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울이 비추는 곳, 덕적도

망설임을 발명한 이에게 나는 오늘 편지를 쓴다. 때가 되었다는 말이 무섭게 들려 올 적엔 나는 기어이 내가 자라고 말았음을 깨닫는다. 관성의 힘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워서 멈춰있는 것에게는 멈춤을 선물하고 움직이는 것에게는 움직임을 부여하여 변하는 것과 변함없는 것을 구별해준다. 그런데 말이지 그렇게 시간이라는 것도 흘러서 책임을 주워 담는 나이가 되었는데, 나는 멈춰있는 것일까 움직이는 것일까. 그저 이도 저도 아닌 몸부림일 것일까. 헷갈리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도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하다.


  관성의 경계에서 내가 서른을 맞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아, 2020년의 마지막 날에 지휘통제실장이 대신 전파합니다. 내일 서른을 맞는 한 용사를 위해 청소 시간 간에 특별히 노래를 틀겠습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일고여덟 살은 어린 친구들과 나는 나의 서른을 축복하며 떼창에 합류했다. 늦은 나이에 간 군대였고 코로나19의 여파로 신병과 말년, 휴가는 딱 두 번밖에 나가지 못했다. 답답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안에만 있으면 무언갈 증명하지 않아도, 책임의 추궁에서 면제받을 수 있다는 자기최면 덕분이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차량용 후사경의 문구가 떠오른다. 내 뒤를 보여주는 거울은 언제나 지나온 길들을 마주 보게 한다. 남들보다 늦은 입학, 늦은 입대, 그리고 늦은 취업 준비. 왜 내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을까. 일찌감치 독립해 의식주를 혼자 해결하며 남들과 다른 순서로 살았다는 것은 한때 내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과 다른 순서로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메어있다. 나를 증명해야 할 차례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넌 뭐든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응원이 아니라 압박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두려움은 막상 그 한가운데 들어가 있을 때보다, 바깥에서 구경할 때 더욱 크게 느껴진다. 공고 앞에서 부족한 부분만 크게 비출 때마다 나는 내 거울을 미워했다. 지각 인생의 망설임을 깨고 첫발을 떼는 일, 그것이 내 여행의 동기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새벽부터 분주하게 짐을 꾸렸다. 첫배를 타고 막배로 돌아오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런대로 자신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평소와 다르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빈속에 차를 타지 못하는 동생과 나는 비빔면을 세 개 끓여 먹고, 온수 샤워로 새벽의 찐득함을 씻어냈다. 배낭에 필요한 물품을 주워 담고 도시락을 챙겼다. 동생의 복장은 위아래 검정의 클라이밍 복이었고, 나는 청바지에 남색 셔츠를 입었다. 여행 분위기를 내고자 프로펠러가 달린 색동 모자도 주섬주섬 챙겼다. 현관문 앞에서 조용히 등산화를 조여 맸다.


우리가 떠날 곳은 옹진에 있는 덕적도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장거리 여행이 부담됐던 우리는 가까운 덕적도를 목적지로 정했다. 섬에 대한 사전 정보는 물론 별다른 계획도 짜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 그 마음 자체가 예상 밖의 일들을 물어다 줄 것이라고 믿고 떠난 여정이었다. 달이 지구 주위를 분주히 돌면서 바다를 밀고 당기는데, 그 바다는 다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모양이다. 나와 내 동생은 취업준비생이다. 자소서 준비에 지친 동생과 전역 후 이력을 정리 중인 나는 바다가 당겨서 섬을 찾게 되었다. 바다의 부름과 섬의 응답, 그 사이에서 인간은 자신의 해묵은 고민과 감정을 홀가분하게 털어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
배편 예매를 위해 전날 <가보고 싶은 섬> 어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았다. 연안 여객을 타고 섬으로 떠나보는 것은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었다. 사실 이런 서비스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쉽사리 없었던 것이라 섣불리 단정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세상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상태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플은 보기보다 직관적이었고 결제까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는 졸음이 몰려왔다. 제물포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인천 연안 여객 터미널>로 갔다. 차창 밖으로 크레인과 포크레인을 비롯한 중장비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청명한 하늘 밑에서 유난히 주황색과 노란색이 도드라졌다. 이윽고 터미널 건물이 보였다. 건물 밖에서 미리 가방에서 스틱형 멀미약을 꺼내 먹었다. 건물 내부가 방역으로 인해 마스크를 내리지 못할 것을 예상해서였다. 효험은 30분 뒤부터 발생할 것이다.
입구에서 체온 체크와 손 소독을 마치고 이상 없음을 상징하는 분홍색 종이 팔찌를 차고 입장했다. 나는 군에서 백신 2차 접종을 완료하였고, 동생은 1차 접종 후 14일이 지난 터라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터미널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지 이틀 차였다. 뭍과 섬을 오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라운지에는 전문 장비에 등짐이 한가득한 외지인과 생필품을 잔뜩 들고 가는 현지인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사실 한 시간 거리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통근권이고,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날아갈 수 있다. 그런데 왜 배로 한 시간은 멀게만 느껴졌을까. 어쩌면 무엇이든 사람의 이동과 교류를 가로막는 건 실제 물리적 거리보다는 사람의 심리적 거리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멀게 생각하면 먼 것이고 가깝게 느낀다면 가까운 것이다. 섬 또한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었으므로’ 앞으론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객 이용이 처음이라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코로나 관련 문진표를 작성한 뒤 예매한 표를 발권받았다. 뙤약볕에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미리 신분증과 승선권을 준비시키는 능숙한 진행이 인상 깊었다. 체온 체크를 마치고 승선했다. 생각보다 배가 컸다. 톤수가 얼마일지 궁금했다.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주려고 챙겨왔는데, 내가 예약한 배는 뚜껑이 닫힌 2층 쾌속선이었다. 배가 생소했던 나는 어플리케이션에서 배의 이름만 보고 배의 모습을 쉽사리 떠올릴 수 없었다. 멋쩍게 다시 새우깡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2021년 9월 24일 오전 8시 30분, 그렇게 우리는 첫배를 탔다.


<덕적도 진리항>에서 하선했다. 물길이 좋아 예상 소요 시간보다 5분가량 일찍 도착한듯했다. 오늘 기온은 영상 22도, 여름의 출구와 가을의 입구에서 날씨는 화창했다. 하선 즉시 선크림부터 덧발랐다. 섬의 햇볕은 유독 위세가 좋아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선한 바람이 바로바로 몸을 식혀줘 활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조금 걸으니 가슴팍에 어린아이만 한 물고기를 가슴에 안고 있는 푸근한 인상의 어부상이 보였다. 풍요로운 표정이었다.


<덕적바다역>에서 잠시 화장실에 들른 뒤, 섬의 지도를 구해 펼쳐 보았다. 더 고를 것도 없이 일단 <비조봉>부터 오르기로 했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섬은 정말이지 근사할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근처에 있는 방문객 중 우리 짐이 가장 가벼워 보였다. 각기 다른 행선지 팻말을 붙여둔 초록색 버스가 줄을 지어 서 있었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쳤다. 오직 두 다리의 근력만 믿고 무작정 걸어서 둘러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두 ‘경량 보병’은 천천히 지도를 살펴 가며 아스팔트를 따라서 걸어 올랐다. 나는 프로펠러가 달린 색동 모자를 가방에서 꺼내 개구쟁이처럼 뒤돌려 썼다.
마을 곳곳에 태양광 패널이 많이 보였다. 태양열이라고 말했다가 공학도인 동생에게 “태양광”이라며 교정당했다. 보건소에는 주민들이 줄지어 늘어서있었다. 섬 전역에 울려퍼진 안내 방송에 따르면, 육지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해 전수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표도 끊지 않고 무임승차한 고약한 바이러스가 미웠다. 기다리는 주민분들이 내 모자를 보며 웃었다. 나도 걸을 때마다 바람에 프로펠러가 돌아가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근처에 학교가 있었는데, 소나무림이 아름다웠다. 방풍 목적으로 높게 자라도록 가지를 친 듯 보였다. 학교 건물에 모래 섞인 바닷바람을 막아주려고 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저 소나무의 기상처럼 아이들이 높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사람도 어렸을 때 가지를 잘 쳐주면 어떤 분야든 높게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유년 시절의 보살핌과 환경은 한 인격체의 인생과 가능성에 참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정말이지 학교에 꼭 어울리는 나무숲이었다.
이어지는 길에서 <덕적 기미 3·1 독립만세 기념공원>이 있었다. 정치학 전공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덕적 면민들은 육지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회를 보았다. 1919년 4월 9일 지역 운동회에서 왜경 백근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근해의 섬들에 봉화로 퍼져나갔다. 나는 섬에서까지 살아 숨 쉬던 독립 의지가 놀라웠고, 동생은 이곳까지 경찰을 두어 한반도의 말초신경마저 모조리 촉수를 내뻗었던 일제의 야욕을 놀라워했다.


<호박회관>이라고 마을의 감성을 잘 살린 건물이 보였는데, 뭐 하는 곳인지 몰라서 일단 이곳을 그냥 지나쳐 올라갔다. 나중에 찾아보니 마을의 특산물인 호박과 지역 상품을 파는 곳이었다. 산 입구를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들르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된다. 초행길이라 등산로 입구를 찾는데 좀 헤맸다. 동생이 지도와 지형지물을 이리저리 대조해보며 길을 잡았다. 길가에 핀 들꽃 무리를 지나치다가 비조봉 등산로를 가리키는 팻말을 찾았다. 입구에서 잠깐 멈추어 500ml 생수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숨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우리는 등산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파른 산이었다. 내심 고도가 292m밖에 안 된다고 얕보고 있었는데, 평지 구간이 적어서 거리는 짧지만 강도가 높은 산이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오르니 호흡도 조금 모자랐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몸에 바르는 벌레 퇴치 스프레이를 놓고 온 걸 후회했다. 산 안에는 나무로 그늘이 져서 시원했다. 곤충에 관심이 많은 내 눈에는 사마귀와 땅벌을 비롯한 여러 곤충이 눈에 보였다. 중간쯤 왔을 때 한 번 쉬어 갔다. 미리 챙겨놓은 초코바가 단맛으로 손실된 열량을 메꿔주며 황급히 기운을 북돋웠다.


내 뒤를 따라오던 동생이 나를 성큼성큼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기운도 좋다. 나도 내색하지 않고 뒤따라가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 내비게이션이었던 동생은 이제 셰르파로 전직하여 길을 잡았다. 점차 쉬어 가는 빈도가 늘었다. 600m, 700m짜리 산을 탈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어제 자지 않은 것이 모래주머니처럼 몸에 큰 부하를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속으론 ‘놀러 간다고 해놓고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겼다. 괜히 물을 하나 덜 챙긴 동생을 탓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생이 그런 것 같다. 무의미에 빠지는 것은 해냄의 징후라는 역설을 두발 자전거와 방정식과 삼각함수와 토익과 학위 논문과 다투면서 배웠다. 무의미 속에서 잠겨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력을 되찾고 일어서 뚜벅뚜벅 나아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더 의미 있는 길을 모색하고 전보다 나은 선택지가 주어졌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앞만 보며 가다가 이제는 내 발을 보며 걸었다. 행군을 하면서 배웠다. 멀리 보지 말고 발을 보라고. 발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걷는 행동 자체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덧 ‘생각보다 멀리’ 나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가 후사경의 원리라면, ‘생각보다 멀리’는 걸음의 원칙이다. 집중해야 할 것은 내 뒤나 앞이 아니라 내 발걸음이다.
한 시간 반쯤 걸었을까. 드디어 뙤약볕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늘로 가려줄 나무보다 높게 있다는 것은 곧 정상이 임박했다는 뜻이리라. 고도가 높아질수록 내 시야에 푸른 바다가 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멈춰 침묵의 예를 지키며 말없이 넋 놓고 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스럽게 사진을 찍어 담았다. 코앞에 정상이 있었다. 비조봉 정상에는 쉬면서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정자와 망원경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일단 너무 배가 고팠다. ‘비조봉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어제 사다 둔 닭강정 도시락부터 까먹었다. 정상의 운치를 즐기며 고생의 보답으로 먹는 닭강정 맛이 기가 막혔다. 제로 칼로리 콜라로 입가심을 하는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두 날개를 펼치며 기류를 받아 날아올랐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으나, 무슨 새인지 알 수 없었다. 음식은 남기지 않았고 쓰레기는 미리 챙겨둔 봉지에 담아 집까지 들고 갔다. 지도와 섬을 다시 찬찬히 살피며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그 풍경에 다시 우리 모습을 담았다.


하산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난코스는 밧줄도 잘 감겨있었고 전반적으로 등산로가 잘 손질된 인상을 주었다. 올라온 길과 반대 방면으로 성큼성큼 내려가다 보니 금세 밧지름 해변에 도착했다.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밧지름의 소나무림은 그물코처럼 햇살을 조금만 투과시키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선선한 바닷바람이 몰려왔다. 쉬어 가기 좋은 숲이었고 쉼의 이유가 없이도 주저앉아서 쉬고 싶은 곳이었다. 아늑했다. 나무토막에 앉아서 한참을 쉬어 갔다. 뭉쳐있는 허벅다리와 종아리 중앙의 가자미근을 손으로 압을 가해 조금 풀어주었다.


소나무 사이로 한참을 걸어 나갔다.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해변은 물이 빠져 뻘을 드러냈다. 남아있는 물기가 부서진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른 갯벌은 꼭 혼자만 있는 듯한 안정감을 주었다. 서울의 지근거리에서 이 정도 적막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사회인이 되면 맛보지 못한 이 섬의 나머지 조각들을 어른의 방식으로 채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춰 캠핑과 낚시와 같은 어른의 취미로 다가올 이 섬은 또 어떤 모습일까. 통통배를 빌려 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미도 등대, 서포리 해수욕장, 소야도의 떼뿌루 해변. 우리가 가지 못한 공간을 가능성으로 남겨둔 채 우리는 진리항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닭이 도로를 활보하고 큰 개가 묶여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사람이 반가워 짖으니 영락없는 섬마을이었다. 살 바람에 프로펠러가 빙글빙글 돌았다. 굽이진 아스팔트를 밟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뇌는 왜 항상 되는 이유보다 안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 섬을 이렇게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마음을 먹고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음의 빈틈에 주저함이 가득 차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발목이 잠기면 출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
성큼성큼 걸어서 <덕적바다역>에 다시 도착했다. 오랜 걸음에 요의가 느껴졌었는데,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공공 화장실을 폐쇄한 탓에 화장실부터 들렸다. 겸사겸사 젖은 땀이 증발한 찝찝한 티셔츠도 갈아입었다. 카페인이 당겨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수혈하며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을 SNS에 자랑할지 같이 찍은 사진을 골랐다. 인천항으로 돌아가는 배가 한 시간가량 남았는데, 배가 고파졌다. 무엇보다 시원한 바다의 맛이 땡겼다. 근처에 횟집에 가서 물회 두 그릇을 시켰다. 회의 쫄깃한 식감과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동생 밥을 사줄 수 있어 다행이다. 우리는 다시 스틱형 멀미약을 짜 먹었다.


돌아가는 배에서는 처음 탔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구명조끼와 긴급대피 요령과 같이 혹시 모를 해상 안전에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음이 느껴졌다. 선내 TV 방송을 보면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프로그램은 일반 유선 방송과 동일했다. 이게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좋은 컨텐츠를 두고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운 조합과 선사들이 지역 여행 유튜버들과 제휴를 맺어 섬 여행 브이로그, 캠핑기, 시민 공모 UCC 같은 것을 중간중간에 홍보영상으로 넣어준다면, 나와 같은 젊은 층에게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영훈 작가의 <섬 여행기>가 실려있는 <가보고 싶은 곳> 어플에도 영상 링크를 같이 첨부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철도의 <내일로>처럼 여객선도 프리패스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다로 티켓>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쉽게 떠오르는 모양이다. 다만 이왕이면 판이 커졌으면 좋겠다. 근 미래에는 철도, 항공, 버스 업체와 제휴가 이어져 ‘육해공 청년 국내 여행 패키지’화 되어, 육로·해로·항로가 청년에게 모두 합류되는 통합 플랫폼의 대양(大洋)이 생기길 바란다. 이 땅의 젊음은 그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한가득 자신의 열정과 추억으로 채워 넣을 것이 분명하다. 그 컨텐츠가 순환하면서 활기차고 젊은 기운이 구석구석 퍼져나갈 것이다.


바다를 선물하는 친절한 세상에서 젊음을 맞았다는 이유로 이토록이나 편안히 섬을 여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인접 도시에 항구가 있다는 것이 내게 이렇게 자유를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나 뒤늦은 축복이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섬 여행을 시작했고, 동시에 사회인으로 향하는 내 청춘의 첫발을 함께 뗐다. 그 걸음은 내게 말해주었다. 가까운 곳부터 걷다 보면 빙글빙글 프로펠러가 돌아갈 것이라고. 언젠가 사회초년생이 된 나는 또다시 후사경을 바라볼 것이다. 그때는 뿌듯함이 더 가까이 보이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 안의 망설임을 발명한 나에게 쓰는 축원의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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