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는 ‘쉼’이다

해양수산부가 주최하고 한국해운조합이 주관한 ‘제7회 섬여행 후기 공모전’에서 대상 1편,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바다로 특별상 1편 및 장려상 10편 등 총 15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本誌는 해운조합의 협조로 2월호에 대상(이리나) ‘길은 걷는 자의 것이고, 섬은 건너는 자의 몫이다’, 3월호에 최우수상(신민영) ‘어린 날의 섬, 사량도’ 연재에 이어 4월호에는 우수상(나호선) ‘내 거울이 비추는 곳, 덕적도’를 실었다. 이번 호에는 우수상(최옥숙) ‘청산도는 ‘쉼’이다’를 게재한다.-편집자 주-

 

살랑이는 봄의 끝자락, 손녀딸과 둘만의 여행에 나섰다. 결혼을 앞둔 손녀딸과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어 급하게 결정한 여행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여행지는 느림의 미학이 살아있는 섬, 청산도(靑山島)였다. 결혼을 앞두고 심경이 복잡할 손녀딸이 청산도에서 지친 마음을 풀어놓고 푸릇한 생기를 가득 채워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섬 여행에는 여느 여행과 비슷하면서도 남다른 특별함이 감춰져 있다. 통상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여행자에게 낯선 떨림으로 다가오기 마련인데, 그 떨림에는 예사로운 것을 예사롭지 않도록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마법이 숨겨져 있다.
이번 청산도 여행을 통해 아직 한 번도 섬을 경험해보지 못한 손녀가 섬이 주는 색다른 매력에 대해 알게 되기를 바랐다.


오전 여덟 시. 한산하던 완도여객선터미널 안이 친구, 가족, 연인, 출사 단체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여행객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섬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으로 여행길에 나섰기 때문일까. 여객선을 타기 위해 몇 시간을 달려왔을 텐데도 어느 누구의 얼굴에서도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승선이 시작되었다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퀸청산호로 향하는 사람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에는 청산도에 대한 설렘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장단을 맞추듯 뱃머리 쪽에서 뱃고동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내 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섬에 대해 그리움을 토로하는 시인의 노래처럼 들렸다. 우리의 기분도 덩달아 들뜬다. 이렇게 가슴 가득 설렘이 차오른 여행이 언제였던가 싶다.


섬 여행이 특별한 것은 여객선을 타고 가기 때문이다. 손녀와 함께 여객선에 올라 탁 트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을 바라보자, 마치 우리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그 어느 경계쯤에 다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여객선이 섬에 닿을 때쯤이면 아마 우울한 회색빛 도시와는 전혀 다른, 생동감 넘치는 낯선 세상이 주는 매력에 푹 빠져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손녀의 손을 잡고 갑판 위를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퀸청산호 곳곳에는 그간 여행자들이 쌓아온 추억과 즐거움, 웃음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승객들의 안전을 고려한 세심한 배려도 돋보였다. 배 곳곳에는 구명조끼가 구비되어 있었고, 안전을 위한 안내 방송도 수시로 나왔다.


여객선 위에 서서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풍기는 바다 내음을 맡고 있으니, 빡빡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고 느슨해진 마음자리로 해방감과 설렘이 슬며시 스며들었다. 나는 비금도 하트해변, 삽시도 석간수 물망터, 사량도 옥녀봉 출렁다리 등 그동안 섬 여행을 다니며 경험했던 가슴 벅찬 풍경과 감동들을 손녀 앞에서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약 1시간 후 퀸청산호가 청산도 도청항에 다다랐다. 이제 막 청산도에 첫발을 내딛으려는 사람들과 청산도에 추억을 한 아름 남기고 떠나는 사람들이 여객선을 사이에 두고 교차했다.
‘청산도는 쉼이다’


섬으로 들어가는 초입, 조형물에 새겨진 글귀가 마음에 평안과 안정감을 전해준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이 천천히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계바늘처럼 오랜만에 ‘빨리’를 내려놓고 ‘느리게’ 시간을 보내볼 참이다. 대자연의 품안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 자신과 대화하고 손녀와 추억을 쌓으며 삶의 여유와 느림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슬로길은 푸근하고 아름다운 섬 풍경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슬로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청산도를 빙 둘러서 하나의 길로 연결한다. 제각각 다른 멋을 지닌 열한 개 코스로 나뉘어져 있으며, 마라톤 코스와 똑같은 42.195㎞로 구성돼있다.
섬을 즐기는 가장 좋은 여행법은 섬 구석구석을 두 발로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나는 손녀와 함께 항구의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서 슬로길 1코스인 바람의 언덕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바다가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머릿속에 상상만 해오던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눈으로 들어온 바다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산도 곳곳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귀가 즐거웠다. 낮은 돌담길, 나지막한 지붕, 달팽이 표지판, 유유자적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 내게는 섬 전체가 하나의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왜 슬로우시티로 지정되었는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써 멀리에서까지 찾아오는지 알 것 같았다.
손녀와 보폭을 맞춰 느리게 걸으며 소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함께 여행을 오면 이렇게 벅찬 순간들을 같이 누릴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것 같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행복을 함께 나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거든”


이토록 황홀한 길 위에서 손녀와 소중한 순간을 함께 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져 코끝이 찡했다.
1코스는 슬로길 중에서 제일 유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가 1코스에 들어서자, 호젓한 당리 마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심 대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기 때문일까. 마을 곳곳에서는 청산도만의 여백의 미가 느껴졌다.
4월이면 유채꽃으로 뒤덮인다는 서편제길이 지금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란 파도가 넘실대는 장관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손녀와 나도 잠시 일상의 무게를 덜어내고 휴식이라는 쉼표를 찍어본다. 기지개를 쭉 펴니 가슴 사이를 툭 밀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살아온 것은 무엇일까. 청산도는 삶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거라고 가만 일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청산도는 이곳을 찾는 이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주는 섬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봄의 끝자락이 이렇게 생기 넘치고 싱그러울까요? 역시 할머니랑 청산도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손녀는 어느새 청산도의 매력에 푹 빠졌다. 평소 내가 왜 그렇게 섬 여행에 대해 말해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표정이다. 
1코스를 다 둘러본 우리는 청산도 투어버스를 타고 구들장논과 다랭이길이 있는 6코스로 향했다. 한참 투어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저 멀리 청산도의 상징인 구들장논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기사님이 구들장논에 대해 구수한 사투리로 맛깔나게 설명을 해줬다.


구들장논은 우리나라의 전통 난방방식인 구들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농경지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지혜와 땀방울로 빚어낸 것이다. 구들장논은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구들장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논을 조성한 다음, 구들장 벽에 방고래와 같은 수로를 만들어 맨 위의 논에서 시작된 물길이 맨 아래 논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이 지역 특유의 농경방식이다.
버스기사님은 구들장논이 세계 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 되었다고 소개하면서, 그 독특하고 빼어난 경관에도 한번 주목해볼 것을 권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구들장논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터져 나올 만큼 논들의 곡선이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푸릇푸릇한 빛을 발하는 논들이 마을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음에 안식을 주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손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론 돌담을 훑으며 천천히 고샅길을 걸었다. 청명한 여름 하늘이 내 느린 걸음에 맞춰 천천히 뒤를 따라왔다.
마늘농사가 한창인 마을 주민들과의 조우는 유쾌하고 정겨웠다. 뭍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가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밀어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환한 웃음을 건네며 푹 쉬었다 가라고 곁을 내어줬다. 청산도 풍경에 취하고, 섬마을 사람들의 푼푼한 인심에 취해 우리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마을에서 머물렀다.
걸음을 옮겨 해안길을 따라 바다에 다다르자, 때마침 일몰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바다가 점차 선홍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온 세상이 붉은 빛으로 뒤덮인다. 눈이 시리도록 붉고 아름다운 하늘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석양에 잠긴 청산도 바다가 손녀딸의 고운 얼굴에 물들어간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은 순간이다.
“결혼을 해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잊고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게 되더라. 그러니까 살면서 너무 지치거나 힘들 때는 이렇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한숨 돌리는 시간을 갖도록 해. 고달픈 삶의 넋두리 일랑 자연 속으로 던져두고, 마음을 한없이 자유롭게 풀어두렴”


조곤조곤 들려주는 내 얘기에 손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도청항에 가서 저녁거리로 우럭회와 소라회를 샀다. 인심 넉넉한 청산도 아주머니가 해삼을 덤으로 주셨다. 평상 위에 차려진 푸짐한 저녁식사. 손녀딸은 청산도의 맛과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우럭회와 소라회는 모두 달보드레한 맛을 품고 있었다. 입 안 가득 청산도의 바다향이 퍼져나갔다.
우리는 도청항에 위치한 민박집을 찾아서 들어갔다.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왔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청산도의 밤공기는 달콤했고, 이름 모를 풀벌레의 노랫소리는 밤새 끊이지 않았다. 긴 시간 함께 하며 쌓아온 행복한 사연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풀어내느라 손녀와 나는 그만 하얗게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청산도의 새날을 활짝 열어젖힌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우리의 머리 위로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을 쏟아낸다.


손녀와 나는 범바위가 있는 슬로길 5코스로 향했다. 우리처럼 아침 일찍 슬로길 산행을 나온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듯 쑥스러움이 섞인 인사를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슬로길에서는 누구든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슬로길은 길 위에 선 모든 이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특별한 힘을 가진 듯했다.
손녀와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범바위로 향했다. 자기장을 뿜어내 나침반까지 멈추게 한다는 범바위에는 호랑이의 기운을 받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범바위를 바라보면서 손녀의 새로운 시작과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범바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이름처럼 모양이 웅크린 범의 모습과 같았다. 심지어 바람이 세게 불면 범의 울음소리까지 난다고 했다. 나는 범바위로 부는 바람이 손녀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깨끗이 씻어내 주기를 다시 한 번 기원했다. 범바위 정상에 서서 바라보는 섬 풍경은 오랜 시간 눈에 담아두고 싶을 만큼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범바위를 지나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상서 돌담마을로 향했다. 돌담은 청산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장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빈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쌓은 돌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이 됐다. ‘소확행’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나와 손녀의 마음 속에 있고, 자연 속에 있으며, 청산도에 있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 끝났다. 우리는 마음 한 귀퉁이에 남아있던 삶의 시름을 청산도 푸른 바다 한편에 슬며시 내려놓고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마치 청산도가 우리를 향해 다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 나도 청산도를 향해 답을 하듯 손을 흔들었다. 내 옆에 선 손녀도 ‘청산도의 풍경처럼 너른 품으로 배우자를 배려하고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손녀는 지금도 가끔씩 내게 청산도 여행을 언급한다. 손녀와 함께 청산도에서의 추억들을 얘기하다 보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되살아난다. 청산도의 푸르름을, 눈부신 에메랄드빛 바다를, 섬마을 사람들의 따스한 정을 떠올리면 지치고 시들은 마음이 어느새 물을 머금은 화초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오늘도 내 마음은 날렵한 여객선을 타고 느림의 섬, 청산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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