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의 느티나무가 정겨운 걸 보니 세월이 많이 흐른 듯하다. 지난 4월 발표된 정부의 거리두기 전면해제로 일상이 회복되어 오랜만에 거리와 식당이 북적거리며 활기를 되찾고 있다. 장기휴회 중에 안타깝게도 콤파스 회원 여럿이 작고하셨다. 최재수, 배병태, 김종길, 백옥인...... 이름만 들어도 느티나무 그늘같이 아늑하고 푸근한 분들이다. 함께 해운을 얘기하며 담소하던 시절이 마치 꿈만 같다. 그 빈자리를 도저히 메울 길 없어 마냥 허전하다.


푸틴의 야욕에 의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가며 피해가 막심하다. 도시가 초토화하고 특히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어 러시아의 만행에 세계가 공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힘겨루기 땅이던 우크라이나는 과연 어떤 나라이고, 또 러시아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그 역사를 통해 알아본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일본 외교관으로 주 우크라이나 및 몰도바 겸임 대사와 니혼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역임한 구로카와 유지가 쓴 책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 오레스트 수브텔리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최대 주제는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즉, 모든 나라의 역사 주제는 민족국가 형성과 발전이나 우크라이나는 국가라는 틀이 없이도 어떻게 민족이 살아남았는지가 역사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에 국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키이우 루시(루스) 공국은 10~12세기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키이우는 쇠퇴하고, 분가에 해당하는 모스크바가 부상하여 슬라브의 중심이 옮겨졌고, 루시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심지어 키이우 루시 공국은 우크라이나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라고 우긴다. 모스크바에서 발흥한 나라가 훗날 대국이 되어 러시아로 명명하고, 키이우 루시를 잇는 정통 국가라고 자칭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나라 없는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없다는 큰 결점과 언어와 문화 및 관습이 매우 비슷한 러시아를 이웃으로 두고도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으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키워갔다. 우크라이나는 코사크 시대의 독창적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병합된 후에도 러시아 역사 속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독립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이 점점 고조되었다.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인이 활약한 흑해 북안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 처음부터 스키타이인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문헌에 고유명사를 가지고 최초로 등장한 민족은 키메리아인이었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저서 오디세이아에서 흑해 북안의 땅을 키메리아인의 땅이라 칭했고, 이는 우크라이나 땅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언급이다. 키메리아인은 유목생활을 했고, 승마술을 익혀 전투에 사용했으며, 흑해 북안에 철기시대를 열었던 민족이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민족이 이란계 민족인 스키타이인이다. 그들은 기원전 750년경 카스피해 동쪽 연안에서 흑해 동북 연안으로 진출하여 드네프르 유역에 살던 키메리아인을 쫓아내고 그 땅의 주인이 됐다. 스키타이인은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중동지역을 석권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스키타이 땅에 사는 이들이 모두 유목민은 아니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농경 스키타이라는 집단이 왕족 스키타이라는 중추 집단의 지배 아래 있었다. 삼림이 우거진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며 농사를 지은 농경 스키타인 집단, 스텝 초원지대에 사는 유목민인 왕족 스키타이, 연안 도시에서 상업과 가내공업에 종사한 그리스인 등 세 집단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농경 스키타이가 슬라브인의 선조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스키타인은 매우 뛰어난 전사였다.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대왕의 원정을 저지할 수 있던 것도 기동력과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스키타이인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2000년이 지나도 유라시아 대평원에서 이 방식이 반복되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서도 스키타이인이 썼던 방식인 적을 오지로 유인하여 게릴라 전술로 승리했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4세기가 전성기로 왕족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분묘가 드네프르강 중하류와 크름(크림)반도에 남아 있다.

 

스키타인은 황금을 숭배했는데, 이는 인도-이란계 사람들의 세계관 및 종교관과 연결되어 있다. 스키타이 건국 신화에 따르면 왕-불-황금 삼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왕권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4세기경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이란계인 사르마타이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스키타이인을 몰아냈고, 이어 게르만계 고트족, 흉노의 후예 훈족, 아바르족, 불가르족 등이 잇달아 침략하여 지배했으나 스키타이인 같은 문화적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이렇듯 유목민족에 의해 스텝 초원지대가 유린당하는 동안, 흑해 연안의 패권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제국으로 돌아가 비잔티움 문화가 번성했다.

 

유럽의 대국 키이우 루시
일반적으로 공국 하면 왕국이 되기에는 부족한 작은 나라를 연상하기 쉬우나 키이우 루시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히 빛난 대국이었다. 전성기였던 볼로디미르 성공 시대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하여 그의 아들 야로슬라프 현공은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의 왕에게 시집 보낼 만큼 권력을 장악하여 유럽 왕들의 장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에는 키이우 루시가 아닌 루시로 불렸으나 그후 루시에서 파생된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됐고, 또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고자 키이우를 수도로 하는 나라 키이우 루시로 부르는 관례가 됐다. 키예프는 러시아식 표현이고 우크라이나 언어로는 키이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다른 개별 국가로 부상하자 키이우 루시가 누구의 것이고, 키이우 루시 공국의 직계 후계자는 누구인지 논제가 됐다. 러시아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키이우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가 됐고, 나라 자체가 소멸하여 계승자도 없었다. 이에 반해 키이우 루시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이우 루시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입장으로는 키이우 루시 공국의 정통 계승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역사가 관건이라며, 모스크바를 포함한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라 16세기가 되어야 핀어 대신에 슬라브어를 사용했고, 모스크바 공국은 키이우 루시 공국의 지배 아래 있던 비 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이우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또한 키이우 루시 공국은 가혹한 중앙집권체제인 러시아 소련 체제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국가로 몽골에 의한 정치사회 문화적 파괴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할리치나-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유럽을 구성하는 3대 민족인 라틴, 게르만, 슬라브 중에서 슬라브인이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가 가장 늦어 문헌상 6세기였다. 슬라브인이 원래 살던 곳은 남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 오데르강, 북쪽 프리퍄티강, 동쪽 드네프르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로 추정한다. 그들은 여타 민족이 살던 곳을 떠나 이동한 것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세력을 서서히 확장했다. 여기에는 슬라브인이 유목과 수렵 민족이 아닌 농경 중심의 민족이었던 요인이 크다. 슬라브인 중에서도 키이우 루시를 형성한 것은 동슬라브인이며, 이들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다. 키이우 루시의 건국 경위를 살펴보면, 바이킹인 바랴그인이 스웨덴에서 건너와 볼가강과 드네프르강을 이용하여 카스피해와 흑해를 거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바닷길을 개척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노브고로드 지역의 동슬라브인은 바랴그인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땅을 통치해달라고 요청하자, 자신을 루시라고 칭하는 수장 류리크가 이를 수락하여 일족을 거느리고 노브고로드에 당도하여 862년 노브고로드 공이 되었다. 이렇게 그들에 의해 루시라는 이름이 탄생하였고, 류리크는 키이우 루시 공국과 그후의 러시아를 통치하는 류리크 왕조의 선조가 되었다. 노브고로드에서 류리크가 죽자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일족인 올레흐가 후견인이 되어 키이우 공이 됐다. 올레흐는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이우로 옮기고 영토를 넓혀 광대한 땅을 지배하는 비잔티움 제국도 두려워하는 왕국을 건설했다. 올레흐야말로 실질적인 키이우 루시 공국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후 볼로디미르와 야로슬라프 현공, 모노마흐에 의해 루시는 황금기를 누렸고, 키이우는 당시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다. 1125년 현명한 군주 모노마흐가 죽은 후 1240년에 몽골이 키이우를 점령하기까지 한 세기에 걸쳐 키이우 루시 공국은 서서히 해체과정으로 접어들었다. 수도로서의 키이우와 대공의 지위가 저하됐고, 키이우로부터의 분리 독립 경향이 뚜렷해져 12세기에 이르자 10~15개의 공국이 나타나면서 키이우 루시 공국은 공국들의 연합체가 됐다. 그중에 동북부의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 북부의 노브고로드 공국, 서남부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힘을 갖게 됐는데,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에서 갈라진 것이 모스크바 공국이다. 키이우 루시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 러시아의 논리이나 우크라이나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의 90%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평가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시대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하고 17세기 중반 코사크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없었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키이우 루시 공국 시대에는 전역에 걸쳐 단일 민족을 이루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됐다. 그동안 모스크바 대공국, 폴란드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나뉘어 장기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키이우 루시 공국 말기부터 이미 분화가 시작된 언어도 이 시기에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 각각 독립된 언어가 형성됐다. 우크라이나 지명이 만들어지고 가장 우크라이나 다운 코사크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런 뜻에서 이 시기는 3세기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시절이었다.


리투아니아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슬라브도 게르만도 아닌 독립된 민족이다. 그들은 선사시대부터 발트해 연안에 살았고, 키이우 루시가 정교, 폴란드가 가톨릭을 믿었으나 리투아니아는 독자적인 신앙을 지켰다. 13세기 폴란드는 발트해 연안의 이교도에게 위협을 느끼고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독일기사단을 불러들여 정주시켰다. 이 기사단이 무력으로 이교도를 억제하는 동안 리투아니아인은 힘을 키워 주변의 슬라브 국가들과 맞설 수 있었고 동남진 정책을 취해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14세기 게디미나스 대공은 수도를 빌뉴스로 정하고 벨라루스 대부분과 우크라이나 북부를 지배하며 리투아니아 루시 왕으로 자칭했다. 리투아니아는 건국 이래 반세기도 되기 전에 당시 유럽 최대의 판도를 거머쥐었다. 리투아니아인은 우크라이나 땅에 침입하던 당시에는 이교도였지만 몽골인처럼 위화감을 주지 않았고 이내 정교로 개종했으며, 언어도 루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여 점차 루시인이 되어갔다. 이러한 점에서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키이우 루시 공국의 전통이 모스크바가 아닌 리투아니아 공국에 계승됐다고 평가한다.


슬라브계의 폴란드는 루시 입장에서 리투아니아보다 가까운 관계였지만, 10세기부터 폴란드가 서방 가톨릭을 받아들였기에 동방 기독교인 정교를 받아들인 키이우 루시와 문화적으로 이질적이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진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리투아니아가 아닌 폴란드였다. 당시 이들 나라는 후사 문제로 왕위 계승이 복잡해져 1385년 리투아니아를 폴란드 왕국에 편입시킬 것을 약속하는 크레보 합병이 성립됐다. 그 배경은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이 결혼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크레보 합병 결과 즉각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리투아니아는 독자적으로 대공을 옹립하여 폴란드와 대항하는 개별국가로서의 독자성을 장기간 유지했다. 그러나 폴란드가 강성해지면서 1569년 루블린 회의에 따라 루블린 연합이 성립됐다. 이 연합을 통해 공통의 왕, 의회, 외교정책을 갖는 연합국가가 형성되었으나 이는 사실상 폴란드에 의한 리투아니아 병합이었다.


키이우 루시 시대 그 땅에 뿌리내린 정교는 루시인과 정교도를 동일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땅이 몽골에 정복된 후 정교 중심이 키이우를 떠나 루시의 동북 지방인 블라디미르와 모스크바로 옮겨졌는데, 이는 모스크바 공국이 융성해졌으나 우크라이나에는 정교를 보호할 강력한 정치권력이 사라진 결과였다.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폴란드도 우크라이나의 정교와 가톨릭을 통합하려 했다. 1596년 로마대주교의 지원 아래 브레스트에서 회의를 열고 정교와 가톨릭을 합동하려 했으나 결론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그 여파로 정교는 분열됐고, 기존의 정교와 달리 통합교회라는 우크라이나만의 새로운 교회 우니아트가 탄생했는데, 이를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의 절충안이라는 뜻에서 그리스 가톨릭이라 불렸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지배로 들어가면서 우니아트가 금지됐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우니아트는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됐다. 우크라이나 단어에는 우크라이나인의 자존심이 달려 있다. 러시아역사에는 우크라이나의 원래 의미를 변경지대 즉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변경으로 여기나 우크라이나인은 변경이 아닌 땅 또는 나라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의 ‘krai’는 슬라브어로 ‘자르다, 나누다’라는 의미다. 키이우가 쇠퇴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동북쪽에서는 모스크바 공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제2의 로마 비잔티움 제국이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하자 모스크바는 자신들이야말로 제3의 로마이자 기독교의 맹주라며, 이반 3세는 자신이 전체 루시의 군주이고 예전의 키이우 루시 공국의 영토는 자신의 땅이라 주장했다. 15~16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키이우 루시 땅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장기간 전쟁을 벌여 영토를 도려내갔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뇌제 이반 4세는 최초로 차르로 대관했다.

 

코사크의 영광과 좌절
15세기경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자치적인 무장 집단은 러시아어로 카자크라 칭하는 코사크였다. 13세기 중반 키이우 루시가 해체된 후 남쪽 초원지대는 몹시 황폐하고 인구도 희박해졌다. 게다가 노가이 타타르 등의 유목민이 스텝 초원지대에 횡행하며 루시인의 도시와 촌락을 습격하고 노예사냥을 하자 이 지대는 점점 더 무인의 땅이 되어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로 불리는 이 땅은 위험하지만 그 이상으로 풍요롭고 매력적인 곳이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와 풍족을 누리기 위해 그곳에 머문 사람들은 타타르의 습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장 조직을 만들었다. 그후 그들은 점점 강해져 타타르인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가축을 탈취하고 튀르크와 아르메니아인 대상을 습격하더니 나중엔 도나우강 하구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도시와 촌락까지 습격했다. 그들이 타타르인과 달랐던 점은 자신은 정교의 옹호자라며 노예가 된 정교도 루시인을 해방했는데, 이들을 코사크라 불렀다. 코사크는 튀르크어로 ‘노획품으로 생활하는 사람’ 또는 ‘자유 민족’을 의미한다. 그들이 거주하는 드네프르강 중하류의 체르카시, 카니우, 치히린 등을 코사크 마을이라 불렀다.

 

16세기 말까지 코사크 마을은 헤트만이 이끌었는데, 훗날 코사크는 헤트만을 코사크 전체의 수령으로 선출했다. 작은 코사크 마을에 만족하지 못한 드네프르강 하류 거류자들은 시치라고 불리는 요새형 거점을 구축했다. ‘여울의 맞은 편’이라는 의미의 자포로제는 지명이 되었고 그 거점을 자포로제 시치, 그곳의 코사크를 자포로제 코사크로 불렸다. 코사크의 힘이 점차 강력해지자 이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 그중에 오스만튀르크를 두려워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대주교가 있었지만, 코사크를 빈번하게 이용한 사람은 폴란드 왕으로 타타르와 튀르크로부터 폴란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폴란드 왕이 고안한 것은 등록제도라는 회유정책이었다. 등록된 코사크에게 왕의 군인이라는 지위를 인정하고 복무에 대한 급료를 지급하는 대신 왕의 통제를 따라야 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코사크는 폴란드 왕에게 복종하여 각지에서 용감히 싸우며 정치적 위상을 높였으나, 다른 한편에선 왕에게 받는 열악한 대우와 영주의 착취에 대한 불만으로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1630년대 폴란드에 반란하는 코사크를 묘사한 것이 니콜라이 고골의 명작 ‘대장(타라스) 불바’로, 고골도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 소지주의 후예였다.

 

흐멜니츠키와 페레야슬라프 조약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키이우 루시 공국의 볼로디미르 성공과 야로슬라프 현공 말고도 우크라이나 최고의 영웅 보흐단 흐멜니츠키를 꼽을 수 있다. 흐멜니츠키는 군사령관, 외교관,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으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국가를 완성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모스크바와 맺은 보호조약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며, 우크라이나의 배신자로 불리기도 한다. 흐멜니츠키는 드네프르강 중류 치힐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등록 코사크이자 소영주였다. 그의 인생 전반은 코사크 대장을 지냈고 폴란드 왕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평탄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쉰살이 지나며 완전히 달라졌다. 토지 소유권을 두고 그와 다투던 폴란드 귀족이 흐멜니츠키의 영지를 습격하여 그의 막내아들을 살해하고 그가 재혼하려던 과부를 납치하자 흐멜니츠키는 정부와 왕에게 강력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치히린 대관에게 체포되어 수감됐다.

 

그후 지인의 도움으로 탈옥한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에 대한 반란을 결의하고 자포로제 시치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뛰어난 웅변으로 코사크인를 움직여 헤트만에 선출됐다. 당시는 자유민과 농민들의 농노화로 인해 폴란드에 대한 불만과 반항심이 쌓여 있던 때라 순식간에 코사크와 농민들이 흐멜니츠키의 막하로 들어왔다.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와 전쟁을 하기에는 코사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적국이던 타타르에게 동맹을 청하여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을 결성하고 폴란드군과 일전을 벌여 크게 격파하고 계속 진군하여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압박했다. 이에 당황한 새로 즉위한 폴란드 왕은 강화를 제안하여 코사크의 전통적 권리를 인정하고 코사크는 왕에게만 복종하며 토지 귀족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약속했다. 그러자 흐멜니츠키는 후세의 역사가들조차 의아롭게 여길 정도로 쉽게 약속을 받아들이고 돌아서, 폴란드 예속에서 루스를 해방시킨 영웅으로 환대를 받으며 개선했다. 흐멜니츠키는 강력한 폴란드로부터 헤트만 국가를 끝까지 지키기엔 자력만으론 한계가 있어 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타타르와의 동맹은 앞서의 전투에서 봤듯 신뢰가 낮아 의존할 수 없었고, 튀르크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을 일반 코사크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흐멜니츠키는 외국과의 동맹을 위해 가능성을 모색하던 중 유일하게 떠오른 것이 차르 모스크바와의 보호협정이었다. 일반 코사크들도 같은 정교도인 모스크바를 택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모스크바는 아직 강해지지 않았고 강국 폴란드와의 대결을 피하고 싶었기에 처음엔 흐멜니츠키의 제안에 신중했다. 그러나 흐멜니츠키의 승리를 통해 폴란드도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우크라이나를 모스크바와 튀르크 사이의 완충국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동의했다. 마침내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의 원본은 분실되어 지금은 불완전한 번역문만 남아 있는데,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모스크바 입맛에 맞게 고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아있는 조약 번역문에 따르면, 코사크와 우크라이나는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 차르는 우크라이나에 군사원조할 것, 코사크는 스스로 헤트만을 선출하고 모스크바에 사후 통보할 것, 헤트만과 자포로제 코사크는 외국사절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분쟁이 될만한 일은 차르에게 보고할 것, 등록 코사크의 수는 6만명으로 할 것, 우크라이나 귀족의 전통적 권리를 인정할 것, 우크라이나 정교도는 모스크바 총주교의 축복 아래 있지만 간섭은 받지 않을 것 등이다. 페레야슬라프 조약은 우크라이나에게 결과적으로 종속의 첫걸음이 됐지만, 모스크바로선 제국으로의 길을 내딛는 큰 걸음이 됐다. 우크라이나의 국민 시인 타라스 세브첸코는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팔았다고 비난했지만, 역사상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인 헤트만 국가를 형성한 사람은 흐멜니츠키로 훗날 그는 우크라이나 재건의 상징이 됐다.    

 

러시아·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18세기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가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이후 1차 세계대전까지 1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80%를 러시아, 20%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다. 전제군주 차르의 중앙집권제에 의한 러시아화가 진행되어 17세기 거셌던 코사크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도 사그라져 19세기엔 한낱 러시아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 러시아 제국하의 우크라이나는 행정상 명칭인 소러시아, 우크라이나인은 소러시아인으로 불렸다. 그렇다고 내셔널리즘 기운이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코사크를 대신할 인텔리겐치아라는 새로운 계층에 의한 내셔널리즘이 서서히 배양되어 1차 세계대전 중엔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 정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제정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여 우크라이나어 교육과 출판 결사 금지, 강제이주 및 추방으로 억압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은 러일전쟁 패배를 계기로 일어난 1차혁명 때였다.

 

그후 오데사항에 정박중인 전함 포템킨에서 반란이 일어나 우크라이나인 수병들이 시위하는 파업 노동자에 대한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전함을 점령하다가 루마니아로 도주하였다. 이렇듯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차르는 부득이 정책을 바꾸어 우크라이나인에게 전면적인 시민권을 부여하고 의회인 두마 개최를 약속했는데, 이는 전제정치에서 입헌정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우크라이나는 동할리치나, 부코비나, 자카르파티아였다.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 지배에 들어갔을 때는 오스트리아의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로 그녀는 합리적인 근대적 관료국가를 목표로 했기에 차르의 러시아에 비해 나은 형편이었다. 이 당시에 우크라이나 최초의 대학 리비우대학이 설립되고, 우크라이나어 신문이 처음 발행됐으며, 최초의 정치 조직인 ‘최고 루테니아 평의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엔 러시아 지역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저조했던 반면에 오스트리아 지역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됐다.

 

중앙 라다의 우니베르살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 및 동유럽의 지도를 완전히 바꿨다. 러시아에는 제정이 무너지고 소비에트연방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고,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구러시아 지배하에 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의 발트해 북유럽국가들이 독립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하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됐다. 이는 1차 세계대전 후의 체제를 결정하는 파리강화회의와 이를 조약화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서였다. 우크라이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독립운동에 더 많은 힘을 쏟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실현되지 못하고, 대부분을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 나머지는 오스트리아를 계승한 폴란드 지배 아래 돌아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중심의 연합국이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 주축의 동맹국이었는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인은 양쪽에 가담하여 서로 적으로 싸웠다.

 

그런데 독립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인 쪽은 오스트리아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그들은 1차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우크라이나 평의회를 결성하고, 입헌군주제의 오스트리아가 승리하고 전제주의제 러시아가 패배하는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이 해방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의용군을 모집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들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전쟁으로 인해 독립운동이 정체되는 동안 러시아에 2월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우크라이나의 정당과 사회, 문화, 직업 단체의 대표가 모여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를 결성했다. 민족주의적 조직인 평의회를 의미하는 라다는 우크라이나어이며, 러시아어의 소비에트에 해당한다.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의 의회 기능을 수행했다. 1917년 10월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제압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는 폭력에 의한 권력 탈취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볼셰비키를 비난했다. 그리고 자치선언인 우니베르살을 발표하고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창설을 선언했다.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고 우크라이나에 민족주의적 중앙 라다 정부가 성립되자 필연적으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틀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 중앙 라다의 내셔널리즘을 반혁명 부르주아 분리주의자로 간주하고 적대시했다. 볼셰비키는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우크라이나를 수중에 넣으려고 하르키우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고 우크라이나를 흡수하려 했다. 마침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중앙 라다는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포하는 우니베르살을 발표하고 수도 키이우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분전했으나 불리해져 외각으로 철수하자 볼셰비키군이 키이우의 주인이 됐다. 1919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어 볼셰비키의 승리로 종결됐다. 격동기의 우크라이나에 제2의 흐멜니츠키가 나타나지 않았다. 중앙 라다의 초대 대통령 흐르셰브스키는 훌륭한 사상가였으나 이처럼 혼란한 정국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기간이 결코 무의미한 시기는 아니었다. 단기간으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는 틀림없는 독립을 경험했고, 그 기억은 소련이 붕괴하자 본격적인 독립을 추진하는 동력이었다. 과거 독립국가였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인에게 자긍심과 버팀목이 됐다. 현재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기, 국가, 국장 모두 1918년 중앙 라다가 정한 ‘하늘과 밀밭’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구성된 2색기, 베르비츠키가 작곡한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 국장 볼로디미르 성공의 삼지창을 보아도 잘 나타난다.

 

350년간 기다린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전망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에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됐으나 피해는 막심했다.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 피해가 가장 컸다. 우크라이나 인구의 1/6인 530만명이 사망했고, 독일과 소련 군대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진 후퇴하며 벌인 초토화 작전으로 도시와 공장이 완전 폐허가 됐다. 키이우 85%, 하르키우는 70%가 파괴됐다. 이렇듯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도 독립은 실현되지 못했다. 승전국 소련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은 안 됐으나 전쟁 전 4개국에 각각 분할돼 있던 우크라이나 거주지역이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의해 합쳐졌다. 특히 러시아인이 70% 거주하는 크름(크림)도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이관됐다. 우크라이나 서기장 출신 흐루쇼프 수상이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한 페레야슬라프 조약 체결 300주년을 기념하여 ‘위대한 형제애와 신뢰의 증거’라며 우크라이나에 선심 쓰듯 넘겨주었다.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향후 독립할 것이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단순한 행정조치였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며 우크라이나 독립을 향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르바초프는 코사크 출신이며 외가가 우크라이나인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개혁을 단행하면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의 시스템이 존속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방과 개혁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두 정책 중에 글라스노스트만 시행되고 페레스트로이카는 기득권의 저항으로 지지부진했다.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 역대 지도자들은 공포 또는 회유정책으로 제국 소련을 유지해왔으나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인해 억눌렸던 불만이 민족주의를 타고 터져 소련 해체가 급속히 진행됐다. 특히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더욱 불거진 계기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사고와 은폐 구조로, 공산체제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일시에 무너졌다. 우크라이나도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이 결성되어 인권, 소수민족의 권리, 종교 자유와 우크라이나어의 복권을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1990년 1월에는 30만명이 참여하여 리비우와 키이우를 잇는 이른바 인간 사슬의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독립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의 쿠데타였다. 모스크바의 보수파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크름의 대통령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고르바초프를 구금하고 권력이양을 압박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옐친의 저항으로 맥없이 끝났다. 쿠데타 실패를 틈타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만장일치로 독립선언을 채택했다. 훗날 이날은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이 됐고, 9월에는 민족주의 전통에 입각한 국기, 국가, 국장을 법제화했는데, 모두 중앙 라다 정부가 제정한 것이었다. 그후 최고회의 의장이던 크라프추크는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날 큰 뜻을 품었던 흐멜니츠키의 우크라이나 독립의 꿈이 350년이 지나 실현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중요성과 장래성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로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도 5천만명이 넘는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하며, 특히 농업은 세계 흑토지역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유럽의 곡창으로 불린다. 과학기술, 문화예술 면에서도 소련의 최대 공업지대를 지탱했듯 수준높은 과학자와 기술자, 뛰어난 작가와 예술인을 배출했으며, 정치외교적으로도 외교력과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둘째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세계와 러시아 그리고 아시아를 잇는 통로였다. 역사적으로도 여러 민족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세계 패권을 다툰 대전의 전장이던 전략적 요충지로,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의 힘의 균형이 달라지는 지정학적 위상이 높은 지역이다. 아! 우크라이나. 그곳이 지금 전쟁으로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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