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호쿠(京北)해운과의 협업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한국의 해운산업은 오일쇼크 등으로 미증유의 불황을 겪었고, 마침내 1985년 해운산업합리화 조치로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보양상운은 냉동선 등의 특수화물 시장에서 활동했고, 주고객이 일본 수산업계였기 때문에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사업과 선대를 확장할 수 있었다. 1986년 일본의 게이호쿠(京北)해운(대표 小川延夫)으로부터 5,000톤급 원목선인 ‘Di Lorelei’호를 오릭스의 자금융자로 구입해 ‘Dinok’호로 개명했다. 운항은 전선주인 게이호쿠해운에 재용선을 주고, 용선료로 선가를 상환했다. 


이후 게이호쿠해운의 오가와 노부오(小川延夫) 사장과는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그 직원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막 결혼한 큰 아들 커플(김일호, 정우현)이 1992년 그들의 사택 한채를 임대해 살며 와세다대학을 다녔다. 오가와 사장을 연결해준 사람은 와타나베(渡邊)인데, 두 사람은 대학입시 재수생활을 할 때 같은 학원에 다니며 알게 된 사이였다. 재수 끝에 오가와는 게이오대학에, 와타나베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오가와는 그 뒤 홋카이도 출신의 선주인 사토 하지메(佐藤一) 사장의 맏딸과 혼인해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사업 수완도 뛰어나 일본내항노무협회 회장을 맡았고, 정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활용해 일본의 원자력발전의 원료인 우라늄폐기물 재처리 사업을 하청받았다.
그는 자사 원목선의 선창에 코르크로 만든 mine store에우라늄봉을 선적해 자위대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의 르아브르항까지 운송한 뒤, 여기서 재처리된 원자력발전용 연료를 수송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오가와 사장은 진유(仁勇)해운과의 사이에 선박 반환 문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저들의 말만 듣고 나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와타나베가 본의 아니게 부인과 이혼해야 하는 사태로 전개되자 오해를 풀었다.


‘Dinok’호의 선가 상환이 종료되는 시점에 이르자 일본 정부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폐연료의 국내 재처리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자 게이호쿠해운에게 효자노릇을 했던 정책물자 운송사업이 종료되고, 오가와 사장도 2000년에 내항노무협회 회장직을 물러나게 되어 원목 운송시장도 악화되어 회사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게다가 창업자인 사토 하지메회장이 타계하여 게이호쿠해운은 2004년에 파산하였다. 오가와 사장은 부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한다는 후문이었다.

 

사명 변경과 사업 다각화
아진해운의 계열사인 보양수산에서 시작해 1976년 보양상운으로 20여년간 사업을 영위하며 나름대로 냉동운반선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왔다. 그러나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구가하기 시작하면서 사업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989년 9월 ㈜보양상운을 ㈜보양사로 개명하였다. 이때 사업영역으로 부동산임대업 등을 추가했지만, 결과적으로 부동산과 관련한 사업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1990년 3월에는 부산에 ㈜경신원양을 설립했는데, 이는 오징어와 꽁치조업 등의 원양어업을 전문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였다. 원양어업은 전문영역인 만큼, 파인마치호의 초대선장을 역임했던 김정수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1985년 전후 시도했던 대서양 원양어업이 어려움에 처하자 새로운 활로를 베링해에서 찾게 되었는데, 그 중심지가 미국 북서부의 시애틀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냉동선들은 특정 어업선의 어획물 전체를 받아 운송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우리 같은 후발주자들은 냉동선의 냉동창고를 다 채울 어획물을 특정 어선으로부터 받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의 어선으로부터 조금씩 예약을 받아 냉동선 창고를 채워 운송하는 방식으로 운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어선 여러 척의 어획 상황을 보아가며 냉동선을 운항해야 했기 때문에 시애틀 현지에서 냉동화물 부킹 등의 업무를 대행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알래스카 트롤조업선의 전진기지인 미국의 시애틀로 가서 김동진 박사, 일본통인 Alan Peterson과 Elwood Peterson 형제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1987년 선박관리 및 해운대리점업 면허를 획득하고 잠시 김동진 박사의 사무실을 빌려 사용했으나 곧 사무실을 얻어 독립했다. 1991년 9월에는 Boyang USA Inc.이라는 법인을 설립했는데, Boyang USA Inc.은 1995년에 Trans- Ports International Inc.로 개칭하였다. 베링해 냉동선 영업은 그럭저럭 성과를 올렸으나,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2002년 더치 하버에 입항한 냉동선 3척이 연이어 기관실의 빌지를 바다로 배출하고 기관일지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적발돼 350만달러의 벌금을 내게 되었다. 더 이상 Trans-Ports International Inc.이라는 이름으로는 영업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2007년 8월에 Trans Pac Inc.을 설립해 그 업무를 이어받았다. Trans-Ports International은 법인으로만 존속하고 있다.

 

베링해 사업 확장
1991년 시애틀에 설립한 Boyang USA Inc.의 대표를 맡은 김동진 박사는 그 뒤 북양재 등의 무역에 치중해 회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어 1992년에 장희성 차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켰다. 춘추 2차에 걸친 출어와 신조선 취항시에 수산업계 종사자들을 초청하여 시애틀 센트럴 피어(Central Pier)에서 퍼짓만(Puget Sound) 크루즈파티를 열었다. 비비안과 직원 부인들은 한복을 입고 서브를 들면서 장기자랑으로 분위기를 살리며 보양사의 영업 홍보에 열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 베링해의 알류션 열도 중간에 위치한 더치 하버(Dutch Harbour)에 사무실 겸 사택을 마련해 오픈 하우스로 활용하면서 신조선 처녀입항시 축하파티를 개최해 현지인들에게 보양사를 각인시켰다. 어획 성수기에는 4-5척의 운반선이 항내에 묘박하는 캡틴스 베이(Captain’s Bay)를 보양 베이(Boyang Bay)로 부르며 회사의 인지도를 높였다.


1997년 장희성 소장이 비자 연장이 불가하여 귀국하게 되자 시애틀의 Trans-Ports International 사장으로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13기인 김진한을 임명하였다. 주변의 수소문 끝에 한국해양대학 기관과 13기인 정갑환의 추천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UW, U-DUB)에서 석사학위과정을 밟으면서 Trans-Ports의 일도 거들고 있던 둘째아들(일해)이 1998년 6월에 석사학위를 따게 되어 Trans-Ports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공무와 해무 기능을 강화하고, 더치 하버 현장으로 김진한을 파견할 것을 염두에 두고 2000년에 Trans-Ports의 대표를 둘째아들로 변경했다. 사전에 양해를 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김진한으로서는 기분이 상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써니 브리즈’호 화재 사고
화학제품 운송시장에서 호실적을 맛본 김에 2,635톤급 화학제품운반선 ‘Sunny Breeze’호를 1993년에 매입했다. 써니 브리즈호는 재용선되어 대만과 일본 항로에 배선되어 주로 항공기용 제트유를 선적했다. 여수에서 제트유를 싣고 제주도와 큐슈 사이를 항해 중 1996년 2월 화재가 발생해 3일이나 타올랐다. 때마침 편서풍이 불어 동력을 상실한 써니 브리즈호가 나가사키 쪽으로 밀리게 되니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보통 해상화재는 잔유가 다 타버리기를 기다리는 게 보통인데, 일본 측에서는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난리쳤기 때문에 해상자위대가 선체를 폭파해 수장시켜 버렸다. 일본해난방지협회의 월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다. 1996년 2월 9일 나가사키 현 고토 열도 북서쪽 해역에서 파나마 선적의 2,635톤 써니 브리지호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선박은 한국 여수에서 대만을 위한 항행 중 폭발 화염 표류를 계속 해안에 표류 우려에서 본청 특수구난대가 수중에서 견인색을 장착하고 안전 해역까지 견인 후 선체를 침몰시켰다. 승선자 18명은 근처 항해 중인 선박에 구조됐으나 선장(심동춘) 1명 실종, 미얀마(Maung Zaw) 선원 1명 사망하였다.

 

냉동선과 화학제품선 사업 확장
세계 제일의 수산업, 냉동선, 가공모선 등을 보유한 다이요(大洋)어업이 1993년 사명을 마루하(丸は)로 개명하였다. 사주는 황실, 정부, 내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재벌로, 무역업으로도 성공해 미국의 곡물 수입을 독점했다. 그렇다 보니 당초 기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어로부와 선박부는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모양새였는데, 양 부서의 간부들은 나를 각별히 대해주었다. 그들 회사의 자랑거리인 신조 오우요우마루(櫻洋丸)가 부산항에 기항시 bowthruster와 Heltz rudder를 사용해 제자리에서 회두(pivotturning)하는 것을 보여준다기에 박강준 소장과 김종택 공무감독을 보내 견학하게 했다. 이는 그들과의 관계를 살려 우리 회사도 종합수산회사로 발돋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경제수역의 확장과 어장의 축소로 수산업과 관련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런 시점에서 1994년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집권하면서 재벌해체 수순에 들어가자 원양어업계는 크게 축소되었다. 시모노세키와 나가사키에 조선소를 갖고 있던 다이요어업 계열의 하야시카네(林兼)조선소가 오일 쇼크와 조선불황, 엔고 등의 영향을 1987년 12월 해산되었다. 하야시카네조선소 시모노세키 도크의 공장장이던 이라하라 쿤지(伊良原 訓次)을 포함한 조선전문가들을 교쿠요(旭洋)조선이 채용하여 사업 확장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즈음 진유해운과의 관계가 정리되니 싱구루시마(新來島)조선과도 소원해졌다. 그동안 맺었던 구루시마조선의 모리(森) 과장과 나의 인간관계를 살려 쿄쿠요조선에 냉동선을 발주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로 포경선과 트롤어선, 페리 등을 건조했던 하야시카네조선이나 2만톤급 이내의 상선을 주로 건조했던 쿄쿠요조선은 냉동선을 건조한 실적이 없어 설계도면조차 없었다. 따라서 당시는 신조 발주를 하지 못하고 후에 구루시마조선이 기술을 지원해 쿄쿠요조선에 냉동선을 신조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화학제품운반선인 ‘골든연’호의 매각 후 시코쿠의 선주로부터 1,100톤급 소형 화학제품운반선인 에이코(榮光)호를 오릭스의 금융주선으로 매입해 ‘Glory Endeavour’호로 개명하고 원 선주에게 재용선주었다. 화학제품 운송시장이 호경기여서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대만과 일본 간의 근해 화학제품운송에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운항되었다. 이에 힘입어 오릭스의 금융을 통해 5,000톤급 화학제품운반선인 ‘비너스 가스’호를 큐슈의 시타노에(下ノ江)조선소에서 건조해 용선료 수입으로 순조롭게 선가를 상환해 갔다.
고마운 사람들베링해 출어는 그야말로 보양사의 현재를 있게 한 사업이었다. 기름유출로 법인(Trans-Ports)을 개문폐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아픔이 있었음에도 새로운 법인(Trans Pac)을 설립해 오늘날까지 사업의 맥이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다. 이는 시애틀 주재 직원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수많은 헌신자들 덕분이었다.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사람은 Arctic Storm Inc.의 윤도영 부사장이다. 윤도영 부사장은 1980년대 중반 우리가
처음으로 시애틀에 진출할 당시 워싱턴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오양수산 미국법인에 갓 입사한 적극적이고 야심찬 젊은이였다. 당시 베링해의 냉동선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터라 오양수산도 일본 냉동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윤도영은 한국인이 한국냉동선을 이용해야 한다면서 우리 회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성어기에는 베링해의 각 구역에 산재해 올림픽방식조업(어획량 상한까지 먼저 잡는 자가 승리) 중인 트롤 어선들이 어획물을 현장에서 바로 냉동운반선으로 이적한 뒤 조업을 계속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선주들은 냉동운반선을 유치하려고 쟁탈전을 벌일 지경이었다. 우리는 윤도영의 요청에 따라 냉동선을 배선해 제때에 어획물을 운송하니, 우리 회사는 물론 수산회사도 호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윤도영 부사장은 오양수산의 윤정구 사장의 장남으로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도미했다. 그 회사에서 선원관리와 어획물의 일본 판매를 담당하다 부친과 함께 Arctic Storm Inc.를 공동 설립해 독립했다.


박혜주 사장도 시애틀에 진출한 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혜주 사장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뒤 NOAA Fisheries에 취업해 조업 중인 어선에 승선해 어획물을 검수하는 옵저버(observer)로 일했다. 그녀로부터는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지만, 아직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기에 일일이 밝히는 것은 부적절할 것 같아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만 기록으로 남긴다.
민영복 부사장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산대학 경제학과 60학번인 그는 보양사의 부사장까지 역임하고 퇴직했다. 내가 일본과 미국으로 출장을 가 몇 달간 회사를 비울 때 서울 회사를 맡아 원만하게 운영했다. IMF 이후 2003년 한국리스여신 사태를 해결하고 회사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 공동보증인이 민영복이었다. 그는 자칫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개인재산을 압류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를 피하느라 부동산 이전 등을 자비로 처리했다. 회사와 관계된 일에 자기 돈까지 들여가며 처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 미안한 마음 뿐이었지만, 그 뒤 회사가 안정을 찾게 되면서 그가 입은 금전적 손실을 보상해주고 마음의 빚을 갚았다.


IMF사태와 존폐의 위기
사업을 영위하면서 포클랜드어장 출어시 라비니아와의 갈등, 진유해운과의 분쟁, 가나호 암모니아 가스 유출 사고, Sunny Breeze호 폭발 사고 등 크고 작은 암초를 만났다. 하지만 천운이 있었던지 무사히 넘기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 사업이 정상궤도에 들어섰다. 1980년대 말에 진유해운과의 분쟁을 겪은 뒤에 다라, 수아, 자차 호 등의 선박금융을 일본계 은행으로부터 DNB 파이낸스로 옮긴 바 있었다. 그 뒤 1990년 무렵 다시 청주에 기반을 둔 중앙리스로 금융선을 변경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IMF 때 회사를 위기에 빠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를 기치로 해 집권한 김영삼 정부의 금융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동남아시아에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이것이 이른바 ‘1997 아시아 금융 위기’, 우리나라에서는 ‘IMF사태’로 불리우는 사건이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위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 우리나라는 단순 지표상으로 앞의 두 국가보다는 덜했으나 역시 엄청난 위기를 겪었다. 홍콩,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향을 덜 받았다. 일본은 이미 침체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향은 아주 크지 않았지만 1995년을 기점으로 점차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소비세를 5%로 인상하면서 소비 심리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확 꺾여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국내기업의 외국자본 단기부채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발생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외환 위기 직전이 호황으로 여겨졌지만, 위기 조짐은 전년인 1996년도부터 보였다. 1996년도의 경제성장률이 1995년도의 9.6%에서 7.6%로 떨어졌던 것이 그 단초였고, 언론에서는 경기 침체를 잇달아 보도하고 있었다. 즉, 이미 그전부터 불황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경제성장률 7% 정도면 전혀 낮지 않은 평균 정도는되는 수준이었기에, 경기침체로 경고했던 언론의 부채질은호들갑 수준이라고 봐도 되었다.


1994년과 1995년도의 경제성장률이 9%대를 잇달아 기록할 정도로 활황이었기에 성장률이 떨어진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번에는 성장률 감소가 수출액 감소, 대외 채무 폭증 등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구조개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과 은행마저도 나날이 무너지며, 대규모 실업 -대량의 부동산 매각-금융불안 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외환 위기 상황으로 현실화된 이후에야 IMF의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인 경제적 체질 개선과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우리에게 선박금융을 제공한 중앙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중은행까지 자금난에 봉착했다. 중앙리스는 IMF 사태 이전부터 효산그룹에 185억원 편법대출 문제(동아일보, 1996.5.2.), 부실채권 해약 리스 자산의 7배 이상 급증(매일경제, 1997.6.16.), 전체 채권 중 부실채권 비중 16-17%(조선일보, 1998. 1.15) 등 이미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1997년 말 당시 우리 회사의 미상환 선가 잔액이 약 800만달러였다. 중앙리스는 충북은행의 자회사로,자본금 200억원으로 충북지방에서 설립된 리스사로 1993년에 주식장외시장에 등록했다.


이미 국내 주요 리스업계는 1997년 11월부터 영업 중단에 들어갔고, 중앙리스는 1998년 1월 14일 50억원의 기업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다가 모기업인 충북은행의 지원으로 부도 위기를 넘긴 바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은, 대구, 경인, 대동, 동남, 동화, 광은, 중부 등의 리스업체와 더불어 중앙리스도 1998년 6월 20일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퇴출된 리스사의 자산부채를 넘겨받아 정리할 가교리스사로 한국리스여신(대표 이정녕)이 1998년 7월 출범했다. 한국리스여신 측에서는 부채 회수를 위해 2002년 초 부산항에 입항한 우리 회사의 모노녹, 디녹, 바론 등 냉동선 3척을 압류해 미상환금의 회수를 시도하였다. 우리로서는 ‘압류 해제’를 위해 한국리스여신 측과 협상을 했지만, 일본과 미국이 주력 사업 무대인 우리회사로서는 현금을 적립해두고 있지 않았고 그들로서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었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우리 측에서는 김일호 이사로 하여금 이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고, 태평양법무법인의 강종구 변호사에게 일 처리를 의뢰했다. 한국리스여신 측에서는 어떻게든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압류한 냉동선 3척을 매각하기 위해 SK해운(대표 손길승)과 접촉했다. 한국리스여신 측은 SK해운의 서광조(한국해대 E27)를 통해 냉동선 3척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SK해운은 냉동선의 주무대인 시애틀 주재원 박상범에게 사업성 여부를 검토시켰다. 냉동선 시장을 잘 알고 있는 박상범은 냉동선 3척을 인수하는 것으로는 효과가 없고, 보양사 전체 선대를 인수해야 사업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우리 회사는 8척의 냉동선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즈음 훤리스의 이명진 사장이 노르웨이 선주사 Stavangerske의 Her-mansen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로서는 압류된 선박 3척을 압류 해제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시장가격으로 허만센에게 매각해 미상환금액 일부라도 리스여신에 상환하는 게 나았다. 김일호 이사와 한국리스여신 측과 협상을 시도한 결과, 한국리스여신 측은 선박매각 대금으로 채무 일부를 상환하고 잔액 200여만달러와 연체이자를 합해 100억원 상당의 채무는 내 개인 채무로 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한국리스여신은 우리의 남은 채권을 새한신용정보에 매각처분했다. 우리로서는 연체이자가 36%로 과도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채무잔액을 모두 상환하는게 어렵다고 판단해 새한신용정보와 협상을 벌인 결과 현금 19억원에 상계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2009년에 남은 선박금융 채무를 모두 상환하였다.

 

자회사의 설립 및 변천
1983년에 해운대리점과 수리업을 할 목적으로 설립된 ㈜다라마린은 모회사명인 ‘보양’과는 상이하여 이를 통일시키고자 1995년에 ㈜보양마리타임으로 변경하였다. 한편 원양어업을 전문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1990년에 설립한 경신원양도 1999년 말에 남대서양 조업이 중지되고, 1998년 IMF 등으로 모회사인 ㈜보양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역시 경영에 어려움이 처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리스여신 측의 채권 회수 등으로 어려움에 빠지게 되자 ㈜보양사로서는 사업영위가 어렵게 되고 사업의 영속성을 위해 1999년 10월 ㈜보양마리타임과 ㈜경신원양을 합병한 뒤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을 출범시켰다.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은 국내외의 해운대리점과 선원관리, 선박수리, 선용품공급 등을 영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업의 대부분이 일본과 시애틀 등지에서 이루어지는데 기존의 ㈜보양사는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채무 추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우선 ㈜보양사 대신 대외 영업을 담당할 회사로 ㈜오스위고(대표 김일연)를 설립했다. 

 

한국여신리스로부터 채무를 변제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보양사는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더 이상 법인으로서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국내외 고객들에게 익숙한 ‘보양’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 부산에 소재하고 있는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을 2001년 12월에 새㈜보양사로 개칭하였다. 기존의 ㈜보양사는 서울 소재 법인이어서 부산의 보양마리타임경신원양을 ㈜보양사라는 법인명으로 사업자등록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더치 하버항에서 기름 배출 사고
2002년은 회사뿐만 아니라 인생 최대의 악재가 겹친 해였다. 냉동선 3척이 억류되었고, 베링해에 출어했던 선박 3척이 기름유출로 막대한 금액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2
년 7월 알래스카의 냉동화물 선적을 위해 더치 하버에 입항한 가나(김두현 선장, 김인호 기관장), 소오(고민권 선장, 이제용기관장), 바론 등 3척이 PSC검사에서 기관빌지를 불법적으로 배출했다는 혐의로 선장과 기관장이 구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 소식은 국내 해사언론(쉬핑데일리, 2002. 7.22) 뿐만 아니라 미국의 Marine Link(2021. 9.10)와 Green Environment(2002. 11.14) 등을 통해 알려져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다.


당시 회사에서는 빌지 배출시 반드시 유수분리기를 통해 정해진 해역에서 배출하고, 일지에 기록할 것을 선장에게 지시하였다. 당시 선·기장의 말에 따르면, 기관빌지는 공해상에서 유수분리기를 통하지 않고 배출했다고 한다. 유수분리기를 통해 기관빌지를 배출할 경우 자주 막히는 현상이 발생해 기관원이 상시 당직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공해상에서는 유수분리기를 통하지 않는 우회(by-pass) 밸브를 열고 배출하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했다 하더라도 기관일지에 빌지 배출을 했다는 기사를 기록했다면 문제가 안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아 PSC검사관이 기관빌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결국 2002년 10월 23일 미국 연방법원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지방법원으로부터 500만달러에 달하는 벌금과 유치금, 기여금 등을 부과받았다. 미국의 법 체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에 항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검사측과 부과액에 대해 조정하는 절차를 택했다. 최종적으로 350만 1,200달러를 내는 데 합의함으로써 이 사태를 종결하였다. 변호사비까지 포함하면 1심 부과액 500만달러의 비용을 들인 셈이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우리 회사는 빌지 배출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기관빌지는 유수분리기를 통해 규정에 따라 공해상에서 배출하되, 기관선원들이 번거롭게 느낄 경우 따로 모아두었다가 입항하면 빌지 처리업자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트랜스-포트 인터내셔널로 사업을 영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2007년에 새 법인으로 Trans Pac Inc.을 설립해 현재까지 김일해가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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