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국 선장

영국선장 면허를 취득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서문욱 ㈜씨엠에스마리타임 선장의 기고문을 연재한다. 이번 6월호에는 두 번째 영국 선장(두 번째 영국 선장, 사우스햄턴 해양 유산, 그리고 다시 신성모, 세 번째 영국 선장)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큰아들 얼굴을 오랜만에 다시 보셔서인지 곧 나아지셨다. 멍한 상태가 며칠 이어졌는데 시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짧게는 지난 두어 달, 길게는 재작년, 아니 몇 년 전부터 생각해오고 계획하고 목표하던 일을 마침내 마무리지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흡사 나 자신이 한참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일순간에 놓아 늘어져버린 활시위가 된 느낌이었다. 교수님들의 축하 답장을 받았다.

 

‘Well done, Wook, and congratulations.
We Master Mariners are a select and special group of professionals.
Best wishes for the future’

 

‘Hi!
Well done!
I am delighted, and not surprised.
Have fun, be good, and careful.
Regards’

 

시험 치고 와서 먹겠다고 한 과자 봉지를 아내가 내밀었다. 유통기한이 사흘 남아있었다. 조조의 술잔을 받고서 술이 식기 전 적장의 목을 베고 와 마시겠다고 했던 관우가 떠올랐다. 나는 삼국지에서 개인적으로 관우를 좋아한다.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 내 구술시험 문제를 정리하여 학교 도서관에 이메일로 제출하였다.

 

<구술 시험 문제지>
오랜만에 한국해양수산연수원 교수님들을 찾아뵈었다.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쭙고 영국 선장 면허시험 합격 소식을 말씀드렸다. 교수님들의 축하와 과분한 칭찬을 들었다. 1939년 고 신성모 해양대학장님이 영국선장 면허를 취득한 이래 내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영국 선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79년만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득한 역사 속에 남아 있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뜻이 있는 한국 해기사라면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임을 증명한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MCA로부터 영국선장 면허를 최종 발급받기 위한 구비서류들을 확인하던 중, 함께 제출해야 하는 기초안전교육의 유효 기간이 이미 지났음을 발견했다. 상급안전교육의 유효기간과 연관하여 이리저리 확인해봤지만 별수 없이 다시 이수해야만 했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은 몇 달 뒤까지 기초안전교육 예약이 이미 완료되어 있어 와사시해양대학과 사우스햄턴 인근의 교육 기관들을 검색하여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있는 요트학교의 기초안전교육을 예약하고 영국행 왕복 항공권도 예약하였다. 계획에 없던 추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들었던 보험 하나를 해지하였다. ‘원래 목적과 다르긴 하지만, 보험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사우스햄턴 해양 유산
기초안전교육 교육생은 나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는 상선 해기사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20대 초중반의 남녀 청년들이었다. 영국 국내는 물론 멀리 뉴질랜드에서도 온 이들은 수상스포츠 강사, 바텐더, 카페 매니저 등으로 일했고 앞으로 슈퍼 요트(Super Yacht) 승무원이 되고자 이 교육을 이수하는 것이었다. 슈퍼 요트 승무원도 경력직을 우선 채용하는 상황이라 신입 승무원 취업이 녹록치 않고 또 이를 악용하는 회사도 있어 막상 승선을 하였지만 이로 인해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동안 시험 때문에 가보지 못했던 씨시티박물관(Seacity Museum)과 사우스햄턴 내 해양 관련 장소들을 방문했다. 씨시티박물관은 사우스햄턴의 해양박물관으로 기존의 해양박물관을 폐관하고 2012년 사우스햄턴 시청 옆에 다시 문을 열었다. 항구 도시로서 사우스햄턴의 역사를 소개하고 무엇보다 ‘타이타닉’호 사고와 관련한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유물 뿐 아니라 각종 모형과 영상, 음향 효과를 통해 실제 ‘타이타닉’호에 승선하고,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경험과 감정적 유대감까지 만들어 냈다.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타이타닉’호 승선권 모양의 그림엽서를 샀는데, 첫 항해에 침몰하여 대다수 승객이 목숨을 잃은 이 여객선의 승선권을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밀러 래이너(Miller Rayner)는 1818년 사우스햄턴에 문을 연 상선 사관 제복 전문점이다. 전성기 때에는 런던, 파리, 로테르담에 지점을 두고 큐나드(Cunard), BP(British Petroleum), P&O(Peninsula and Oriental) 등 상선회사의 사관 제복은 물론, 옛 영국항공(BOAC,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의 조종사 제복까지 공급했다. 특히 ‘타이타닉’호 운영 선사인 화이트스타라인(White Star Line)에도 제복을 납품했는데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J. Smith) 선장도 여기에서 그의 선장 제복을 맞췄는지 모른다.


‘타이타닉’호 기관사 추모비(Titanic Engineers’ Memorial)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내 중심의 공원, 이스트 파크(East Park)에 있다. ‘타이타닉’호가 수면 아래로 내려 가는 순간까지 선박의 조명과 구난 통신을 지원했던 조셉 벨(Joseph Bell) 기관장과 모든 기관사들은 배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아울러 퇴선하는 승객들과 배에 남겨진 승객들을 위해 연주를 그치지 않았던 연주자들을 기리는 ‘타이타닉’호 연주자 추모비(Titanic’s Musician’s Memorial)와 부원(Crew), 객실 승무원(Steward), 화부(Fireman)들을 기리는 추모 분수(Memorial Fountain) 등 사고의 희생자들과 최후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물들이 시내 곳곳에 있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의 동상은 영국 중부의 소도시 리치필드(Lichfield)에 있는데, 막상 그의 고향 스트로크 온 트렌트(Stroke-on-Trent) 당국은 동상을 세우는 것이 불명예스럽다고 거부하였기에 아무 연고도 없는 인근 리치필드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한때 리치필드에서도 이 동상을 스트로크 온 트렌트로 보내버리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다면 타이타닉호 항해사 추모비는 어디 있을까? 없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신성모
사우스햄턴시청 지하에 있는 시 문서보관소(Southampton archives)를 방문하여 상선 선원 중앙 색인(Central Index of Merchant Seaman)에서 고 신성모 학장님을 한번 찾아보았다. 영국 런던 근교의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와 카디프(Cardiff)의 선박등록원(UK Ship Registry), 그리고 사우스햄턴시 문서보관소에는 1835년 이래 영국 선적 상선에 승선했던 모든 선원들의 기록이 분산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사우스햄턴시 문서보관소에는 1918년부터 1941년까지의 선원 색인, 이른바 4차 명부(Fourth Registry)가 소장되어 있다. 신성모 학장님의 영문 이름 SHIN, SUNG MO와 출생 연도, 그리고 국적을 한국, 중국, 일본으로 각각 적어 자료 신청 카드를 제출했다. 카드를 갖고 사라진 사서가 얼마 뒤 돌아와 해당 인물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아쉬웠다. 좀 더 사전 조사를 하지 않고 그냥 간 탓도 있고 혹시 영국 선적이 아닌 선박에서 승선하셨을 수도 있다. 신성모 학장님은 중국 우쑹(吳淞)상선학교와 난징(南京)항해대학을 거쳐 영국 킹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을 졸업하고 선장 면허를 취득하였다고 한다.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941년부터 1972년까지의 선원 색인인 5차 명부(Fifth Registry)가 있다. 최근 들어 4차 명부는 인터넷으로도 검색이 가능해졌는데, 5차 명부는 여전히 직접 방문하거나 국립문서보관소에 인터넷으로 유료 조사를 의뢰하여야 한다.


신성모 학장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논문을 찾아 읽은 후에야, 사우스햄턴 시 문서 보관소 4차 명부에서 신성모 학장님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성모 학장님은 영국에서 공부하던 당시 영문 성을 ‘SHIN’이 아닌 ‘SIHN’으로 표기했고 광복이 되어 귀국한 후 국방장관으로 재직시에도 SUNG MO SIHN이라는 영문 성명을 사용했다. 4차 명부를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출생 연도와 함께 그리고 출생 연도 없이 다시 한번 SIHN, SUNG MO를 검색해보았다. 모두 세 건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S.M. SIHN, SHIN, S.M 그리고 SIHN SUNG MO. 첫번째 S.M. SIHN은 1903년 일본생. 두 번째 SIHN, S. M.은 출생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선원수첩 번호(Dis. A. No.) ‘R81983’이 동일하다. 세 번째 SIHN SUNG MO는 영국 런던을 출발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베인(Brisbane)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승객으로 승선한 영국 국적의 상선사관(Merc. Marine Ofcr.)이며 인도 봄베이(Bombay)에서 하선할 예정이고 1939년 당시 나이는 36세.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 대종교 신자인 신성모 학장님은 중국 망명 시기 ‘신철(申澈)’이란 가명을 쓰기도 했고, 1925년 조선총독부는 입수한 불온(不穩) – 그들 입장에서 - 간행물의 해외 배송지 명단을 통해 신성모 학장님의 영국 집 주소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출생 연도를 실제 1891년이 아닌 1903년으로 위장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는 항해대학 입학문제 때문에 나이를 낮춘 것으로도 추정된다. 실제와 기록된 출생연도의 차이는 킹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의 후신인 현재 런던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신성모 학장님의 학적과 비교하면 좀더 명확하게 규명될 터인데, 1934년 학교로 돌아와 한 학기 수업을 이수한 신성모 학장님의 등록 카드(Enrollment Card)에는 나이가 30세로 기재되어 있어 상선선원 색인 4차 명부로 추정할 수 있는 1934년 당시 나이 31세와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신성모 학장님의 이름을 S.M. SIHN 혹은 SIHN, S.M.으로 기록한 상선사무소 (M.M.O, Mercantile Marine Office) 담당자를 보건대, 학교 학적 기록 담당자 역시 1903년생을 서른 혹은 서른한 살로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상선 선원 색인 기록과 런던 메트로폴리탄대학교 학적은 모두 신성모 학장님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39년의 영국 국적은 영국에서 공부하고 취업함으로써 취득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성모 학장님이 3등항해사로 승선한 임페리얼 프린스호(SS IMPERIAL PRINCE)는 1922년 영국 미들즈브러(Middlesbrough)에서 건조되었으며, 총톤수 8,022톤, 길이 143.9미터, 너비 17.7미터, 깊이 11.7미터이다. 2등항해사로 승선한 ‘퍼시픽 엑스포터’호(MV PACIFIC EXPORTER)호는 1928년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건조되었으며 총톤수 6,723톤, 길이 132.9미터, 너비 18.3미터, 깊이 8.8 미터이다. 승객으로 승선한 ‘스트라탈란’호(SS STRATHALLAN)는 1937년 영국 바로우(Barrow)에서 건조되었으며, 총톤수 23,722톤, 길이 202.5미터, 너비 24.4미터, 깊이 10.23미터로 1,100여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다.


‘스트라탈란’호의 여객 명부(Passenger Manifest)는 (1)번부터 (9)번 항목까지 나뉘어져 여객의 성명, 주소, 나이, 객실 등급 등의 정보가 기재되어있다. 여객 명부에 타이핑된 신성모 학장님의 영국 내 주소는 47, Avenue Road, E.7으로 런던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런던 동부의 주택가에 위치해있다. 주목할 것은 (9)번 항목으로 향후 영구 거주 의도 국가(Country of Intended Future Permanent Residence)를 기재하는 란인데 신성모 학장님은 ‘인도(India)’로 표시되어 있다.
신성모 학장님은 영국에서 승선 생활을 한 다음 영국을 떠나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였던 바, 이 여객 명부를 근거로 1939년 6월 9일 런던에서 스트라탈란호에 승선하여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이 되기 위해 인도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 세 건의 기록 외에 현재 인터넷에 누락되어 검색되지 않는 일등항해사와 선장 승선 기록 등이 추가로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 신성모 학장님에 대한 사실(史實)은 많은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 봄베이(Bombay) 상선회사 고문, 영국 엑스트라 마스터(Extra Master)자격 등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는 듯하다. 앞으로 신성모 학장님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이를 미래 세대에게 올바로 전하는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려 한다.

 

세 번째 영국 선장
지난 9월 와사시해양대학 학생들은 런던 국제해사기구(IMO)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선원의 경력과 숙련도 개발에 대하여 발표하고 임기택 국제해사기구 사무총장님을 예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당장 학교 수업과 시험 성적에 관련이 없을지라도 와사시해양대학 학생들은 자국의 수도 런던에 자리한 국제해사기구에서 열리는 각종 포럼과 회의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회의실 의자에 앉아 학생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전 세계에서 마리타임 런던(Maritime London)으로 찾아온 각국 대표들의 연설과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치열한 논쟁들을 지켜보며 해양강국 영국의 위상을 실감하고 앞으로도 이를 변치 않게 유지시키겠다는 다짐, 각오를 하였을까? 지난 2019년 초 영국 교통부는 ‘Maritime 2050 : navigating the future’라는 장기 정책 보고서를 발간했다. 요약본이 5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보고서를 통해 탄소 절감, 무인 선박 등 급변하는 미래 해운 환경에서도 해양 선도국의 지위를 결코 내주지 않겠다는 영국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2019년 5월 와사시해양대학은 700만파운드(한화 약 109억원)을 들여 영국 최대이자 유럽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해상 시뮬레이션센터 중 하나를 개관했다. 개관식에 참석한 영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영국이 세계적인 해운 및 선원국으로 남도록 영국 정부의 ‘Maritime 2050’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데 이 센터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와사시해양대학은 해상, 소화 교육을 제외한 전 과정을 사우스햄턴 시내에서 교육하고 있다. 선장 및 일항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은 세 학기를 모두 영국에서 공부하는 대신 한 학기는 자국에서 편리하게 온라인 교육으로 마치고 두 학기만 영국에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세계 해운계에서 실력과 성실함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한국 해기사들 중에 관심 있는 이들이 준비하여 앞으로도 세 번째, 네 번째 영국 선장이 계속해서 배출되길 소망해본다.
승선 중 뵌 선장님들과 와사시에서 만난 모든 친구들, 와사시해양대학 교수님들, 그리고 한국해양수산연수원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혹 누군가 연수원 교수님께 나에 대하여 질문을 했을 때, “그 친구, 내가 잘 알지. 내가 가르쳤잖아”라는 답을 듣게 된다면 그것 또한 교수님들이 내게 주시는 더없는 칭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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