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양대학 입학과 신성모 학장의 해양대학 쇄신

보양사그룹의 45년사와 동그룹의 김옥정 회장 회고록을 담은 ‘보양만어기(寶洋滿魚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창업 전사(前史)’와 ‘바다 경영’ 2부로 구성돼 있는 보양만어기의 내용중 △수학기(한국해양대학교 입학이후) △창업기 △도전기 △안정기 부분을 선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56년이 밝아 졸업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진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집안 형편에 일반대학 갈형편은 안 되었으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사관학교는 키가 작아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화학과 A반에서 상위 5등 안에 드는 이현옥李鉉玉이 해양대학 입시가 다른 대학 보다 빠른 데 응시한다며 지원서를 사러 간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뭘 배우는 데고?’라고 물으니, 현옥이는 ‘학비도 안 들고 졸업하면 외국에도 나간다’고 대답했다. 


나는 솔깃해 ‘내 것도 하나 사다 주라’고 부탁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이현옥, 이권석李權石, 나는 항해과를 지원했고, 양두태梁斗台는 기관과를 지원해 나와 양두태 2명만 합격했다. 양두태는 기관과 4등으로 합격하였고, 나는 영어 성적은 좋았지만, 수학이 좀 못 미쳐 항해과 15등으로 합격하였다.
특차 전형 합격생 중 자기 학급에서 1등 했다는 친구가 절반 이상이었고, 입시 경쟁이 치열해 재수와 삼수를 한 동기가 절반 이상이었다. 


관립학교의 특성상 정부 등 권력기관의 추천으로 입학한 보결생과 엄한 학내 규율로 발생한 낙제생 등이 추가되어 학년 정원 120명 5에 30여명이 추가되어 입학시 동기생은 150여명이었다. 책상은 오른쪽부터 성적순으로 배치되어 앉은 자리가 곧 성적이었다. 따라서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최우수 학생으로 교반장을 맡았다. 소문으로 듣던대로 학교생활은 만만치가 않았다. 하루일과가 시간표에 맞춰 짜여 있었다. 학과 공부 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좌석은 성적순으로 배치되었는데, 교수들은 성적이 좋은 학생 쪽만 바라보고, 성적이 좋지 않은 쪽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수업을 하는 분도 계셨다. 한번은 대선배인 S 교수가 과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팔을 걷어붙이고좌석에 앉은 순서대로 한 대식 빰을 올려붙이다가 제풀에 지치셨던지 “팔도 아프고, 때려줄 가치도 없다”며 그만둔 적도 있었다.


이처럼 힘든 나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 후에 승선할만한 국적선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학업 경쟁이 치열했다. 따라서 소등이 되고 난 뒤에도 화장실에 가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때 귀가하니 몸무게가 3kg이나 줄어 있었다. 2학기 개학을 하고 나니미복귀 학생이 3명이나 되었다. 당시는 학생지도를 교수들이 직접 했는데, 학생지도라는 것이, 마치 일본군 요카렌豫科連7 하사관 출신들처럼, 기강을 잡는다고 설쳤다. 


3학년 10기생들이 거의 매일 밤 비상을 걸어 훈련을 주고 별별 이유를 대며 빠따를 치니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우리 분대장인 10기 정연통 선배는 ‘상선사관 정신 배양’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어떠한 명분으로 빠따를 치는지 알 수가 없었을 뿐더러 분대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입학 당시인 1956년 4월에는 한국해양대학이 상공부 관할이었으나, 7월에 문교부로 관할이 바뀌었다. 게다가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등록금도 납부하고, 약간의 국비 보조를 받는 대학생 신분인 우리가 왜 이러한 처우를 받아야 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우등생들도 결국 복종형 인간이 되는 것이 불 보듯 뻔한 지라 웬만큼 사는 집의 학생이라면 자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신성모 학장의 부임과 해양대학의 쇄신
1956년 4월 입학 당시에는 이시형 학장이셨는데,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신성모 학장이 1956년 11월 말에 취임하였다. 
신성모 학장은 “내가 해양대학을 위해 안할 일이 없고, 못할 일도 없을게야”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은 1958년 해군예비원령 시행(대통령령 1935호), 교가 제정, 1959년 실습선 반도호 확보, 교수들의 학위 취득 등 한국해대 발전의 초석을 놓으신 것으로 입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환영을 받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면학분위기 쇄신을 위해 주말 외출을 금지한 것이다. 신성모 학장은 상선사관 후보생들은 사관생도와 같은 생활을 하므로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외출을 금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가장 기다린 시간은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의 외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외출도 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공부하라는 것이 신성모 학장의 방침이었다. 유일하게 허용된 외출은 교수의 인솔하에 단체로 동삼동교회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1학년 겨울 방학 때는 부산에 사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남아 2기숙사 뒤편 경치석傾置石 공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경치석 공사를 총지휘하신 분은 이준수 학생과장(재임 : 1955.3-1957.3)으로 3학년인 10기 3명(김부현,노규환, 장상봉), 2학년인 11기 2명(김문희, 이경준), 1학년인 12기 2명(나와 전효석) 등이 차량으로 옮겨온 경치석을 쌓고, 시멘트를 섞어 보강하였다. 마침 격려차 공사 현장을 방문하셨던 신성모 학장은 잠시 짬을 내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세기 말 개화기 때 영국에서 중국, 일본과 수교하면서 두 나라에서 각각 50명을 해군사관후보생으로 뽑아 2년간 단기양성교육을 시켰다. 이들을 수료시킨 기념으로 영국은 중국과 일본에 각각 범선 1척씩을 선물했다. 중국의 생도들은 ‘우리는 장교 교육을 수료했으니, 수병들을 배승해야 출항할 수 있다’고 말한 반면, 일본 생도들은 1등이 선장, 2등이 기관장 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자력으로 범선을 출항시켜 귀국했다. 사관은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할 수 있어야 하며, captain is last여야 한다”


신성모 학장이나 이준수 학생과장 등 선배 교수들에게 겨울방학 동안 눈에 든 덕분에 ‘적응하기 힘들고 염증나는 대학’이라 여겨왔던 나의 해양대학 생활은 180도로 변하게 되었다. 해양대학 재학 동안 나는 부족한 리더쉽을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양두태와는 졸업 후에도 인연을 이어갔다. 원래 진주중학을 다니다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와 경남공고 2학년으로 전학해 같이 다녔다. 양두태는 해양대학 졸업 후 해운공사 소속선의 전기사로 승선 중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현지 한국인을 따라 하선해 브라질에 정착하였다. 내가 Uno호와 Dos호를 아르헨티나 해역으로 출어시킬 때인 1985년 경 양두태를 브라질 현지의 대리인으로 지정했다. 그는 브라질 해역 입어를 위해 노력했지만 무사되어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신성모 학장이 부임한 이후, 즉 1학년 말부터 한국해양대학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해양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배의 당직과 운항처럼, 시간에 맞춰 짜여진 생활이었지만 1학년 때와 같은 야간훈련이나 빠따같은 것은  그 가도와 빈도가 많이 완화되었다. 신성모 학장은 일본식 요육은 안된다는 신념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이시형 학장을 학교에서 물러나게 했고, 교수들도 국내 저명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실력을 쌓게 하셨다. 이는 이시형학장 제자들을 내쫓는 모양새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해양대가 1956년 문교부로 이관되면서 졸업생들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해야 하는데, 교수진은 학사학위가 아닌 수료증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교수자질 향상 프로그램으로 1957년 허동식 교수(해상법)와 김용성 교수(기계학)가 서울대학교로 1958년에는 이준수 교수가 경희대학교로, 1959년에는 손태현 교수(경제학)가 연세대학교로 각각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렇듯 교수진이 빠져나가게 되자 후임으로 항해 2기 김수금 선장이 1958년 2월에 교수로 취임하였고, 성철득 선장이 초빙강사로 오시게 되었다. 관사에 입주하셨던 김수금 교수와의 의사소통도 잘되었고, 부인(곽명열)도 삼천포 출신으로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왜 두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당대 명선장 중 한명인 성철득 선장이 매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성철득 선장은 경남공고 동기인 성유수成劉秀의 삼촌이었다. 성철득 선장은 1952년 11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해사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소속은 부산수산대학 교수였다. 성철득 선장은 1959년 4월 대한해기원협회의 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는데, 이때도 부산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60년 6월 한국선급협회가 설립될 때 발기인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때 소속은 대한해운공사업무부장이었다. 마침 삼촌이 해양대학의 초빙강사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유수가 “삼촌, 김옥정이가 공부도 잘하고 늘 일등만 하는 모범생인데, 규율 엄한 데서 잘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내 이름을 상기시켰던 모양이다. 3학년이 되어 김수금 교수와 성철득 선장이 나를 각별히 챙겨주니 나의 해양대 생활은 꽃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두 차례의 대리시험
1957년 2학년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초봄이었다. 저녁 온습 시간에 경남공고 화학과 동창인 이○○이 케이크 한 상자를 들고 학교에 찾아와 부산사범대학 대리시험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은 “너희 봄 방학 중 부산사범대학 입시가 있어 지원했는데, 자신이 없으니 시험 좀 봐도 이모가 교수로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될끼다”고 말했다. 나는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와 체격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승낙하고 말았다.
시험일이 되어 번호표를 달고 입실하니 영어 문제가 의외로 어려워 영어시험을 마치고 이○○에게 ‘야, 안되겠다. 영어가 어려워 잘 못 봤다. 그냥 집어 치우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는 울상을 지으며 낙담하기에  ‘기왕 나섰으니, 함 해보자’라고 안심 시키고 나머지 시험을 치렀다. 3일 뒤 합격자 발표에 이○○가 ‘영어 최고 점수로 합격했다’며 기뻐했다. 봄 방학이 되어 이○○와 국제시장을 휩쓸고 다녔고, 여관에 취직한 박수철朴壽喆이를 찾아가 화투놀이로 짧은 봄방학을 보냈다.


3학년 봄방학(3월 21-31일까지)이 되자 나는 또한 차례 경남공고 친구 박○○의 대리시험을 치러야 했다. 1교시에는 국어였는데, 13번 ‘박○○’ 하고 부르길래 ‘예’하고 대답하는 데 감독 선생이 놀라는 것이었다. 
감독 선생이 경남공고의 국어 선생이었던 윤동철 선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고개를 돌려 외면하니, 윤동철 선생도 못 본 척 넘어 간다. 며칠 뒤 박 이 온습시간에 찾아와 ‘수학과를 지망했는데, 면접관이 경남공고 대수학 선생이었던 이대경李大經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이 선생님은 ‘박, 공부를 많이 했구나’라며 반겨주었다고 한다. 피난 학교 시절 무질서한 행정으로 이러한 대리시험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감독들도 ‘교직원 누군가가 뒤를 봐 주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12기의 해대 생활
3학년이 되어 김수금 교수의 배려로 13기 2학년 항해과 2분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2분대에는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이태웅과 김국립 등 쟁쟁한 친구들이 포진해있어 나 혼자 후배들을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나보다 2년 연상으로 양정고 럭비부 출신인 동기 최정익崔正翼이 2분대 부副 분대장을 맡았다. 게다가 1년 연상에 체격도 크고 다부진 용산고 출신 김승구金承九가 갑판사관을 맡아 후배들을 지도하니 편안하게 분대장 노릇을 하며 3학년을 보냈다.


민둥산을 가꿔야 한다고 4월 5일을 식목일로 지정한 것이 1949년이었다. 전쟁 후라 산은 더욱 피폐해졌던 지라 해양대에서도 4월 5일에는 교내 주변과 봉래산에 나무를 심었다. 3학년 때인 1958년 나는 2학년인 13기 2분대원 전원을 이끌고 해양대 동삼동 교사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해양대가 1974년에 아치섬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부산 남고등학교로 바뀌었는데, 지금도 내가 심어놓은 소나무가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는 한번 출항하면 몇 주 또는 몇 달을 항해해야 하니 선원들은 상륙할 수가 없다. 해대생들도 이와 똑같은 원리에 따라 신성모 학장이 부임하고 나서 일요일 교회를 다녀오는 것 이외에 주말 외출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 덕분에 교회를 다니지 않은 학생들도 외출을 위해 교수를 따라 동삼교회에 가서 예배도 보고, 떡도 얻어 먹고 귀교하기도 했다.


외출이 금지된 주말에는 중리 바다로 나가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하루는 낚시를 하고 있는 데 무엇인가 걸린 것 같은 감이 와 줄을 잡아당겼는데, 전혀 당겨지지 않아 큰 것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감아 올렸다. 올려보니 5cm 정도의 새끼 병어 등지느러미에 낚시바늘이 꽂혀 있었다. 한번은 주말 외출 금지로 답답해 하던 2분대 전원이 집단으로 탈사를 감행해 고구마와 막걸리를 사 먹여 분대장으로서 분대원의 사기를 높여주기도 했다.현재 한국해양대학교는 2학년 여름방학 때 해양훈련을 실시하지만, 당시에는 3학년 때 1주일간 실시했다. 1956년 4월 입학 당시 김승만 교수가 체육담당으로 계셨는데, 56년 7월에 부산교대로 옮기셨지만, 출강을 계속하셨다. 김승만 교수는 일본 큐슈사범대학을 졸업한 6척 장신에 유도 유단자였다. 여름방학에 실시된 해양훈련 때 3학년생들과 1주일간 합숙을 같이 하며 해양훈련을 지도하였다. 그분의 모토는 ‘수영 3시간이면 준비체조도 3시간’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준비체조에 진을 다 빼니, 해양훈련 중에 인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2시간 유영으로 해양훈련이 종결되는데, 나를 포함해 12명만 통과해 자격증을 받았다. 해양훈련 최종일에는 각 영법별로 수영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50m 접영에 출전했다. 총 6명이 출전했는데, 수영선수인 곽승희가 첫 번째로 들어왔지만, 중간에 부정 영법泳法을 사용해 실격 처리되어 2착인 내가 우승을 차지했다.


내가 주번사령일 때의 일이다. 마침 교내 순찰을 하는 도중 학장실을 지나가고 있는데, 신성모 학장이 ‘김군, 들어오게’하는 것이었다. 학장실로 들어가니 주치의인 한의사가 신 학장을 진료하고 있었다. 신 학장이 ‘요즘, 식사는 어떤가?’ ‘하급생을 너무 심하게 닦달하지는 않은가?’ 등을 물으시며, ‘자네도 한번 진맥 받아보게’라고 권하시는 것이었다. 주치의는 한참 내 진맥을 짚어보더니 ‘심장판막증이 있으니 치료를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이것이 엉터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사실로 판명되었다.
몸집이 장대한 성철득 선장은 학교에 출강하여 해상충돌예방규칙을 강의하셨다. 마침 교실을 순찰하던 왜소한 신성모 학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성철득 선장이 거수경례로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의 웃음이 터졌다. 경례를 받은 신 학장이 우리를 향해 ‘단성 1성 신호는 좌로 가나? 우로 가나?’라고 질문을 던지시는 것이었다. 학기 초라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경북고에서 2학년에 월반해 한국해양대에 3등으로 입학한 수재 배성곤이 손을 번쩍 들더니 ‘좌로 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신 학장은 ‘그래 맞았네’라고 말씀하시며 교실을 나가셨다. 우리들은 영문도 몰라하고 있는데, 성철득 선장이 그 내막을 말씀해주셨다. 

 

성철득 선장은 ‘For safetyupon the sea, navigator should be acted, positive, in ample time, with good seamanship’라고 부연 설명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단성 1 성은 우현으로 변침해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위급할 때는 명확한 행동을 취하면 상대도 ‘내가 잘못 들었구나’라고 생각하여 상대선의 움직임에 따라 조선을 하게 되니, 긴급시 조선에서는 positive, 즉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충돌을 예방하는 최선이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동삼동 지국 운영
어려운 시절이라 학생들이 이러저러한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11기 박경현 선배가 경향신문 동삼동 지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4학년이 되어 실습을 나가야 해서 이를 인수해 보지 않겠느냐고 내게 제안해 왔다. 박 선배는 ‘보증금으로 3만환(당시 쌀 한가마니 값)을 경향신문사에 공탁해야 하니 돈을 구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동기생인 김문옥金文玉의 의견을 들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해 한번 해보기로 했다. 토요일 밤 순검이 끝난 뒤 몰래 탈사脫舍를 감행해 동삼동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부용동에 계시는 큰외삼촌 댁을 찾아가 거금을 마련해 돌아왔다. 사전에 말을 맞추어 둔 김문옥이가 반갑게 맞아 주며 박경현 선배에게 공탁금을 건네고 경향신문 동삼동 지국을 인수하였다. 다음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동삼동 교회에 다녀오는 틈을 타 배달을 맡은 배삼칠 군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동삼동 지국을 운영하는 것은 힘든 일이 별로 없었다. 당시 학교 주변에서 신문을 보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았고, 주로 해양대생들이 보았기 때문에 신문 배포와 대금 수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 1부당 수수료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 달에 한번 정도로 판매 부수의 5% 정도를 판촉용으로 ‘지국장 무가지’로 제공되었다. 이를 교내에 나눠주면 추가로 구독하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입이 괜찮았다. 문제는 동삼동에 배포하는 배 군이 수금한 돈을 형들에게 뺏기는 일이 있어 이것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1959년 4학년이 되면서 좌학은 종료되고 승선실습만 남았다. 1, 2학년 성적은 항해과 7등 정도였고, 3학년은 분대장 등의 학내 활동을 감안해 가산점이 부여되어 이윤수, 김경구, 배성곤, 조판제에 이어 5등으로 올라갔다. 실습을 나가야 했으므로 1959년 4월 경향신문 동삼동 지국을 김문옥의 수배로 그의 방어진 후배인 13기 양호춘에게 양도했다. 동삼동 지국을 정리하고 경향신문 부산지사에 인사차 들렀더니, 한양우 지점장과 오종식 부장 등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편집국의 정태식 과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니, ‘그동안 수고했다’면서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1차로 국제시장의 갈비집에서 갈비를 먹고, 2차로 단골 술집으로 이동하여 청주(정종)를 마시기 시작하니 통금시간이 다 되었다. 정 과장은 통금 제외된 취재 차량을 타고 귀가해 버리고, 나는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술집에 남아 계속 술을 마시고 뻗어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며칠 뒤 경향신문 부산지사를 방문해 정 과장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고 인사를 드리니 분위기가 썰렁했다. 정 과장은 손을 설레 설레 흔들며, “말 마소. 인자 죽었어요. 하루만 늦었더라도 당신 저녁 식사도 없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경향신문의 주요한 논설위원의 ‘여적’ 사건으로 정부로부터 어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195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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