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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海運의 代父는 누굴까?
[579호] 2021년 12월 01일 (수) 11:12:06 耕海 김종길 komares@chol.com

이 글은 고려대학교 해상법연구센터 김인현 교수의 포럼(회원 500명)에서 발표한 온라인 강의내용을 필자가 보완해 기고한 내용이다. 강의 당일 150여명이 참여하여 60분 강의와 120분 질의응답과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耕海 김종길

1. 해운 선각자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제합방하고 조선해운말살 정책을 펼쳤다. 조선총독부가 군소 해운회사를 통폐합하여 1912년에 조선우선을 설립하여 조선사람이 해운에 접근할 수 없도록 원천적인 봉쇄를 했다. 하여 광복 당시 우리 해운은 황무지였다.
삼국시대에 경쟁적으로 중원을 나들며 조공무역이 발달되었고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고 중동까지 진출한 해양국가였다. 조상의 DNA가 유전되었음인지 일제 치하에서 상선학교에 진학하여 해기사면허를 획득하고서 해운 전문지식을 습득했다. 이들이 광복 후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분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계 7대 해운국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발전됐으나 수출입과 해운이 동전의 앞뒤임을 국민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조선조의 뿌리 깊은 유학(儒學)의 기풍이 바다를 멀리하고 바닷사람들을 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 선각자들 몇 분을 소개하자면
❶ 유학렬: 조선인으로 동경고등상선학교에 최초로 입학하였고, 최초로 도선사가 되어 해방 당시 미국 원조물자 수송선박을 도선했고, 매카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에 공헌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출하였음. 아들 세 분도 모두 해운에 진출하여 4부자가 해운에 투신한 한국 해운의 명문가이였다.
❷ 황부길: 초대 해운국장으로 선박확보, 항로개척, 선원양성 등 해운정책을 비전 있게 펼쳐 해운발전의 초석을 구축하였고, 4·19혁명 후 해무청장으로 임
명되어 KR 설립을 주관하였으며 부산항 도선사와 해양대학장을 역임했다.
❸ 남궁련: 해운공사와 조선공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극동해운을 설립하여 침몰 선박을 인양 수리하여 고려호로 명명하고 태평양을 최초로 횡단케 했다.
❹ 이시형: 진해 고등해원양성소를 재개하여 해양대학으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해운 동량들을 양성했다.
❺ 박옥규: 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조선우선 선장으로 근무하며 로이드 보험이 최고 선장으로 인정했다. 해군창설에 참여하여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고 현역제독의 신분으로 고려호 선장이 되어 최초로 태평양 횡단항해를 했다.
❻ 신성모: 대영제국의 슈퍼마스터 자격을 획득하였고 귀국하여 내무장관과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서리를 역임하고서 대통령의 해사정책 자문역을 하였음. 마지막으로 해양대학장으로 임명되어 해양대학을 개혁하고 발전시켰다.

 

2. 대통령의 신성모에 대한 신뢰
이승만 대통령이 민성일(民聲日)에 노동자 농민 서민층의 민원을 청취했다. 한 노파가 대통령께 “내아들 찾아주시오” “아들이 누구시오?” “신성모요” “오 캐프틴 신! 곧 돌아올 겁니다” 이승만은 신성모를 익숙히 알고 있었다.
신성모가 1948년 10월 3일에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첫 임무는 대한청년단장으로 제주 4·3사태 진상조사와 구호대책을 대통령께 보고했다. 신성모가 국방장관 재임 중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야당이 신성모의 책임으로 몰아붙여 해임됐다.
대통령은 신성모를 주일한국대표부 공사로 임명했다. 귀국하여 해사위원장으로서 평화선선포, 해무청설치, 해경창설 등 정책자문역을 했다. 1956년 제8대 해양대학장 임명은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뢰였다.
4·19혁명 이후 한국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신상초가 작정하고서 신성모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글을 『광장』 잡지에 2회에 걸쳐 게재하여 정치적으로 매장을 시켰다. 『해양한국』도 이 글을 그대로 옮겨실어 해운계에서도 신성모를 용서받지 못한 인물로 낙인찍었다.

 

3. 해양대학장 신성모
미국 원조로 부산 영도에 해양대학을 신축하였으나 내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신성모가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여 우선 학생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였고 도서관 신축과 운동장 건설 등 시설과 환경을 정비했다.
그때까지 교과서가 없었다. 미국 킹스 포인터 교과서를 해군인쇄처에서 복사한 교과서로 학생들이 전공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학생 외출을 통제해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고 교수자질향상을 위해 손태현은 연세대학, 이준수는 경희대학으로 유학시켰다. 해운공사 금천호를 인수하여 반도호로 명명된 실습선을 확보했다. 그리고 해군예비원령을 제정하여 학생들의 병력문제를 해결했다.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UNCTAD 자금으로 신축한 해양대학에 미국이 캡틴 스미스를 고문관으로 파견했다. “학장은 무슨 해기면허장을 가졌소?”라고 물었다. “I have the Extra Master License of the British Empire”라 대답하자 스미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Yes, Sir!”라며 거수경례를 했다.
2차대전 후 미국이 세계를 주도했으나, 1588년 엘리자베스Ⅰ세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350년간 5대양 6대주를 지배했던 영국을 떠받들어 왔는데 나라 잃은 신성모가 대영제국의 엑스트라 마스터일 줄 꿈엔들 상상했으랴!


학장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가끔 특강을 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1/3이 돌아오지 못했다. 영국 상류층 시민과 선원들의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을 강의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택상, 이은상, 홍진기 등 명사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했다. 장택상은 허스키 목소리로 “바다를 제패한 자 세계를 지배한다”란 Sea Power 강의를 60년이 지냈는데도 잊히지 않는다.
이은상은 충무공 애국충정의 난중일기를 잔잔하게 강의했다. 홍진기를 해사행정을 일원화시킨 탁월한 행정가라고 소개했다. 특강은 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여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라는 간절한 신성모의 애국심이었으리라.

 

4. 신성모의 진면목
신성모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극과 극이다. 진면목을 파악하려고 의령군청과 문화원을 비롯하여 알만한 곳에 문의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치적으로 매장되면 모두가 외면하는 것이 세상인심일까!
백산 안희재의 장손 안경하가 신성모 유족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질문서 100개와 녹음기를 준비하고서 따님 신내원과 손녀 신한덕을 상대로 대면 기록을 했다.
신성모는 1891년 5월 26일 경남 의령에서 신재록의 독자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백산 안희재의 도움으로 마산 창신학교를 거쳐 보성전문 재학 중, 한일합방이 되어 연해주로 망명했다. 백산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중국 안동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풀려나 중국 남경항해학교에 재학 중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퇴교당할뻔했는데 김익환의 신원보증으로 구제되었다. 김익환은 대한제국 외국어학당을 졸업하고 청국대사 자녀의 영어가정교사가 되었다. 일제강점으로 청국대사관이 폐쇄되어 김익환은 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갔다. 신원보증의 인연으로 신성모가 김익환의 딸 김복희와 결혼하여 아들 명구와 딸 내원이 북경에서 태어났다.

 

5 김복희 고난의 행진      
신성모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부두노동을 하다가 런던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김복희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기 때문에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수 없어 두 자녀를 데리고 만 리 타향 남편의 고향 의령으로 갔다. 가난한 시가에서도 머물 수 없었다. 의령의 부호 이우식의 도움으로 일본 오사카로 이주했다. 이때 신성모가 영국 상선 견습사관으로 4개월마다 고베항에 입항하여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개성의 부호 공진항의 도움으로 도쿄로 옮겼다가 2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에 머무를 수 없어 만주로 돌아갔다. 공진학의 만몽농장에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장질부사가 만연되어 동포를 간호하다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6. 신성모의 사망과 명예 회복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5월 25일 뇌일혈로 쓰러졌다.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한 5월 29일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란 유언 한마디를 남기고 운명했다. 해양대학 학교장으로 고향 의령에서 초라하게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스미스 고문관이 헌납한 『韓國海洋大學長 小滄 申性模之墓』란 묘비가 영결식에서 쓸쓸하게 빛났다. 유족들은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신성모에게 추서되어 현재 대전 국립현충원에 영면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었다. 2009년 3월 6일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제1호로 헌정되었다. 해운계에서도 명예 회복이 됐다.
최근 연세대학교 이승만 연구원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6·25전쟁 전황에 관한 육필보고서가 발견되어 월간조선 2020년 8월호에 게재되었다. 1950년 7월 1일부터 12일까지 전황을 9차례 대통령께 직보한 내용이다. 6·25 전쟁사와 신성모의 역할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다.

 

7. 대한민국 해운80년사
2025년이면 대한민국 해운 80년이다. 『해운산업합리화』란 죽음의 바다를 건너오는 등 수많은 해운기업이 명멸했다. 80년은 세계해운사에도 의미가 있다.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 등 3척의 배를 거닐고 1492년 에스파냐를 출항한 대양항해 탐험은 80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해운사가 몇 번 발간되었으나 정부 통계나 자료를 베껴 썬 관변역사였다. 『대한민국 해운80년사』에는 실체적 사실(史實)을 담기 위해 전문가들이 방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해야 한다. 준비 기간은 2~3년 소요된다. 집필은 1~2년이면 족하다. 역사에는 상징적인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적 갈등으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 해운계만이라도 상징적 인물이 결정되길 기대한다.
나는 『되돌아본 海運界 史實들』 『영예로운 海運人들』 『선박행정의 변천사』 등을 집필하면서 해운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을 두루 살펴봤다. 신성모가 마땅히 대한민국 海運의 代父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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