를 방치했다가는 종국에 도선사 마저 외국인을 고용해야 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부와 해운업계가 지혜를 모아 급성장한 한국해운의 내실있는 더 큰 발전을 위해 해기전승을 이룩해 나가기를 바다와 해운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배순태 회장 이력>


△1925년 경남도 창원 출생 △45년 진해고등해원양성고 항해과 졸업 △66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2002년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공학박사 △45년 조선우선 입사·승선 △48년 국립 부산수산대학 조교수 △50년 해군사관학교 항해과 교수 △51년 상공부 수산국 기정 △52년 갑종선장 면허장 취득 △52년 대한해운공사 입사 원양선 선장 △58년 인천항 도선사면허 취득 △59년 인천항 도선사 개업 △66년 경영진단사 자격 취득 △68년 명성학원 이사장 취임 △70년 인천시 중구청 자문위원장 △70년 한국도선사협회 초대회장 △1993년 도선사 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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