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시해양대학

영국선장 면허를 취득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서문욱 ㈜ 씨엠에스마리타임 선장의 기고문을 연재한다. 이번 2월호에는 △영국 선장 신성모 △영국으로 가는 길(해사연안경비청, 해기면허제도, 세계조난 및 안전제도 자격증, 학교 선택)을 편집했다. 이후 △와사시해양대학(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 국가 학위과정, 첫 학기, HND와 SQA, 부활절 방학, 두 번째 학기, 수업, 시험 결과 발표, 첫 구술시험 응시자, 여름방학, 법정 부가 교육, 방학생활, 한국인 교수님, 첫 번째 구술시험) △영국 시골 생활(두 번째 아시아인 가족,  매우 영국스러운, 마을 교회, 나들이) △선장 구술시험(1급 항해사 면허, 영국 재입국, 3 선장 구술 과정, 친구들, 수업과 시험 준비, 시험) △두 번째 영국 선장(두 번째 영국 선장, 사우스햄턴 해양 유산, 그리고 다시 신성모, 세 번째 영국 선장)을 4-5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은 1년, 3학기 동안 상위국가학위(HND) 5과목과 MCA 시험에 대비한 구술시험 준비 과목, 그리고 세 개의 법정 단기 교육을 이수하여야 한다. 학기별 이수 과목과 평가방법, 해당되는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 학기에는 항해학과 적하 및 구조학에 집중하는데, 이 과목들이 학교 자체 HND 학위시험과 국가 주관 SQA 시험 공통과목이기 때문이다. 학기 말에 치르는 이들 시험 중 만약 한 과목이라도 과락하면, 둘째 학기에도 나머지 과목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항해, 적하 및 구조학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교수님들은 첫 응시에 합격할 것을 학생들에게 반복하여 주입시켰다. 4월 초부터 있는 2주간의 부활절 방학 기간 중 한 주는 법정 단기교육인 항해장치, 장비 및 시뮬레이터훈련 관리자 등급(NAEST, Navigational Aids, Equipment and Simulator Training, Management Level)을 이수한다. 둘째 학기에는 나머지 HND 세 과목을 이수하며 과목별 시험과 과제가 주어진다. MCA 구술시험에 대비한 구술 준비과목도 있는데 현직 사우스햄턴항 도선사가 출강해서 선박운용술, 나침반, 통항규칙 등에 대해서 강의하여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 여름방학이 시작한 직후, 또 다른 법정 단기교육인 인적 요소 통솔력 및 관리과정 관리자 등급(HELM, Human Element Leadership and Management, ManagementLevel)와 상급 의료관리(Proficiency in Medical Care)를 이수하고 두 달 간의 긴 여름방학을 갖는다. 마지막 셋째 학기에 정규 수업은 없으며 HND, SQA 시험 불합격자와 구술시험에 대한 재시 및 준비기간으로 각자 시간을 보낸다.      

      
영국 해양대학들은 더 이상 군사교육훈련을 실시하지 않고 해군과 다른 상선 고유의 문화와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연방 교육기관인 미국상선사관학교(US Merchant Marine Academy, 일명 ‘킹스포인트(Kings Point)’에서 여전히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졸업 후 해군이나 상선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과거 미국 독립전쟁 당시 정규군이 생기기 전 미국 상선대가 가장 먼저 영국에 대해 봉기하여 싸운 역사적 사건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참고로 미국만큼 상선사관들에게 여전히 엄격한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는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은 필리핀상선사관학교(Philippines Merchant Maritime Academy)를 꼽을 수 있고 이곳 졸업생들 역시 상선뿐 아니라 해군, 해안경비대를 선택할 수 있다.

 

첫 학기
1월의 첫 월요일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의 지도로 모두 먼저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총 23명의 동기들 중 영국인 4명과 덴마크계 남아공인 1명, 그리고 나이지리아, 터키, 한국인 각 1명을 제외하면 모두 인도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4명의 영국 친구 중 JD는 영국과 지브롤터의 등대 및 등선, 부표, 무선과 위성항법 장치를 제공하고 관리하는 트리니티하우스(Trinity House)에서, S는 영국해군보조함대인 RFA(Royal Fleet Auxiliary)에서, L은 해상유전이나 플랫폼을 지원하는 Offshore Supply Vessel(OSV, 근해보급선박)에서 승선 중이었다. JA는 슈퍼요트 항해사로 승선하는데 생소한 분야라 궁금한 점을 개인적으로 물어보았고, 여러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트에서 휴가를 즐기는 억만장자 러시아 선주와 그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여름은 지중해 연안에서, 겨울은 태국에서 보내는데 선주는 아마도 러시아 마피아 보스로 추정되며 그의 정확한 직업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분명 실종되어 뒷골목 시체로 발견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비단 해기면허를 소지한 항해사, 기관사뿐 아니라 수상/수중스포츠 강사, 바텐더, 요가 강사 같은 경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슈퍼요트 객실승무원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인도 친구 J는 뉴질랜드해양대학(New Zealand Maritime School)을 졸업하고 뉴질랜드OOW면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뉴질랜드라는 곳을 경험하고 싶어 아무 연고도 없는 생면부지의 곳에 가서 공부했다고 했다. 덕분에 취업 인터뷰 때, 인도 항해사가 왜 뜬금없이 뉴질랜드 면허를 가지고 있냐는 질문에 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인도 친구 AK는 미국 오일메이저(Oil Major) 유조선사 쉐브론(Chevron Shipping Company)에서 이등항해사로 승선 중이었다. 쉐브론은 상급 사관의 경우 3개월 승선 - 3개월 휴가의 형태로 근무하며 승선, 휴가에 상관없이 매달 동일한 액수의 급여가 지급된다고 했다. 월 수령액은 우리나라 동일 직책 급여의 70% 정도로 동일 기간 대비 총소득은 적지만, 집에서 그냥 쉬는 3개월 동안에도 승선 기간과 차이가 없는 급여를 계속받는다는 점에서 일견 안정적인 장기 승선을 장려하는 제도라 여겨졌다.  
영국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에 막상 영국 학생이 소수인 이유를 나름 추정해보면, 이 과정을 통하여 상급 면허를 취득하는 것이 영국에서 대다수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에서 해양대학을 졸업하면 상급국가학위가 수여되는데 우리 과정 영국 동기들이 이 학위과정에 입학한 것을 보면 해양대학을 졸업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학위를 이미 취득한 해양대학 졸업생들을 위한 Master and Chief Mate Post HND Course(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취득 후 과정)이 따로 있는데 그 과정은 전원이 영국 학생들이었다.           


항해학은 선장 출신인 K 교수님과 F 교수님이, 적하 및 구조학은 조선공학을 전공한 R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몇 분의 박사학위 교수님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석사 학위만 소지하고 계셨다. 2월 하순까지 과목별 진도를 모두 마친 다음 3월 중순 HND 시험과 3월 말 SQA시험에 대비한 기출문제, 예상문제 풀이와 모의시험을 반복하였다. 항해학은 교과서와 기출, 예상, 보충 문제집 등에 기상학을 포함하여 총 5권, 적하 및 구조학은 교과서와 기출, 예상문제집을 포함하여 총 3권의 교재를 사용했고 모두 학교에서 직접 제작한 책들이었다.  


기상학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항해분야, 이를테면 지문항해, 레이다플로팅, 천문항해, 탐색구조, 조석조류, 전자해도, 항해장비 등은 K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말 그대로 첫 학기 수업의 거의 절반 이상이 K 교수님의 시간이었다. 영국 해양대학이라 해서 항해사 십년 동안 도통 듣도 보도 못한 대단한 것을 배우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공학계산기를 부지런히 두드리고, 가물거리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고, ‘예전 그게 이거였구나’ 혹은 ‘이걸 헛갈렸었구나’ 새삼 깨달아가는 시간이었다. 강의실의 칠판은 빔프로젝터, 컴퓨터와 연동되는 전자칠판이었는데 교수님들이 칠판의 필기내용만 또는 아예 음성까지 함께 저장하여 파일로 학교 웹사이트에 올려 놓으면 학생들은 수업을 마친 후 수업 내용을 재생하여 원하는 부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영국 친구 JA는 수업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교수님께 질문하여 설명을 듣곤 했는데,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을 때에는 강의실 앞쪽으로 나아가 칠판 필기를 손으로 짚어가며 교수님께 재차 질문했다. 인도 학생들은 수학 시간에 구구단이 아니라 십구단을 배운다던데 그 중에서도 인도 친구 V는 정말 계산이 빨랐다. 항해학과 적하 및 구조학 강의 때 계산 문제가 나오면 늘 가장 먼저 대답했고, 때론 칠판에서 수식을 계산하고 있는 교수님보다도 빨리 계산하여 교수님이 멈추고서 뒤돌아볼 정도였다. 급기야 인도 동기들 사이에서 V에게 혼자 먼저 말하지 말고 좀 조용히 있으라는 말까지 나왔고, 적하 및 구조학을 담당하시는 R 교수님은 개인별, 국가별로 수학 계산 속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먼저 끝마치고서도 다른 동기들을 기다려 함께 답을 비교해보자고 하였다.      


기상학(Meteorology)을 담당한 F 교수님은 ‘타이타닉’호 선장을 연상케 하는 풍모와 연세에 왼쪽 와이셔츠 주머니에는 온갖 종류의 펜을 가득 꽂고서 늘 넥타이와 정장 바지에 멜빵을 매신 차림으로 나타나셨다. 그냥 교수님 이름을 부르는 영국 동기들도 F 교수님에게는 꼭 “Mr. ~”라고 달리 불렀다. F 교수님은 매 수업 시간 시작마다 그날 그날의 기상상황을 40, 50장씩 우리에게 프리젠테이션하셨다. TV 뉴스 수준의 영국 일일기상부터 기간별 기상 예상도, 온갖 종류의 기압도, 위성 사진, 오대양 해수 온도, 북대서양 빙하 통보, 북극과 남극의 빙하 상황, 엘리뇨와 라니냐까지. 우선 이 발표를 모두 마친 후 그날 주제에 따른 수업을 진행하셨다. 학기 내내 매일 새로운 기상도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를 해석하고 예측하는 감이 생긴 것 같았다. 흔히 한반도를 간략하게 토끼 모양으로 그리는 방법이 있듯이 영국 역시 간략하게 세워 놓은 장구 모양으로 그리는 방법이 있었다. 


TRS(Tropical Revolving Storm, 열대 폭풍) 강의 때 F 교수님은 마침 그 무렵 태풍으로 침몰한 미국 컨테이너선 ‘엘파로(SS El Faro)’호 사고에 대해 기상학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선박 운용, 선장의 지휘와 선교자원 관리, 회사 안전관리체계, 상업적인 압력 등 다각도로 분석하고 원인을 추정하였다. 최신 기상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21세기에 24년 경력의 노련한 선장이 지휘하는 대형 상선이 태풍의 중심으로 항해하여 침몰한 이 사건은 비단 해운계 뿐 아니라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침몰한지 10개월 후 미 해군이 수심 4,700m해저에 있던  ‘엘파로’호를 발견하여 선박항해기록장치(Voyage Data Recorder)를 회수했고, 이를 토대로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에서 사고보고서를 발간했다. 개인적으로 1987년 2월 쿠릴열도 해역에서 침몰한 우리나라 ‘한진인천’호 사고와 유사해 보여 나중에 옛 해난심판원의 ‘한진인천’호 사고보고서를 구해 ‘엘파로’호와 비교해가며 읽었다. 


적하 및 구조학을 가르치시는 R 교수님은 확신에 찬 일타강사를 연상케 했다. 수업 첫날 교수님 왈 SQA 시험은 계산문제 셋, 토의문제(discussion question) 셋, 도합 여섯 문제를 세 시간 동안 풀어야 하는데 작년, 재작년, 그 이전에는 이러이러한 문제들이 출제되었으니 올해는 저러저러한 문제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후 수업 동안 온갖 유형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푸는 방법을 익히길 반복하였다. 혹여 동기들 중 어떤 개념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질문하거나 교수님과 다른 방식의 해법에 대해 질문할라치면, R 교수님은 웃으면서 그 부분은 시험날 저녁 당신에게 전화하면 펍(Pub)에서 만나 한 잔 사주면서 밤새도록 설명해 줄테니 일단 지금은 시험범위와 당신이 최적화한 해법에만 온전히 집중하라고 말하여 다들 웃음이 터졌다. 타국에 와서 시간적, 경제적 제약에 쫓기며 시험을 통과하고 귀국해야 하는 국제학생(International student)들에게는 일견 현실적으로 필요해 보이는 교수법이기도 하였다. 실제 문제풀이를 반복하다 보니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문리(文理)가 트이듯 보이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재미가 생겨 혼자서라도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R 교수님은 현재와 다른 예전 영국 교육에 대해 얘기하곤 했는데 당신이 부모님, 선생님으로부터 맞아가며 공부해서 결국 대학원까지 진학했고 너희들보다 비록 월급은 적지만 지금 학교 선생이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그때 그 분들이 당신을 그렇게 체벌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마 너희들처럼 배나 타고 있을 거라 하여 모두 빵 터졌다. 아! 이 영국식 유머!        

  

HND와 SQA
학교 주관 HND시험은 국가 주관 SQA 시험보다 한 주 앞서 치러져 사실상 SQA 대비 모의고사인 셈이기도 했다. HND가 네 시간동안 다섯 문제를 푼다면 SQA는 세 시간 동안 여섯 문제를 푸는데 두 시험 공히 모두 주관식 문제이다. SQA는 과목당 200점 만점에 결과는 10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이 181~200점, 2등급이 161~180점, 3등급이 141~160점인 식으로 4등급 121~140점 이상을 맞아야 합격한다. 과목 합격의 경우, 나머지 과목이 2등급 이상이 되어야 인정된다. 즉, 시험 결과가 2등급, 5등급이라면 다음 번에 5등급 한 과목만 응시하면 되지만, 3등급, 5등급이라면 두 과목을 모두 다시 치러야 한다.


첫날 오전 항해학, 둘째 날 오전 적하 및 구조학 시험을 치렀다. 인상적인 것은 시험지와 함께 Formulae Sheets(공식 종이)라 하여 항해, 적하 및 구조 계산 문제에 참고하도록 필요한 각종 공식들을 정리한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이다. 또한 Examination Work Book(또는 Examination Answer Book, 시험답안책)이라 하여 주관식 답안을 적어 제출하는 A4 크기로 10페이지 정도 되는 답안 공책을 나눠 주었다. 이에 더해서 적하 및 구조학은 복원성자료책(Stability Data Booklet)와 그래프 용지를, 항해학은 문제 풀이에 필요한 천측력과 조석표, 항로지, 레이다플로팅 용지, 조석계산 그래프 용지를 나눠줬다. 응시자는 두 시험 모두 공학계산기를 지참해야 하며, 특히 항해학 시험에는 개인 레이다플로팅 도구도 가져가야 한다. 시험장에서 받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R 교수님은 시험 전 마지막 수업에서 시험을 잘 치르는 몇 가지 비결을 얘기했는데 혹시나 첫 날 시험을 망칠지라도 깨끗이 잊고 다음 날 시험준비에 몰두할 것과 세 시간 동안 집중하려면 뇌에 영양분이 필요하니 견과류를 좀 준비해 가서 시험 중 먹을 것을 당부하였다.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은 1월, 5월, 9월 매해 세 차례 입학하는데 우리 기수뿐 아니라 지난 기수에 불합격한 친구들도 함께 시험에 응시하였다.   
항해학은 대권항법, 조석 계산, 탐색 구조, ECDIS가 출제되었다. 이류 안개(Advection Fog) 문제가 나왔는데 제한 시정 시 필요한 절차와 Master’s Standing Ord
er(선장당직근무명령)을 적으라는 문제도 나왔다. 적하 및 구조학은 항해 중 복원력, 복원력 조정, 복원정곡선(GZ Curve), 입거(Drydocking) 계산, 국제만재흘수선협약, 만재흘수선구역 통과 항해, 정적 복원력(Statical Stability)이 출제되었다.

 

부활절 방학
이틀 간의 SQA 시험을 마치고서 사실상 첫 학기가 끝났다. 푹 쉬고 싶었지만, 약 2주간의 짧은 부활절 방학기간에도 법정 단기교육인 항해장치, 장비 및 시뮬레이터훈련 관리자 등급(NAEST, Navigational Aids, Equipment and Simulator Training, Management Level)와 ECDIS교육을 추가로 이수해야만 했다. 한국에서 ECIDS교육을 이미 이수했지만, 영국 MCA는 MCA 승인훈련제공기관(MCA ATP, MCA Approved Training Providers)에서 받은 교육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학교 과정 외 개인적으로 비용을 들여 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같은 규정이 적용되어 STCW협약 상급교육 역시 모두 추가로 받아야 했다. MCA ATP에서 받은 교육이 아니라면, IMO White List (IMO 우대국 명단)에 속한 국가들은 STCW협약 상급교육만 추가로,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기초교육부터 다시 이수해야 한다. STCW협약 상급교육 중 일부는 일정과 비용을 고려하여 여름방학 중 학교와 인근 사설 훈련센터에서 받기로 하였다. 


NAEST 교육은 5일간 학교 시뮬레이션 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충돌방지, 평행방위선법, 묘박, 탐색구조, 통항계획 및 선박자원관리 등 이론 교육과 함께 총 15개의 각기 다른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를 주제별로 반복하여 연습했고 마지막 날에는 평가가 있었다. 수업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들 그간의 경험을 가지고 임하면 별로 어렵지 않을 듯하였지만 동기 중 하나가 평가에 불합격하여 재시 끝에 통과하였다. ECDIS 교육은 학교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설 교육센터에서 이수하였는데 ECIDS 시뮬레이터와 선박조종 시뮬레이터를 갖추고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우리 과정 중에 나와 마찬가지로 MCA 승인 ECDIS 교육증서가 없는 나이지리아 친구 J, 터키 친구 T가 함께 교육받았고, 북해 해상풍력단지 작업선 항해사라는 영국 친구와 함께 교육받았다.


두 번째 학기 수업
두 번째 학기에는 HND 학위 과정 세 과목과 MCA 구술시험준비 과목, 총 네 과목을 이수했다. HND 학위 과정 세 과목은 Law & Management for Mates and Masters(일등항해사와 선장을 위한 법과 경영), Bridge & Engineering System(선교 및 기관 장치), Cargo & Port Operations(화물 및 항만 운용)이다. 각 과목에 대한 평가는 학교가 주관하는 주관식, 객관식 시험 또는 과제물 제출로 이뤄지며 구술준비(Oral Preparation) 과목은 별도 평가가 없다.


Law & Management for Mates and Masters(일등항해사와 선장을 위한 법과 경영) 과목을 담당하는 경영학 박사 G 교수님과 현직 해양법 변호사 SD 교수님은 외부에서 출강 오시는 분들이셨다. 이미 한 번쯤 접해보고 교육받은 내용들이지만, 특히 두 교수님의 강의가 승선 중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어휘들이 아닌 탓에 수업을 100% 따라가기가 좀 버거웠다. 해운경영 평가는 해운경영에 관한 자유 주제 소논문(小論文)을 제출하는 것인데 먼저 교수님께 작성 계획서를 제출하여 검토받은 후에 학기말에 소논문을 제출하였다. 해양법 평가는 논술 문제로, 미리 알려준 다섯 문제 중 세 문제를 출제하는 방식이어서 나름 모범답안을 정리하여 암기하였다. 시험 당일, 문제를 확인하는 순간 정신없이 답안을 적기 시작하여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서 시험장을 나왔다. 나중에 동기들이 시험 제대로 봤냐, 괜찮냐고 물어봐서 답안 잊어버리기 전에 후딱 다 쓰느라 일찍 나왔다고 말하여 함께 웃었다.  


Bridge & Engineering System(선교 및 기관체계) 과목은 선박 운용과 나침반은 JE 교수님이, 선박 추진기관과 각종 보조기관은 기관장 출신인 BD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강의동 꼭대기에는 자기, 자이로(Gyro), 광섬유자이로(Fiber-Optic Gyro) 나침반 등 각종 나침반을 갖춘 나침반실(Compass Room)이 있어서 강의와 실습을 병행할 수 있었다. 광섬유자이로 나침반은 초기 비용 문제로 해군 함정이나 탐사선, 고속선 등 극소수 선박에만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가격이 많이 낮아져 일반상선에도 보급되는 추세라고 했다. 나침반실에는 비나클(Binnacle)이 각기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자기 나침반 두 개가 있어서 우리 수업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중 플라스틱 비나클 자기 나침반이 고장 나서 사용할 수 없다고 JE 교수님은 애석해하셨다. 기관체계 수업 첫 시간, 기관장 출신 BD 교수님은 당신에게 배운 걸 가지고 배에 돌아 가서 기관장이나 일기사 닦달하는데 쓰지 말라고 농담을 하셨다. 선박운용 평가는 이전 승선 선박의 조종특성에 대한 보고서 제출, 나침반 평가는 논술 시험, 기관 체계 평가는 객관식 시험으로 과정 중 유일한 객관식 시험이었다.


Cargo & Port Operations(화물 및 항만 운용)과목은 탱커(Tanker) 분야를 다루는 액체화물(Wet Cargo) 분야와 이외 산적화물, 컨테이너, 로로(Ro-Ro), 여객 등을 다루는 건조화물(Dry Cargo) 분야로 나뉜다. 액체화물을 담당한 AW 교수님은 비교적 젊은 분으로 쉐브론에서 승선하였고 박사학위를 갖고 계셨다. 유조선, 화학운반선, 가스운반선에 대해 배웠고, 평가는 세 종류의 선박 중 택일하여 화물작업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인용법에 대해 자세히 강의하셨는데, 특히 학술 목적 인용에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사용하지 말것을 신신당부하셨다. 건조화물은 JI 교수님이 담당하셨는데 제한된 시간에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어서인지 실무에 바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심층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평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
용하여 영국에서 출항해서 남아공에서 선적하고 오스트렐리아에서 양하하는 산적화물선의 적양하계획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었다.     


Oral Preparation(구술준비) 과목은 AB 교수님과 외부에서 출강 오신 사우스햄턴항 현직 도선사 BH 교수님이 나눠서 진행하셨다. AB 교수님은 벌크선 선장까지 승선한 후, 해운경영학 석사를 받고 다시 영미 크루즈선사인 프린세스 크루즈(Princess Cruise Line)에서 환경사관(Environmental Officer)으로 승선하고서 학교로 돌아왔다. 국민 비만율이 높은, 몇천 명이나 되는 미국인 승선객들이 한끼에 만들어내는 음식물 쓰레기양이 엄청났다고 농담을 했다. 구술시험의 법규분야를 가르치셨는데 영국 선장 면허 공부를 하는 만큼 영국 국내 법규까지 공부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좀 생소했다. 수업에 성실히 임한 몇몇 학생들에게는 특별히 학교 넥타이를 선물하셨는데 감사하게 나도 포함되었다. 사우스햄턴항 도선사 BH 교수님은 시험관이 판단하는 구술시험 당락 여부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Would I have this candidate as a Chief Officer or Master of my ship? (내가 이 응시자를 내 배의 일등항해사로 혹은 선장으로 삼을 수 있을까?)”  BH 교수님은 긴장하여 경직돼서 치르는 구술시험이 아니라 자신감과 여유를 보이는 구직 면접을 상상하라고 했는데 영국의 구직 면접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실제 BH 교수님은 시험에 필요한 지식이나 당신의 경험뿐 아니라 시험관 앞에서의 태도 나아가 실제 선박으로 돌아가 일항사나 선장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수업 중 우리들에게 심어주고 북돋아 주려 노력하였다. 영국 MCA에서는 국제협약, 국내법 등을 선사와 선박에서 실제로 이행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구체적 지침이 되는 MGN(Marine Guidance Note. 해사 지침 주석)을 발행한다. 따라서 구술시험에서도 이 주석에 의거하여 답변하여야 하며, BH교수님은 중요한 MGN의 경우 내용뿐만 아니라 번호와 제목을 함께 암기하여 답변할 때 언급하므로써 시험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시험 결과 발표
SQA시험 결과는 학기 중간인 5월 초 토요일 오후에 발표되었다. 학교 도서관 게시판에 공고가 붙는다고 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사우스햄턴 시내에서 자취하며 통학했기에 학교 인근에 살던 나와 인도 친구 S가 시험 결과를 먼저 확인하고 우리 과정 왓츠앱(WhatsApp) 모임에 사진을 찍어 올리기로 하였다.
주중의 왁자지껄한 분주함이 아닌 주말의 텅 빈 적막함은 학교를 딴 세상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드디어 시험 결과가 게시되었다. 수험 번호를 찾았다. 손가락을 짚어 따라가 점수를 확인했다. 두 과목 모두 합격했다! S도 두 과목 모두 합격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홀가분했다. 지난 몇 달간 날 짓눌러오던 엄청난 돌덩어리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사진을 보고서 슈퍼요트 항해사 JA가 그의 BMW M3를 몰고 나타났다. 자기 눈으로 게시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너무 기분이 좋은지 그 하얗던 얼굴이 정말 벌겋게 상기되어 지인들에게 연신 전화를 돌려댔다.


주말을 이용해 잠시 고국에 다녀온 터키 친구 T가 월요일 아침 교실에 모두를 위한 축하와 수고의 뜻으로 터키에서 사 가져온 전통 과자를 펼쳐 놨다. T도 두 과목 모두 합격했다. 시험 결과 공고에는 다른 인적사항 없이 수험번호만 적혀 있기에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다른 과정 학생들, 외부 응시자도 섞여 있었다. 그래도 우리 동기 중 몇 명이 과목 합격, 한 명이 두 과목 모두 불합격인 것을 다들 알게 됐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고서 며칠 후, 인도 친구 S와 나는 평소처럼 걸어서 하교하는 중이었다. 어느 집 앞, 전력 시설 같아 보이는 녹색 금속상자 위에 누군가 낙서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학교를 오가는 누구라도, 동네 어느 사람이라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흰색 수정펜으로 아주 눈에 잘 띄게 휘갈겨 놓았다.  “Mr. xxxxxxx messed upmy xxxxxx exam! I failed! Fxxx xxx Mr. xxxxx” 이걸 쓴 사람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이건 아니었다. 동일한 교수님에게 배우고서 S와 나는 합격하지 않았던가? 워낙 커다랗게 적혀 있어서 나와 S는 교수님의 성함만 겨우 지우고 괜한 오해를 살까 서둘러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첫 구술시험 응시자
구술시험은 원래 두 번째 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고서, 시간을 가지고 배운 것을 정리한 후 치르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유학 비용을 줄이고 시간과 혹시 모를 추가 응시 기회를 더 얻기 위해 학기 중간부터 하나 둘 구술 시험에 응시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 친구들이 주로 그러했는데, 이 친구들은 앞서 이 과정을 이수하고 인도로 돌아간 여러 지인들로부터 미리 강의 자료, 시험 기출 문제 등을 전해 받고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학기 수업과 구술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영국 친구들은 모두 두 번째 학기를 마치고서 구술시험에 응시했다.


학기 중 구술시험을 처음으로 응시한 세 친구는 와사시해양대학에서 OOW과정을 마쳤다는 AS와 셰브론에서 승선하는 AK, 싱가폴 유조선사에서 승선하는 K였다. AS와 AK는 워낙 잘 하는 친구들이라 이해가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K는 좀 의외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지 인도 동기들 역시 그렇게들 여기는 분위기였다. 세 친구는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구술시험을 치르러 갔고 수업 중인 우리들은 곧 들려올 소식에 당사자처럼 조바심을 가졌다. 가장 먼저 한창 시험을 치고 있을 AS가 별안간 우리 과정 왓츠앱(WhatsApp) 모임에 질문을 올렸다. MCA 구술시험이 유별나다고 느낀 것이 어느 특정 질문으로 합격과 불합격선에 애매하게 걸린 응시자가 있으면, 시험관이 재량으로 응시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10분 간 시간을 줄테니 나가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 가지고 와서 다시 내게 설명해라” AS가 그러했다. 이 일이 또 심심찮게 있는 것이, 나중에 학교 도서관에서 과거 구술시험 기록을 살피다가 동일한 사례를 발견하였다. AS와 AK는 합격하여 다들 축하해 주었다. K는 불합격하였는데, 나머지 인도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뒤에서 K를 무시하였다. 그래도 제법 공부를 하고, 다른 동기들보다 앞서서 구술시험에 응시할 만큼 자신감 있던 친구가 이 일로 그만 주눅이 들어 버렸다. 몇 달 뒤 K는 다른 동기 두 명과 함께 웨일즈(Wales) 지역 카디프(Cardiff)에 있는 MCA 시험장에 가서 구술시험에 합격하여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학생들 사이에 퍼져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MCA 본부가 있는 사우스햄턴 시험장이 다른 지역 시험장보다 까다롭다는 것이다. 더욱이 와사시 출신들에게는 유독 어려운 질문을 골라 던진다는 것이다. 각 지역의 MCA 구술시험관들이 몇 년 주기로 순환근무를 한다는데도 이런 얘기가 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와사시 학생들이야 첫 구술시험을 사우스햄턴에서 치르거나 다른 지역에 가지만, 다른 지역 학생들이 자기 지역 시험장을 제쳐 두고 굳이 사우스햄턴에 와서 첫 구술시험을 치르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K가 불합격하자 다들 시험장 선택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우스햄턴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시험장이 있는 카디프는 기차로 약 세 시간 거리였다. 아예 처음부터 카디프 시험장에 가서 구술시험을 치는 친구들이 적잖이 생겨났고 몇몇은 그래도 사우스햄턴 시험장에서 응시했다. 카디프에서건 뉴카슬(Newcastle)에서건 사우스햄턴에서건 합격할 것 같은 친구는 합격하고 어려워 보이는 친구는 불합격했다.

 

자국 2급 항해사 면허를 가지고서 HND 과정을 이수하고 선장 구술시험을 통해 영국 선장 면허에 도전하는 친구가 인도 친구 G, 터키 친구 T,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 있었다. G는 북해 유전 근해보급선박(Offshore Supply Vessel)에 승선했는데 사우스햄턴 시험장에서 첫 시험을 떨어지자 마자, 스코틀랜드에 있는 북해 유전 중심항구인 아버딘(Aberdeen) 시험장에 접수를 하여 두 번째 응시에서 합격했다. 다들 G에게 빨리 선장이 되어 사우스햄턴 구술시험관으로 오라고 농담을 했다. T는 사우스햄턴과 다른 지역에서 치른 두번의 시험에서 모두 불합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우는 카디프와 사우스햄턴에서 떨어진 후 마지막 학기가 끝난 12월 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삼수 끝에 합격한 인도 친구 M이었다. 타국에 와서 연이은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도전에 합격한 M이 너무 대단하여 함께 정말 축하해 주었다. 서둘러 구술시험 준비에 치중하다 보니 막상 둘째 학기 HND 과목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생각지도 못하게 재시(Resit)를 치러야 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학기가 끝나기 전, 다들 함께 상의하여 우리 과정 기념티셔츠를 맞추어 입었다.  

 

여름방학 법정 부가 교육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 동안 이수해야만 하는 필수 법정 부가 교육 중 남은 교육은 인적 요소 통솔력 및 관리과정 관리자 등급(HELM, Human Element Leadership and Management, Management Level)와 상급 의료관리(Proficiency in Medical Care)였다. 하지만 내 경우 MCA에서 인정하는 STCW 상급교육을 추가로 받아야 했기에 이수해야만 하는 교육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경비도 늘어났다. 이러한 교육들은 해양대학과 사설 전문 훈련기관에서 제공되는데 사설 전문 훈련기관의 교육 비용이 예상외로 오히려 학교보다 저렴했다. 사설 전문 훈련기관의 교육비가 학교 대비 약 20% 정도 저렴했던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선박회사나 관리회사들과 밀접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해양대학들보다 직접적으로 경쟁에 노출되는 중소 사설 전문 훈련기관들의 상황 때문이 아닌지 추측해보았다.


HELM 교육의 교관은 예비역 영국 해군 중령과 소령이었다. 조직관리, 통솔력, 팀웍, 상황인지, 각종 사례 등에 관련한 이론교육과 조별 과제, 그리고 이에 따른 평가가 있었다. 다른 과정들과 달리 승선 시에도 교재를 휴대하여 수시로 참고할 수 있도록 B5 용지 크기로 교재를 작게 만들었다고 했다. 해상 기름 유출 사고 대처와 남극 대륙 횡단 계획 수립에 대한 조별 과제를 수행하였는데 특히 후자의 과제가 흥미로웠다. 런던에서 출발하여 남극 대륙을 횡단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실제 남극 대륙 횡단로, 이동 수단, 소요 경비 산정 및 확보, 장비, 일정 등을 기본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토의하고 결정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다른 조들과 함께 발표, 비평하였다.


상급 의료관리 과정과 상급 응급처치 과정은 학교 근처 마리나(Marinar)에 있는 작은 요트학교에서 수강했다. 와사시를 끼고 흐르는 햄블강(River Hamble)에는 약 10개의 크고 작은 마리나들이 있어 강가와 강 한가운데 계류되어 있는 수많은 요트들의 돛대를 볼 수 있는데, 과장 좀 보태어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리나 선석 수만큼은 되지 않을까 하였다. 어느 평범한 영국의 강도 아마 이런 모습이겠지만, 특히 강 맞은편 햄블 르 라이스(Hamble-le-Rice)에 왕립요트협회(RYA, Royal Yacht Association) 본부가 있어 더욱 많은 마리나들과 요트학교, 요트판매거래소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원래 상급 의료관리과정만 이수하면 되지만, 상급 의료관리과정의 필수 선행 과정이 상급 응급처치과정인지라 결국 두 과정 모두 이수하였다. 상급 응급처치과정은 요트 학교 강사가 되려는 여학생, 영국해협 페리 승무원인 남학생과 함께 교육받았고, 상급 의료관리과정은 아니나 다를까 나를 포함해서 전원이 와사시해양대학에서 각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이었다. 우리 다음으로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을 5월에 입학한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상급 구명정 조종사 교육은 학교에서 이수하였는데 교육 내내 밀폐식 구명정과 팽창식모터보트를 원 없이 몰았던 것 같다. 교육 평가는 마지막 날 구술시험과 실제 구명정 진수 및 운항이었다. 학교는 사우스햄턴 수로와 이어지는 햄블강 하구에 구명정 교육용 자체 피어(Pier, 돌제부두)를 갖고 있는데 해당 해도에 아예 ‘와사시해양대학 구명정 교육 주의’라는 참고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침에 방수 복장으로 갈아 입고 구명조끼를 입고서 마리나를 드나드는 배들과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넓은 공간에서 각자 역할을 바꾸어가며 구명정 진수 및 조선 훈련, 모형 인형을 던져 두고 바람과 조류를 감안하여 익수자 구조 훈련을 하였다.     

 
상급 소화교육을 실시하는 훈련기관은 와사시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야하는 곳이었다. 몇 사람의 교관이 있었는데 대표 교관이 전직 소방관 출신이었다. 이 교육 역시 실습에 치중하였기에 매일 방화복과 자장식 호흡구를 착용하고서 실습을 마친 다음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몸에서 그을음 냄새가 났다. 나와 시리아에서 온 친구를 제외하면 모두 사우스햄턴항 예인선에서 승선하는 선원들이었다. 개개의 기술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선박에서 내가 지휘하여 소화수를 현장으로 투입시킬 때 소화수들이 어떤 환경에 직면하게 되는지 다시금 깨달았고 가장 효과적인 소화 전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법정 부가 교육들을 이수하면서 영국 교육에서 특히 발표를 중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교육생 모두가 각기 주어진 주제를 선택하고서 나눠 받은 커다란 전지에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는데, 내가 기억하는 예전 한국 교육에서는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유사한 경험인 군대 브리핑을 떠올리며, 중요 단어와 정의, 핵심개념 정리 등 줄을 바꿔 가며 내 딴에는 최대한 간략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하지만 다른 영국 친구들의 발표를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달 수단이 단순히 글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은 둘째 치고 화살표, 그림, 만화까지 동원하여 알리고자 하는 바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발표가 모두 끝난 후 교관에게 물어보니 영국 학교에서는 흔하게 사용하는 교수법이라 하였는데, 발표한 전지들을 사진 찍어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이지리아 친구 J는 방학 중 학교에서 영국 GMDSS GOC 과정을 이수하였다.

 

방학 생활
싱가폴 선사에서 근무할 때, 방글라데시 감독이 사우스 쉴즈해양대학에서 영국 선장 면허를 취득했는데, 당신은 학교 교문 바로 앞에 숙소를 구하여 학교와 집 사이만 다녔다면서 방학 때 어디 놀러 다니지 말고 구술시험 준비에 매진하라고 했다. 영국으로 1년 정도 가족과 함께 공부하러 간다고 했더니, 한국의 지인들은 좋은 기회라며 방학 때 시간 내어 영국뿐 아니라 가까운 유럽 여러 나라까지 모두 둘러 보라고 충동질을 해댔다.
하지만 앞으로 살다 보면 뭐 유럽 여행 한번 못 가겠는가 하는 호기와 오히려 영국 시골 구석에서 1년을 ‘찐’으로 사는 경험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근처를 둘러보는 당일치기나 1박 2일 나들이 정도 말고는 거창한 여행은 하지 않았다.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구술시험 준비를 하는 한편, 도서관 서가들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훑어 보다 관심 있는 책을 뽑아 읽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영국의 해운업과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영상들을 검색하여 보곤 했다. 통항분리방식(Traffic Separation Scheme)에 대한 책을 읽다가 항로 방향과 관련한 흥미 있는 소사(小史)를 발견했다. “영국의 차량 통행 방향은 좌측 통행으로 특유의 회전교차로까지” 선박 통항 체계에 포함시킨 영국이 왜 자국의 익숙한 차량 통행 방향과 반대되는 우측 통행의 선박 통항분리방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다수의 국가들이 우측 통행을 채택하고 있는 현실도 있었겠지만, 책에서는 1966년 정부간 해양협의기구(Inter-Governmental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tion, IMO의 전신)에서 통항분리방식을 토의하던 당시, 참석한 프랑스 수로국장이 우측 통행으로 결정되는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 은근히 프랑스 탓을 하고 있었다. 
영국 친구 JA가 사우스햄턴항 도선사와 구술시험 대비 개인교습을 하였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고맙게도 내게 권하였다. 이리저리 고심하다 여름방학 후 9월 말부터 학교에서 시작하는 선장구술시험 준비(Master’s Oral) 과정에 등록할 요량으로 개인 교습은 사양하였는데, 행정 착오인지 등록이 안되어 혼자서 구술시험 준비를 계속하였다. 


한국인 교수님
2학기가 끝날 무렵, 학교에 계신 한국인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영국으로 가기 전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인 교수님이 한 분 재직 중인 것을 이미 알았지만, 부지불식간 내가 그 분께 의지할까 혹 그 분께 부담될까 하여 일부러 찾아뵙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보는 도서관 사서 노부인이 학교에 한국인 교수님이 계신다고 말을 꺼내고 영국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라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서성기 교수님은 1980년 영국으로 유학 오셔서 뉴캐슬대학교(Newcastle University)에서 선박유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줄곧 영국 대학들에서 재직해 오셨다. 뉴카슬에서 주말한국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몇 년 동안 교장으로 학교를 이끌면서 많은 한국 학생들이 영국 내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다고 하셨다. 자제분들 역시 모두 영국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하게 영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히 생활하고 있었다. 서 교수님은 기관학과 학생(Officer Cadet) 과정을 담당하고 계셔서 막상 수업에서 뵐 기회는 없었다. 아내, 아이와 함께 교수님 댁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사모님이 준비하신, 식탁이 주저앉을 만큼 차려진 한국 음식으로 몇 달 만에 포식을 하였다.


서성기 교수님은 선박의 전심(轉心, Pivot Point) 위치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최소한 백 년 이상 전래된 경험치로 정립된 기존 이론이 잘못됐음을 밝혀 내셨다. 이 연구의 발단은 학교 유인선박조종시뮬레이션센터(Manned Ship Handling Simulation Centre)에서 시작되었다. 기존 전심이론에 따라 선박을 선회시키던 교관들이 이론상 예상치와 다르게 선박이 자꾸 구조물에 부딪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교수님께 얘기한 것이다. 경험 많은 선장 혹은 전직 도선사 출신인 교관들은 처음에는 기존 이론을 뒤엎는 교수님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현재는 학계와 도선사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브라질과 오스트레일리아 도선사협회는 기존 전심 이론 대신 교수님의 이론을 협회 차원에서 채택했고, 독일 해군 역시 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2학기 때 해운 경영을 가르치신 G 교수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자택 침대에서 주무시다 돌아가신 것을 아침에 사모님께서 발견하셨다 한다. 사모님께서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으셨을까?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서 G 교수님이 특별히 날 격려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한데… R.I.P. Dr. Gavin Brown.


 
첫번째 구술시험

11월 중순 사우스햄턴 시험장에서 선장 구술시험에 응시하기로 신청했다. 구술시험은 학생들 각자가 신청하는데 우선 MCA에 자신의 해기면허, 승선경력, 영국 MCA 승인 선원신체검사증서 등 필요 서류를 제출하여 일종의 응시 원서격인 자격통지서(Notice of Eligibility)를 발급받아야 한다. 원하는 시험장에 MCA가 발급한 자격통지서를 제출하여 구술시험을 예약하고 응시할 수 있다.
1학기 초, 자격통지서 발급을 위해 요구 서식을 작성하고 필요서류를 갖추어 MCA에 제출하였는데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한국 2급 항해사 면허취득 이후의 승선경력을 조회하는데 필요하니 2급 항해사 면허 최초 발급일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항해사 면허를 갱신하러 우리나라 해양수산청에 가면 갱신이라 하면서 기존 증서의 갱신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 면허 번호와 증서를 발급해주는 것이 좀 의아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될 줄이야. 면허 증서에는 해당 면허의 최초 발급일 없이 해당증서의 발급일만 있기에 한국으로 이메일을 보내 우선 지방해양수산청에 문의하였다. 지방해양수산청에서는 해양수산부 본부 소관이라며 본부 담당자를 알려 주었다. 해양수산부 본부 담당자에게 MCA 담당자가 면허 최초 발급일을 요구하는 이메일과 나의 해기면허증서, 와사시해양대학 학생증을 첨부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해양수산부에서 영국 MCA로 공식 답변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양수산부 담당자가 친절하게도 나의 2급 면허 발급일을 신속하게 알려주긴 했는데 문제는 막상 답장을 내게만 보낸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한국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자 왈 영어로 이메일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투로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MCA담당자에게 보내는 영문 답장을 직접 써서 해양수산부 담당자에게 보내고, 해양수산부 담당자가 이를 받아 다시 MCA 담당자에게 보냈다. 나중에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MCA 담당자에게 한국 해양수산부의 공식 답변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해양수산부로부터 받은 - 실은 내가 쓴 - 답장을 함께 보내 주면서 잘 받았다고 곧 자격통지서가 발급될 것이라고 답하여 겨우 한 고개를 넘은 느낌이 들었다.


구술시험은 시험관과 응시자 일대일로 진행되며 대략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가량 소요된다. 일이십 분 걸리는 간단한 시험이 아닌 탓에 사우스햄턴 시험장에서는 하루 최대 네 명만 응시할 수 있고, 응시료 역시 상당한 액수이다. 시험장에 들어서면 먼저 인적 사항과 응시자의 승선 선종을 확인하고 주의사항 고지 및 간단한 분위기 전환을 한 후 시험을 시작한다. 선장 구술시험의 첫 문제는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자네가 이제 유조선 –또는 응시자 선종에 따라 컨테이너선, 산적화물선, 크루즈선 등– 에 선장으로 새로이 승선하는데 부두 갱웨이(Gangway)에서부터 선장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어떤 점들을 살펴볼텐가?” 각종 증서, 규정, 기상, 항해장비, 선박운용, 선원관리, 화물 등에 대한 질문들을 거쳐 시험의 마지막은 ROR(Rules Of the Road) 문제로 끝난다. 항법, 부표체계, 레이다플로팅 등을 망라하는 것으로 앞서 다른 질문들과 달리 곧바로 당락을 결정하는 문제들이다. 항법과 부표체계는 각각 모형선박과 모형부표들을 하나하나 책상 위에 늘어놓고서 질문을 하며, 스마티 보드(Smartie Board, 검은 금속판에 적, 녹, 백색의 자석을 붙여 선박의 등화를 표시함)를 이용하여 등화를 식별하고 이에 따른 항법을 묻기도 한다. 구술시험의 대략적인 주제와 범위는 다음의 표와 같다.


예전 구술시험에는 항해 중 타가 고장으로 유실되었을 때의 비상 대처법을 묻는 질문도 출제되었다. 답은 주갑판의 화물창 덮개를 떼어 가져와 선미 추진기 쪽으로 내리고 후갑판 양쪽 양묘기에 로프로 연결하여 응급 타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물론 현재와 같은 선박의 초대형화가 이뤄지기 전의 문제이다.          
구술시험에 합격한 동기들은 하나둘씩 귀국하거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국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와사시 학생들도 졸업하여 학교를 떠났다. 남학생 R은 고향으로 돌아가 요트학교 강사를 한다고 했고, 여학생 S는 P&O Cruises Australia에, 여학생 K는 영국 연안 준설선에 각각 3등 항해사로 승선할 거라 했다. 동기들 중 유일하게 와사시에 살면서 수업 시간뿐 아니라 등하교길도 함께 하던 인도친구 S도 귀국하게 되었다. S는 사우스햄턴과 카디프에서 치른 구술시험에 불합격하였고, 일단 돌아가서 승선한 후에 다시 준비하고 영국에 와서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구술시험은 단순히 암기사항을 시험관 앞에서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지식과 그간 자신의 경험을 접목하여 이를 토대로 최대한 합리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이를 다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구술시험 준비 필독서랄 수 있는 책을 구입하여 숙독하고 나름 이런 저런 책과 자습용 DVD를 구입하여 공부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기출구술시험보고서(Past Oral Exam Report)를 빌려 예전 문제들과 시험의 분위기를 익혔다. 이 보고서들은 구술시험 응시자들이 시험 후 자발적으로 자신의 구술시험을 정리하여 학교 도서관에 제출한 것이다. MCA가 구술시험에 대해 발행하는 공식 기출자료가 없는 만큼 실제적이고 유일한 참고 자료지만, 부정확함이나 다소 과장도 담겨 있고 당연히 불합격자보다 합격자가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구술시험의 원칙은 어디나 동일하다. 알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답하되 시험관이 추가 질문을 할 정도로 필요 이상 많이 얘기하지 말 것. 답변이 다시 꼬투리가 되어 내게 날아오지 않도록 더도 덜도 말고 시험관이 원하는 딱 그 선에서 멈출 것. 머릿속에 하나하나 정리하여 담아 나가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부분에서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 과정 주임교수인 K 교수님과 상담을 하니 구술준비 과목을 담당하셨던 AB 교수님과 개인 교습을 주선해 주셨다. AB 교수님과 함께 법규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전체 시험 범위를 정리하고 문답하며 ROR 문제도 연습하였다. 교회 친구의 아들에게 부탁해서 주말에 만나 구술시험 교재를 가지고 묻고 답하는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AB 교수님과 최종 모의시험까지 치렀다. 교수님께서는 시험 시작 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닐 뿐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니 대답이 유창하지 않더라도 이해해줄 것을 미리 시험관에게 얘기하라고 조언했다. 마지막 학기는 12월 말에 끝나고 학생 비자는 다음 해 2월 말까지 유효하지만 혹시나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가 한 배를 승선하고 나서 시간을 좀더 가지고 준비한 후 영국으로 다시 와 두 번째 시험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시험날이 되었다. 사우스햄턴 MCA 본부에 10분전쯤 미리 도착하여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되어 시험관이 들어와 내 이름을 물어 확인한 후, 함께 시험실(Exam Room)로 들어갔다. 시험실에는 자기 나침반과 레이다플로팅 도구, 각종 항해 장비와 모형선박, 모형부표들이 있었다. 시험관은 Capt. M. 살짝 까다롭지만 뭐 무난하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시험관이 절차에 따라 나의 신원과 면허증서, 승선선종을 확인하고, 구술시험과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나는 나의 영어 답변에 대한 양해를 구했고 시험관은 이해한다고 편안하게 시험에 임하라고 했다. 첫 질문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장으로 승선할 때 어떤 종류의 증서들을 확인할 텐가?” 나쁘지 않게 대답했다. 문답이 이어졌다.


“사우스햄턴에서 미국 동부해안까지 항해하는데 어떤 준비를 하고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선장이 선박보안책임자(Ship Security Officer)인데 일등항해사도 선박보안책임자 증서가 필요한가?”
“ISM Code(International Safety Management Code, 국제안전관리규약)에서 말하는 SMS(Safety Manage
ment System, 안전관리체계)의 6가지 기능에 대해 설명해라”
내 대답이 좀 느려졌다. 시험관이 볼펜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화물선 안전장비증서(Safety Equipment Certificate)
갱신 검사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폴란드 사관 두 명이 새로 승선했는데 어떤 종류의 선원 서류들을 확인할 것인가?”
내 대답이 점점 더 느려졌다. 시험관이 다시 한번 볼펜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였다. 그날 따라 그 망할 몽블랑 볼펜의 하얀 육각형 별이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와 팍팍 꽂혔다.
“1년 간 계선해있던 선박을 출항시키는데 무엇을 확인하고 준비할 것인가?” 
“ILLC(International Load Line Convention, 국제만재흘수선협약) 검사와 이에 따른 증서, 문서 종류에 대해 설명해라. 이에 해당하는 M Notice(MGN, MSN or MIN) 번호는 몇 번인가?”


시험관이 시험을 중지하고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네 답변이 어떤 것 같냐?” 나는 많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느낀다고 답했다. 시험관은 내 답변 중 잘된 부분과 부족한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서 마지막으로 내 자격통지서에 ‘불합격’이라고 적어 돌려주었다. 좀더 적극적으로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알고 있는 것조차 다 말하지 않았고 아울러 언어의 문제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시험장을 나서니 사우스햄턴 시내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떠 있었다.


시내 솔렌트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내 시험 결과를 궁금해하고 있을 친구들을 찾아 갔다. 누구는 두 번째 구술시험, 누구는 세 번째 SQA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구술시험 문제들을 알려 주고 ROR문제 전에 Capt. M이 시험을 중지시켰다고 하자, 인도친구 V가 웬만하면 다들 ROR문제까지 가서 떨어지는데 아예 중간에서 떨어진 너는 폭망한 경우라 하여 함께 웃었다. 타국에서 근 1년동안 함께 공부하고 지낸 이 친구들을 이제 모두 한 자리에서 다시 보긴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나이지리아 친구 J가 자기가 그럴싸한 집을 찾겠다고 앞장서서 들어가기에 간판을 자세히 보니 젤라또(Gelato) 아이스크림집이었다! 결국 시내 중심가에 있는 펍 ‘THE STANDING ORDER(당직 명령)’에서 맥주 한 잔씩 하며 저녁을 들었다. 헤어지기 전, 시험들 잘 보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꼭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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