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근 부장 가족.
양홍근 부장 가족.

연초에 모처럼만에 유쾌한 원고청탁(?)을 받았다. 그동안 십수년에 걸쳐 해운홍보 업무를 담당하면서 무수한 원고청탁을 받았지만 십중팔구는 해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말이 청탁이지, 이미 지면을 배정하고 난 후의 강요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원고는 청탁하는 측이나, 청탁을 받는 측 모두가 부담이 크다. 청탁하는 쪽에서는 마감시간을 늘 염두에 두고 재촉해야 하고, 받는 쪽 역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항상 데드라인을 초과하게 된다. 서로가 못할 짓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새해 벽두에 해양한국에서 제안한 청탁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얘기인 즉, 해양한국에 가족관련 지면을 편성하니, 가족과 함께 최근에 개봉된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즉석에서 오케이했다. 그리고 하루 뒤에 후회했다. 연초에 일이 많은데, 과외로 숙제할 일을 생각하니 아득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랐던가. 미뤄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즉시 가족회의를 가졌다. D-데이는 큰애 스케줄로 인해 토요일 심야시간으로 정했다. 그리고 영화는 가장의 직권으로 ‘싸움의 기술’과 ‘왕의 남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전자로 결정됐다. 실로 오랜만에 가족들과의 영화 나들이었다. 큰 애 국민학교 때 ‘쥬라기 공원’ 보고 난 후 처음이었다. 고3, 고1 두 아들은 다 컸는 줄 알았는데, 애들처럼 좋아했다. 해양한국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 간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 영화는 능력없는 형사를 아버지로 둔 실업계 고등학생 병태(재희)가 학교를 자주 옮기면서 친구도 없이 늘 맞고만 지내다가 독서실 특실(?)에 은둔 중인 전설적 싸움 고수 오판수(백윤식)를 만나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을 그린 코믹엽기액션물이다. 싸움의 기술을 열거하는 교과서인 것 같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주연급 만년 조연인 이문식이 특공무술 사범으로서 도장을 그만두려는 병태를 설득시키기 시작한다. 그것도 소줏집에서... 사범은 열변을 토한다. 손가락 두 개로 상대의 가장 민감한 급소인 두눈을 찌르면 상황은 끝난다고...하지만, 그 자리에서 어깨들과 시비가 붙고, 급소찌르기는 무위로 끝난다. 그 사범은 제자가 보는 앞에서 죽지않을 정도로 엄청 얻어 맞는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알려준다. 싸움은 특공무술이나, 태권도, 유도 등 무술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그러던 중에 병태는 독서실 특실에서 낮잠과 무협지로 소일하는 싸움의 지존 오판수를 만나게 된다. 초면에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뒤 동네 사우나에서 우연히 지존의 실력을 목격하게 된다. 온몸에 문신을 한 거대한 어깨를 일격에 제압하는 지존의 실력은 그야말로 병태의 눈에는 신으로 비쳤다. 학교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파김치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병태는 생존을 위해 지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다. 결국 제자로 낙점된 병태는 싸움의 기법들을 전수받는다.


근데, 싸움의 지존이 가르키는 기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일본 싸움교과서에 나온 500원짜리 동전으로 상대방의 이마를 가격하는 황당한 기술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었다.


“싸움엔 룰이 없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 기선을 제압하는게 첫째며, 이를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말라. 주위에 있는 모든 것(무기)들을 잘 활용하라.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을 보면, 다음행동이 읽혀진다. 멱살을 잡히면, 양손을 머리뒤로 하여 손깍지를 끼고 위에서 내리치면 상대방의 머리가 앞으로 꺽이는데 이때 머리로 들이받아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깡다구다.
지존은 싸움의 기술만이 아니라 철학도 전수한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싸움않고 해결하는 것이다. 상대방 치료비를 물어줘야 하니까 싸움에도 돈이 든다. 싸운 뒤에는 이기고 집을 떠나 항상 후회한다고....”


영화는 싸움의 지존과 병태가 하나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기도 한다. 병태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자신을 괴롭히는 불량학생들이 아니라,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을...이러한 두려움을 자신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오판수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설득력은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또, 가족들이 보기에 민망한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굳이 필요없을 것 같은 육두문자의 남발과 나무젓가락으로 상대방 눈 언저리를 찍는가 하면, 상대방이 휘두른 칼을 태연하게 잡는 등 엽기적인 폭력장면은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리고 불량배들에게 채무관계가 있는지 두서차례 얻어 맞다가 끝내 자취를 감춘 여주인공 최여진의 출연도 상당히 어색했다.


하지만, 나약한 학창시절을 보낸 남성 관객들에겐 충분히 공감할 소재의 영화인 것 같다. 더구나 백윤식의 연기를 보는 것은 크나 큰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영화 초반 깜짝 등장한 이문식의 껄쭉한 연기는 보너스였다. 특히, 사우나 안에서 어깨한테 일격을 당하고도 천연덕스런 얼굴과 중저음 톤으로 “야! 거기 소금가져와, 한번 더 그러면 너 피똥 싼다”고 하는 맨트는 그가 아니면 날릴 수 없는 맨트이자 연기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극장안이 소란스러워졌음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환갑의 나이에 남녀노소에게 그만큼 어필하는 배우는 없을 듯 싶다. 연기력에 있어서는 비슷한 캐릭터의 로버트 드니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천연덕스러움은 오히려 로버트 드니로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영화는 위조여권까지 마련하여 해외로 튈려다 불량배들로부터 병태를 구하려고 돌아 온 판수가 칼에 찔리고, 형사인 병태 아버지의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끝을 맺는가 싶더니, 병원에서 사라지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여준 뒤 엔딩자막이 올라간다. 결과적으로 한평생 싸움만 하다 노회한 한 인간의 비참함 내지는 외로움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극장문을 나서는데, 요즘에 청소년들 사이에서 뜨는 힙합그룹 리쌍의 ‘내가 웃는게 아니야’라는 노래가 일산의 라페스타 거리를 은은하게 수 놓았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또 내가 걷는게 걷는게 아니야”.... 이 노래와 영화의 줄거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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