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합의와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

- 서울회생법원 2020. 8. 18.자 2017하확71 결정 등 -
 

 
 

1. 서론
필자는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진해운의 파산과 관련한 법적 여러 쟁점들에 관하여 다룬 바 있다. 그것들은 ①정기용선료 채권과 슬로트용선계약에 의한 선복사용료 정산금 채권 중 도산채권1)에 해당하는 부분과 공익채권·재단채권2)에 해당하는 부분은 각각 어떻게 구분되는가3) ②선박소유자가 파산한 채무자(정기용선자)에 대하여 채무자가 유류 공급자에게 미지급한 연료유대금 채무와 관련한 장래의 구상권(파산채권)을 가지는가4) 그리고 ③공익채권·재단채권 발생의 원인인 기본계약에 관한 중재합의가 있는 경우 그 지급을 구하는 소에서 파산관재인이 방소항변(妨訴抗辯)을 할 수 있는가5)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는 특히 마지막 ③ 쟁점과 관련하여서는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합의의 효력, 계속중인 중재절차 및 중재판정의 승인·집행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포괄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위 ③쟁점과 내용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동일하나 다른 작용 국면을 가지는 쟁점을 다루고자 한다. 공익채권자는 회생사건에서의 관리인을 상대로, 재단채권자는 파산사건에서의 파산관재인을 상대로 통상의 민사사건으로서 공익채권·재단채권의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할 수 있다.6) 이처럼 민사소송이 계속되는 경우, 관리인 또는 파산관재인은 공익채권·재단채권 발생의 원인인 기본계약에 관한 중재합의가 있음을 들어 방소항변을 할 수 있다(중재법 제9조 제1항). 우리 법원은 이러한 경우에 ‘당사자들이 중재합의를 하였다면 일방 당사자에 대한 도산절차의 개시 여부와 관계없이 위 중재합의는 유효하다’는 이유로 위 방소항변을 받아들여 소를 각하한 바 있다.7) 그렇다면 도산채권자(회생채권자 또는 파산채권자)가 회생채권조사확정재판 또는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을 신청한 경우에도 위와 같은 중재법의 규정이 적용 내지 준용(민사소송법 제224조 제1항)될 수 있는가? (서울회생법원 2020. 8. 18.자2017하확71 결정(이하 ‘대상결정’이라 한다)) 등 한진해운의 파산과 관련하여 내려진 서울회생법원의 다수 결정은 이를 긍정한다.8) 이하에서는 대상결정을 중심으로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 절차에 있어서의 방소항변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들을 짚어본다.   

 

2. 사실관계 및 사건의 경과
가. 한진해운에 대하여 2016년 9월 1일 회생절차개시결정(이하, 이 글에서 일관하여 ‘이 사건 회생절차개시결정’이라고 한다)이 내려졌고, 이 사건의 상대방(한진해운의 파산관재인)은 같은 날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가 이후 한진해운이 2017년 2월 17일 파산선고(견련파산)를 받음에 따라 파산관재인으로 선임되었다.
나. 신청인은 싱가포르에 본점을 둔 회사로서 이 사건 회생절차개시결정에 앞서 한진해운과 복수의 선복교환계약, 화물운송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위 계약들에는 신청인과 한진해운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은 싱가포르 중재원 등에서 중재절차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는 중재합의가 포함되어있었다. 
다. 신청인이 파산채권 신고를 하였으나 상대방은 이에 대하여 ‘채권액 미확정’을 이유로 위 신고채권 전액에 대하여 이의하였다.9) 이에 신청인은 2017년 6월 21일 이 사건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을 신청하였는데, 상대방은 이에 대하여 중재합의에 따른 방소항변을 하였다. 법원은 위와 같은 방소항변을 받아들여 신청을 각하하였고, 이 결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3. 법원의 판시사항
법원은 아래와 같이 회생채권조사확정재판에 있어서도 중재합의에 의한 방소항변을 받아들여 신청을 각하하였다.

중재법 제9조 제1항 본문에 의하면, 중재합의의 대상인 분쟁에 관하여 소가 제기된 경우에 피고가 중재합의가 있다는 항변을 하면 법원은 그 소를 각하해야 한다. 채무자에 대한 파산이 선고된 경우 중재합의의 효력을 부인한다거나,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 중재법에 우선한다는 규정이 없다. 따라서 당사자 사이의 중재합의는 한쪽 당사자에 대한 회생절차 개시 여부와 관계없이 유효하고, 중재합의가 있다는 항변이 있는 경우 중재합의의 대상인 분쟁에 관한 채권조사확정재판은 부적법하다.


4. 검토
가.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에 미치는 영향
1) 중재와 도산의 충돌

중재는 이른바 ‘중재자치(arbitral autonomy)’에 기초하여 당사자들이 국사사법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분쟁해결체계를 마련하고 작동시키는 것을 지향한다.10) 이와 달리 도산제도는 공평, 신속, 효율의 이념에 기초하여 도산채권자의 권리행사나 도산절차로부터 직접 파생되거나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률관계의 해결을 도산절차에 집중시킬 것을 요구한다(이른바 ‘도산의 관할집중력’/vis attractiva concursus).11) 그러므로 중재와 도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상반된 이념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다.12) 사실 도산절차에 복종하지 않는 청구권, 즉 공익채권·재단채권에 관하여 통상의 민사소송으로서 그 지급을 구하는 소가 제기된 경우에는 도산과 중재 사이의 충돌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국면에서는 ‘채권자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집단적인 권리조정·배분 절차’라는 도산법 특유의 국면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본 위 각주 7)번의 판결들에서 비록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합의의 효력에 어떠한 효력을 미치는가가 문제되기는 하였지만, 해당 사건들에서 피고의 방소항변을 받아들이는 결론은 비교적 간명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13) 이와 달리 파산채권의 확정 절차가 문제된 대상결정에서는 중재의 이념과 도산의 이념 사이 충돌이 정면으로 부각된다. 당초 기본계약에 관한 중재합의를 하였던 파산채권자와 채무자의 의사를 존중하자면 파산채권의 확정을 회생법원의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절차가 아니라 중재절차에 맡기는 것을 긍정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절차의 지연과 각각의 파산채권 확정을 위한 중재판정 간의 상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도산절차의 신속, 효율과 공정을 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2)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에 미치는 영향14)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①중재합의에 의한 중재절차가 계속되기 전에 도산절차가 개시된 경우 ②중재절차가 계속되어 있는 중에 도산절차가 개시되는 경우 ③중재판정이 이미 내려진 뒤에 도산절차가 개시되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15) 그중 대상결정에서 문제되는 상황은 ①의 상황으로서, 신고된 파산채권의 발생 원인인 기본계약에 중재합의가 포함되어 있고, 파산채권자가 위 파산채권의 확정을 위하여 파산채권조사확정재판 신청을 한 사안이다. 이 경우에는 ⅰ) 이 문제를 규율하는 준거법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ⅱ) 파산채권의 조사 및 확정이 중재가능성 있는 분쟁인가 그리고 ⅲ) 파산채권자인 신청인과 채무자 사이에 체결된 중재합의가 파산관재인도 구속하는가 내지는 채무자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중재합의의 효력이 유지되는가가 핵심 쟁점이 된다.


먼저 준거법에 관하여 본다. 준거법은 위 ⅱ) 쟁점과 ⅲ) 쟁점에 관한 준거법 결정 원칙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중재가능성의 준거법과 관련하여, 이미 내려진 중재판정의 집행 단계에서는 승인 또는 집행을 요청받은 국가의 법에 의한다는 것이 명백하다(뉴욕협약 제5조 제2항 a호, 중재법 제38조, 제36조 제2항 제2호 가목). 이와 달리 중재합의의 당사자 일방이 중재합의의 무효 등을 주장하면서 제기한 소송에서 피고의 방소항변이 있는 항변 단계에서는 어느 법에 의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국내에 확립된 논의는 없고, 일반적으로는 중재합의의 준거법설, 법정지법설, 양자의 중첩적적용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16) 중재가능성이 문제되는 분쟁이 ‘파산채권의 조사 및 확정’이라 하여 당해 도산법정지법이 중재가능성의 준거법으로 작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편 위 ⅲ) 쟁점과 관련하여, 중재합의의 효력의 준거법에 의한다는 견해와 도산절차개시국법에 의한다는 견해가 제시될 수 있으나, 이 문제는 ‘도산전형적인 법률효과의 작용과 관련한 문제’17)로서 도산법정지법에 의함이 타당하다고 본다.18) 


다음으로 ⅱ) ‘파산채권의 조사 및 확정’이 중재가능성 있는 분쟁인지에 관하여 본다. 필자는 중재가능성의 준거법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입장을 유보하지만, 만약 우리 법이 준거법이 되는 경우 위 분쟁은 성질상 중재가능성 있는 분쟁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러한 분쟁은 비록 도산채무자를 당사자로 하는 분쟁이지만, 그 실질은 기본적으로 도산절차 개시 전의 원인으로 생긴 채권의 존부와 액수를 정하는 재산권상의 분쟁이기 때문이다(중재법 제3조 제1호).19) 도산절차가 개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본래 성질상 중재가능성 있었던 위 분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20) 


마지막으로 ⅲ) 파산채권자인 신청인과 채무자 사이에 체결된 중재합의가 파산관재인도 구속하는가 내지는 채무자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중재합의의 효력이 유지되는가에 관하여 본다. 중재합의가 관리인·파산관재인을 구속하는가의 문제를 중재합의의 인적 효력 범위 문제로 접근하는 견해도 있으나,21) 그보다는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합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함이 타당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선 중재합의가 관리인·파산관재인에 의해 해제 또는 해지될 수 있는 ‘쌍방미이행 쌍무계약’(채무자회생법 제119조, 제335조 참조)에 해당하는지가 논의되나, 중재합의는 서로 대가적 급부를 부담하는 계약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보아 이를 부정하는 것이 국내의 다수설이다.22) 나아가 관리인이나 파산관재인이 소송법상의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은 도산절차 개시 전에 채무자가 가지고 있던 법적 지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도산절차의 개시로 말미암아 중재합의의 효력을 상실케 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관리인·파산관재인이 채무자의 중재합의에 구속된다는 것이 국내의 통설적 견해이다.23) 필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관리인·파산관재인에 대한 중재합의의 구속력을 긍정한다. 다만 도산절차의 핵심적 절차 또는 예컨대 관리인·파산관재인에 의한 부인권 행사와 같이 도산절차로부터 직접 파생되거나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률관계로서 도산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법률관계들에 대해서는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므로 개별 사안에 따라 중재합의의 구속력을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쟁은 애초부터 당사자들이 예정한 중재합의의 대상인 분쟁이었다고 보기 어렵고, 통상의 재산권상의 분쟁에 비하여 도산절차에 의하여 신속하고 공평하게 해결되어야 할 필요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24)

 

나. 중재에 의한 도산채권의 확정
앞서 본 바와 같이 관리인·파산관재인은 원칙적으로 채무자가 도산채권의 원인행위에 관하여 파산채권자와 체결한 중재합의에 구속된다. 필자는 나아가 도산채권의 확정은 당사자들이 중재합의로 해결할 것으로 예정한 분쟁의 대상에 해당하므로, 도산채권의 확정에 대하여 방소항변이 있는 경우 이를 중재에 회부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대상결정이 “채무자에 대한 파산이 선고된 경우 중재합의의 효력을 부인한다거나,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 중재법에 우선한다는 규정이 없다”고 판시하면서 중재법 제9조 제1항을 적용하여 신청인의 채권조사확정재판 신청을 각하한 것은 정당하다.25) 이러한 법리는 채권조사확정재판에 대한 이의의 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26) 다만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유의할 사항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산채권자는 도산채권 확정을 위하여 중재합의에 따른 중재신청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반드시 회생절차 또는 파산절차에서 채권신고를 하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해 도산채권이 실권될 수 있다.27) 당사자들이 중재절차에서 도산채권의 존부와 범위를 확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도산채권자가 도산절차에 대하여 참가하기 위한 형식적 요건인 신고를 하여야만 도산절차 내에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28)


둘째 중재합의의 구속력이 미치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중재합의에 의한 도산채권의 확정이 긍정될 수 있다. 채무자회생법 제170조 제1항은 이의채권을 보유한 권리자가 그 권리의 확정을 위하여 ‘이의자 전원을 상대방으로 하여’ 법원에 채권조사확정재판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고, 제462조 제1항 역시 이의채권을 보유한 파산채권자가 그 내용의 확정을 위하여 ‘이의자 전원을 상대방으로 하여’ 법원에 채권조사확정재판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대상결정의 경우에는 중재합의의 구속력을 받는 파산관재인만이 신청인의 파산채권에 대하여 이의하였으므로 파산채권의 확정을 중재절차에 회부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이의자가 관리인이나 파산관재인 아닌 다른 도산채권자인 경우라면, 그 도산채권자에게 중재합의의 구속력이 미친다고 볼 근거가 없고 그에게 중재절차를 강요할 수도 없으므로 그 경우 이의채권의 확정은 채권조사확정재판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29) 문제는 관리인·파산관재인 뿐만 아니라 다른 도산채권자까지 여러 사람이 함께 이의한 경우이다. 위 법률규정들에 의하면, 이의자들을 상대로 한 채권조사확정재판 신청은 당사자들 사이에 합일확정이 요구되는 필수적 공동소송의 성질을 가진다.30) 특히 위와 같은 채무자회생법의 규정상 공동소송이 강제되는 고유필수적 공동소송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의자 중 일부만을 상대로 신청한 채권조사확정재판은 부적법하다.31) 이러한 경우에는 도산채권의 확정을 이의자 모두를 상대로 한 중재절차에 회부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도산채권자와 채무자 간 중재합의에도 불구하고 이의자 모두를 상대로 한 채권조사확정재판 절차에 의하여야 하는지 그 해결이 쉽지 않다.32) 이러한 경우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도산절차로부터 직접 파생되거나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률관계로서 도산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법률관계’에 준하여 결국 중재합의의 구속력을 부정하고 이의자 모두를 상대로 한 채권조사확정재판 절차에 의하도록 하는 방안을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5. 결론
대상결정은 채권조사확정재판 절차에서도 채무자가 도산채권자와 체결한 중재합의가 관리인·파산관재인에 대한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상결정은 중재와 도산이 충돌하는 전형적인 국면에서, 도산절차의 개시가 중재합의의 효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우리 법원이 취하는 입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해운기업의 도산에 관한 사례가 계속 누적되는 것이 바랄 일은 못되지만, 이와 같이 법원과 법률가들이 기왕에 벌어진 사태에서 여러 유의미한 결정과 법적 시사점을 이끌어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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