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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만어기(3)창업전사
[586호] 2022년 07월 04일 (월) 11:29:37 해양한국 komares@chol.com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인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 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국토건설요원으로 남해에 배치
나는 아버지의 고향인 남해를 자원했는데, 서울공대 출신인 정운선(鄭雲宣) 등과 함께 남해 남면 사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남해군에 발령받은 국토건설요원은 총 16명이었는데, 1961년 3월 초 남해군수에서 착임 신고하고 사령장을 들고, 정운선과 함께 남면 사무소가 있는 홍덕(洪德)으로 가 남면 면장과 농림과장 등에게 인사하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근무 첫날이라 식후에 홍덕여관에 방을 잡아 놓고, 국토건설사업으로 선정된 상가촌과 운암촌의 소류지(小留池) 공사장 현장을 둘러보았다.


상가촌은 남면 사무소에서 여수항이 마주보이는 서상항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남해군청 방면으로 난 외곽도로를 1시간 가량 걸어가야 있는 산골이었다. 운암촌은 서상항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도로를 따라 2시간 가량 걸리는 곳이었는데, 숙소가 있는 홍덕에서 마주보이는 700미터 산을 넘으면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남해의 지질이 화강암이 부식된 사질성(沙質性) 토질이라 논에 물을 채우면 곧 물이 새 나간다. 그러니 논 마다 담수보가 설치되어 인력으로 물을 퍼 올려야 하니 농민에게는 쌀 한 톨이 정말 귀하디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딸이 태어나면 쌀 한 말을 못 먹고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는 곳이라 소류지 공사는 남해 사람들에게는 숙원사업이었다.


예부터 남해 사람들의 근면성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인데, 논이나 밭이 나오면 비밀리에 매매가 이루어진다. 운암 소류지 공사에 수몰되는 야산의 가격을 평당 700원에 매입한다는 계약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당시 부산 괴정의 우리 집 옆에 딸인 밭이 평당 350원이었으니 두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공공사업의 매입가니 다소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남해 사람들의 땅에 대한 집착은 타 지방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60년 7월 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사사건건 대립하고, 4·19혁명 1주년을 맞아 서울대 학생회는 <4·19 제2선언문>을 발표하고, 민통련 기념식 뒤 열린 침묵 시위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남북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등의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또한 대구시청 촉탁 이정용, 삼천포 시의원 조상윤, 함양의 정한진과 최강평이 ‘적기가’7를 부르는 사단이 났다. 이러한 정쟁과 혼란이 5.16쿠데타의 빌미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관 주인의 동생이라는 노인이 ‘민주당 새끼들 간을 끄집어내어 씹어 먹고 싶다’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국토개발요원으로의 임기는 3개월이었으니 5월말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남해
현지에 파견된 국토개발요원들은  5.16쿠데타를 군인들에 의한 자유당의 복권 정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토개발요원 16명이 군청에 모여 대책을 논의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으니 이 기회에 금산이나 구경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근무지를 이탈해 금산을 오르는데 휴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국토건설사업은 계속되니 국토개발요원은 업무에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근무지를 이탈한 지 하루 만에 복귀해 5월 말에 임기를 마치고 각 부처로 배정받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총무처에 배정된 국토건설요원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찾아가 진정해 방송을 통해 업무 복귀 지시가 나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해양경비대 백두산정 승선
나는 13명과 함께 해무청 산하 해양경비대에 5급 갑류공무원으로 발령을 받고, 기함인 701 백두산 정의 조타수(QM)직으로 승선했다. 원래 대양용 예선으로 건조된 600톤급 백두산정은 1955년 8월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 US Operations Mission for the Republic of Korea)로부터 인수해 해난구조정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내가 배속된 1961년 6월에는 해사 4기생인 주사원 정장이 승선해있었다. 가끔 제주에 입항할 때에는 족발과 순대 파티를 열기도 하고, 흑산도에 들렀을 때는 윤활유 2 드럼과 소 한 마리를 바꿔 승선원 28명이 이틀만에 먹어치운 적도 있었다. 부산 입항시 함대사령으로 당직근무 중 혁대에 찬 권총을 풀어놓고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분실해 가슴이 철렁한 적도 있다. 다행히 본대 사령이던 이성숙 경감이 나를 골려주려고 잠시 숨겨둔 것으로 드러났다.


국토건설요원으로 선발된 우리 동기들은 해경 배속시 4급 주사 발령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실무 경험이 없어 일단 5급 갑류 서기로 발령받은 것이었다. 일시에 14명을 해경에 발령을 내다보니 보직이 부족해 현직으로 근무 중이던 통영수고 출신자 30명을 병역미필자로 몰아 강제로 사직시킨 상황이었다. 이렇다 보니 기존 해경 대원들로부터 시기를 받은 것은 물론, 새로 임명된 우리 동기 14명도 자부심만 높아 기존 대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에 해군 상사 출신인 이성숙 경감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경에는 한국해대 기관과 1기 김헌영이 경감으로, 2기 한창열이 경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결국 이성숙 경감이 우리를 놀려 먹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인지라 권총을 돌려주고 아무 일 없던 일이 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숨어 있는 돈을 찾아내기 위해 1962년 6월 10일 10환을 1원으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701함이 부산에 계류 중 내가 화폐 교환을 위해 상륙한 사이 해양대 7기생 박태환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허탕을 쳤다. 박태환 선배는 재일동포가 선주인 원양어선 유성호의 항해사로 나를 점찍고 찾아온 것이었다. 헛걸음 치고 돌아가던 박태환 선배는 마침 접안 중인 연안 유조선 유양호의 1항사로 승선 중이던 12기 동기생 최원창을 만나 스카웃해갔다는 후문을 들었다.


해경에 배속된 14명은 정보도 교환하고 친목도 도모할 요량으로 자주 만나 회비도 모았다. 따로 회장을 뽑은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회장 역을 맡게 되었는데, 1961년 겨울에 박종무와 함께 서울에 출장 간 길에 그의 아현동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왕에 서울에 온 김에 해경 본부에 인사를 하러 가자고 의기투합해 해무청의 이각순 청장을 찾아갔다. 나는 이각순 청장을 만나 ‘해경에 부임해 보니 개선할 점이 너무 많은데, 당초 예정한 4급으로 승진해 보람 있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밤에는 박종무의 집이 있는 아현동 고개에 살고 있는 해무청장 보좌관인 2기생 유덕준의 집을 찾아가 청탁을 하기도 했고, 토요일에는 신당동의 윤상송 학장의 집을 찾아가 사모님이 내어준 커피 맛을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엽관운동을 한 셈인데, 4·19혁명 이후에 젊은이로서의 패기가 발동한 것인지 모르겠다.

 

해양경찰대 4급 승진
별 기대를 하지 않던 4급 승진 기회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1962년 해양경찰대 4급 승진시험이 치러졌고, 시험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당시 해양경찰대에는 전투경찰, 경찰기동대, 경찰, 해군, 해양계, 수산계 출신들이 뒤섞여있던 시절이라 해경 내에 이른바 주류세력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대졸자 14명이 합류해 4급으로 승진하자 대원들간에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해대 항해과 8기 이원영 선배가 해군대위 전역 후 해경에 경위로 입대 후 경감으로 승진해 경비과 교육계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경위로 그 밑의 교육주임으로 배치되었다. 내근직이라 보통은 사복으로 출근해 정복으로 환복하고 근무를 했다. 가끔은 정복을 입고 금테를 두른 정모를 쓰고 출근할 경우도 있었는데, 힐끔힐끔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에 쑥스러워했다.


교육주임은 해경 대원들의 기술교육과 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성안해 항해와 행정 교육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자유당 시절 행정관청의 공문서는 오른쪽에서 시작해 아래쪽으로 쓰는 한자식으로 품의서를 작성해 상급자의 결재를 득하는 방식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새로 도입된 공문서는 기안자가 시행기관이 되어 품의문서를 작성하면 그 자체가 시행문서가 되도록 했다. 공문서 작성에는 사전 경험이 없었던 나는 관련 서적도 찾아보고, 1957년에 설립된 한국생산성본부의 자문도 받아 공문서 작성에 관한 나름대로의 전문가적 지식을 갖게 되었다.
모(某) 총경이 해경본부의 재무관으로 부임하면서, 교육주임으로 있던 나를 발탁해 기술부문을 보좌하라고
했다. 내게 주어진 업무는 경비정의 수리 공사, 함수품의 구매 입찰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란 시행부서에서 시장가격을 조사해 입찰계획을 입안해 경리에 넘기면 재차 사정(査定)하여 재무관이 공개입찰시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통상은 입찰이 진행되면 재무관이 제안가격을 약간 삭감해 ‘김 주임, 이정도면 어때?’라고 내 의견을 물으면, 나는 그저 ‘예, 요즘 철판 가격이 인상되었다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업자가 제출한 입찰봉투를 개봉해 ‘갑을 제조회사의 얼마가 최저가격으로 낙찰되었습니다’라고 발표하면 입찰이 끝이 난다. 그러나 경리와 사전에 입을 맞춘 업자들이 가격을 담합해 낙찰예정가에 근접한 액수를 적어 내기 일쑤이니 싱겁기 짝이 없는 공개입찰이지만, 당시 어려운 국가재정을 고려해 마련한 제도였다.


업자 입장에서 보면, 재무관의 판정에 관여하는 나의 입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부정에는 상하가 없는 법이니, 경리과에서도 ‘저 친구를 잘 삶아라’라고 일러주니 자주 봉투가 내게도 주어지곤 했다. 이전 보직인 교육주임은 생기는 게 전혀 없고 힘만 들었던 반면, 재무관 보좌 반년여 만에 어머니가 밭 한 뙈기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일주일에 절반 이상 접대를 받느라 귀가가 늦어지고, 내가 평소부터 경원시해오던 ‘기성세대’로 변해가니 이 생활을 계속하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5.16쿠데타 주도세력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차관을 들여와 1963년 7월 한국수산개발공사를 설립하였다.

 

한국수산개발공사의 설립
한국수산개발공사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원양어선단의 확보가 급선무인 것으로 판단한 정부가 이탈리아·프랑스 어업차관 계약을 성립시켜 설립한 것”이며 “원양어업기지 개척, 해외어장의 개발, 어업 및 해양기술인력의 양성, 해외수산자원 확보와 경제개발 협력, 양질의 단백질 식량 공급 등”을 그 설립목적이라고 한국수산개발공사법에는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먼저 우리에게 어업 차관 도입을 제안해 시작된 것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이듬해인 1962년 우리나라에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갈리아니(Luciano Galiani) 무역상이 방한해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원양어업을 위한 어선과 어로장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시 한국의 경우 개척할 어장은 많았지만, 배가 없었다. 이탈리아로서는 어선을 건조해 공급해 한국에 제공한다면 이탈리아는 수출할 수 있고, 한국은 어선을 확보할 수 있어 서로에게 이익이 되었다. 그런 사정을 간파한 갈리아니 무역상이 군부정권의 실세들에게 차관 제공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혹한 쿠데타 실세들이 그의 의도대로 1억달러 차관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차관 규모가 커 프랑스도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관계약은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되어 ‘계약시 2% 착수금과 8% 계약금’ 조건부터 이상했지만, 차관으로 도입된 어선도 불필요할만큼 호화선박으로 선가는 민간어선보다 40-80% 가량 비쌌고, 원리금 상환조건도 불리해 정부와 수공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어 결국 설립 10년만인 1973년 파산해 민영화되었다.
군사정부는 당초 쿠데타에 비협조자라고 체포해 해외로 추방했던 이한림 장군을 설득해 수산개발공사를 맡겼다. 이한림 장군은 수산개발공사에 참여하게 된 내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수산개발공사 설립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유관기관으로부터 인계받기로 한 것이 1963년 6월 말이었다. …나는 조직과 인사는 7월 내로 완결시켰다. 조선, 수산, 선원 양성 및 국제무역의 권위자를 찾아내어 중역진을 구성했다. 부사장에는 재정에 밝은 김용기, 수산이사에는 일본 수산대학을 나온 이경엽, 영업에 김홍범, 조선 및 선원 양성에 한국해대 학장을 역임한 윤상송(사임 후 이준수) 등을 이사로 임명하고, 이 분들이 인재를 모아 간부를 채용케 했다. 또한 정긍모 전 해군참모총장을 감사로 임명해 해군 기술진과도 제휴했다. 다음은 차관계약 수정 조인과 차관 제1기 집행계약의 발효를 보도록 했고, 미국의 STARKIST와 이탈리아의 GENEPESCA의 합작회사인 ITSACO와 공사 간의 수출대행협정도 보완 체결했다.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의 어선 건조도 진척시키고, 1965년 4월에 첫 배를 인수해 총 91척의 어선을 67년 10월까지 인수 완료토록 계획을 추진케 했다”

 

수산개발공사로 전직
이즈음 해경 경위로 재무관 보좌로 근무하며 부정에 젖어가는 나 자신에게 싫증을 느끼던 중이었던 지라 1963년 8월경 수산개발공사 설립 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망설일 것도 없이 지원서를 냈다. 서울로 상경해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자 7명 중 수석으로 합격했다. 곧바로 해경에 사직서를 내고 보따리를 싸니 주변의 모두가 “저리 좋은 자리를 걷어차고 서울로 간다니, 미쳤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수산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긴 뒤 해경의 내 후임들은 끝이 좋지 않았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나로서는 내가 적기에 해경을 그만둔 것은 조상의 덕임에 틀림이 없다고 느낄만했다.


1963년 9월 선원계장직을 맡아 1966년 12월까지 약 3년간 수산개발공사에서 일했다. 수산개발공사에서는
어장에 따라 몇 가지 형태의 어선을 도입했다. A형선(현 측식 트롤선, 135톤) 10척, B형선(참치연승어선, 160톤) 61척, C형선(참치연승어선, 620톤) 15척, F형선(선미식 트롤선, 222톤) 2척, G형선(선미식 트롤선, 1,4
72톤) 2척, L형선(선미식 트롤선, 529톤) 1척 등 총 91척이었다. 이들 어선이 모두 도입되면 그중에서 남태평양 어장 에 15척, 대서양과 인도양 어장에 61척을 배치하고, 나머지 15척은 동중국해에서 조업하도록 계획되었다. A형은 소형 트롤 어선으로 동해에 출어시켜 일본 어선과 경쟁해야 했다. B형은 참치 주낙조업선으로 남태평양의 사모아 파고파고(Pagopago) 항을 모항으로 주로 날개다랑어(Albacore)를 조업해 밴 캠프 씨푸드(Van Camp Seafood) 사모아 공장에 납품했다. 수산개발공사의 선원 업무가 가장 많은 곳이 사모아였기 때문에 당초 어로부 선원과가 담당하기 버겁게 되어 선원부로 확장되었다. 나는 사모아의 현지사무소로 발령날 뻔했으나, 더위에 약하다는 핑계를 대고 해외근무를 피했다. B 형 일부는 남아프리카의 프리 타운과 라스 팔마스 항에 기항해 포획한 어획물을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수출하기도 했다. 대서양 어장에서는 한때 하루 어획고가 10톤이 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대규모 원양어선단이 새로 원양어업에 투입되는 것에 대해 기존업계의 견제, 어선 운항기술의 미숙, 선원의 집단노동행위 등으로 수산개발공사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수산개발공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빚덩이가 눈더미처럼 불어나는 구조였다.


수산개발공사 동기생 6명은 모두 나름대로 전문가 연하며 말꽤나 하는 친구들이었다. 어로계장 민경성은 트롤선 유경험자였고, 경제기획원 출신인 양경남은 기획부 기획계장으로 4.19 이후 출범한 민주당 시절 공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나와 비슷해 죽이 잘 맞았다. 생산성본부 출신인 장공식은 기획부 조사계장으로 공무원 행정서식 관련 생산성본부의 자문을 받을 때 안면이 있었고, 서울상대 출신인 김기석은 무역계장으로 내게 생소한 무역 상식을 많이 가르쳐 주어 후일 동양시멘트 해운부에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수산대학 양식과 출신인 조규남은 제조계장으로, 급속 냉동건조한 식품에 탕수(湯水)를 주수(注水)해 원상으로 복원하는 인스턴트 냉동식품에 관한 지식을 내게 전수해 주었다.


원양어업, 특히 연승조업은 하루 18시간 이상을 노동해야 하는 고된 작업에다 미숙한 선장과 항해사들의 폭력 등 근무 조건이 열악하다. 그러므로 선원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가 조업의 성패를 가름한다. 먼저 어로장인 선장을 선임하면 선장이 최측근을 지명해 선원들을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원양 어로 경험이 있는 선장도 부족했고, 뇌물을 주고 선원으로 승선하여 출어 뒤 집단으로 항거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어쩔 도리 없이 수산개발공사에서는 선원을 직접 선발해, 훈련시켜 팀을 구성하는 일까지 개입해야 했으므로 선원 관리가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사상계를 매개로 아내를 만났다. 나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에 관심이 있어 사상계를 매월 구독하고 있었다. 육체파 배우로 인기 있었던 마릴린 먼로가 1962년 8월 사망했다. 그런데 사상계 1963년 12월호에 ‘몬로의 자살과 아메리카의 비극 : 자기충실과 자기파괴의 대결에서 숨진 글래머의 비화’(다이나 트릴링)라는 글이 소개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사상계 같은 월간지에 유명 여배우의 뒷얘기를 다룬 글이 실린다는 것자체가 정기구독자의 품격을 손상하는 것이라 여겨 ‘항의성’ 독자편지를 작성해 보냈다. “떠들썩하게 타계한 육체파 배우만이 아니고 옛 황진이처럼 그윽하고 여운이 남는 미인 얘기를 소개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김옥정. 중구 을지로 3가 제일빌딩 수산개발공사 어로부. 그런데 얼마 뒤 “잘 보았어요. 언니하면 좋겠어요. 박숙자”라는 취지의 편지 한 통이 ‘서대문구 서소문동 281 교학사’ 봉투에 넣어 배달되었다. 내이름이 ‘옥정’이라 여자로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언니는 안되고 오빠는 될지 모르니 한번 만나요”라고 바로 회신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한 차례 전화 통화를 나눈 뒤 직접 서소문 교학사로 찾아가 첫 대면을 하고 연애를 시작했다. 주말에 북한산성 가는 길목의 진관사 계곡으로 원정하며 밭에서 딸기를 직접 구입해 먹기도 하고, 퇴근길에 남산 장충동을 경유해 마장동까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데이트를 마칠 때는 그녀를 버스로 퇴근시키고 나는 걸어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서울에 친인척이 없어 나는 묵정동(현 퇴계로50길 충무초등학교 부근)에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하숙집 주인이 이북 출신이라 백김치에 애돼지 편육까지 날로 넣어 발효시킨 식혜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하숙집 장남은 동국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를 무척 따라 함께 당구장에도 다니고 그의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독주를 마시며 고달픈 인생살이를 논하기도 했다.


그 뒤 신당동 하숙전문집을 거쳐 금호동 옆 동화동 산기슭에 전세방을 마련했다. 하숙에서 생활하다 처음으로 전세에 살게 되니 밥을 혼자 해결해야 했다. 상왕십리 시장의 식당에서 백반, 김치, 국 한 그릇 1식(20원)에 꽁치구이(10원)를 추가하여 주문하면 점원이 “짜리 하나요”라고 식당에 외친다. 이렇게 아껴가며 생활해도 저축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가끔 동기생들과 술 한잔하면 월급 3만여원을 다 쓰고도 1만원 정도는 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결국 괴정에 마련한 집을 팔아 생활비로 전용해야만 했다.
총각시절 홀로 전세살이를 하는 동안 이런저런 소극(笑劇)이 발생하곤 했다. 한번은 둘째 외삼촌의 차녀인 금차(今次)가 상경해 묵을 데가 마땅치 않아 내 전셋집에 머물게 되었다. 아무리 친척 간이지만 다 큰 남녀가 한 방에 잘 수가 없어 금차는 방에, 나는 마루에 잘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동무산송이가 상경해 같이 저녁을 먹고 청계천 변에 널린 색시집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숙자가 나를 발견하고 친구와 미행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을 졸였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여름 찜통 더위에 집 마당에서 등목을 시켜주고 있었는데, 하필 그날따라 집에 있던 집주인 아저씨에게 ‘부
인이 있는 집안에서 무슨 해괴망칙한 짓이냐’는 호통을 듣기도 했다.


경남공고 3년 내리 담임을 맡았던 최내영 선생님이 부산대학으로 영전하신 뒤 상경한 길에 회사로 나를 찾아오셨다. 저녁을 들며 그간의 회포를 풀고 같이 당구도 치고 종로3가 일대를 구경시켜 드리고 헤어졌는데, 그 뒤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김용성 교수는 한국해대 1기생으로 기관학 전공자지만, 해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시 운용술을 가르친 것이 인연이 되어 운용술을 가르쳤다. 재학 중에는 선배인줄도 모르고 친해졌는데, 졸업 후에도 이따금 만남을 이어갔다. 한번은 서울 상경 길에 내게 연락해 저녁을 대접하고 종로3가를 구경시켜 드렸더니 학교에 내려가 ‘옥정이가 새까만 후배지만, 선배를 잘 모신다’는 입소문을 내주기도 했다.

 

제3공화국과 수산개발공사
쿠데타 세력은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1962년 11년 12일 김종필과 오히라(大平) 외상의 담판을 통해 무상 3억달러, 유상 3억달러 등 총 6억달러를 한국에 지원하는 것으로 한일청구권협상을 타결지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2년여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종필을 둘러싼 내분으로 쿠데타 세력은 양분되었다.
창당 반대 세력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6항을 지키기 위해 박정희 의장에게 대선에 나가지 말고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춘(육사 5기), 박태준(육사 6기), 유병현(육사 7기)과 유양수(육사 7기) 등이 창당 반대세력이었다. 1963년 2월 18일 양측 사이에서 갈등하던 박정희는 ‘재야 정치지도자들이 9개 수습방안을 수락한다면 본인은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에 김종필은 2월 20일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2월 25일 제1차 외유를 떠난다. 


김종필이 외유를 떠난 다음날인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고, 민정불참선언을 번복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46.6%를 득표해 45.1%를 득표한 윤보선에게 15만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그 한달여 뒤인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 시내에서 퍼레이드 도중 암살되어 세계인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수산개발공사는 이한림 장군이 사장을 맡고 추진력이 붙으면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차관 도
입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감에 따라 인력이 대폭 보강되어 한국해대 졸업생도 10여명으로 늘어났고, 어선에 승선시킬 선원도 2,500여명 선발했다.


어선원 선발, 교육, 배선, 관리 업무가 폭증하여 선원계를 선원부로 확대 개편했는데, 총무부장을 맡고 있
던 포병대령 출신 강철선이 선원부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그의 군대 내 지인들 여러 명이 선원송출 브로커로 나서니 실업자가 넘쳐나던 당시에 돈을 싸 들고 선원부장 지인들에게 취업청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강 부장의 동료인 한(韓) 대령이 소개한 그의 조카가 말썽을 일으켰다. 자그마한 체구였던 그의 조카가 부산의 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받다가 ‘나는 프랑스 유학가는 줄 알고 돈을 쓰고 들어왔는데, 이런 중노동을 시키니 도저히 못 하겠다’며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훈련소는 해사 1기생으로 예비역대령인 문부이(文夫二) 소장이 맡고 있었는데, 민병서 선원과장과 문부이 소장이 상의해 말썽 부린 한 대령의 조카를 어떻게 채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나는 강철선 선원부장의 동기인 한 대령이 선원부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 먹은 것과 한 대령이 담배 한 카툰을 가져와 담배를 피우지 않아 직원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고 해명했다. 


문 소장과 민 과장이 요령도 없고 선원 관리에 경험도 없는 나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려고 했으나 한 건 갖고는 무리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사장 비서실장이 나를 불러 ‘부산 선원 문제로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네’라고 말하기에, ‘무식한 군인들이 제멋대로 하라고 하세요’라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총무과에서 나를 무기정직 발령을 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3년여 남짓 수산개발공사에서 일하는 동안 표창 3회, 정직 2회를 받았는데, 이것이 정직 2건 중 1건이었다. 수공의 돌아가는 형편이 정직을 받았다고 해서 손을 놓을 처지가 아니라 출근을 하면서 일을 계속했다. 당초 선원과는 나와 수산대학 출신 문인리, 수산대학 출신인 박관균, 포병 중위로 제대한 황보벽, 여직원 김 양 등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대령 조카 문제가 불거진 뒤 문 소장과 민 과장이 해결방안으로 선원과 확대개편안을 밀어붙여 치안국 신원 조회 담당, 외무부 여권 신청 담당, 선원 입출국 수속 담당, 선원과 선원 가족 안내, 경리 2명 등 총 12명으로 늘어났다. 정직을 받은 내가 선원 선발에서 손을 떼게 되니 수산대학을 나와 여학교 선생을 하던 김용석이 업무를 이어받았다. 


실업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수산개발공사의 수위에게까지 취업 청탁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어로배당금제까지 없어져 돈을 주고 승선하고 나면 고기를 많이 잡으나 적게 잡으나 월급을 받게 되니 근로 의욕이 사라져 선원들 사이에 불만이 쌓이고 선원 사고도 빈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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