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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577호] 2021년 10월 01일 (금) 12:47:46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timkang@hanmail.net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이 들어있는 9월,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보름달처럼 밝고 넉넉한 한가위를 맞으셨는지요?
‘도시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도시는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혁신하는가?’ 영국의 역사학자 벤 윌슨이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를 통해 답을 주었다. 그는 이 책에서 최초의 도시 우루크로부터 아테네, 로마, 바그다드, 맨체스터, 파리 등 6,000년간 인류문명을 꽃피웠던 도시를 스토리텔링 했다. 이들 도시가 어떻게 문명을 싹틔워 번성했고 또 몰락과 쇠퇴의 길을 걸었는지 상세히 드러나는 도시의 역사이자 인간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문화탐방이다.


인류는 어디서 어떻게 생활해왔을까?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도시적 정착지가 출현한 이래, 도시는 정보교환소 역할을 해왔다. 사람들이 조밀한 대도시에서 활발히 교류함에 따라 역사의 동력인 각종 사상과 기법, 혁신이 생겨났다. 도시는 항상 인류의 실험실이자 역사의 촉매제였다. 인간은 지식을 공유할 때, 지역적 환경 특히 정보의 흐름을 촉진하는 장소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때 번성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도시의 복잡한 사회관계망을 통해 번졌다. 사회관계망으로 엮인 도시는 번영과 위험을 동시에 초래한다. 인류는 도시의 개방성과 다양성 그리고 밀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도시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어머니 도시라는 뜻의 ‘메트로폴리스’는 단순히 웅장한 건물이나 도시계획에 관한 책이 아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도시생활의 압박에 대처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다루었다. 도시는 끊임없는 변화와 적응과정을 겪는 휘발성 지대다. 도시는 웅장한 건물과 특징적 대형건물로 불안정성을 은닉하지만, 그 영속의 상징물 주변에는 무자비한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도시에서의 기쁨과 역동성은 도시의 공간적 혼란스러움에서 비롯된다. 공간적 혼란스러움이란 건물과 인간 활동이 서로 뒤섞여 상호작용하며 연출하는 다양성이며,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도시다움의 핵심이다. 도시는 온갖 종류의 재난에 맞서고 대응할 수 있는 끈질긴 집단이고, 인간은 도시생활의 압력과 가능성에 익숙해진 유연한 도시 종족이다.
우리가 코로나 감염병으로 봉쇄조치를 겪는 동안, 도시의 밀집성은 혜택에서 위협으로 변모했다. 기후 비상사태와 팬데믹 시대를 맞은 지금이 바로 도시와 도시생활에 대해 평가해볼 적기다. 기후변화와 세계적 유행병이라는 심각한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끈질기고 유연한 도시가 필요하다.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자원이 풍부한 공동체로서의 도시 복원력을 키워야 한다. 도시는 골격인 건축, 기반시설, 기술체계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곳의 이야기나 역사, 세월이 흐르며 쌓이는 기억, 신화, 집단경험 같은 요소들도 매우 소중하다. 이것이 도시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여명-우루크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엔키두는 자연과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시냇가에서 멱을 감는 샤마트의 알몸을 보고 넋이 나가 사랑에 빠졌다. 엔키두는 원시적 자연상태의 인간을 상징하며, 황야의 자유로움과 도시의 부자연스러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였다. 샤마트는 세련된 도시문화의 화신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수메르인이 세운 도시 우루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뜻한다. 세계 최초의 도시 우루크는 1,0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심으로 군림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둑에 생겨난 도시의 발명은 인류사에 멈출 수 없는 힘으로 용솟음쳤다. 농업에 가장 유리한 지역을 품은 이곳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렸다. 서쪽의 나일강에서 동쪽의 페르시아만까지 펼쳐진, 오늘날의 이집트에서 시리아, 이라크, 터키의 동남부와 이란의 서쪽 가장자리를 아우르는 반원형 지대다. 최초의 도시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가장자리인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탄생했다. 신들의 대장간으로 알려진 우루크가 역동적으로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곳이 교역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우루크의 주민들은 그들의 도시가 신이 내린 선물이고,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 중에 제일 훌륭하다고 믿었다. 우루크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문명은 전쟁과 재난, 경제적 붕괴를 견디며 여러 세대에 걸쳐 도시의 위력을 과시했다. 마치 거대한 두상화처럼 우루크는 문화를 아주 먼 곳까지 퍼뜨린 어머니 도시요 대도시의 원조였다. 우루크에서 화폐가 가장 먼저 만들어져 교역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널리 통용됐다. 국가와 왕이 있기 오래전에 이미 도시가 존재했다. 정치조직의 기본재료인 도시에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편성하는 관료제와 종교가 탄생했고, 도시를 방어하고 힘을 투영하는데 필요한 왕과 군대도 등장했다. 우루크는 무척 오랫동안 실용적이고 신성한 도시로 남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쇠퇴기에 접어들어 마침내 수메르인과 함께 수명을 다해 위대한 도시로 도약한 지 5,000년 뒤인 서기 700년경 그 신비로운 도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로 전락했다.

 

에덴동산과 죄악의 도시-하라파와 바빌론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걸친 광활한 땅에 1,500개 이상의 정착지가 발견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도시들과 무역로의 전략거점이 해안과 하천계에 있었다. 대략 500만명이 살던 이곳의 주축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를 비롯한 5개 도시였고, 대표적 도시 하라파의 이름을 따 하라파 문명이라고 부른다. 하라파인은 메소포타미아 도시로부터 도시개념을 차용했으나 그들이 만든 도시들은 전적으로 토착문화와 독창성의 산물이었다. 최근 고고학자들은 인구 10만명의 모헨조다로를 청동기시대 최대의 도시이자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장소로 여긴다. 불가사의한 하라파 문명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생활 수준은 두 도시가 존재했던 시기뿐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도 놀랍도록 높았다. 아마 에덴동산도 하라파 문명처럼 큰 대가를 치를 필요 없이 수요가 충족되고 안전이 보장되는 장소였을 것이다.


 도시는 증오의 대상이다. 성경에는 지옥 불로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하여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느니라” 세속적 유혹과 향락으로 얼룩진 바빌론은 전형적인 죄악의 도시였다. 우주의 중심 바빌론의 상징 이슈타르 성문을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왕궁과 신전들이 버티고 서 있다. 도시 위로 하늘과 땅의 기초를 이루는 집이라는 뜻의 거대한 지구라트 에테메난키가 보이고, 그 건너편에 유프라테스강이 흐른다. 도시적 오만과 혼잡의 상징인 바벨탑이 바로 에테메난키다. 그러나 바빌론이 누린 미증유의 전성기는 겨우 몇십년만에 막을 내렸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에게 정복되어 오만의 극치로 불렸던 바빌론의 몰락은 훗날 문학적, 예술적 은유로 남았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대도시의 벽돌은 하나씩 사라져 근처의 촌락과 도회지에서 재활용되었다. 바빌론은 촌락 규모가 줄어들어 그로부터 2세기 만에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낭만주의 시대부터 할리우드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화에는 강력한 반 도시적 편견이 있었다. 이런 사조에 의해 바빌론은 세속적 형식을 통해 오명을 뒤집어썼다. 바빌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려는 열망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 도시의 모순인 대립적 요소와 상스러움은 오히려 그 도시에 강렬한 자극과 맥동하는 에너지를 선사한다. 도덕적 기준이 낮은 곳, 저열한 퇴폐업소가 있는 곳, 매력과 재력을 갖춘 곳, 이것은 대도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이율배반적 특성이다.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다.

 

국제도시-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역동성은 주로 관념과 물품, 사람의 지속적인 유입에 따른 결과다. 역사적으로 도시가 번영을 누리려면 언제나 그곳 관문을 두드리는 대규모의 이주자들이 있어야 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가 거둔 놀라운 성공은 외부 영향에 대한 개방성과 자유민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외국 태생이라는 점 덕분이었다. 국제적 대도시 안에 조성된 도시풍 무대장치는 그리스의 도시문명과 아테네인의 진취성을 증명한다. 아테네는 문화가 서로 겹치고 무역로가 교차하며 관념이 널리 유포되는 지중해 연안의 지형적 특성에 힘입어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내륙도시와는 전혀 다른 도시로 탄생했다. 그리스인은 다양한 민족과 뒤섞이는 과정을 거쳐 지중해 지역의 모든 문화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스 사회의 핵심은 폴리스였다. 폴리스라는 단어는 도시나 도시국가라는 의미이나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폴리스의 진정한 의미는 도시환경 속에서 조직된 자유 시민들의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 공동체를 뜻했다.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멀리 떨어진 열악한 곳에서 도시를 건설하여 시민들의 자치공동체로 발전시켰고, 그 개념이 그리스로 역수입되었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아테네는 도시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시민공동체로서의 아테네였다. 시장이나 광장이라는 뜻의 아고라는 폴리스의 상업, 오락, 풍문, 소송절차, 정치가 실없는 잡담 속에 한데 뒤섞여 집단 에너지를 발산하는 장소였다. 아고라 근처에 바위를 깎아 만든 연단이 있어, 모든 시민은 이곳에 서서 시민들에게 연설할 권리가 있었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자랑했다. “우리 도시는 세계에 활짝 열려 있다. 우리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온 세상의 과실들이 흘러온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물산을 우리 것만큼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아테네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테네인이 외국인에게 점점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적들이 생겨났고, 역병이 아테네를 강타하여 도시 전체를 휩쓸어버렸다. 민회와 민주정을 통해 아테네가 위대한 도시로 발전한 지 1세기도 흐르기 전에 아테네는 힘을 잃었고 국체가 붕괴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도시국가들에 승리를 거두며 그리스를 정복했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아시아 지역 깊숙이 전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과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같은 나라를 정복했고, 도처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에도 제일 오래 버틴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다. 거대한 등대를 갖춘 알렉산드리아의 최신식 항구 덕택에 이집트는 더 넓은 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 성장을 거듭한 알렉산드리아는 마침내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그 도시를 꿈꾼 지 불과 70년 만에 30만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발돋움했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 크리소스토무스가 “알렉산드리아는 세상 온갖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모습을 보며 서로 비슷해지는 시장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 국제적 상업도시는 누구나 환영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백과사전적이고 순응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과학, 수학, 기하학, 역학, 의학 등의 분야에서 세상을 선도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적 원천으로 남았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도서관은 조금씩 부서졌고, 지식을 담은 파피루스는 화재와 전쟁과 포악한 황제들 그리고 사상을 통제하는 주교들과 습도 탓에 야금야금 사라졌다.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국제도시라는 마지막 영광마저 해저지진에 따른 쓰나미에 휩쓸려버렸다.


목욕탕 속의 쾌락-로마
로마인은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도시도, 공공건물도, 야심도 클수록 좋고, 영토와 사치품, 힘과 물건도 많을수록 좋았다. 로마와 그 거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방대한 제국의 규모를 느끼고 이해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시인 스타티우스는 이렇게 읊었다. “수고와 근심을 떨쳐버려라. 빛나는 대리석이 번쩍거리는 목욕탕을 찬미하노라!” 로마인의 끔찍한 목욕 사랑은 지금까지 의문의 대상이다.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목욕과 목욕에 연계된 활동을 향한 욕구가 더욱 강렬해졌고, 목욕시간도 점점 더 길어졌다. 그 방종과 탐닉, 치장의 현장은 로마가 지중해와 서유럽의 주인으로 떠오른 비결인 엄숙하고 금욕적인 정신과는 극도로 대비됐다. 로마는 역사로 가득 채워진 도시였다. 그들은 행여 조상보다 허약하고 무기력해질까 두려워했다.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면서 그런 염려는 현실이 됐다. 세네카는 목욕을 탐닉하는 깔끔한 동포들을 이렇게 비난했다. “우리 조상에게는 천막과 농장 그리고 영웅 냄새가 났다” 목욕을 타락과 퇴폐를 부추기는 관습으로 여겼던 역사가들은 목욕이 로마제국 쇠망의 씨앗이었다고 생각했다. “목욕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로마시대에 회자했다. 세네카 시절의 로마는 인구가 100만이 넘는 도시였기에 목욕을 퇴폐의 증거나 극단적 도시성의 발로로 보는 것은 좀 지나쳤다. 오히려 도시 거주자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목욕탕은 도시를 알거나 보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곳으로 침투한 로마식 도시팽창 과정으로 게르만인이나 갈리아인, 브리타니아인이 야만인 때를 벗고 로마인으로 탈바꿈하는 통과의례였다. 문명의 라틴 어원은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과 뒤섞여 살 때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렇듯 목욕탕은 문명의 두드러진 물리적 상징이었다. 5세기 말엽 인구가 10만명으로 급속히 감소한 로마에는 거의 유산만 남아 있었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는 비대해진 유산이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는 자기 몸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목욕은 도시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목욕탕과 수로교의 유적은 도시성 붕괴를 가리킨다. 이슬람권 대도시와 아시아의 도시들에서 살아남은 목욕탕은 만개한 도시생활을 상징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이 예전처럼 보잘것없는 곳으로 전락하는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맹렬한 에너지와 도시화로 활력을 찾고 있었다.

 

다채로운 식도락의 향연-바그다드
3개 대륙에 걸쳐 있는 광활한 도시요 제국의 중핵 바그다드는 새로운 세계적 문명의 위업을 보여주는 도시였다.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는 맨땅의 잿더미 속에서 세계의 지적, 영적, 상업적 수도의 윤곽을 그렸다. 그는 매우 정교하고 감탄스러운 도시 설계안에 따라 10만명의 건축가와 기술자,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완성했다. 이후 십여년 만에 바그다드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어섰고, 전성기에는 무려 200만명을 기록했다. 시인 알리 탈리브는 이렇게 썼다. “바그다드는 가장 사랑스러운 도시 아니었던가. 시선을 사로잡는 장관 아니었는가!” 음식문화가 꽃핀 바그다드는 고위층이나 서민들이나 좋아하는 음식의 조리과정을 살펴보는 곳, 시인들이 요리에 애가를 바치는 곳, 요리사들이 유명인으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9세기의 칼리프 알 마문은 평범한 노동자로 변장한 채 바그다드의 길거리 음식을 맛보려고 궁전을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길거리 요리는 바그다드 주민뿐 아니라 이따금 암행하는 칼리프까지 유혹하는 맛있는 포장판매 음식이었다. 음식 장사로 가득한 도시에서 쏟아지는 특유의 서정적 외침과 노래는 음식 냄새와 뒤섞여 왁자지껄한 정감 있는 도시의 풍경을 자아냈다. 이렇듯 시장과 길거리 음식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였고, 도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도시의 생명력과 활기는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미각 세포를 자극하는 일로부터 생겨났다. 길거리와 시장의 행상이 사라진 도시는 도시적 사교성을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잃어버린 꼴이다. 세계의 교차로 바그다드는 음식문화뿐만 아니라 물산과 자원 그리고 지식을 빨아드리는 이슬람판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탁월한 지식과 재력에 이끌린 수많은 인재가 바그다드에 모여 함께 일하고 생각하며 먹었다. 바그다드의 학자들은 광학, 의학, 화학, 공학, 야금학, 물리학, 음악, 건축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다. 13세기 초엽 칭기즈칸은 무력과 협상을 통해 여러 부족과 나라들을 정복했다. 1258년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들이닥쳤고, 양 떼를 습격하는 사나운 늑대처럼 거리를 누비며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융단에 돌돌 말린 채 말발굽에 짓밟혀 죽었다. 학문과 사치로 명성을 떨치고 식도락을 즐긴 고상한 도시가 폐허로 변했다.

 

전쟁으로 일군 자유-뤼벡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던 1942년 영국 공군이 한밤중에 2만 5,000발의 소이탄을 나치 독일의 항구도시 뤼벡에 퍼부어 중세풍 심장부를 사정없이 도려냈다. 뤼벡은 온통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전쟁 후 폐허에서 복구된 뤼벡은 오늘날 북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다시 태어났다. 시가지의 미로 같은 중세풍 거리 여기저기에 우아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우뚝 서 있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역사적으로 뤼벡은 무장을 갖춘 소규모 자치독립체 자유도시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부와 명성을 노린 개척자와 이주자들에 의해 건설된 뤼벡은 변경의 요새로 출발하여 자유도시로 탈바꿈한 1226년부터 백작, 세습 공작, 주교 또는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 크게 번창했다. 성벽과 무기로 방어하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독일어 한제(Hanse)는 원래 무장 호송대를 뜻하는 용어였다. 당시는 어떤 국가도 원거리 교역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했기에 무역과 무력을 동반해야 했다.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영역을 넓혀 북유럽 전역으로 진출했고, 혈연적 유대를 통해 단합했다. 그리고 위험을 분담하고 보상을 공유함으로써 원거리 교역의 비용을 절감했다. 한자동맹 상인들은 갑옷식 선박 코그(cog)를 이용했는데, 배가 크고, 운임이 싸며, 장거리 항해에 적합한 유럽에서 가장 큰 화물선이었다. 한자동맹이 발트해를 빠르게 장악하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뤼벡이 주역으로 떠올랐다. 뤼벡은 발트해 무역을 통제했고, 해외와 독일 내륙 사이에서 상품 유통을 중개했다. 뤼벡 출신 무역업자들은 크고 부피가 큰 화물을 전문적으로 잘 다뤘다.

 

한자동맹은 국제무역 장악에 힘입어 북유럽의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 시장을 개척하고 무역 특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의 강력한 왕국들도 조그만 독일 도시들의 연합체에 무릎을 꿇었다. 한자동맹의 내부 콘토르에 거주하는 독일 상인들은 한자동맹이라는 든든한 버팀목 덕분에 신변과 재산을 보호받았다. 자유로운 시장 접근권과 유리한 관세, 세율 같은 형태의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15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뤼벡을 비롯한 작고 효율적인 도시들은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중앙집권 국가를 상대하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16세기에 접어들어 한자동맹 앞에 영국과 스웨덴, 덴마크 같은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조직된 왕국들이 등장하자, 많은 가맹 도시들은 국가에 흡수되거나 자치권을 잃었다. 드디어 한자 의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1669년 한자동맹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번성했던 뤼벡의 몰락이 초래된 주요 원인은 세계무역 양상의 극적인 변화였다. 외부적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곧장 동아시아로 갈 수 있는 항로가 개척됨에 따라 유럽인에게 방대한 시장이 열렸고, 내부적으로는 암스테르담이라는 신흥도시의 등장으로 뤼벡의 무역 패권이 무너졌다. 이렇게 한자동맹은 급속히 쇠퇴했지만, 상거래, 사업관행, 무역독점 같은 한자동맹의 유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카페인 공동체와 사교-런던
카페인은 현대도시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커피는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사회적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다. 카페 문화는 대화를 유발하는 불꽃이고, 대화는 예술의 연료였다. 예술적 탁월성과 자유로운 생활방식이 연상되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커피숍은 현대적인 도시생활의 핵심적 배경이다. 궁정에서 대도시로 무게추가 이동하는 현상은 17세기 후반기 커피점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커피점은 18세기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사교적 도시환경을 조성하는데 일조했다. 런던의 에드워드 로이드가 운영한 커피점은 해운업 관련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는 곳, 수많은 선원과 선적인, 원거리 무역업자들이 만나 얘기를 나누고 거래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로이드 커피점은 런던을 넘어 세계의 주요 보험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중개인들은 고객에게 가장 유리한 거래를 맺으려고 온종일 보험업자들과 협상했다. 증권시장, 신용시장, 보험시장, 주식시장, 상품거래소, 도매시장, 뉴스공급처 등의 기능을 수행한 커피점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사무실과 회의실 역할도 맡았다. 런던의 커피점 군단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비공식 공간이었다. 커피점은 자발적 만남과 비공식적 관계망 형성에 필요한 장소와 동기를 제공하는 도시의 필수적 공간이었다.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만든 강철 고층건물에 자리잡은 세계 최대 보험시장 런던 로이드는 지금도 옛날의 소란스러운 커피점에서 태동한 대면거래 방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보험업자들은 등받이 없는 걸상에 앉아 있고, 연미복 차림의 직원들은 아직도 웨이터로 불린다. 변두리 도시로 평가되던 런던은 17세기 말엽에 번영을 구가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국제무역의 중심지 암스테르담을 밀어내고 세계를 주도하는 대도시로 부상했다.

 

지상에 자리 잡은 지옥-맨체스터와 시카고
1839년 찰스 네이피어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맨체스터는 세계의 굴뚝이다. 비에 젖어 반죽으로 변한 검댕이 지형을 이룬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1840년 짙은 석탄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공장 맨체스터에는 매일 수천개의 역직기가 굉음을 내며 주변 건물을 뒤흔들었다. 스웨덴의 저술가 프레드리카 브레머는 “맨체스터는 엄청나게 큰 거미 같았다. 두꺼운 비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거미집처럼 생긴 흉측한 주택과 공장의 덩어리에 에워싸여 있는 맨체스터는 어둡고 답답한 도시였다” 브레머는 시카고도 방문하고 혹평했다. “미국의 거인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흉한 도시였다. 시카고는 호수의 여왕이라는 칭호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떠돌이 장사꾼처럼 보였다” 시끄러운 가축 사육장과 제철소 그리고 공장 굴뚝으로 이뤄진 시카고의 풍경은 맨체스터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산업주의의 명백한 증거였다. 면직공업 도시 맨체스터는 세계 직물업의 중심지이자 세계적 산업화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맨체스터에 즐비한 공장들의 모습은 인류의 미래를 예고했다. “문명은 기적을 일으키고, 문명화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돌아갔다” 인류학자 토크빌의 비평이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협하는 시카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도시적 퇴화의 장소인 맨체스터를 보며 인간사에 큰 위기와 재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사회학자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오늘 맨체스터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일 세계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고 선언했다. 맨체스터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가는 에인절 메도였다. 그곳은 불결하고 폐허로 뒤덮인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였다.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자본주의와 산업시대의 섬뜩한 미래를 예견하는 에인절 메도를 그야말로 지상의 지옥이라고 혹평했다. 맨체스터에 에인절 메도가 있다면 시카고에는 도시 한가운데 섬 리틀헬이 있었다. 커다란 공장과 지저분한 판잣집과 쓰레기로 가득한 리틀헬에서 아일랜드계 마피아가 생겼고, 뒤이어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나타난 저주받은 땅이었다.


시카고와 맨체스터 같은 도시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인구의 40%가 20세 미만이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있었고, 술과 유흥과 패션에 쓸 돈이 있었다. 그들은 개성이 강했고 성적으로 왕성했다. 이곳은 매직 같은 도시에 이끌려 세계 각지로부터 건너온 온갖 사람들이 빚어낸 용광로였다. 빈민가는 경멸어로 여겨질 수 있으나 비공식 정착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빈민가라는 좌절감보다 자긍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다. 이주자들이나 대가족들로 이뤄진 자급자족적 공동체에는 힘과 응집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에서 발생하는 소외현상이나 익명성과는 대조적으로 빈민가와 비공식 정착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행복하다. 도시는 물질적 혜택을 누릴 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을 느끼고 혁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다. 맨체스터와 시카고의 많은 시민은 자신이 사는 도시가 일종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사회개혁가들은 가장 열악한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마을과 거리에 깊은 애착을 보이는 것에 놀라워했다. 맨체스터의 노동계급은 자기주장이 강했고, 중산층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교육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욕구가 급진적 정치활동을 불러왔고, 이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맨체스터의 공장과 작업장을 체험한 노동계급 출신 여성들은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하여 크게 활동했다.


외부인에게 괴물 같은 산업도시는 지옥처럼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유형의 대도시에서 생기는 가능성을 엿본 사람들도 많았다. 빈민가는 빈곤하고 고립된 농촌생활에서 벗어나 색다른 형태의 사회적 생활과 행동을 경험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이주자들은 가혹한 격변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공공제도와 시민적 태도를 확립했다. 도심은 다양한 민족집단이 밀려 들어와 이곳저곳 이사하며 점점 더 좋은 집을 마련하는 간석지 같은 곳이었다, 그 도시의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려고 사람들이 발휘한 창의적 재능과 소질은 급진적 정치활동과 여성주의부터 스포츠, 힙합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파리 증후군-파리
 19세기 초반 파리는 독특한 불결함을 지닌 원초적 도시로 부조화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중세시대를 대변했다. 이러한 파리 증후군의 치료제는 파리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몰두하고 그 도시적 드라마를 품평하는 일이었다. 파리의 진정한 자랑거리는 물리적 외형이 아니라 파리 사람들이 그곳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마치 극장 같은 거리의 연극적 요소에 힘입어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이자 관광객에게 성배와 같은 곳이 되었다. 소설가 발자크는 “파리는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도시의 거대한 작업장”이라고 증언했다. 파리 사람들은 카페, 정원, 극장, 상점, 야외 공연장 같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춤이나 야외 연주회를 통해 즐거움을 느꼈다. 파리에서는 도시생활을 구경하는 사람을 바도라 부른다. 바도는 인파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며 일상생활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즐기는 구경꾼이다. 또한 근대적 도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용어 플라뇌르가 있는데, 이는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을 뜻한다. 화가 들라크루아는 “플라뇌르가 미식가라면 바도는 대식가일 것이다”라고 썼다. 보들레르도 “완벽한 플라뇌르, 열정적 구경꾼은 인파의 밀물과 썰물 한가운데 일시적인 것과 무한한 것에 둘러싸인 곳에 머물며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파리는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 3세의 명령과 근대의 가장 위대한 도시계획가이자 잔인한 파괴자 오스만에 의한 무자비한 창조적 파괴로 개조됐다. 빅토르 위고는 “인파로 붐비고 자유롭게 뻗은 고풍스러운 거리도, 뜻밖의 변덕스러움도 없고, 굽이치는 교차로도 이제 없다”고 한탄했다. 파리에 활기를 불어넣고 파리를 바도와 플라뇌르와 도락자의 도시로 만든 구불구불한 거리가 냉혹한 기하학적 배치와 대로에 밀려나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의 거리풍경을 그림에 담아 도시생활의 병폐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처방도 제시했다. 도시에 흠뻑 스며들 때 우리는 플라뇌르나 바도가 된다. 도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심리적 자기방어수단은 냉담함이나 무감각함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도시가 펼쳐질 때의 광경과 소음, 정서와 느낌에 몰두하는 일이다. 도시를 자유롭게 걷자. 도시의 진면목은 움직일 때 드러난다. 걸어 다니기는 도시를 살만하고, 무엇보다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걸어 다니기는 현지인이나 방문객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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