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컴퍼스가 ‘콤파스 재개 어려움’을 가리킨다. 아직은 코비드 기상도가 험난하기 때문이다. 콤파스호가 조속히 닻을 올리고 순항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희철의 ‘오스만제국 600년사’를 읽었다. 최근 국명을 튀르키예로 바꾼 터키의 역사가 궁금했다. 우리에게 터키로 친숙한 튀르키예를 이해하려면 그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했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자는 튀르키예 가지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 후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역사와 문화 탐구에 몰입했다고 한다. 특히 튀르크인의 거대한 역사와 문화 콘텐츠를 접하며 그들의 선조인 흉노와 돌궐이 북방 유라시아에서 일구어낸 장엄한 역사적 자취에 흠뻑 빠졌다고 썼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스만제국은 서양사에서 잊힌 제국이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의 부상과 확장은 유럽인들에게 충격과 시련을 함께 안겼다. 20세기 초까지 오스만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는 대결 구도에 갇혀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래 존속한 제국 중의 하나였고 세계사에도 큰 영향력을 끼친 제국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여러 면에서 로마제국과 닮았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도시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듯, 오스만제국도 아나톨리아반도 작은 도읍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두 제국이 지중해 패권국 모델이라는 것도 닮았고, 제국의 역사가 정복 전쟁으로 점철된 것도 그렇다. 그들은 광활한 영토와 다민족을 법치로 통합했고, 신앙과 예술 분야에서도 크나큰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오스만제국을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비잔티움제국 변방의 작은 토후국이 세계 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확장 전략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인식과 그에 따른 변화와 혁신에 관한 것이다.

 

역사 속의 튀르크인
오늘날 우리가 튀르크인이라 할 때는 튀르크 공화국에서 튀르크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튀르크인은 언어학적으로 알타이어를 사용하는 알타이계통 민족으로 튀르크 계열에 속한다. 튀르크인의 원래 고향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전사이자 유목민인 튀르크인은 기후변화, 인구증가, 식량부족, 지정학적 분쟁 등으로 기원전 1700년대부터 최초의 거주지를 떠나 알타이산맥과 톈산산맥이 연결되는 지역으로 이주했다. 수천년 동안 튀르크인은 크고 작은 제국을 수없이 많이 건설했다. 무사 기질이 강한 튀르크인이 유라시아 초원에서 세운 흉노제국과 돌궐제국이 초원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튀르크인이 최초로 세운 흉노제국의 사회 운영과 군사조직 편성은 이후 돌궐, 위구르 등 튀르크계 거의 모든 국가에 전승되어 튀르크 사회를 특징짓는 정치개념이 되었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6세기 몽골초원에는 돌궐제국이 등장했다. 돌궐의 영토는 이전의 흉노제국 영토와 거의 같은 지역으로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실크로드가 그들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돌궐이 멸망한 후 튀르크인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아시아 서쪽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여러 세기가 지나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무슬림 튀르크인은 셀주크제국을 세웠다.

 

이처럼 유목민족 튀르크인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였다. 그들의 이주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두 번이나 바꿔 놓았는데, 첫 번째는 흉노의 일파인 훈족이 유럽의 게르만족을 침략한 사건이다. 훈족의 공세에 밀린 게르만족이 연쇄적으로 로마를 침공하여 결국 로마제국이 멸망했고, 이로 인해 세계사에서 고대를 마감하고 중세가 열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튀르크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구즈족의 대이동으로 세워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사건이다. 이로써 비잔틴은 몰락했고,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됐다. 튀르크계 부족 중에서 오늘날의 튀르크인에 가장 가까운 조상은 오구즈족이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 몽골의 툴라 강가에 살기 시작한 오구즈족은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이란의 아제리인, 이라크의 튀르크멘,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의 선조가 됐다. 오구즈족은 11세기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란 등을 포함한 중동에 대셀주크제국을 건설하여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슬람 셀주크제국과 십자군전쟁
셀주크 술탄조는 건국자 셀주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셀주크 가문은 대셀주크제국과 아나톨리아 셀주크조를 세웠다. 대셀주크제국을 세운 튀르크 부족은 오구즈족이었다. 반유목, 반정주 생활을 하던 오구즈족은 10세기에 시르다리야강과 카스피해 사이의 지역에 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교차로인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의 비옥한 트란스옥시아나는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왕조들이 장악하려던 곳이다. 셀주크는 그곳에서 100세 넘게 장수하다 사망했고, 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셀주크가 세상을 떠난 뒤 전사한 첫째아들 대신에 둘째인 아르슬란이 통치자인 야브구에 올랐으나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부족은 트란스옥시아나의 혼란한 국제정세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웃 나라 정변에 의해 아르슬란이 적국에게 생포되어 7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죽었고, 장조카 투우룰이 동생 차으르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어 안정된 거주지와 영토확장으로 세력을 키운 후 토후국을 넘어 독립을 선포하고 제국의 초대 술탄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인 니샤푸르가 튀르크의 지배에 들어갔고, 1040년은 대셀주크제국으로 발돋움하는 해가 됐다. 그 후 바그다드를 정복했고 1071년에는 비잔티움제국 군대와 말라즈기르트전투에서 압승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차으르의 아들 아르슬란은 큰아버지 투우룰이 사망하자 2대 술탄에 올라 후임 멜리크샤 1세와 함께 전성기를 열었다. 셀주크의 영토는 동쪽은 중국, 서쪽은 비잔티움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광활하여 대제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대셀주크제국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극단 시아파의 음모로 전성기를 이끌던 탁월한 재상 니자뮐뮐크가 살해되고 술탄 멜리크샤도 독살되었다. 그 후 왕권 다툼으로 내홍이 계속되어 제국이 건국된 지 한 세기를 겨우 넘기고 막을 내렸다. 대셀주크제국이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국력이 쇠약해진 원인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3개의 셀주크 분국과 무관하지 않다. 제국의 전성기 전에 남부 페르시아 케르만에 세워진 케르만 셀주크, 시리아 셀주크, 아나톨리아 셀주크가 분리되어 나갔고, 멜리크샤가 사망한 직후 술탄의 형제와 네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이라크와 호라산 셀주크도 분리되었다.
역사적으로 셀주크의 약진은 놀라웠다. 1077년 셀주크는 서쪽으로 원정하여 시아파 파티마왕조 영역으로 쳐들어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차지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셀주크의 세력이 강해지자 기독교 세계는 성지 예루살렘의 운명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1095년 비잔티움 황제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셀주크튀르크 세력을 저지할 파병을 요청했다. 이듬해 3만명의 십자군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하여 1098년 시리아의 안티오크 성채를 정복하였고 이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여 두 달만에 함락시켰다. 신의 도시 예루살렘을 되찾은 십자군 병사들은 대부분 되돌아갔으나 일부는 남아 4개의 십자군 제후국을 세웠다. 아나톨리아반도에 영향을 미친 네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끝나자 셀주크에게 위협 세력으로 몽골이 등장했다. 1243년 셀주크 군대는 쾨세다으에서 몽골군에 대패하여 아나톨리아는 몽골의 영향력 안에 들어갔다. 몽골의 조공국이 된 셀주크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여 이름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셀주크가 남긴 문화적 자취는 대단했다.


페르시아, 이슬람, 중앙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셀주크가 군사, 경제, 행정,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과 성과는 바로 오스만제국에 계승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이 세워지고 레반트 지역에서 서양 상인들의 활동이 늘어나자 셀주크에도 무역량이 늘어났다. 이에 술탄은 다양한 시장 파자르를 만들어 상인들이 몰리게 했고, 흑해, 에게해, 지중해의 항구도시가 과거 실크로드의 거점과 연결되어 아나톨리아 전국이 육상과 해상교역의 네트워크가 됐다. 몽골이 이슬람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칭기즈칸이 동서무역로의 교차점에 있는 이란 호라즘제국의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이슬람의 역사적 도시들을 파괴하고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칭기즈칸의 호라즘제국 정복은 몽골제국이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를 정복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동서로 연결된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은 대원제국을 중심으로 몽골의 네 칸국에 의해 사실상 국경 없이 통합되었다. 사람과 물자가 교류되고, 문화교류와 함께 유라시아 전역이 거대한 통상권이 되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주로 이슬람교도로 조직된 카르텔과 같은 대규모 상인단체 오르톡이 몽골 권력층의 비호를 받으며 국제무역을 수행했다.
한편 튀르크인이 세운 20여개 아나톨리아의 토후국들은 몽골 일칸국의 속국 상태로 셀주크왕조에도 충성해야 하는 이중 지배구조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셀주크왕조가 쇠락하자 몽골로부터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셀주크가 한 시대를 끝내려는 즈음에 아나톨리아의 토후국 가운데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으니 오스만제국의 탄생이다.


오스만의 건국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오스만 토후국은 지도자 오스만이 세운 나라다. 가지 즉, 무사였던 오스만은 1299년 쇠위트에서 독립국가를 선언했다. 변경의 작은 마을 쇠위트는 오스만제국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이후 오스만 가지는 비잔티움 영토에 대한 정복작업을 수행했다. 아나톨리아 서부로 몰린 유목민들은 타고난 무사 기질을 가진 전사로, 그들은 성전을 뜻하는 가자 정신 아래 쉽게 융합되었다. 가자 정신은 튀르크인을 충실한 무슬림으로서 공동 목적에 심취하여 오스만제국이 이교도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혔다. 술탄 오르한은 1326년 비티니아 지역에서 가장 중심도시이며 비잔티움의 상업도시 부르사를 정복하여 이슬람 도시로 만들어 수도로 삼았고, 술탄 무라드 1세는 발칸지역으로 눈을 돌려 1363년에 아드리아노플을 정복했다.


아드리아노플은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 오스만이 유럽을 정복하는 관문이었다. 무라드는 이 도시 이름을 에디르네로 바꾸고 이곳에 오스만제국 최초의 궁전을 지었다. 오스만 영토에 에디르네까지 편입되자 비잔티움의 영토는 수도 콘스탄티노플만 남았고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한가운데 갇힌 모습이 되었다. 그 후 무라드가 아나톨리아 토후국 문제에 매진하는 틈에 발칸지역의 세르비아, 불가리아, 보스니아가 힘을 모아 오스만제국에 대항했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세르비아 남부는 오스만제국에 병합되고 북부는 속국이 되었다. 이렇듯 오스만제국의 발칸 정복은 오스만뿐만 아니라 튀르크인의 침략에 대한 대응과 세력균형이라는 면에서 유럽 역사에도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메흐메드 2세는 1451년 술탄 지위에 올랐고, 그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의 목표는 오직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그곳은 당시 최고의 도시이자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요지이므로 해상장악으로 얻을 상업적, 문화적 이득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메흐메드 2세는 1453년 에디르네를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플 성곽을 포위한 후, 비잔티움 황제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황제는 단호히 거절했다. 오스만 군대는 성곽의 해자를 메우고 새로 제작한 오르반 대포를 발사하여 성벽을 부쉈다. 그러나 비잔티움 군사들도 성을 계속 보수하며 맞서는 바람에 큰 성과가 없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메흐메드는 해상에서 압박하는 공격을 구상했다. 한밤중에 마르마라해에 정박해있던 67척의 함선을 육로를 통해 끌어올려 금각만에 내려놓는 기상천외의 작전을 감행하여 승리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마침내 정복됐고, 끝까지 항전한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사했다. 황도가 무너지며 천년왕국 비잔티움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중세가 마감되고 근세가 열렸다.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은 이스탄불로 개명됐다.


메흐메드 2세는 이스탄불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을 정복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모든 행정과 군사를 이스탄불에 집중하여 과거 로마제국이나 비잔티움제국 도시처럼 이스탄불을 이슬람 술탄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홍해 항로를 독점하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새로운 항로가 개척됐다. 이렇듯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에는 르네상스, 항로개척, 종교개혁 등으로 정치·경제·종교적으로 큰 변혁이 실현됐다.

 
오스만제국의 제도와 통치방식

오스만제국의 팽창과 발칸지역에 대한 정복이 늘어나자 제국의 통합을 위해 정복지 주민에 대한 관대한 통치가 필요했다. 오스만 중앙조정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원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이스티말레트 정책을 폈다. 이는 피정복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유화책으로 생명과 재산의 보호, 종교자유 보장, 전통관습 인정, 정의로운 납세 등 친화적인 대민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무슬림 종교공동체에 대한 관용정책은 종교공동체라는 뜻의 밀레트제도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아 19세기 비무슬림계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들 정책은 피정복민이 오스만제국 정복을 인정하게 하고 그들에 의한 지배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다. 귀족계층 없이 오직 법과 제도로 다스려지는 통치시스템이 이교도 사람들을 이슬람 튀르크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오스만제국 초기에는 공식적인 군대조직이 없었다. 전쟁이 나면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원하여 자신의 무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건국기에 들어서 유목국가가 아닌 정주국과의 전쟁이 늘어나면서 보병보다 대규모 기병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토지를 근간으로 하는 군대조직 티마르제도였다. 이 제도는 오스만제국의 군사와 경제제도의 중추로, 중앙조정으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받은 지방의 토지 소유주가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전시에 일정 수의 기병을 제공하는 식이다. 기본적인 개념은 현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은 현지에서 사용한다는 제도다. 절대적 소유주인 술탄은 땅을 나누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며, 토지를 받은 사람은 해당 농지에서 세금을 걷는 동시에 기병을 양성해야 하는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데브쉬르메는 정복지의 청소년들을 오스만제국의 충직한 병사나 행정가로 양성하는 제도였다. 티마르제도는 오스만제국의 정예군대인 예니체리를 양성하는 데브쉬르메 제도와 함께 오스만제국의 영토확장과 전성기를 가져오는 양대 핵심 제도였다.


오스만제국의 조정회의 체제를 일컫는 디완은 술탄 또는 대재상을 의장으로 수도 또는 술탄이 있는 곳에서 열리는 내각회의로 조정 최고의 의사결정 기관이었다. 술탄의 주재로 대재상, 최고판관, 재무대신, 총무대신 등이 참석하여 주로 정치, 행정, 재정, 군사, 법률 등 의제들을 협의하고 결정했다. 대재상, 최고판관, 재무대신은 국가의 행정, 사법, 재무를 대표하는 국가의 3대 기둥으로 오늘날 3권분립과 같은 것이었다. 튀르크인들의 정통적인 국가이론은 정치사상가 유수프 하지브가 쓴 ‘쿠타드구 빌리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강한 군대가 필요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라가 부유해야 하며, 나라가 부유하려면 신민들의 삶이 풍요로워야 하고, 신민들의 삶을 풍요롭기 위해서는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쿠타드구 빌리그’에 있는 절대적 통치권과 부국강병책은 이슬람 세계 통치자들의 통치원칙이었고, 오스만제국이 이를 잘 활용하였다. 오스만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법치와 공정한 과세원칙을 강조했으며, 통치자의 국가 철학 핵심은 정의였다. 술탄은 오스만이 이슬람 국가였지만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차별없이 다스리기 위해 애썼고, 다양한 소수민족과의 불만과 갈등을 공정한 법치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사회통합과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세계제국으로 성장
오스만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이슬람권인 중동과 아라비아 지역을 향한 영토 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이와 더불어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국제도시로 전환하는 건축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건축과 예술 분야의 적극적인 후원자는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 1세였다. 그들 사이에 있는 셀림 1세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 메디나와 이집트 맘루크를 정복한 후 페르시아와 아랍 예술인들을 오스만 궁전에 대거 입궁시켜 예술 진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 1세 시대에 오스만의 건축과 예술은 전통 튀르크, 페르시아, 이슬람, 아랍, 비잔틴 문화가 혼합되어 오스만 특유의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스만 제국의 문화, 예술적 언어들도 대부분 이때 조성되었고, 쉴레이만 1세 시대에 오스만의 예술과 문화는 정점에 이르렀다. 이스탄불, 이즈니크, 부르사, 카이로, 바그다드 같은 제국의 주요 도시들은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 도시에서는 건축과 함께 직물, 도자기, 비단, 카펫, 제책, 세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이 꽃을 피웠다. 오스만제국의 건축과 예술의 후원자인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 1세는 비잔티움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탄생시킨 콘스탄티누스 1세와 최고의 걸작품 성소피아성당을 건축한 유스티아누스와 각각 비견된다.


쉴레이만 1세는 위대한 통치자에게 필요한 지혜, 용기, 결단력, 공정함 같은 덕목을 두루 갖춘 술탄이었다. 알렉산더 같은 세계적 군주가 되고자 했던 쉴레이만은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문학, 과학, 예술, 건축 등의 분야에서 유럽의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탁월한 문인이자 군사전략가, 능숙한 외교관이요 정치가로 유럽의 역사적인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주역이었다. 당시의 톱카프궁전은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고 품위와 격식 있는 의전행사는 외교사절의 눈을 사로잡았다. 역사가들은 16세기를 튀르크인의 시대, 쉴레이만의 시대라고 불렀다. 쉴레이만 1세에게 후궁 출신 휘렘 황후가 있었는데, 그녀는 오스만제국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여성이었다.


서양에서는 록셀라나로 알려진 휘렘은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하여 14세에 납치되어 크림칸국 궁전에서 지내다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에게 노예로 팔려왔다. 휘렘은 노예에서 궁녀, 다시 궁녀에서 황후로 신분이 급상승한 여인으로 그녀는 미모와 영특함에다가 노래도 잘 불러 쉴레이만 1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시인이기도 한 쉴레이만은 자신의 시집에 아내에게 보내는 연가를 많이 남겼다. 휘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그녀를 만난 이후에는 다른 후궁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황실의 준엄한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고 노예 출신인 그녀를 자유인으로 만든 후 궁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오스만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휘렘이 황후로서 제국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오스만제국 술탄과 이교도 노예 출신 휘렘과의 사랑과 이를 둘러싸고 궁중에서 전개된 정치적 음모극은 하렘에 대한 상상력과 신비함을 더해 세상의 화제가 되었고, 베네치아 외교사절과 여행가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어 연극과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다. 쉴레이만 1세가 세상을 떠나자 휘렘의 둘째아들 셀림이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쉴레이만이 황후에게서 낳은 첫아들 무스타파는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 후궁 휘렘이 자기 아들을 술탄으로 만들기 위해 무스타파가 아버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죽음으로 몰았다. 오스만제국 전성기는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함께 하렘 이야기 등 스토리텔링이 풍성한 시절이었다.

 

변화와 격랑의 시대
17세기 오스만제국에는 10명의 술탄이 집권했다. 위대한 통치자 쉴레이만이 이룩한 영광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위기의 전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하자마자 정예군대 예니체리가 봉급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예니체리는 술탄이 교체될 때 반란을 일으키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의지가 약한 술탄은 예니체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메흐메드 3세 시기에 오스만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플레 현상이 일어났다.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는 올랐다. 그러자 그동안 누적되어온 사회 불만이 쏟아졌고, 곳곳에서 소요와 반란이 일어났다. 소빙하기 영향으로 한파와 기근, 질병으로 오스만제국은 군사, 경제면에서 불안한 징후를 보였으나 술탄의 자질과 능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전사들을 이끌고 전선을 누비며 동서로 진군하던 술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향락을 즐기거나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17세기에 들어서 아흐메드 1세는 새로운 승계 원칙을 공표했다. 정권안정을 위한 악법 형제살해법을 철폐하고 오스만 왕족 중 온전한 정신상태의 연장자가 술탄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형제살해법을 철폐한 배경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메흐메드 3세는 즉위하자마자 19명의 형제를 교살하여 조정의 관리뿐만 아니라 외교사절마저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었다.
형제살해 관행을 없애고 연장자 승계제도가 생기면서 술탄의 형제들은 궁전의 별실에서만 기거하게 됐다. 그런데 가택연금 조치로 인해 오스만제국을 통치할 술탄의 통치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왕자들이 행정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지방 군수로 나갈 수 없었고,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술탄의 식견과 소통능력이 부족하여 통치기술과 행정능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17세기 들어 오스만제국의 경제구조와 상황은 서유럽과 정반대였다. 유럽은 인간중심의 인문주의를 확산시켜 문예부흥을 일으키고,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으로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는데 경제이론 중상주의가 이를 뒷받침했다. 해양기술 발달로 대항해시대를 열고 유럽인들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무역을 하자 오스만제국에겐 이것이 불운이자 재앙이었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를 관리하며 사실상 세계무역을 독점하던 오스만제국은 그 자리를 유럽인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국제물류 공급사슬의 대변혁인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는 유럽 앞에 오스만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오스만인들은 세계는 곧 오스만제국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 오스만 밖의 변화에 무관심했다. 유럽이 경제와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그 영역을 세계로 펼치고 있을 때 오스만제국은 전통을 고수하며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이 변화하면 할수록 오스만은 전통적 가치관에 더욱 매달렸다. 뒤늦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제국은 전성기 메흐메드 2세가 천명했던 ‘두 대륙과 두 해양의 지배자’라는 정복자 기상이 다시 꿈틀거리며 서구화라는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개혁시도와 오스만의 쇠퇴
오스만제국이 쇠퇴하는 시기에 유럽 열강은 오스만 영역에 자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며 경쟁상대국이 우월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술탄 셀림 3세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무스타파 3세는 아들이 세계적 정복자가 되리라는 이슬람 현인들의 말에 크게 기뻐하고 탄생 축하연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셀림 3세의 재위 시기는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는 프랑스대혁명으로 촉발된 유럽의 정세변화와 더불어 오스만의 정치 사회도 격변하여 유럽 열강과의 전쟁, 영토 상실, 개혁으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셀림 치세는 오스만제국이 위기와 정체의 시대를 지나 19세기 개혁의 시대로 들어가는 분수령이었다. 그는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질서’라는 이름 아래 개혁을 추진했다.


셀림은 우선 군부 개혁에 착수했다. 오스만제국 역사상 최초로 ‘새로운, 강한, 근대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개혁과 혁신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유럽식 군사제도를 바탕으로 중앙집권 통치권을 다지는 강한 제국을 만들려고 했다. 행정, 사법, 교육 등 광범위한 분야의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모색했다.
당시는 중앙집중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분권이 성행하여 개혁을 위한 효율적인 행정 집행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중앙통제가 잘 안 미치는 지역에선 토후국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처음에 셀림 3세의 개혁사업이 잘 진행되는 듯했으나 서서히 술탄의 개혁과 혁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개혁 세력은 복잡한 국제정세와 외치 실패로 술탄의 권위와 위상이 하락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특히 지방 토호세력인 아얀의 권력이 점차 강해졌고, 정치와 행정의 근간인 예니체리와 이슬람 율법학자 울레마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침내 예니체리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일반 신민들도 가담했다. 셀림 3세는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됐다. 새로 취임한 술탄은 개혁이 아닌 과거 전통을 답습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개혁이 실패한 것이다.

 

빈 회의의 세력균형과 오스만제국의 종말
유럽이 오스만제국을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한 회의는 1815년 빈 회의였다. 이 회의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방안과 유럽의 질서를 전쟁 이전 상태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열린 회의에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5개국의 대표가 참석했다. 당시로선 매우 중요한 회의였음에도 오스만제국은 불참했다. 오스만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치렀기에 사절단을 보낼 수 있었고, 메테르니히도 오스만의 참가를 원했음에도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오스만 조정이 영토보전 권리 같은 주권 문제를 다른 나라의 결정에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승전국인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패전국 프랑스는 유럽 정치의 안전보장을 위해 세력균형 원칙에 따라 서로 협조하기로 합의했다. 빈 회의 결과 유럽 각국의 국경이 새로 그려졌고, 열강의 이익에 반하는 반란이 일어나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오스만제국의 미래와 관련한 영토 문제를 포함한 발칸지역과 터키해협을 장악하려는 유럽 열강 간의 포괄적인 외교적 현안 ‘동방문제’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빈 회의의 대회장인 메테르니히는 오스만제국이 해체된다면 유럽의 세력균형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는 추후 세계대전 발발로 증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사라지자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발칸반도에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은 현장외교에서 힘을 발휘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이를 견제하려는 열강에 의해 유럽의 협조체제는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었다. 크림전쟁 이후 체결된 1856년 파리조약은 “열강 각국은 오스만제국의 영토보전 권리를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이 공식적으로 유럽 협조체제의 일원이 되었고, 유럽 열강은 어느 나라도 오스만제국과의 이익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 열강은 오스만제국의 쇠퇴기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세력균형이 깨진 1914년 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제국의 수명은 그만큼 연장됐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대륙에 펼쳐진 영역을 장악했던 최강의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무스타파 케말의 국민저항운동으로 탄생한 튀르크 공화국으로 이어졌다. 그 영역은 오늘날 아나톨리아반도 주변에 한정됐다. 오스만제국은 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발칸과 중동지역을 상실했다. 발칸지역에서는 민족주의자의 반란으로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이 독립하였고, 중동지역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아랍 국가들이 탄생했다. 이들 독립국가는 과거에 지배를 받았다는 기억 때문에 반오스만 정서가 남아있었으나 언어, 음식,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오스만의 유산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발칸과 중동을 상실한 오스만인은 아나톨리아반도와 이스탄불을 영토로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고, 오스만인은 튀르크인이 되었다. 튀르키예는 오스만제국이 추진한 서구식 개혁정신과 제국에서 양성한 관료와 관료조직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오스만제국은 튀르크인의 민족적 전통, 문화 다양성, 사회정의, 관용 같은 정신적 가치도 유산으로 남겼다.
초강대국과 힘겹게 전쟁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지난 콤파스에서 다루었고, 이번엔 같은 알타이어계로 한민족과 친근한 ‘오스만제국 600년사’를 살펴보았다. 역사 탐구는 나라와 민족의 근원을 찾아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늘 신비롭고 흥미롭다.         

10월 29일 밤 이태원에 벌어진 핼러윈 축제의 참사! "지금은 같이 슬퍼하고 함께 기도할 때"라는 말에 눈시울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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