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산업개발로 이직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마침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행되면서 각종 전력, 유류, 시멘트, 비료 등의 수요가 폭증해 이에 대한 공장 신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1966년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즈음 삼척의 시멘트공장 생산량 증설을 앞둔 동양시멘트공업에서 해상수송을 활성화하기 위해 자회사인 동양산업개발에서 해운부문 과장급 간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동양시멘트는 삼척공장의 생산량을 60만톤 증설해 연간 100만톤의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게 생산시설을 확장하고 있었다(1967년 4월 준공). 채용은 서류전형과 면접시험만으로 이루어졌는데, 1966년 12월 경 서류전형에 합격해 면접시험을 치렀다.
면접관은 이양구 회장과 장수호 사장 등이었다. 당시 육사 8기생으로 수산개발공사 이한림 사장 비서실장을 역임한 바 있는 임영덕이 총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은근히 나를 지원해 주었다. 이양구 회장은 “과장 요원을 모집했지만, 미스터 김은 아직 경력이 짧으니 경험을 좀 더 쌓으면 어때요”라고 묻는다. 나는 “잘 보아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면접관들이 살짝미소를 띤다. 속으로 ‘글렀구나’ 생각하며 나오려는데, 임 부장이 ‘좀 기다려 봐요’라며 이상희 감사실장에게 안내한다. 이 감사실장은 “당신 앞길이 창창한 데 뭘 그 정도를 못 참아. 한번 해봐요”라고 권한다. 글렀다고 생각하던 참에 다정스러운 권유에 ‘예’라고 수락했다. 이상희 감사실장은 이양구 사장의 부인인 이관희 여사의 친오빠로, 회계전문가로서 동양시멘트의 2인자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동양시멘트는 1942년 오노다(小野田)세멘트로 준공되어 해방 후 정부 귀속업체로 상공부가 직할 운영하였다. 6·25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삼척공장을 UNKRA 지원으로 일부 보수하여 1956년 1월에 삼척세멘트주식회사로 강직순에게 불하되었으나 1956년 12월에 동양제당주식회사로 재매각되어 동양세멘트주식회사로 개칭되었다. 1957년 6월 이양구가 인수하였다.
동양산업개발은 동양시멘트가 시멘트의 수송과 판매, 광업을위해 전액 출자해 1960년에 설립한 자회사였다. 동양산업개발에서는 이양구 회장, 장수호 사장, 한기훈 전무, 성낙필 상무 등이 개인사무실을 갖고 있었고, 그 아래 부장, 과장, 계장, 직원 순으로 출입구 쪽으로 함영걸 책상을 배치했다. 수송부장에는 송 아무개, 과장은 공석, 김인태 육운계장을 맡고 있었고, 내가 해운계장이었다. 부산사무소에는 해대 7기생인 함영걸 선배가 소장으로 있었고, 그 아래 선박해무 담당으로 해대 8기 이완기 감독과 역시 해대 8기생인 김은국 공무감독, 그리고 총무과장 1명이 있었다. 동양시멘트 삼척공장에 해대 기관과 10기생인 전영수 선배가 생산과장으로 있는 등 여러 명의 동문이 근무하고 있어서 업무협조가 잘 이루어졌다.


경제개발 초창기라 이른바 삼분(三粉) 폭리라 하여 설탕, 소맥분, 시멘트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삼척공장에서 리어카로 수십포의 시멘트를 구입하려면 출하과에 점심값, 트럭으로 출하할 때는 과장이나 부장에게 돈봉투를 건네야 했다. 제품이 부족하니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는 격으로 생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었다. 따라서 각지의 판매 대리점들은 1구좌에 100만원의 보증금을 예치시켜야 했다. 당시 내 월급이 6만원 내외였으니, 100만원이면 1억원에 상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철도수송은 기관차의 견인능력이 제한되고 영동의 똬리굴을 통과하는 능력에 따라 차이가 컸다. 따라서 김인태 육운계장이 노상 영주 철도국에 상주해야 했고, 해상수송은 흥아해운 윤종근 사장이 대리점 5구좌를 보유하여 소형 소유선과 용선으로 전담해 왔다. 흥아해운이 시멘트를 비롯해, 석고(石膏), 철공(Iron balls), 벙커C유 등 상당량을 운송했다.


따라서 동양시멘트는 자체 선박으로 시멘트와 원료 운송을 위해 1966년 6월부터 1967년 3월까지 500톤급 선박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삼척항 축항을 건설하였다. 동양시멘트는 1967년 4월 24일 축항 준공식과 동시에 시멘트운반선 제71, 72, 73, 75 칠성호 등 4척의 취항식을 거행하였다. 동양시멘트는 1967년 4월에 준공된 삼척공장 제3차 증설로 연간 100만톤의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68년도 수송량을 보면, 철도 수송이 47만톤이었으니, 수송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1차 선박도입이 추진되었는데, 1966년 일본 오오사카에서 매매 및 차관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 3월 28일에 선박 4척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이 4척의 선박으로 연간 16만 2,000톤의 시멘트를 수송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27만톤의 시멘트 수송대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제1차 도입선 4척은 동양시멘트 소유선이지만, 운항은 동양산업개발이 담당하게 되었고, 내가 그 운항업무를 전담하였던 것이다. 제71, 72, 73, 75 칠성호는 1,000총톤급으로 삼척에서 부산, 여수, 목포 등지로 시멘트를 실어 날랐다. 그 뒤 동양 1, 2, 3호를 추가로 도입했는데, 동양 1, 2호는 2,000총톤급 살물선이었고, 동양 3호는 탱커였다. 내가 입사하고 1년여가 경과해 1968년 모기업인 동양시멘트에서 경영합리화를 위해 동양산업개발을 흡수 합병하였다.


취항식이 있었던 1967년 4월, 한가한 어촌인 묵호항에 칠성호가 입항하니 주민들이 몰려들고, 회사의 간부들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운담당계장인 나는 칠성호 접안시 선박에 동승하고 있었는데, 선장과 항해사들, 선원들의 우왕좌왕하는 꼴이 영 마음에 안들어 선교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상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를 듣고 있던 일부 사람은 ‘저런 얌전한 친구가 깡패로 변하네’라는 측도 있었고, 일부는 ‘뱃사람이라 그렇지’라는 반응도 있었다.


제3차 증설공사 증설 완공과 더불어 칠성호 4척은 모두 1,000총톤 미만의 소형선으로 삼척-부산간을 월 3.5항차 하는 데 그쳤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24시간 단위로 쪼개 선박을 관리하다보니 퇴직 직전인 1971년 말에는 항차를 거뜬히 소화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해송능력은 20만톤에 불과했기 때문에 외부선박을 용선했다. 그런데 제1, 2 동양호는 2,000총톤 급살물선이어서 삼척항의 준설이 원활하게 진척되지 않아 결국 선저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선체보험은 대한화재보험에 가입해 사후처리는 문제없었으나 향후에도 계속 삼척항을 모항으로 운항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정기선 영업에 눈 뜨다
이즈음 나는 해운과장으로 승진해 있었기 때문에 선박운항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어차피 삼척항을 모항으로 운항할수 없었기 때문에 위탁 운항하기로 했다. 당시 고려해운 도쿄지사장으로 다년간 해운영업을 해왔던 해양대 항해과 9기인 김윤희가 뉴코리아해운을 설립했다. 나는 제1, 2 동양호를 뉴코리아해운에 위탁 운항하기로 하고, 한일 부정기항로에 배선했다.
처음에는 뉴코리아해운이 화물수배와 운항을 전담했으나, 차츰 내가 화물수배와 운항을 전담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해운계에서 태영상선의 최계순(한국해대 항해과 9기)을 부정기 영업의 귀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동양 1, 2호의 영업과 운항을 하면서 상당 수준의 부정기영업력을 쌓게 되었다.
1970년 7월 준공을 목적으로 대성목재가 인천 월미도에 제2합판공장을 건설 중이었다. 이 공사에 사용할 기계 등 7,000톤을 일본의 이토추상사로부터 수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겁도 없이 이 운송계약을 내 명의로 따냈다. 운임은 6만달러로 선박만 확보하면 운임의 10%인 6,000달러가 내 몫이 된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풍전(豊殿)상사 소속선 1만톤급 풍전호가 곧 용선계약이 만료되어 일본에서 반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풍전호가 반선되면 내가 수송계약을 따낸 대성목재의 기계를 선적하기를 획책하고 있었다. 풍전상사의 이춘석 회장의 장남 이다몽 사장과 해운부의 김연환(해양대 항해과 11기) 부장과 함께 청와대 근처의 이 사장댁에서 마작도 하고, 요정에서 밤을 새며 술을 마시면서 구두로 용선계약을 약속받았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는 선박의 항로별로 운항면허가 발급되었는데, 풍전호는 항해구역이 원양이었다. 이것을 근해로 바꾸어야 한일항로에 취항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해무청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 당시 외항국장 댁을 방문해 서류 심사만으로 항해구역 변경을 하기로 승인받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동양시멘트의 일본 총대리점인 닛신(日伸)해운의 후지이(藤井) 사장과 후쿠다(福田)과장에게 용선계약 건을 알리고 화물선적및 선박 입출항에 관한 준비를 해주도록 지시했다.
풍전호는 대량화물 위주로 선적했던 배라 선장과 1항사는 일반잡화의 선적계획(stowage plan)을 짤 능력이 없어 나랑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짜내야 했다. 게다가 이토츠상사의 플랜트 수출 준비도 여의치 않아 풍전호 출항일에 맞추어 모든 화물이 집화되지 않았다. 결국 남은 화물은 영양(英洋)해운의 영양1호에 분할 선적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천의 하역업자들의 하역도 미숙해 일부 화물에 손상이 발생했다. 공장 건설에 사용할 기계에 손상이 발생했으니 화물보험을 활용해 기계를 재발주하니 대성목재 제2합판공장 건설 공정이 반년이나 지연되는 사태로 비화되어 이를 해결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당초 풍전호 1척으로 7,000톤의 플랜트를 수송하기로 계약했다. 당시 해운업계의 관행으로 운임의 40%를 할인해 57만달러에 덤핑운송계약을 하고, 조흥은행의 지불보증의 3개월치 어음으로 운임을 수령해 풍전상사의 경리과에 입금했다. 화주에게 주는 리베이트를 포함해 집화 수수료 명목으로 1만 7,000달러에 해당하는 500만원을 풍전상사로부터 3개월치 후불어음으로 받아 내가 보관했다. 문제는 풍전호 1척으로 운송할 물량을 영양1호에 나눠 운송했으니, 대성목재로부터 받은 운임 중에서 정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양해운의 이현택 사장이 ‘서툴게 하면 재미없다’고 불만을 드러냈지만, 다행히 양측의 양보로 수령한 운임을 비율에 따라 나눠 정산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통상 화주와 선주들에게 리베이트를 지급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1척에 운송할 물량을 2척에 나눠 운송하다보니 대성목재, 풍전상사, 영양해운 모두 리베이트 얘기를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지만, 내가 보관 중이던 리베이트는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이 돈으로 양재동 말죽거리 포이동에 땅 200평을 어머니 명의로 구입하였는데, 쉽게 들어온 돈은 탈이 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토지 취득을 신고하려는 데 담당공무원이 어머니께 자금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하여 결국 내가 증여한 것으로 해 48만원의 증여세를 납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200평이나 되는 땅을 놀릴 수 없어 윤활유 원료로 사용되는 피마자를 심었다. 주말마다 어린 일호와 일해를 앞세우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왕복하며 피마자를 키웠다. 하루는 귀가하는 길에 홍제동 정류장에서 정차해 일해를 먼저 내려놓고 일호와 내리려는 데 버스가 갑자기 출발해 버린 것이다. 깜짝 놀라 버스를 세워 일호와 내리니 일해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아이를 잃은 게 아닌가 당황해 하고 있는데 마침 일해 가 눈물을 훔치며 앞에서 걸어오는 게 아닌가. 그 뒤부터는 아이들과 말죽거리에 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도 하락하고, 회사 자금사정이 어려워져 결국 처분해 회사 경비로 지출해 버렸다.

 

탱커 운항을 배우다
제3 동양호는 2,000톤급 탱커로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소에서 삼척공장에 벙커C유를 수송할 목적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삼척항의 수심과 저유탱크의 용량 제한으로 1,300톤 정도만 선적해 월 3회 정도만 운항하면 더 이상 운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방치할 수 없어 급히 대한석유공사를 방문해 수송주임인 이영식을 만났다. 이영식 수송주임은 공군 소령으로 제대하고 1969년 종로경찰서장을 맡을 정도로 이른바 주체세력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이영식 수송주임에게 ‘우리 배 한 번만 배선해 달라. 출세시켜 준다’고 부탁했다.
일단 1항해를 배선하기로 하고 석유(petroleum) 200만리터를 선적하고 운임으로 150만원을 현금으로 수령하였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담당 정상무와 상의하여 일단 결제선 5명에게 각각 5만원씩 주는 것으로 했다. 그래서 1만원권 정액수표 5장씩을 넣은 봉투 5개를 만들어 대한석유공사의 이 주임, 윤 계장, 임 과장, 서 부장, 이 이사에게 건넸다. 그런데 다음날 이 주임이 다급한 목소리로 ‘김형, 빨리 들어와 봐요’라고 호출하는 것이었다. 


급히 대한석유공사 사무실로 가 이 주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났어요?’라고 물으니, 이 주임이 ‘큰 일 났어요. 인도양에 사이클론이 발생해 수급에 문제가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관리하는 제3동양호의 추가 배선을 요청하는 셈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단 조정해 보십시다’라고 뜸을 들였지만, 결국 월 3회 배선, 월 4회 배선으로 늘여가다가, 마침내 월 5회 배선까지 배선하게 되었다. 물론 배선할 때마다 운임이 지불되면 나는 계열사인 동양제과의 선물용 과자와 돈봉투를 마련해 담당자들에게 사례를 했다. 제3동양호는 당초 3년 반만에 선가를 상환할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대한석유공사의 연속 배선으로 인해 1년 반만에 상환했다.


외항선의 용선계약시는 으레 리베이트를 주는 것이 관례인데, 태영상선의 최계순은 용선계약이 성약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회사 수표를 끊어 선불로 리베이트를 주었다. 그러니 군소 화주와 수입 담당자들이 태영상선의 최 부장과 안심하고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것을 따라 회사 수표를 끊어 리베이트를 주려고 시도한 바 있는데, 결제선 5명의 간인이 찍혀 있는 것을 보고, 받는 쪽이 ‘김 형! 나중에 줘요’라며 받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결국 내 통장에 넣었다가 현금을 찾아 리베이트를 지출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회삿돈을 개인 통장에 입금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였다. 당시 동양시멘트 해운부에서는 ‘꿩 잡는 게 매’라고 성과가 있으면 수용되던 시절이었다.
동양시멘트는 큰 회사여서 재주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개발붐이 이어지면서 부동산에 먼저 눈을 뜬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당첨률 10% 밖에 안되는 화곡동 주택단지의 상가 분양 추첨에 응모해 당첨되는 행운이 따랐다. 
1970년 6월에는 갈현동 산부인과에서 일연이가 태어났는데, 두 아들만 키우다가 아이가 태어난지라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동양시멘트의 부산사무소의 함영걸 소장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이제는 됐다’라면서 정관수술을 했다고 자랑을 하며 내게도 권하는 것이었다. 나도 아이 셋이면 됐다고 생각하고 그가 권한 장충동의 한 비뇨기과에서 정관수술을 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