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다츠해운에 선원 송출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마루다츠(丸辰)해운은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요코하마를 기반으로 하역용 바지 140여척을 운항하는 중견선사였다. 마루다츠해운은 3대 이시이 요시히로(石井善浩) 사장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1970년 말경 한국선원을 송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루다츠해운은 1,000톤급 냉동운반선 마루다츠마루(丸辰丸)호를 도쿄의 야지마(八島)해운에 항해용선계약을 체결했다. 
마루다츠마루호는 아프리카-유럽 항로에 배선되었는데, 보양상운 부산사무소의 임영택 소장의 사촌동생인 임영규가 조리원으로 승선 중 열병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유골은 송환하고, 후임 선원을 출국시키려는 찰나에 선박이 나이지리아 라고스항에 입항해 발이 묶였다는 연락이 왔다. 마루다츠해운의 이시이 사장이 “선원 격려 차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흔쾌히 동의했다.


도쿄를 경유해 요코하마로 이동해 이시이 사장을 만나 업무협의를 간단히 마치고, 그의 집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하네다공항에서 출발했다. 다음날 아침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내렸는데, 나이지리아 행 비행기는 오후 늦게야 출발했다. 반나절 정도 여유시간이 생겨 택시를 잡아타고, 튤립공원과 안네 프랑크 생가 등을 둘러보았다. 오후에 나이지리아행 비행기에 탑승해 이륙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급유차 4시간 가량 기항한 뒤 다음날 오후 라고스 공항에 도착해 용선주인 야지마(八島)해운에서 수배한 호텔 라고스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이시이(石井) 사장과 함께 보트를 빌려 라고스항 외항에 묘박 중인 마루다츠하루호를 방선하였다. 선장으로부터 사망 경위와 유골을 부산으로 보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런데 오후에는 보트를 빌릴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냉동선에서 1박하고, 다음날 호텔로 돌아왔다. 냉동선이 부두에 접안하면 며칠 더 머물려고 했는데, 1주일 뒤에나 접안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이 사장과 함께 도쿄로 돌아와 그의 집에서 묶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원거리 출장을 갔다 귀가한다는 소식에 치바현에서 양식을 하는 본가에서 보내온 전복, 해삼, 소라 등으로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내었다. 


귀국해 망자의 사촌형인 임영택 소장의 요청으로 유족수당과 장례비 외에 20만원을 추가로 부조해 주었는데, JapanP&I에서 지불을 거부해 회사 장부에는 미수금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얼마 뒤 마루다츠마루호가 매각되어 선원 송출계약이 종료되었다. 그 후 이시이 사장과는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지만, 사업은 전혀 없었다. 아진해운의 분사 방침 이후 보양수산으로 합류하여 출납부를 훑어보던 조석행 사장이 미수금으로 처리된 내역을 보고 내게 “책임지라”고 말해, 기분은 나빴으나 “알았다”고 말해버렸다.
당초 이원영 전무를 영입할 때 어획성공보수를 받으면 출자하기로 하고 지분 25%를 인정했는데, 조과가 신통치 않으니 자본 투입없는 주주가 되었다. 그런데도 조석행 사장은 동향인 이원영 전무를 앞세워 점차 나를 압박해 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자선 중 FRP선 2척은 스즈키 사장에 반환하기로 하였다. 모선의 어로 장비는 고철로 처분해 수리를 담당했던 동일조선의 미지불금 일부를 상환하였다. Van Camp Seafood에서 빌린 자금은 모선 2척을 운반선으로 개조해 팔라우-사모아 간 냉동선으로 운용해 번 수익으로 갚기로 하였다. 당시 가다랑어 어획 부진으로 조업이 원활하지 못했던 Van Camp Seafood의 사모아 공장으로 팔라우 해역의 냉동 가다랑어를 수송하고, 팔라우로 귀항시는 밸러스트 탱크에 사모아의 디젤유를 수송했다. 왕복 항해마다 화물을 실으니 돈이 쌓여갔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원양 조업에 실패한 이후 냉동선의 운항으로 어느 정도 사업이 정상화되던 시점에 파인마치2호가 괌 근처에서 좌초해 멸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더 큰 문제는 파인마치2호의 선체보험이 무보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Van Camp의 차입금으로 출어할 당시 호너 부사장이 이원영 전무에게 “융자금을 제공했으니 선체보험은 Van Camp의 방계회사인 Pool Insurance에 부보하면 요율도 저렴하게 해주겠다”는 제안해 구두로 승낙하였다. 보양수산 측으로서는 이렇게 파인마치1, 2호의 선체보험이 Pool Insurance에 부보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보험 부서에 이 사실을 통지하는 것을 잊은 탓에 파인마치2호는 무보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원영 전무는 국제전화와 녹음기를 들고, 호너 부사장과 과거의 우리 어선 2척의 선체보험 가입을 중개한 사실을 실토하도록 유도했다. 호너 부사장은 연신 “shamed, sorry”를 연발해 우리를 안심시켰다. 결국 파인마치2호 전손의 보험금은 Van Camp 측으로부터 출어준비금으로 받은 비용(advance)으로 상계 처리하기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76년 봄, 파인마치 1호만 남게 되자 원양어업에 흥미를 잃은 조석행 사장이 회사 분할을 제의했다. 원래는 나와 조석행 사장이 상선, 이원영 전무가 냉동선이 각각 전문영역이었다. 그러니 보양수산을 분할한다면 파인 마치호를 이원영 전무에게 주고, 나와 조석행 사장이 상선인 용진호를 지분에 따라 공동운항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학교 선배이자 상사인 조석행 사장 입장에서는 후배와 동업을 하는 데 편치 않았던 것 같았다. 조석행 사장에게 내가 상당금액(1억원 상당)을 위탁한 돈이 있었는데, 이러저러한 기회에 이를 언급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조석행 사장은 내게 진 채무를 고려해 파인마치1호를 내게 주어 청산하고자 했다.


옆에서 이를 본 이원영 전무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 조 사장에게 거액을 떼이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게 이해할 수가 없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나중에 받지요”라고 어물쩡 넘어갔지만, 내게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태평양 출어의 좌절로 미국의 Van Camp와 도쿄의 오션 파이오니아 등의 거래처에도 피해를 주었고, 관리비와 운영경비 등으로 조 사장도 투자비를 썼으니 조 사장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1976년 4월, 파인마치 1호 1척으로 보양상운을 설립했고, 조석행 사장은 이원영 전무와 보양선박을 설립했다. 비록 회사는 분할했지만 조석행은 1988년까지 지분을 갖고 있었고, 지분정리를 완료한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양상운 설립
나는 제동산업 출신으로 보양수산 시절 영입한 천해식 이사, 송기성 과장 등으로 인력을 갖췄다. 당시 사하국민학교 23회 출신으로 사하초등학교 동창회 서울지회장으로 있던 김기환이 문장기업 이사로 근무 중인 인연으로 을지로 2가 문장기업 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그의 아들인 김인준을 영업담당으로 채용했다.
냉동선으로 재개조된 파인마치 1호 1척만으로는 회사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선박 확보에 나섰다. 일본 제일의 건착(巾着)선 선구자인 후쿠이치(福一)그룹의 제2 후쿠이치마루(福一丸 -350톤)의 어획 장비를 철거하고 운반선으로 개조해 수출하는 허가를 받았다. 후쿠이치(福一)어업이 제안한 선가는 5,000만엔이었다. 파인마치 1호의 전 선주인 오쿠야마(奧山保)의 도움으로 신토아교역(新東亞交易)의 노자와 히로시(野澤浩) 과장을 소개받았다. 선가 융자를 신청하니 선금으로 융자금의 30%인 1,500만엔을 선불로 납부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내가 보유한 현금은 900만엔 뿐이었다. 나는 닛신(日伸)해운을 그만두고 지인들과 해운중개업을 하던 와타나베 코이치(渡邊 鋼一)를 찾아가 “냉동운반선을 구입하는데 600만엔이 부족하니, 빌려달라”고 상의했다.


와타나베는 와세다대학 출신의 전형적인 장사꾼으로 아진해운의 일본대리점인 닛신해운의 직원으로 주로 닛신해운의 부정기선 용대선을 담당했다. 그의 부친은 가와사키조선소의 노조위원장이었는데, 완고한 공산주의자여서 와타나베는 연좌제로 인해 취업을 하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선원 생활을 한 뒤 용선중개를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내가 구루시마(來島)조선그룹, 진유(仁勇)해운, 게이호쿠(京北)해운, ORIX, 닛쇼이와이(日商岩井), 미츠이(三井)물산 등과 거래할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닛신해운을 그만두고 지인들과 선박중개업으로 새 출발한 이데(伊達) 사장과 상의한 와타나베는 ‘300만엔짜리 어음 2매를 3개월 시차를 두고 발행’해주기로 했다. 나는 첫 번째 300만엔짜리 어음을 갖고 고베로 가서 자형(姊兄-진태수)에게 현금화를 부탁했다. 자형은 큰조카를 시켜 거래하던 신용금고에 가서 현금대출을 받아 왔다. 선이자가 너무 싸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자형에게 물으니 자형은 “자신이 경영하는 싱유(親友)상회의 현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현금이 입금된 통장을 갖고 도쿄로 돌아와 와타나베를 찾아가 다시 300만엔짜리 2차 어음을 받아 다시 고베로 가서 대출을 받아 왔다. 이렇게 해서 1977년 매입한 냉동운반선 모노노크(MonoNok)호는 도쿄 미나토구(港區) 우찌사이와이쪼(內幸町)에 소재한 파나마 변호사(Mr. Marrengo)의 협조를 받아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는 데 드는 수수료를 내고 파나마 선적으로 등록했다. 파나마 페이퍼 컴퍼니는 노자와의 N, 오쿠야마의 O, 김옥정의 K의 첫글자를 따 NOK로 했다. 최종선가는 3,500만엔으로 결정되어 1,500만엔의 잉여금이 발생해 신토아(新東亞)교역에 수수료(add com.)로 100만엔, 노자와와 오쿠야마, 그리고 나의 숙박비, 여비, 접대 등으로 100만엔, 임영호 선장과 김두선 기관장 등의 선원비 및 선박 출항 준비비용으로 200만엔을 지출하고 고베에서 차입한 600만엔과 이자도 현금으로 상환하였다. 당초 3년 계획이던 선가 상환을 1년만에 조기 상환하고 이자율을 계산해 보니 연리 47%에 달하였다.


파인마치1호와 MonoNok 2척으로 냉동화물운송으로 좋은성과를 거두자 이후 매년 선박 1척씩 추가 도입했다. 1978년에는 한 해에 3척의 선박을 도입했다. 냉동운반선인 Curacao호는 자체 자금으로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닛신해운의 후쿠다 타다요시(福田忠吉)의 수배로 ㈜시바우라(芝浦)창고가 소유한 1,000톤급 Seed Leaf호를 소개받았다. 후쿠다는 닛신해운의 영업담당으로 동양시멘트 시절 일본측 총대리점으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시바우라창고 측은 선가로 7,000만엔을 희망했으나, 일본 내 냉동화물시장의 급락으로 5,000만엔에 매입했다. 씨드리프(Seed Leaf)호는 일본 최대의 수산회사인 니혼(日本)수산의 자회사인 닛스이(日水)선박에 항해용선계약을 주어 러시아 해역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수산대학의 출신들과 교류하게 되고, 그들을 통해 마루하(옛 大洋漁業)의 어로부와 선박부의 과부장급과 어울리면서 당시 최후의 어장인 베링해에 출어하는 트롤선과 냉동운반선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8년에 세 번째 구입한 선박은 마루베니상사의 중개를 통해 참치 빙장(氷藏)선박

인 Manok (Marubeni + Nok)호였다. Manok호는 부산사무소의 김세봉 과장에게 맡겨 호코쿠(報國)수산의 기술지도를 받아 괌 해역의 마리아나해에 출어했다. 이 해역에서는 홍치(bigeye)와 노란살다랑어(yellow f
in tu-na)를 연승조업으로 어획해 괌의 아가냐(Agana)항으로 운송해 양륙했다. 이곳에서 폴리비닐로 포장한 뒤 종이상자에 얼음과 함께 넣어 재포장하여 항공기로 일본으로 수송했다. 나리타공항에서 검사와 통관 등의 수속을 거쳐 다음날 츠키지(築地) 중앙어시장에서 다이또(大都)수산의 경매로 판매했다.
새벽 5시에 열리는 경매에 나는 마루베니상사의 수산과 담당자와 함께 입회하기도 했다. 북미 냉수대인 뉴펀들랜드산으로 일본인들이 ‘혼마구로’라 부르는 참다랑어(blue fin tuna)는 300-350kg에 달하는 거물이다. 이에 반해 노란살다랑어는 어체가 대개 15kg 내외다. 물표(物標)에는 ‘일본 어선의 어획물’이란 뜻으로 ‘내지산’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중매인들은 참다랑어의 외형, 지방분 함유 정도, 식감 등을 조사하여 kg당 1만 5,000엔을 호가하는 게 보통인데, 우리 어획물은 kg당 고작 1,500-1,800엔이었다.

 

삼호선박 설립
1970년대는 한국 선원 송출의 전성기였다. 나는 주로 냉동선 운항에 전문이어서 한국선원 송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하게 일본의 산신(三信)해운에 한국선원을 송출할 기회가 찾아왔다. 산신해운은 재일교포 3형제가 경영하는 부정기해운회사로, 맏형 정문형이 사장을 맡고 있었다. 오사카 한국주재영사관에서 근무 중이던 유성준을 한해대 동기생인 이한영이 내게 소개해주었는데, 영사관에 정 사장의 부친이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산신해운에서 선원비 절감 차원에서 원목선 3척에 한국 선원을 배승할 것을 검토 중이라는 정보를 유성준이 전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유성준, 이한영, 내가 공동으로 선원송출회사를 설립해 한국선원을 산신해운에 공급해주기로 했다.


이런 경과로 1977년 3월 15일 7 삼호(三湖)선박을 설립했는데, 사명은 공동설립자 3인의 ‘삼’과 큰아들 일‘호’의 호를 따 지은 것이다. 이한영과 유성준은 주주로만 참여하고 경영은 내게 일임하기로 했다. 선원 관리를 전담할 부산사무소장에는 당시 고려해운 부산사무소장을 하던 한해대 항해과 동기생인 권오석을 영입했다. 나는 선원 인선과 일반적인 운영까지 권오석 소장에게 일임하였는데, 하선자 빈발과 사고 등이 발생했다. 마침 삼신해운에서 3척 중 2척을 매각하게 되어 1척만 남게 되니 경영이 어렵게 되었다. 결국 설립 1년여만에 실비를 보상받는 가격에 경영권을 권오석에게 넘기고 말았다. 권오석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동기생으로 한국해기사협회 상무로 근무하다 해직된 이헌탁에게 넘겼는데, 그가 능력을 발휘해 삼호선박을 크게 일궜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인력 송출 사업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보양수산 시절 이원영 전무가 일본의 토쿠마루(德丸)해운에서 냉동선 선원 배승계약을 의뢰하고 싶다는 제의를 해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나는 “해기사의 인력이나 팔아먹는 장사는 안한다”고 단칼에 거절한 적이 있었다. 보양상운 시절에도 진유(仁勇)해운의 선원공급계약을 계기로 구루시마(來島)조선그룹과 인연을 맺게 되어 냉동선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했지만, 선원송출사업은 부진했다. 진유해운의 무라카미 아키라(村上 顯) 사장이 “선원구성이 나빠지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개선을 부탁했지만, 다라마린의 김대식 사장에게 충고만 하고 별다른 조치 없이 지나갔다. 그러니 김대식 사장도 선원관리에 전력하기보다는 진유해운의 감독들을 접대하는 데만 신경을 썼고, 무라카미 사장을 모시는 것은 흉내만 냈으니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물론 진유해운과 결별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원목선 사업의 부진에 따른 선가상환 압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를 믿고 맡긴 일을 소홀히 처리하여 낭패를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은 경우였다.

 

‘가나’호 냉동기 가스 유출 사고
1979년에 구입한 1,000톤급 가나(Khana)호는 급냉동선으로 미츠비시(三菱)상사에 용선되어 괌에서 어획한 참치를 선적해 게센누마(氣仙沼)항까지 운송했다. 가나호는 전 선명이 호요우(豊洋)호로, 영하 45도까지 급냉 설비를 갖춰 참치 조업의 모선으로 활용되었다. 미츠비시상사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멕시코의 엔세나다(Ensenada-일본간 횟감용 참지) 운송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나로서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 최신 냉동기 1기를 주문했다. 가나호가 게센누마 항에 입항해 양륙하는 중에 선내에 설치해 멕시코 출항시키기로 했다. 마츠시마(松島)의 북쪽 청정해역에 자리잡은 게센누마(氣仙沼) 항은 양식 멍게와 상어 심장 회로 유명한 곳이었다.


부산사무소의 서상수 공무차장이 현지에 출장을 가 냉동기를 설치하고 시운전을 실시했다. 어창 화물을 다 비우고 슬링(sling) 3-4개 분량이 남은 상태에서 급속 냉각이 진행되자 하역인부들이 슬링을 서둘러 잡아 올렸다. 그러자 어창 입구의 냉동 파이프 코일이 눌러져 파이프가 파열되고 암모니아 가스가 누출되었다. 나는 선교에 있었는데, 갑자기 백색 암모니아 가스가 올라오고, “하시고, 하시고(사다리)”하고 외치는 고성이 들려왔다. 곧 앰뷸런스가 도착해 구조된 인부 몇 명을 싣고 갔으나, 암모니아 가스를 피해 구석으로 피신한 인부 4명은 질식사했다. 나도 경황이 없어 숙소로 급히 와 도쿄의 대리점사인 닛신해운의 후쿠다(福田)에게 “보험회사에 알리고 현지로 와서 뒷처리를 하라”고 지시했다.


용선자가 미츠비시상사이고, 대리점이 니혼(日本)통운이어서 일본 제1급 회사들이라 조사차 나온 현경(縣警) 이케다(池田) 수사과장도 매우 신중하고 정중하게 행동해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밥을 같이 먹은 뒤 이케다 과장의 언동이 낮과 상이해져 마치 피의자 대하는 듯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 별별 상상으로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택시를 불러 역으로 가 도쿄로 이동했다. 도착 즉시 고베의 자형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니, 전국 일간지에 “우리 회사 이름과 내 사진까지 실렸다”고 얘기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하네다 공항으로 가 대한항공편으로 여의도공항으로 귀국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가스 프리(gas free) 후 선창 검사 결과 냉동기 교체 이전에 가스가 누설된 부분이 발견되어 선주인 나를 업무상 과실치사로 얽어매려던 시점에 내가 출국해 버린 것이다. 이후 일처리는 대리점 후쿠다와 니시키 변호사가 맡았다. 현지 경찰은 가나호를 압류하겠다고 압박해 들어왔지만, 검찰 출신 니시키 변호사가 “그러면, 우리는 abandon ship(선박 포기)으로 처리하겠다”고 대응했다. 그는 “이후 발생하는 모든 비용과 위험은 너희 몫이니 알아서 하라”고 했고, 결국 이케다 수사과장도 어쩌지는 못했다. 이 사고로 미츠비시상사가 제안한 멕시코 행 사업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가나호가 냉동기 추가 수리 차 시미즈(淸水)에 입항하자 현경(縣警)에서 수사관 6명을 파견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선박 출항 일정에 맞춰 철수했다. 후일 가나호 가스 유출 사고로 인한 사망 사고는 경시청에서 추가 수사하다가 단순 사고사로 종결되었다.


만약 가나호 사고가 없어서 예정대로 미츠비시상사와의 거래가 성사되었다면, 내가 베링해 출어 등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소붙이(構淵) 사장의 급냉운반선사 United Japan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단순 사고사로 종결되자 억울하다고 느낀 유족과 유지들이 모여 우리 회사의 사명을 따 호우요우(寶洋)수산을 센다이에 설립해 냉동창고업과 수산물 가공, 유통업으로 사업기반을 다졌다는 후문을 들었다. 나로서는 가스 유출 사고로 사망한 인부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지라 일본에 출장을 갈 때마다 신경이 쓰였었는데, 이 후문을 듣고 다소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에 창고와 가공시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가나호 사고 이후 나는 여권의 영문이름 Ock Jeong Kim을 Og Chong Gim으로 바꿔 사용해 오고 있다.

 

케미컬운송업 진출
1976년 보양상운을 설립할 때는 을지로에 사무실을 두었지만, 1978년에 강남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 직후 닛신해운의 파트너였던 후쿠다 타다요시(福田忠吉)와 시라토리 히로시(白鳥浩) 두 사람을 설득해 회사를 퇴직하고 내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둘은 대리점사인 닛뿌우(日朋)해운을 설립해 내 사업을 전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시라토리는 Dorval Tanker Partnership(대표 佐藤正)의 영업부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사실 후쿠다는 내가 닛신해운의 후지이 야요이(藤井弥生) 사장에게 추천해 입사시킨 노총각이었다. 소학교 교사와 결혼한 시라토리가 부인의 사촌여동생을 후쿠다에게 소개해 결혼시킨 사이니 두 사람은 사촌동서 사이였다.
도르발 탱커로 이직한 시라토리는 마침 99.99% 스테인리스 철강제 화물창을 갖춘 5,000톤급 화학제품운반선 ‘Golden Star’호를 매각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당시 한해대 12기 동기생인 이한영의 서울 한영고등학교 후배인 유성준 사장이 중개인으로 활약했다. 나는 업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유성준을 높이 평가해 고베의 ‘메리칸부두’(American 波止場)가 바라다보이는 모토마치(元町)시에 유성준 회사 내에 사무실을 내어 산신(三信)해운과 삼호선박 간의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 사무실에 막내 생질인 오오하라 마모루(大原守)를 입사시켜 견습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주선으로 Orix Corporation Finance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아 1980년 골든 스타호를 인수해 ‘골든연 Golden Yon’호로 개명했다. 이 선박금융을 성사시킨 유성준이 커미션으로 선가의 2.5%을 요구해 난감했다. 정상적인 회사 계좌로 지급하는 게 아니고 개인 계좌로 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할 수 없이 2%에 해당하는 1,000만엔을 3회에 걸쳐 지급했다. 선박은 ‘골든연’호로 개명하고, 선가를 상환해야 할 기간에 맞춰 도르발탱커에 재용선 주었다. 그러나 용선기간 5년 동안 화학제품 운송시장이 부진해 용선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일이 발생해 사토 사장과 관계가 틀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시장이 곧 회복되었고, 용선기간이 종료되자 도르발탱커 측에서 용선계약을 연장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선가상환도 종료되었고, 화학제품운반선 시황이 사상 최고치일 때인 1987년에 반선을 요청해 ‘골든연’호를 매각해 약 500만달러의 매매 수익을 올렸다.


Orix 본사가 당시 도쿄 제1고층빌딩이었던 일본무역회관으로 이전하고 미야우치(宮內)사장의 대학동기인 하시모토에츠오(橋本悅男)과장과 친교를 맺게 되어 오릭스의 금융 주선으로 냉동선을 계속 신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시모토(橋本)는 후일 오릭스의 선박과 건설업 담당 부회장까지 승진했다. 그는 진유해운 측에서 야쿠자를 동원해 나를 제압해 선박을 반환받으려 했다는 내 얘기를 듣고 “일본인으로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어 나를 위로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오릭스의 사내 회의 중 미야우치(宮內) 사장이 “하시모토군, 한국에는 보양 밖에 회사가 없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한전이나 유공 등 많이 있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보양의 김 사장이 가락국 72대 손이니 우리가 힘을 보태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일본 왕실이 가락국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한 말이기도 했으나, 신용도가 높은 다이요(大洋)어업이나 니혼수산과 같은 기업에게는 감히 내밀지 못하는 “고리로 대출을 하려면 보양이 제일 만만하지요!”가 본심이었을 것이다.


원래 Orix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시장 상인들에게 대부업과 2배에 가까운 일수놀이를 하던 소금융업자였던 것을 미츠비시상사 계열의 산와(三和)은행이 투자해 투자금융은행으로 발전시킨 회사다. 출발이 대부업으로 출발한 만큼 오릭스는 일반시중은행이 주저하는 ‘고위험, 고수익’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해 겨울 오릭스의 하시모토(橋本) 상무와 이토(伊藤) 부장, 우리 측의 나와 김인준 부장 등 4명이 도쿄 신주쿠에서 송년회를 가졌다. 게 요리에 산토리 위스키로 시작된 모임에서 대취해 2층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롯뽄기(六本木) 경찰서 유치장 안이었다. 어리둥절해 주위를 살펴보니 하얀 와이셔츠, 넥타이와 허리띠도 없었다. 이를 본 경찰관이 ‘정신이 나요?’라며 냉수를 주고, 허리띠와 넥타이, 토설물이 뭍은 와이셔츠를 내주었다. 주섬주섬 옷을 차려 입고, 여권과 지갑을 살피니 그대로 있어 안심하고, 1만엔을 지갑에서 빼 경찰관에 건네니 불법이라며 받지 않았다. 이틀 후에 경찰관이 갈아 입혀준 와이셔츠를 세탁해 케이크 한 상자와 함께 건네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날 하시모토 상무가 ‘우리 회사의 큰 고객이 그렇게 추태를 부리면 되겠느냐?’고 나를 엄중하게 힐난했고, 김 부장에게는 “사장을 수행하는 자가 정신 없이 굴면 되겠느냐?”면서 훈육을 했다. 그날 저녁 모임을 마치고, 모두 택시를 타고 헤어졌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시나가와(品川) 레지던트 호텔을 목적지로 얘기한다는 것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기사가 경찰서에 넘겼다는 것이다. 그 뒤 와타나베 코이치(渡邊鋼一)가 우리 측 대리인으로 행사하게 되어 후쿠다 타다요시(福田忠吉)와 유성준 사장과의 관계는 뜸해졌다.

 

동기생 박종무
한해대 12기 동기생 중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낸 동기는 박종무였다. 그는 국토건설추진요원 임용 시험에도 같이 합격했고, 그 뒤 해양경찰대로 파견되었을 때도 함께 했다. 내가 수산개발공사 선원계장으로 일할 때는 참치연승어선의 항해사로 그를 승선시켰다. 그는 어선을 하선한 뒤 상선에서 승선생활을 한 뒤 현대건설 해운부에서 일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1975년 현대미포조선을 건설한 뒤, 냉동선 운송업 진출에 대한 검토를 박종무에게 지시했다. 그는 냉동선이라면 내가 하는 업종이라 내게 피해가 갈 것이라 생각해 ‘희망이 없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런 박종무가 현대건설 해운부를 사직하고, 다시 승선하고 싶다는 의향을 피력했다. 마침 도르발 탱커의 사토 사장이 도쿄–싱가포르–시드니–휴스턴 간을 운항하는 선박의 선대감독을 구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박종무가 이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해 권하니 “해외 근무도 좋다”기에 사토 사장에게 추천했다. 사토 사장에게 “반년간 임시 채용후 최종 채용 여부를 결정하되, 반년간의 급여 중 절반은 보양에서 지급하자”고 제안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박종무는 가족과 함께 휴스턴에 정착해 도르발 탱커의 선대감독으로 일했다. 3개월의 임시 채용기간이 경과할 즈음 사토 사장이 “이후 급여 절반 부담 불필요”라고 말해 박종무가 정식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나로서는 이를 기회로 사토 사장과 협력해 화학제품운반선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토 사장이 무리하게 선복을 확장했으나, 시황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해 결국 도르발 탱커는 부실기업이 되었고, 시라토리도 당뇨병으로 실명에 이르러 퇴직하게 되니 사업상의 진전이 없었다. 박종무는 휴스턴에 주재하며 79세에 퇴직할 때까지 도르발 탱커에서 일했다. 그와는 대학시절부터 인생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2019년 급환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지 못한 게 지금도 애석한 심정이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