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파스를 오랫동안 열지 못하다 보니 콤파스가 없어졌나 궁금해한다. 이젠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코로나 변이가 계속 나와 재확산하거니와 무더운 휴가철 7, 8월을 지나 가을에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더 많다. 여러 가지를 검토하여 9월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아울러 다양한 의견과 토론 활성화를 위해 콤파스 문을 개방하며 새로운 회원들의 적극 참여를 기다린다.
영국 취재기 ‘영국을 읽다’를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 장정훈은 영국 본머스대학에서 미디어학을 공부한 연출과 촬영감독을 겸한 독립피디로 런던에 거주하며 유럽을 무대로 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영국 외신기자협회와 카메라맨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기록이 습관이자 생업이라는 장 피디가 영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이 책에 자세히 소개하여 영국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폐허의 미학 본머스의 코프캐슬
본머스는 영국 남부의 해안도시다. 깨끗한 휴양도시이자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대학교들과 많은 어학교가 있어 젊은이들의 활기도 느낄 수 있다. 본머스 주변에 볼만한 장소가 많지만, 코프캐슬(Corfe Castle)이 인상적이다. 이곳에 가려면 샌드뱅크만 나루터에서 페리를 타고 스와니지에 내린 후 버스를 타고 30분쯤 들어가면 언덕 위에 성이 보인다. 코프캐슬이다. 작은 돌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인데, 성뿐 아니라 마을도 그냥 코프캐슬이라 부른다. 성은 마을 끝 지점에 계곡처럼 푹 꺼졌다가 봉긋 솟은 언덕 위에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언덕이나 산처럼 높은 지점에 성을 쌓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강을 건너는 나루터나 왕래가 잦은 길목에 지었다. 따라서 코프캐슬은 전형적이면서도 특이한 성이다. 코프캐슬은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였으나, 그것을 찰스 1세의 법무상이던 존 뱅크스의 아내 메리 뱅크스가 사들여 사용하고 있었다. 영국은 한때 국가 통치권을 놓고 의회파와 왕정파가 갈라져 시민전쟁이라는 긴 내전을 치렀다. 메리의 남편 존은 찰스 1세와 함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 나갔고, 그녀가 남아 코프캐슬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 의회군이 밀어닥쳤다. 코프캐슬을 포위한 의회군이 600명인데 비해 메리와 함께 그곳을 지키는 병사는 고작 5명이었다. 의회군은 메리에게 순순히 항복할 것을 통보했으나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고, 의회군은 수시로 공격했다. 그때마다 메리와 하녀 그리고 가병들은 돌과 뜨겁게 달군 석탄을 의회군 머리에 쏟아부으며 6주를 버티자, 의회군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그로부터 2년후 잉글랜드 남부는 모두 의회군의 손에 들어갔고, 마지막 남은 코프캐슬도 허무하게 넘어갔다. 메리의 가병 중의 하나가 몰래 성문을 빠져나가 항복하고 의회군을 끌어드렸기 때문이다.

 

시민전쟁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집중하여 철권통치를 감행했다. 권불십년이라 정권을 잡은 지 9년만에 독재자 크롬웰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왕정보다 더한 독재의 쓴맛을 본 영국인들은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선왕의 아들 찰스 2세에게 돌아와 영국을 다스려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영국은 군주제로 복귀했다. 영국에선 허물어진 성과 사원을 흔히 볼 수 있다. 전쟁 통에 부서진 곳도 있지만 시민전쟁 이후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의회군이 반대파가 이를 저항의 근거지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철거명령을 내렸거나, 주인이 떠나고 쫓겨나 방치되어 허물어진 경우가 많다. 코프캐슬 역시 심하게 허물어진 성이다. 의회로부터 파괴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이 워낙 튼튼하여 의회군이 화약까지 동원했으나 성을 완전히 부서뜨릴 수 없었다. 그후 마지막 성주 메리가 찰스 2세의 왕정복귀로 성을 되찾았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 상속을 받은 메리 부인의 후손들은 코프캐슬뿐 아니라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자선단체 트러스트에 기부하여 보존되고 있다. 코프캐슬처럼 허물어진 성과 윈저캐슬같이 복원된 성이 주는 느낌은 매우 다르다. 폐허가 주는 감동이 훨씬 크다. 고즈넉한 폐허 속에 훨씬 밀도 높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를 폐허의 미학(cult of ruin)이라고 하는데, 바로 코프캐슬이야말로 폐허의 미학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상처와 파손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극적인 사연과 생생한 역사를 상상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복원은 거짓말이라며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기에 복원된 건축물은 가짜다. 복원보다는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잉글랜드와 시티 오브 런던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을 이끄는 더 시티는 런던 한복판에 있다. 더 시티의 정식 명칭은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으로 런던 속에 있으나 엄연히 독립된 도시다. 붉은 검 깃발을 든 용이 그려진 독자적인 국기, 독립된 경찰, 독립된 세금과 시장을 가지고 있다. 상황에 따라 영국 국회의 의결사항을 따르지 않아도 되며,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여왕도 시티 오브 런던 시장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이 가능할 정도다. 런던이라는 이름은 런더니움에서 유래했다. 서기 43년 로마 황제의 명으로 4만명의 병사가 영국을 침략했을 때, 로마군은 시티 오브 런던에 본부를 두고 영국 정복의 교두보로 삼았고, 로마인들은 그곳을 런더니움이라고 불렀다. 로마 군대는 런더니움에 장벽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상업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본국의 정세가 내분과 게르만족의 도발로 불안정해지자 모든 걸 남겨두고 철수했다. 영국에는 로마가 철수하기 전까지 잉글랜드라는 이름은 없었고, 브리타니아 또는 브리튼이라고 불렀다. 막강한 로마도 본국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400년간 브리튼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스코틀랜드는 어쩌지 못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 픽트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전쟁에 능해 로마군을 압도했다. 툭하면 브리튼으로 내려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다. 픽트족에 막힌 로마는 더는 북진을 포기하고 브리튼 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헤이드리안 방벽을 세웠다. 이는 픽트족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로마제국의 북방한계선이었다. 로마가 떠나자 픽트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켈트족을 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고, 서쪽에선 아일랜드가 침략했다. 다급해진 켈트족은 바다 건너 지금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에 살고 있던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에게 도움을 청하자, 세 민족은 한걸음에 브리튼으로 달려왔다.

 

사실 그들은 호시탐탐 브리튼을 빼앗을 궁리를 하던 민족들이라 쾌재를 불렀다. 브리타니아 총독 막시무스는 로마로 철수하기 전에 심복 보티게른에게 브리튼을 맡기고 훗날을 기약했다. 아직 기반이 허약한 보티게른은 북방의 픽트족이 침범하자 성급하게도 앵글로 색슨족을 불러들였고, 무기를 감추고 있던 앵글로 색슨이 함께 회의하던 브리튼 귀족들을 죽이고 보티게른을 협박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그 땅에 각자의 왕국을 세웠다. 총 7개로 노섬브리아, 머시아, 동 앵글리아는 앵글족이, 웨섹스, 서섹스, 에섹스는 색슨족이, 켄트는 주트족이 지배했으며, 켈트족은 서쪽 구석 웨일스로 밀려났다. 그리고 브리튼의 7개 왕국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앵글로족의 이름을 따 앵글라랜드라고 불리다가 10세기에 왕국이 하나로 통일되며 잉글랜드로 불리게 되었다. 7개 왕국은 켈트족과의 전쟁에선 서로 힘을 합쳤으나 켈트족이 웨일스로 밀려나자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였다. 그런 혼란을 틈타 동쪽 해안으로 바이킹이 침공하여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던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자 앵글로 색슨 왕국들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바이킹을 몰아냈다. 927년 웨섹스의 왕 애틀스탄이 바이킹의 마지막 보루 요크를 함락하면서 브리튼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됐고, 자신은 통일 잉글랜드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일곱 왕국시대를 거쳐 통일 잉글랜드까지 어지러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런더니움은 번성했다.

 

그러던 중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700척의 배와 1만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건너와 영국을 침략하여 영국 남부 해안도시 헤이스팅스에서 잉글랜드왕 헤럴드 2세와 맞붙었다. 헤럴드는 초반엔 선전했으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는 결국 앵글로 색슨 왕조의 종말이자 노르만 왕조의 시작을 의미했다. 윌리엄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잉글랜드 전역을 접수하고 런던 장벽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로마가 축조한 런던 성벽은 매우 견고하고 해자도 깊었으며 방어가 쉽도록 높은 탑이 세워진 요새였다. 윌리엄은 자신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면 성의 자치권과 재산권을 모두 보장해 주겠다며 협상을 제시했고, 런던이 이를 받아들였다. 여러 세기를 지나며 로마가 건설한 런더니움은 런던이라는 이름을 거쳐 시티 오브 런던 약칭 더 시티로 불렸고, 장벽 밖의 지역은 그냥 런던으로 불리게 됐다. 런던이 시티 오브 런던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오늘날 금융 중심지 더 시티는 거대한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고풍스런 건물과 초현대적인 건물이 혼합된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분리독립의 꿈, 스코틀랜드
2014년 9월 18일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과연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300년 동거를 끝내고 완전한 독립국가로 탄생할 것인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었다. 독립 찬반투표의 질문은 간단했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원하십니까? 예(독립), 아니오(잔류)’로 답하시오” 520만명의 스코틀랜드 인구 중 16세 이상이면 누구나 투표권이 주어졌고, 과반수를 얻는 쪽으로 결정되도록 하였다. 영국으로선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는 순간 국력이 약화하여 국토의 1/3, 천연자원의 95%를 잃게 되고 국가부채를 갚아가는 부담도 커질 것이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을 달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했다. 독립을 선택하는 순간, 스코틀랜드는 영국에 230억파운드의 채무를 즉시 상환해야 하고, 북해 유전의 생산시설을 해체하여 투자비용이 바로 회수되며, 파운드화 사용을 불허하며, EU 가입도 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수립 비용이 최소 15억파운드가 들고, 파운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스코틀랜드 국민의 재산가치가 대폭 떨어지며, 북해유전의 가치가 반 토막 나고, 경제가 불안정해지고 외교도 힘들어져 돈을 빌리기 힘들고, 국경이 생겨 사람과 물자 교류가 불편하며, 관광산업도 위축될 것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그러고는 스코틀랜드는 이미 국가 예산의 60%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소득세율도 스코틀랜드가 마음대로 결정하며, 스코틀랜드 내의 도로, 철도 등 인프라 수축에 필요한 예산 22억 파운드도 지원하겠다며 구슬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주도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국민당 SNP는 이렇게 반박했다.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1조 2,000억파운드의 영국 국가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북해엔 아직 1조 5,000억파운드 가치의 석유와 가스가 남아있으며, 핵무기 도입과 영국 웨스트민스터와 정치하는 비용이 없어져 매년 6,000억파운드가 절감되며, 항공관세를 50%까지 줄여 수출과 관광을 활성화하여 2030년까지 OECD 상위 5개국 수준의 경제규모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독립에 찬성하는 사람의 숫자가 점차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예측하기 쉽지 않다. 한편, 스코틀랜드 안에 있으나 독립은 원치 않는다는 지역들도 있다. 셔틀랜드와 오크니, 웨스턴 아일 같은 지역 주민들은 투표결과에 상관없이 영국에 남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자신들은 스코틀랜드와 민족이 다른 노르웨이에서 온 후손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SNP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임시 헌법을 상정 발표했다.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뜻이다.


스코틀랜드 입장으로는 민족적 뿌리가 다른 나라가 한집 살림을 하는 것도 불편한데, 경제적인 주도권마저 잉글랜드가 쥐고 흔드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독립 생각이 간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의 길이 험난해 스코틀랜드 독립 찬반투표까지만도 300년이나 걸렸다. 지금까지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97년 스코틀랜드 민심을 의식한 노동당 토니 블레어 정권이 스코틀랜드에 제한적이나마 자치권을 선물하여 수도 에든버러에서 의회를 개회한 것이고, 둘째는 2012년 집권에 성공한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 투표 요구에 동의한 것이다. 더욱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지구촌 곳곳에 나비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도 독립찬반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고, 이어 북아일랜드와 웨일스도 뒤따를 가능성이 크며, 스페인의 바스크와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도 완전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300년을 함께 살아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과연 결별을 선언할지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날씨, 공원, 음식 그리고 편견
영국인들은 만나면 거의 날씨 이야기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식사의 시작이 스타터(애피타이저)라고 한다면, 대화의 시작은 날씨다. 날씨만큼 가볍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즉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도 없으므로 자연스러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나쁘기로 유명하다. 잦은 비와 안개로 인해 어둡고 축축한 겨울 날씨 탓이지만, 비와 안개가 강조된 영화와 추리소설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가 금세 그치고 햇빛이 환하게 비추어 건물과 언덕 너머로 무지개 그것도 선명한 쌍무지개가 떠오르고,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는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를 즐길 수 있다. 출근길에 노랗게 올라온 수선화와 이웃집 앞마당에 하얀 사과꽃 봉오리가 보일 즈음부터 담장의 덩굴장미를 거쳐 붉은 단풍잎이 하나둘 길바닥에 드러누울 때까지다. 사람들은 영국의 겨울을 생각하며 날씨가 나쁜 나라로 단정하기 쉬우나 영국은 사람이 살기에 최적화한 기온과 햇볕을 간직한 나라다. 영국인들은 이런 기후에서 살아왔기에 세계 어디서든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공원이다. 영국에는 산이 거의 없고 평지와 언덕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물론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엔 산을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리 높지 않다. 영국엔 산이 없는 대신 공원이 많다. 영국에 살면서 좋은 점을 들라고 하면 대부분 공원을 꼽을 것이다. 런던에만 3,000개, 전국적으로는 2만 7,000개에 달하는데,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은 하이드 파크와 그 옆에 있는 켄싱턴 가든 그리고 런던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프라임 로즈 힐과 주변의 리전트 파크, 버킹엄 궁 앞 그린 파크와 세인트 제임스 파크다. 헨리 8세가 사냥터로 사용하던 하이드 파크는 대중에게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왕실 소유이며, 정치 집회와 대규모 공연이 자주 열린 역사를 간직한 장소다. 런던에서 가장 큰 공원은 리치몬드 파크로 중심가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있으나 야생의 사슴들을 볼 수 있다. 템스강이 흐르는 리치몬드 파크 주변의 리치몬드 궁전은 헨리 7세가 지었고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거주하던 곳이다. 편안히 산책하고 싶은 동네 공원은 ‘논 서치 파크(Nonsuch park)’로, 헨리 8세가 어렵게 얻은 아들 에드워드의 6살 생일 기념으로 만든 공원이다. 논 서치 파크는 “유럽에 그런 장소는 없다(Non such place like it.)”는 뜻으로, 헨리 8세의 명령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쉽고 재미있다. 그곳엔 천년된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길에 무성한 잎들로 터널을 이루고 나무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려와 신비하기까지 하다.


영국에 대한 편견은 날씨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음식에도 있다. 영국은 음식문화가 변변치 않은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심지어 음식문화가 아예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영국인들은 그런 조롱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전쟁과 산업화로 바쁘고 가난하여 요리를 즐길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다” “절약과 금욕주의로 식탐을 사치와 수치로 생각했다” “농사에 적합한 기후와 땅이 아니었다” 영국의 음식문화를 얘기할 때 특이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 중에 영국인이 제일 많다는 사실이다. 램지, 스미스, 올리버, 마틴 등 수많은 요리사가 영국사람이다. 음식이 별로인 영국이 어떻게 유명 요리사 최다 보유국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텔레비전 스타로 요리 관련 방송 이른바 먹방에 출연하여 유명해진 요리사들이다. 심지어 방송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BBC도 영국 요리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음식 프로그램을 자주 방영한다. 사실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음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세계 각처에 식민지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많은 나라가 독립했고, 당시 영국의 이민자 정책에 따라 많은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으로 들어올 때 음식문화도 함께 유입됐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와 중국식당으로 지금도 이 두 나라 음식이 영국 음식문화를 이끌고 있다. 모든 연령층에 걸쳐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중국 음식이다. 중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로 파병을 나갔다가 돌아온 영국 군인들이 중국 음식을 찾기 시작하여 중국식당이 늘어나 소호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예전에는 보잘것없던 거리가 런던 최고의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했다. 차이나타운은 현재 뮤지컬 극장이 즐비한 웨스트엔드에 있다. 영국에서 중국 음식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는 것이 인도 음식이다. 영국 국민음식 치킨 티카 마살라가 인도 음식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영국 내 인도 식당의 숫자가 8,500여개에 달할 정도로 누구나 즐기는 대중 음식이 되었다. 한때 영국이 인도를 지배했으나 인도는 입맛으로 영국을 정복한 셈이다. 카레 종류만 해도 엄청 많은데, 치킨 티카 마살라는 닭고기살 조각을 향신료와 요거트로 만든 걸쭉한 소스에 담가 내놓는 카레다. 인도 음식이지만 영국인 입맛에 맞게 개발하였다. 그밖에도 스파게티와 피자가 주종인 이탈리아 음식, 케밥의 터키 음식, 스시를 내세우는 일본, 팟타이의 태국, 쌀국수의 베트남에다가 최근에는 한류를 타고 한국식당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영국에 음식문화가 없다는 말은 편견이다. 다양한 민족이 사는 영국에선 세계 각국의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고, 펍에서 맥주와 함께 피쉬앤칩스나 스테이크, 로스트 비프도 즐길 수 있다.

 

오만과 편견의 도시
바스는 관광지다. 보통 관광지가 아니고 해마다 130만명이 찾는 영국의 대표적 관광지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 관광이 자원이 되려면 두 가지 요소인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필요한데, 바스는 게다가 낭만까지 갖추고 있다. 바스는 2000년전 로마에 의해 세워진 도시다. 로마가 그곳에 도시를 세운 이유 중 하나는 영국에서 유독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침략하기 전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은 따뜻한 물이 솟아 나오는 자신들의 땅을 신성하게 여겼다. 로마는 목욕에 푹 빠져있던 나라였다. 목욕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로마 사람들이 냉습한 영국에서 온천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로마는 바스를 점령한 후 목욕 단지를 건설하고 더 로만 바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색슨족이 차지한 후 바쏜이라고 불렀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정식문서를 통해 바스라 칭하면서 도시의 이름이 됐다. 바스는 로마 목욕탕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7세기에 지어진 바스 성당과 에이본 강을 가로지르는 펄트니 다리, 바스의 대표적 건축물인 초승달 모양의 테라스 하우스 로열 크레센트가 있다.


바스에 살았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을 소개한다. 해리포터의 작가 롤링은 그녀를 모든 작가가 꿈꾸는 별과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고,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도 아래와 같이 찬사를 보냈다. “여기 1800년대에 글을 쓰던 한 여인이 있다. 증오, 고통, 두려움, 저항과 설교 없이 글을 쓰던 여자. 셰익스피어처럼...” 놀랍게도 제인 오스틴을 셰익스피어와 비교하였다. 영국의 10파운드권 지폐에는 그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제인은 평생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으나 신데렐라를 꿈꾸지 않았다. 여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강요를 거부했으며, 로맨스와 사회비판을 증오나 설교 없이도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여 넣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바스와 어울리지 않는 작가였으나 바스의 경험이 소설을 쓰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됐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아주 드물뿐더러 차별도 심하던 시대였기에 신출내기 여성 작가가 쓴 소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출판사는 없었다. 다행히 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도움으로 출판의 길이 열렸다. 제인의 나이 36세에 ‘이성과 감성’, 37세에 ‘오만과 편견’, 39세에 ‘맨스필드 파크’ 그리고 ‘엠마’ 모두 익명으로 발표했다. 그녀는 소설가의 길을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운명의 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심한 통증과 피곤이 반복되는 혈액암으로 추측되는 질병과 싸우고 있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도 그녀는 글쓰기를 계속했다. 제인은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언니가 물었다. “원하는 게 있어?” 제인이 답했다. “죽음” “나를 위해 기도해줘” 그러곤 언니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가 제인 오스틴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오스틴이 바스에 대해 느낀 감정은 시골 출신 처녀가 도시를 보았을 때 가지는 설렘, 신기함과 함께 콧대 높고 요란스러운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피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표현한 책이다. 엘리자베스는 첫눈에 잘 생기고 돈 많은 귀족 피츠를 오만하다고 보았으나 지나고 보니 자신의 판단이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녀는 화려하고 도도한 바스를 오만한 도시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오스틴의 소설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사랑 없는 결혼은 하지 말라. 사랑 이외의 조건은 모두 무의미하니까”이다. 누구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제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까?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파문처럼 가슴에 울려 퍼진다.

 

살기 좋은 동네 루이스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답하기 쉽지 않지만, 영국 남부 서섹스 지방의 바다 가까운 마을 루이스를 추천한다. 그곳은 적당한 크기의 아담한 시골 마을로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쁜 카페들이 많아 차 한 잔 시켜놓고 엽서를 쓰거나 책을 읽기에도 아주 좋은 마을이다. 돌멩이가 깔린 골목과 중세풍의 건물들도 볼만하거니와 시야가 탁 트인 성과 꽃향기 가득한 마을 정원, 아기자기한 냇물과 화단의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은근히 끌리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러나 한때 루이스는 전쟁터였다. 헨리 3세와 영주 몽포트가 루이스에서 맞붙었다. 헨리 3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독재자였고, 몽포트는 신념이 강한 민주주의자였다. 헨리 3세의 아버지 존은 그의 폭정에 반기를 든 영주들의 압박에 굴복하여 마그나 카르타라는 합의서를 체결한 왕이다. 마그나 카르타에는 세금 징수와 왕의 재산을 제한하기 위한 조항과 함께 “아무도 사람의 신체적 자유를 구속하거나 해칠 수 없고, 사유재산을 빼앗을 수도 없으며, 모든 죄는 사법절차에 따라 물어야 한다”고 되어 있어 민권 신장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헨리 3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무시하고 회피할 궁리만 하였다.

 

세금 인상도 마음대로 하고 안하무인으로 독재를 하자 몽포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군대를 일으켜 헨리 3세와 루이스에서 맞붙었다. 몽포트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겼고, 포로가 된 헨리 3세는 기존의 협약을 잘 지키겠으며, 15인의 위원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개혁 현안을 몽포트 의회와 협의하여 결정하겠다는 루이스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2년 후 감옥에서 풀려난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가 왕정을 지지하는 영주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웨일스 부근의 에이본 강가에서 몽포트의 군대와 격전을 벌여 승리했다. 몽포트는 그의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고, 의회정치에 대한 그의 꿈도 함께 묻혔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몽포트를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영국인들은 그를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루이스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토머스 페인이다. 그는 ‘상식’ ‘인간의 권리’ ‘이성의 시대’ 같은 책을 써서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페인은 1737년 영국 뎃포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세무 공무원이 되어 루이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앞서 나왔듯이 군주제에 대한 반감이 크고 공화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 마을이었다. 페인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루이스 자치정부의 관리가 되어 마을 회계를 책임졌다. 페인은 우연한 기회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알게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의 기자로 일하며 유능한 언론인이 되어 판매량이 10만부가 넘는 문제작 ‘상식’을 발표하였다. ‘상식’은 자신이 섬기는 왕을 거부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정치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 또 영국 군대를 이길 힘은 갖추었는지, 독립하면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식민지 미국인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자신도 직접 혁명군으로 참전하여 진중에서 ‘위기’라는 책을 써서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며 전쟁을 독려하여 수많은 예비역이 재입대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776년 마침내 미국이 독립했고, 토머스 페인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당국의 위협 속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책 ‘인간의 권리’를 썼는데, 순식간에 100만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파리의 감옥에 갇힌 페인은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듯이 ‘이성의 시대’를 썼고, 이 책이 혁명을 부추긴다고 영국 정부에 의해 출판 관계자들이 일괄 기소되기도 하였다. 평생 쫓기고 투옥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혁명이 있는 곳엔 그도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공공의 적 페인은 미국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72세였다. 이렇듯 루이스는 혁명의 기운이 드세고 왕정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한 곳이며, 주민들의 사고 역시 독립적이고 자유롭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마을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화폐와 주식을 발행하며 경제적 독립을 시도하였다. 루이스 파운드의 화폐 전면엔 영국 여왕의 얼굴이 아닌 토머스 페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그 돈에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힘이 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